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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탁 >
지리산 밀림에서의 사건은 조용히 묻혔다.
실종된 5명의 마나 적합자와 각성자가 구례에서 쭉 활동하던 자들이었으면 또 모를까, 외부에서 들어온 뜨내기들이 실종했다 한들, 없어졌다고 신고하는 사람도,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없었다.
목격자가 있다면 동료 짐꾼인데 마수 부산물과 에너지 결정체를 몰아줬고, 절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터였다.
태주는 백스 드럭샵 백홍표와 만났다.
“고아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다 작은 건물 하나와 주변 대지 구매했습니다.”
“지하 대피 시설 완비된 곳이죠?”
“네, 그래서 조금 비싸게 샀습니다. 땅과 건물 합해서 10억 정도 들었고, 층수는 5층이지만 지하도 합하면 6층이라.”
구례시 부동산은 그리 비싸지 않다.
물론 캐슬 안에 있는 공간은 매우 비싸지만.
“인테리어는···?”
“지하 대피소부터 작업하고 있습니다. 그곳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고맙습니다. 이런 것까지 부탁드려서.”
“하하하! 뭘요! 얼마든지 부려 먹으세요.”
대피소가 필요한 이유는 마수 웨이브가 겁나서가 아니다.
해독제 제조시설과 무기 창고가 필요했기 때문.
지하층 대피소는 나름 보안 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방해받지 않고 연구하면서, 중요한 물건을 보관하기에 안성맞춤.
지금까지는 백스 고아원 지하 대피 시설을 임시로 이용했다.
하지만 고아원에서 독물을 다루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또한 웨이브가 일어나면 아이들이 대피소를 써야 하니까.
그리고 언제까지 호텔에서 생활할 수는 없다.
맨 위 5층은 자신의 집으로 꾸밀 예정.
“약초와 독초 수급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약국에 공고를 붙였더니 다음날부터 재료가 원활하게 공급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들 새로운 작업실로 옮겨주세요. 비용은 제가 다 부담할게요.”
사실 해독제를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다,
한 시간이면 10만 병 분의 원액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재료가 문제.
제조에 필요한 약초와 독초를 채집하는데 시간이 엄청 든다.
그래서 착안을 했다.
약초 및 독초를 좋은 가격에 전량 매수.
더불어 채집자들에게 모기독 해독제 우선 판매권.
종류는 지리산 전역에 서식하는 독초와 약초.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혹시라도 구별을 하지 못할까 봐 독초와 약초의 사진이 있는 간단한 책자도 만들어 배포했습니다.”
구례시에서 하루에 출발하는 레이드팀만 약 200여 개.
그들이 모두 약초를 채집해서 가져올까?
채집은 어렵지 않다.
장갑과 마스크를 착용하고 자루에 집어넣으면 된다.
특히 짐꾼들의 반응은 긍정적.
짜투리 시간에 캐서 백스 드럭샵에 팔면 쏠쏠한 수익이 남으니까.
전보다 돈은 적게 들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집에 드는 시간이 훨씬 줄어들기 때문에 이게 훨씬 더 효율적.
백사장과의 면담을 마치고 태주는 새로 산 건물로 갔다.
자신의 명의로 구입한 첫 부동산.
지상 5층과 지하 1층의 건물.
지하엔 값비싼 재료와 무기를 보관하는 곳으로.
더불어 독과 약을 만드는 연구실로도.
순간 부르릉하는 소리와 함께 트럭 몇 대가 건물 앞에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누구?”
“아버지, 아니 백사장님께서 보내셨어요. 건물 인테리어 작업하러. 엊그제부터 쭉 작업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 어서들 와요.”
작업 인부들이다.
모두 백홍표 사장이 거둬들인 고아원 출신들, 성인이 되어 고아원을 나와 각자의 영역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었다.
당연히 백홍표의 아낌없는 지원이 있었고.
“시작해도 되나요? 불편하시면 나중에···.”
“아뇨. 저도 가봐야 할 데가 있어서, 그럼 부탁드릴게요.”
“네! 신속하게 작업하겠습니다.”
“하하하, 천천히 하세요. 천천히.”
20대 초반의 젊은이들 같은데, 표정이 참 밝았다.
공사비는 높게 쳐준다고 했지만 따로 넉넉하게 챙겨줘야지.
※ ※ ※
태주는 구례장터로 갔다.
오늘이 바로 주문한 장비들을 받는 날.
가죽 공방 거리에서 잔금을 결제한 후, 환상 여우 가죽 코트와 장비 일체를 수령했다.
그리고 금속 공방에서 각종 암기들을 받아 커다란 배낭에다 넣고.
호텔로 돌아온 태주.
먼저 환상 여우 가죽 코트부터 입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코트.
이 무더운 아열대 기후에 코트가 웬 말이냐 하겠지만, 눈에 띄어도 어쩔 수 없다.
‘괜찮네.’
겉보기엔 평범한 가죽 코트로 보이는 디자인.
원래 흰색이었지만 튀어 보일까 회색으로 염색도 했다.
절대독마 당군악도 긴 장포를 선호했다.
숨길 데가 많다는 이유로.
태주도 마찬가지.
코트 안에 빽빽하게 달린 다양한 크기의 주머니들, 바지도 입고, 조끼도 착용하고, 금속이 덧대여 있는 튼튼한 가죽 신발도.
다 수납이 가능하도록 주머니를 만들었다.
이젠 암기를 넣어볼까?
폭우이화정, 철환은 안쪽 주머니, 휘금석은 조끼, 크기가 다소 큰 탈명비도는 허리띠에 빙 둘러서, 나머지 손목 보호대나 발목 부분, 그리고 여분의 주머니는 모조리 작은 유엽비도로 채우고,
“어우, 엄청 무겁네.”
무게도 무게지만 움직이는 데 불편함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익숙해져야겠지.’
이 암기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상징.
어느 상황에서도 든든한 힘이 되어줄 절대독마의 모든 것.
굳이 독을 묻힐 필요도 없다.
태주의 혼원무상독령공.
의지에 따라 독기를 부여할 수도, 않을 수도 있었다.
스슷!
손을 한번 털자 어느새 쥐어진 유엽비도.
스르륵,
다시 거둬들이고.
암기의 출납과 수납.
기술은 다 알고 있지만 이것도 몸으로 익혀야 한다.
‘이젠 밀림 깊숙이 들어갈 수 있겠어.’
지리산 밀림 가장자리 쪽에서 나오는 독초는 그리 강하지 않은 것들, 안쪽에 더 많은 독을 품고 있는 독물들이 있다.
그리고 식물독 말고도 곤충독 같은 동물독도 채집할 필요가 있다.
흡수하는 독이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독정(毒精)의 성취가 올라가니까.
‘다른 약도 만들고.’
이참에 제약회사를 차리자.
돈을 긁어모아서 삼한제국, 아니 전 세계 약품 시장을 장악해야지.
‘뭘 만들어볼까?’
절대독마 당군악이 가진 지식.
태주의 머릿속에 다 들어 있다.
독약은 물론, 해독제, 치료제. 심지어 영약 제조까지 모두 가능하다.
바로 그때!
띠리링!
호텔 전화기가 울렸다.
‘응? 왜 전화가.’
태주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고객님, 안녕하세요.
호텔 프런트에서 온 전화.
“네, 무슨 일이죠?”
- 고객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이 계셔서요. YJ 약국 조훈석 대표님입니다. 로비 커피숍에서 좀 뵙자고.
“그래요?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 그, 그건 저도 잘···,
호텔에서 알려줬나?
기분이 팍 상했다.
호텔 옮겨야지.
아무튼 YJ 약국이라면 구례시에서 가장 큰 대형 약국.
대표 조훈석이 자신을 만나려는 이유가 뭐겠나.
‘해독제 때문이겠군.’
이해가 간다.
현재 백스 드럭샵의 해독제 독점 판매로 꽤 많은 피해를 입고 있을 터.
‘만나볼까?’
뭐라고 하는지 들어는 보자.
태주는 로비로 내려가서 조훈석을 만났다.
“처음 뵙겠습니다. YJ 약국 대표 조훈석입니다.”
“김태주입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본론을 꺼내는 조훈석.
“빙 둘러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부탁 하나 합시다. 저희 약국에도 모기독 해독제를 납품해 주세요.”
이미 예상했다.
대답도 나와 있었다.
“현재로선 곤란합니다만, 아시잖아요? 백스 드럭샵에 들어가는 물량도 부족한 판에.”
“그럼 백스 드럭샵과 공급 계약을 끊으세요.”
웃기는 사람이네.
막무가내로 와서 계약을 끊으라고?
“이거 부탁인가요? 협박인가요?”
“지금은 부탁입니다.”
나중엔 협박으로 변할 수 있다는 의미.
“싫은데요?”
“위약금 때문이면 제가 다 갚아드릴게요. 또 백스 드럭샵보다 공급가를 2배, 아니 3배로 맞춰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전 신뢰 없는 사람이 되기 싫어서···.”
“약물 제조식이라도 파세요. 50억 드리겠습니다.”
이런 양아치 같은 놈을 봤나?
뭐? 50억?
“조 사장님 같으면 팔겠어요?”
“···.”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그러자 조훈석이 태주를 매섭게 노려보면서 말했다.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구례 바닥에서 자리 잡기 어려울 텐데···.”
이 새끼 봐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알아서 잘 할게요.”
“뭐, 두고봅시다. 잘하는지 못하는지.”
태주는 그대로 일어나 호텔 밖을 나갔다.
‘확실히 소문대로야.’
구례에서 짐꾼으로 일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 많이 들었다.
몇 개의 대형 약국들이 담합해서 새로 진입하는 약국을 말려 죽이고 업장을 빼앗은 후, 몇몇 인기 있는 약의 가격을 올려 폭리를 취한다는 의혹.
견제가 들어올 거라 예상은 했다.
어떤 방식일지는 알 수 없지만.
‘곧 알게 되겠지.’
조훈석은 태주의 뒷모습을 싸늘한 시선으로 노려보며 스마트폰을 들었다.
“생각보다 뻣뻣한 놈이더군요. ···맞아요. 놈이 거절했소. 작업 시작합시다.”
먼저 1단계 시작.
아주 약한 거부터.
※ ※ ※
파주 영지.
중심부에 세워진 사각형의 요새 건물.
파주의 행정을 담당하고, 영주 가족들의 거처가 있는 곳이다.
요즘 혼다 미쯔이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결국 눈엣가시 같았던 배다른 자식 김태주를 처리하지 못했다.
눈치를 채고 전역해 버린 것.
그놈은 왜 그리 끈질긴가?
‘마나 거부자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음에도 죽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아 사람을 불안하게 하더니···,’
놈을 죽이려는 시도도 실패했다.
멍청한 것들.
일반인보다도 못한 몸뚱아리를 지닌 놈을 제대로 처리하지도 못하고.
그나마 관련자가 모조리 죽어 탄로날 일은 없지만
그래도 소득은 있었다.
바로 어제.
남편이 공식적으로 김태주의 파주 영지 계승자 자격을 박탈했다.
맏아들과의 인연을 끊어버리겠다고 선포한 것, 그리고 실제로 파주 영지 영주의 권한을 이용해 호적에서 김태주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이제 친아들인 김태평과 김태천 둘 중 하나가 이 영지를 물려받게 될 터.
남은 건 파주를 발전시켜 인구를 늘리고 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부자 영지로 만드는 것.
파주는 개척 영지.
과거 DMZ, 비무장지대와 맞닿은 곳.
그곳은 마수 밀집지대 중 하나.
마수를 몰아낸 땅은 오롯이 파주로 귀속된다.
하지만 그러려면 병력이 있어야 한다.
적합자와 각성자로 구성된 부대 하나를 운영하는 데 드는 비용이 얼마일까? 상상을 초월한다.
더구나 파주는 별다른 수익 산업이 없다.
마수 토벌을 시작해 부산물을 생산하면서 대기업의 투자도 받고, 공장도 유치하고, 산업을 발전시켜야 영지를 운영할 세금이 나오는데.
지금까지는 규슈 영지에서 지원받는 걸로 버텨왔다.
솔직히 그것도 한계가 있지.
김웅방 준장이 진급해서 야전 지휘관으로 전출 간다면 모를까.
영주가 제국의 부름을 받아 자리를 비운 영지는 엄청난 지원을 받으니까.
사실 혼다 미츠이의 친정 규슈 영지가 파주 영지를 지원해주는 속내는 따로 있었다.
삼한제국의 식민지인 규슈 영지.
거긴 위태위태한 곳이다.
마수 때문에?
아니다.
점점 올라가는 해수면.
언제 물에 잠겨도 이상하지 않을 지역.
그래서 혼다 미쯔이는 규슈에 있는 자신의 가족들과 세력, 재산 일체를 파주로 옮겨올 작정, 김태주가 계승자가 되어 영지를 물려받았다면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계승 문제도 끝났고 본격적으로 파주 영지를 개발할 때.
부족한 자금을 조달하는 방법만 찾으면 된다.
‘아버지께 또 도와달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그쪽도 자금이 충분치 않다.
파주보다는 여력이 있다지만.
바로 그때!
“사모님!”
급한 일이라도 있는지 별채 문을 박차고 들어온 영지 관리.
“왜 그래?”
“제국군 남부 지리산 방어 군단장, 오진형 중장이 영주님과 전화 면담을 요청해왔습니다.”
“뭐? 오중장님이?”
오진형 중장은 제국 군부 내에서 제법 큰 파벌에 속한 인물.
궁금하다.
무슨 대화를 나누려고,
“남편은?”
“집무실에서 오진형 중장의 전화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혼다 미쯔이는 서둘러 남편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여보!”
“어서 오시오.”
“오진형 중장님이 왜 전화를 하신데요?”
“나야 모르지. 스피커폰으로 전환할 테니 같이 들읍시다.”
잠시 후.
따르르릉!
울리는 전화벨.
“여보세요.”
- 김웅방 준장인가? 나 오진형일세.
“멸마! 준장 김웅방 전화 받았습니다.”
- 허허, 그래 오랜만이군. 다른 게 아니라 자네 아들 말이네.
“아, 아들 말입니까?”
- 그래, 훌륭한 아들 둬서 기쁘겠군.
훌륭한 아들이라, 사관학교에 보낸 두 아들을 말하나 보다. 누구지? 태평이? 태천이?
- 염치없지만 부탁을 해야겠어.
“···부탁이라뇨?”
- 모기독 해독제 말이야,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지리산 방어군단에 꼭 필요한 약품 아닌가, 하지만 물량이 모자라서 공급할 수 없다더군. 자네가 태주군에게 잘 말해서···.
모기독 해독제? 태주?
‘뜬금없이 무슨···,’
잘못 들었나?
태평이, 태천이가 아니고?
- 이번 거래만 잘 성사되면 내가 육본에다 자네 진급에 영향력을 행사해봄세. 자네도 야전 부대를 지휘할 때가 되지 않았나.
“자, 잠깐만요. 전역한 제 큰아들 태주를 말씀하시는 게 맞습니까? 그리고 모기독 해독제라니오?”
- 음? 설마···, 자, 자네 모르고 있었군.
“네, 그렇습니다. 죄송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부탁드립니다.”
- 허어, 자네 아들이 변종 3줄 무늬 모기 독 해독제 개발자라는 걸 모른다고?
“아···,”
- 현재 구례시 돈을 쓸어 담고 있다는 것도? 거긴 발칵 뒤집혔는데?
“···.”
김웅방 준장은 어안이 벙벙하다.
옆에서 듣고 있는 혼다 미쯔이도 마찬가지였다.
김태주의 이름이 왜 여기서 나와?
< 부탁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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