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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역, 그리고 자유도시 구례 >
이대로 떠날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러면 탈영병 신세, 제국군 헌병대에 쫓기기는 싫다.
마무리는 지어줘야지.
그래서 설악산 전초기지로 돌아왔다.
중대장 황재철 대위와의 면담부터.
“···진짜냐?”
“네.”
“고영호 하사가 널 죽이려고 했다고?”
“절벽으로 절 걷어찼습니다. 절벽 중간 나무에 걸려 간신히 살아남았습니다.”
“끄응.”
느닷없는 태주의 보고에 황재철은 미쳐버릴 것 같았다.
하필 하극상 사건이라니.
“넌 아무 말 말고 영내에서 대기하고 있어. 고영호와 소대원들이 돌아오면 진상을 파악해 볼게.”
“네, 알겠습니다.”
사실일까?
사실이면 안 된다.
전초기지 본부에서 자신의 지휘 책임을 물을 터, 진급은 물 건너가는 거지.
‘어떻게든 무마시켜야 해. 그건 그렇고, 장인동 이 새끼는 어디 간 거야?’
다음 날.
비로소 알게 된 장인동 중위를 비롯한 소대원 5명 부대 미복귀, 그리고 수색대에 의해 발견된 시신.
부대 안으로 소문이 쫙 퍼졌다.
번식기에 접어든 오크에게 당한 것으로 추측되는 죽음의 흔적.
발견된 군번줄, 혈흔과 살 조각.
결국 이 사건은 중대장의 손을 떠났다.
상부에 보고하는 과정에서 김태주 소위와 고영호 하사의 이야기가 나왔고, 당연히 전초기지 헌병대에서 조사가 이뤄졌다.
헌병 수사관 중사에게 심문을 받는 태주.
“전후 사정은 들었습니다만···, 어떻게 돌아오신 거죠? 몸도 편찮으신 분이.”
“마나 거부자는 돌아다닐 힘도 없답니까? 조심조심 절벽에서 내려와 바로 부대로 돌아왔습니다.”
“왜 직접 헌병대에 신고하지 않으셨습니까?”
태주는 픽, 하고 비웃으며 말했다.
“하사 따위가 절 죽이려고 했습니다. 누군가에게 지시를 받았다는 뉘앙스도 풍겼고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누굴 믿어요?”
“···.”
“솔직히 전 헌병대도 못 믿습니다.”
헌병 수사관은 표정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그렇다면 고영호가 김태주 소위님을 죽이려 했다는 증거는요?”
“있을 리가 있나요? 고영호 하사가 살아난다면 모를까? 그럼 대질 조사라도 벌일 수 있겠죠.”
“후우, 장인동 중위와 소대원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정말 모릅니까?”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저도 오크에게 당했다는 소식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헌병 수사관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영호와 소대원들은 그렇다 치고, 장인동 중위는 각성자.
오크에게 쉽게 당할 리가 없는데.
최소한 도망은 쳤어야지.
일단 김태주 소위는 군인들을 죽일 능력이 없다.
마나 거부자 주제에, 일반인도 못 당하는 허접한 신체 능력.
게다가 각성한 것도 아니고.
사실 가장 큰 문제는 각성자를 포함한 군인 5명의 죽음이 아니다.
하사 따위가 장군의 아들이자 제국군 장교를 죽이려고 했다는 당사자의 증언.
만약 이 보고가 상부에 올라가면?
전초기지 헌병대에서 다룰 문제가 아니게 된다.
육군 본부에서 직접 수사관을 내려보낼 것이고, 군검찰이 나설 것이며 이에 연루된 자들은 줄줄이 옷을 벗게 되겠지.
태주의 증언이 허황된 것도 아니라는 건 수사관도 알고 있다.
파주 영지 계승자, 새로운 부인, 배다른 자식, 영지를 둘러싼 권력 암투, 김태주 소위의 죽음을 바라는 사람들.
‘암살 시도가 정말일 수도 있어.’
신빙성이 있다.
행정 장교였던 김태주.
그런데 갑자기 장인동 소대장에게 정찰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건 중대장도 모르는 사실.
장인동이 독단으로 처리했을 리 없을 테고···,
“하지만 소위님의 증언도 확실하지 않아서.”
“압니다. 증거가 없죠.”
태주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전 이 사건 공론화시키고 싶진 않습니다.”
“···네?”
“그냥 덮죠.”
“아아, 저, 정말이십니까?”
“중사님 말대로 증거가 없잖아요. 저도 어디 가서 떠들고 다니진 않을 테고. 고영호 하사도 죽어버렸으니까.”
헌병 수사관의 표정이 밝아졌다.
상부에서도 원하는 바였으니까.
시간이 흐른 후, 실제로 장인동 중위를 비롯한 소대원들의 죽음은 작전 중 순직으로 처리됐다.
그리고 태주는 바로 전역 신청서를 제출했다.
막는 사람도 없었다.
암살위협이 사실이라면?
김태주 소위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군에서 내보내는 것이 더 낫다.
신청서는 즉시 수리되었다.
※ ※ ※
파주 영지 지배자 김웅방 준장은 의자를 피곤한 듯 의자를 뒤로 젖히며 손으로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난데없이 전해 들은 아들의 전역.
하지만 달리 소식도 없었다.
전화를 걸어봤지만 없는 번호라는 메시지만 나올 뿐.
대체 전역을 결심한 이유가 뭘까?
그 이유는 부관이 대신 말해줬다.
“확실한 정보는 아니지만 태주님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암살?”
“네, 같은 중대원인 고영호라는 하사와 오크 부락 정찰을 나가는 도중에···,”
“잠깐! 정찰 임무라니? 걔는 행정 보직 아니었나?”
“그, 그게 갑자기 보직 변경 명령이 내려와서.”
“···.”
김웅방 준장은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마나 거부자라고 해도 아들이다.
그래서 행정 장교로 보직을 정해줬다.
“대체 누가? 명령권자는?”
“육본에 알아본 결과 보직 변경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실제로 확인 결과, 명령은 없었습니다.”
“그럼 정찰 임무 지시는 누가?”
“태주님과 함께 근무하는 장인동 중위입니다.”
“그놈이 수작을 부렸다는 말이야? 무슨 이유로?”
“사, 사실 미심쩍은 부분이 있긴 합니다.”
“뭔가?”
“얼마 전부터 장인동 중위가 육군 참모본부 내 일본계 장교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던 걸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일본계 장교라면?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사람.
자신의 아내, 태주의 배다른 동생인 태평과 태천의 엄마 혼다 미쯔이.
아내라면 동기도 있고 그럴 능력도 된다.
규슈 영지는 파주 영지보다 더 크고 부유하다.
자신도 처가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고.
파주 영지.
과거 비무장지대라는 마수 위험 지역과 맞닿은 곳.
삼한제국 황제께서 친히 이 영지를 하사하셨다.
마수를 토벌해 제국민들을 보호하라고.
하지만 영지의 형편이 좋지 않았다.
마수를 사냥해 얻는 부산물로 영지를 운영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사병들을 훈련시키고 조직하는데 얼마나 많은 돈이 드나.
어쩔 수 없이 새로운 부인 미쯔이에게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영지에서 아내의 파워는 계속 커져 나갔고.
‘설마 아내가···,’
그렇게 위협이 되었나?
마나 거부자인 아들놈을?
하긴!
29살이 되어서도 아직 죽지 않고 버티고 있으니.
아마 불안했을 것이다.
제 배에서 나온 자식에게 파주 영지를 물려주고 싶어 했을 테고.
“제가 따로 좀 더 조사해보겠습니다.”
심사가 복잡하다.
머릿속은 오만가지 생각으로 뒤죽박죽.
하지만 이럴 땐 단순한 것이 제일.
“아니, 됐어. 여기서 끝내게.”
“네? 하, 하지만···.”
“괜히 들춰서 뭘 하나. 아들은 살아있고, 전역까지 했으니. 그 문제는 내가 처리하지.”
“알겠습니다.”
더는 파볼 것도 파볼 필요도 없다.
예전부터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들이다.
아들이 죽지 않았으니 그걸로 된 것.
더구나 자신에게 언질도 주지 않고 마음대로 전역 신청을 했다.
파주로 돌아오지도 않고, 연락도 끊겼고.
‘인연을 끊겠다는 말이냐?’
아니면 새엄마를 의심하고 있거나.
‘후우, 그래, 차라리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29살의 젊다면 젊은 나이.
아픈 손가락이자 자신의 치부였다.
사람들이 아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호부견자.
아비는 호랑이인데 자식은 개.
어떻게 마스터 각성자에게서 마나 거부자가 태어나?
그래도 끝까지 자식을 사랑하겠다고 마음먹어왔다.
실제로 애지중지, 금지옥엽처럼 보살펴왔고.
새 부인 미쯔이에게서 두 명의 연년생 아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태평이와 태천이는 마나 적합자.
아직 각성하지 못했지만 마나 적합자는 얼마든지 인위적으로 각성시킬 수 있었다.
비록 큰아들 태주의 죽음은 안타까우나, 영지를 이을 후계자는 태평이, 혹은 태천이가 될 터.
“태주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나?”
“설악산 전초기지에서 나간 이후로는 행방이 묘연합니다. 찾아볼까요?”
“아니, 그것도 됐어. 찾지 말게.”
새부인 미쯔이에게도 태주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또한 자신에겐 마나 적합자인 아들 둘도 있었다.
큰아들을 대신할, 든든하고 믿음직한 아들들이 말이다.
※ ※ ※
그것은 아무런 전조도 없이 불쑥 다가왔다.
2023년 어느 날.
마나의 침범.
그로 인해 사람들의 몸에 치명적인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마나가 나타난 원인?
아무도 모른다.
지금도 알 수 없다.
2027년.
마나, 대기에 스며든 희한한 물질, 자연환경에 심각한 피해를 끼쳤다.
마나로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식물과 동물도 마찬가지, 죽거나 아니면 변이되거나.
인류는 절망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벌써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죽었다.
2050년.
지구 인구 약 절반 가까이 사라졌다.
탈출구가 없었다.
제법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은 지하 벙커로 숨었지만 그도 소용없었다.
살려면 호흡을 해야 했고 공기에는 마나가 스며들어 있었으니까.
2100년.
살아남은 사람, 약 30%.
생존자들은 직감했다.
인류 멸망은 피할 수 없을 거라고.
2123년.
남은 인구 약 20%.
그즈음에서 서서히 변화가 싹트기 시작했다.
인간을 비롯해 살아남은 생명체들은 이해하기 힘든 적응력으로 삶을 유지했다.
적응의 시작.
적응이라기보단 마나가 일으킨 변화.
진화는 아니다.
마나가 DNA를 변이시켰다.
즉 유전적 돌연변이.
인간도 그렇지만 동식물에서 그 변화가 더 거세게 일어났다.
신식물, 신동물, 마나에 적응한 채로 태어나는 지구의 새로운 주인들.
하지만 위험한 돌연변이도 생겨났다.
일명 ‘마수’라고 불리는 생명체들이 인간을 위협했다.
그리고 각성.
시스템의 출현.
적합자와 각성자로 대표되는 신인류.
시스템이 나타난 이상 마나의 출현은 우연이 아니게 됐다.
대체 누가?
외계인이거나 혹은 신(神)이겠지.
2200년.
인류는 융성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끈질긴 생존력과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면서 이어져 온 과학기술.
과학자 집단에서 마나 에너지를 바탕으로 신기술을 발명해냈다.
새로운 문명 탄생의 서막이었다.
처음, 발전은 느렸다.
하지만 어느 지점에 올라서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마나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한 철통같은 요새인 도시가 만들어졌고 세계는 서로 소통했다.
각성자들의 역할이 컸다.
마수들에게서 인류를 보호하는 그들.
바닥을 쳤다.
앞으로 올라갈 일만 남았다.
인류는 다시 힘을 얻었다.
2323년 현재.
마나 침범 후 300년.
과거 찬란했던 문명이 거의 복구됐다.
지구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마나 침범 외에도 인류를 위협한 것은 또 있었다.
기후 변화.
마나 때문에 그 변화는 더더욱 가속화됐다.
지구 인류의 90%를 절멸하는데도 한몫했고.
기후가 300년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전체적으로 따뜻해졌다고 해야 하나?
지금은 삼한제국에 복속된 옛 일본 열도는 절반 가까이 바다에 잠겼다.
규슈가 작은 섬이 될 정도로 말이다.
한반도도 사라진 땅들이 많다.
주로 서남해 해안선 도시들.
동해안도 피해를 입었다.
태주가 근무했던 설악산 전초기지도 바다와 맞닿아 있을 정도.
그런 이유로 현재 삼한제국의 수도는 과거 중국이란 나라에 속했던 만주 지역에 있다.
수도의 이름은 뉴서울.
나름 살기 좋다.
만주 벌판은 평균 기온도 따스하고 강수량도 풍부해서 제국 전체의 식량을 책임지는 곡창지대.
특히 마나 벼가 잘 자란다.
원래 있던 벼의 품종은 마나의 침범 이후 거의 사라져버렸고, 변화한 세상에 걸맞게 돌연변이 된 품종만이 살아남았다.
마나가 스며들었다는 걸 제외하고는 기존의 쌀과 거의 비슷한 맛.
모든 농축산물이 그렇다.
마나에 적응된 생산물.
그런데 태주의 목적지는 만주 뉴서울이 아니다.
북쪽이 아니라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최종 목적지는 ‘자유도시 구례’.
한반도 남부지역의 음습한 아열대 기후, 제국의 공권력이 제일 적게 미치는 지역 중 하나, 더불어 제국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도시.
구례 바로 위에 위치한 ‘지리산 어둠숲’ 때문이다.
평범한 숲이 아니라 울창한 밀림이 형성되어 있어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아 항상 어두운 곳.
“드디어 왔구나.”
여기서 자리를 잡아보자.
굳이 지리산으로 왜 왔겠나?
이 위험한 곳으로.
지리산 밀림에 존재하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종류의 독사와 독충, 독초와 독버섯, 그야말로 천국 아닌가?
‘절대독마 김태주’에게 말이다.
< 전역, 그리고 자유도시 구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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