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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폭 >
지리산 밀림, 백창훈은 6명의 적합자 동료와 함께 김태주의 뒤를 따라갔다.
백창훈은 25살의 각성자.
등급은 유저, 특성은 <철벽>, <검사>.
성이 백씨인 이유는 백홍표 때문이다.
고아 중엔 자신의 성과 이름을 아는 아이들도 있고, 모르는 아이도 있다.
모르는 아이들은 거의 백홍표의 성을 따른다.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백홍표는 아버지니까.
그런 아버지께서 신신당부하셨다.
김태주 형님을 보호하라고, 여차하면 무조건 데리고 도망치라고.
“저어, 형님, 제가 앞장설게요. 이래 봬도 각성자입니다. 상황대처 능력이 형님보다는···.”
“쉿! 그냥 따라오랬지? 왜 자꾸 말이 많아.”
“아, 아니.”
“확! 앞으로 뛰어간다?”
“···그러지 마세요.”
포자 독 낙타 고라니를 만나 해독제를 시험해보고 돌아오는 임무.
원래 계획한 레이드팀의 진형은 자신이 앞장을 서고 6명의 전투 보조 요원이 김태주의 주위를 둘러싸면서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홀로 쭉쭉 앞장서 걸어가는 김태주.
너무 겁 없는 거 아니야?
‘짐꾼 생활을 했다면···,’
마나 순응자, 일반인이겠지.
적합자도 위험한 이 밀림에.
장비를 챙겨 입긴 했다.
최소 30억을 호가하는 환상 여우 가죽 코트.
‘뒷모습은 정말 멋져.’
하지만 그게 다다.
방어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결국 폼.
코트를 입고 어떻게 싸우려고.
걸리적거려서 움직임이 불편해 도망도 못 간다.
‘불안한데.’
너무 안쪽으로 많이 들어왔다.
칼날이빨 담비 구역을 한참 벗어났다.
포자 독 낙타 고라니는 출몰 지역은 지리산 밀림 전역.
즉 비교적 쉬운 사냥감이 모여있는 칼날이빨 담비 구역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지금쯤이면 낙타 고라니 한 마리쯤은 눈에 띄어야 하는데, 아직 만나지 못했다.
칼날이빨 담비 정도는 처리 가능하지만 이러다 폭풍 족제비나 붉은 털 늑대라도 마주치게 되면?
‘안 되겠어.’
돌아가는 게 낫다.
오늘만 날이 아니니.
나중에 다시 오면 되고.
그런데 문제는 저 형님이 고집이 너무 세다는 것.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자신이 앞장서겠다고 해도 저러는데 돌아가자고 하면 말을 들을까?
‘한 번만 더 설득해보자.’
듣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끌고 밀림을 빠져나가야겠다.
그게 죽는 것보다 나으니.
마침 멈춰 선 태주에게 슬며시 접근하는 백창훈.
“혀, 혀, 형님.”
“조용.”
“네?”
“왔다.”
뭐가 왔다는 건지.
포자 독 낙타 고라니?
하지만 앞엔 아무것도 없었다.
이 양반이 헛것을 보나?
이해한다.
해가 잘 들어오지 않아 어두운 밀림.
심약한 사람들은 가끔씩 착란 증세를 일으키기도 하는 곳.
“그러지 마시고 내일 다시 오···,”
그때였다.
툭.
새까만 무언가가 나무에서 툭하고 떨어져 내렸다.
“케륵!”
날카로운 날개 지느러미를 달고 있는 폭풍 족제비였다.
탐색하듯 기다란 몸체를 요리조리 움직여대는 놈.
“이, 이런!”
백창훈은 탄식했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그래도 다행히 한 마리.
‘이 정도면···,’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었다.
투둑, 투두두둑!
거뭇거뭇한 물체가 나무 위에서 연신 떨어져 내렸다.
다행은 무슨.
“키키키!”
“키킥?”
“케르르르,”
“쿠룩!”
.
.
.
폭풍 족제비는 담비보다 몸집도 작고 공격력이 약하지만 대신 매우 빠르다.
그런데 왜 폭풍일까?
이 새끼들은 한번 나타나면 최소 20마리 이상.
서로 뭉쳐서 뱅글뱅글 돌면서 공격하는 모습이 마치 회오리나 폭풍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대충 세도 20마리 이상의 폭풍 족제비들이 쐐기모양의 진형을 갖추며, 위협하듯 꼬리를 바짝 세웠다.
큰일 났다.
다 죽게 생겼다.
태주 형님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매우 심각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리는 모습.
백창훈은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동료들에게 말했다.
“너희들, 내가 신호하면 형님 모시고 빠져나가.”
“차, 창훈이 형, 형도 가, 같이···,”
“정신 차려! 태주 형님은 반드시 살려야 해! 그래야 우리 동생들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어.”
“···아, 알았어.”
백창훈은 검을 들고 폭풍 족제비 무리에게 달려들 준비를 마쳤다.
그의 특성은 검사.
검에 대한 재능을 부여하는 특성.
최소한 시간을 끌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야 죽든 말든.
‘한 마리도 놓치면 안 돼! 한꺼번에 어그로를 끌어서···,’
그런데 두 손을 코트 안에 넣고 몸이 뻗뻗히 귿은 듯 움직이지 않고 있는 태주.
“형님, 제가 신호하면 쟤들과 함께 달리면 됩니다. 반드시 사실 겁니다. 저는 걱정말고···,”
순간!
불쑥!
태주의 손이 코트에서 빠져나왔다.
동시에 엄청난 속도로 두 손을 앞으로 쭉 뻗어 강하게 털어냈다.
푸앗! 푸아악! 푸닷다닷!
파팍! 파파파팍! 파바바바바바바밧!
터져 나오는 굉음.
“어···,”
갑자기 삭제되듯 사라지는 20여 마리의 족제비 무리.
폭죽처럼 터져 사방으로 흩날리는 살점들.
백창훈은 그저 입만 떡 벌렸다.
‘샤, 샷건이야, 뭐야?’
비폭일섬(飛瀑一閃)의 비폭.
일섬보다 사정거리는 비교도 안 되게 짧지만 근거리에서 기습용도로 쓰이는 암기술.
오른손엔 작은 못처럼 생긴 폭우이화정 한 움큼, 왼손엔 오돌토돌한 철환 한 움큼, 한 손당 최소로 잡아도 100여 개, 합하면 200개.
혼원무상독령공 4성으로 강화된 경력을 담은 암기들이 부채꼴 모양으로 쏘아져 폭풍 족제비 무리를 단번에 갈아버렸다.
조용했다.
꿀꺽.
마른침 삼키는 소리만 들렸다.
믿지 못할 광경에 아무도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한방에 족제비 20마리?
‘태주 형님도 각성하셨어? 아니야. 문양도 없잖아.’
‘적합자라도 쳐도 너무 강해.’
‘진짜 샷건인가? 코트 안에 숨겼나?’
‘샷건이라 해도 산탄 총알로는 족제비 가죽도 못 뚫을 텐데.’
확실한 건 건 태주 형님이 20마리의 족제비를 한 번에 처리할 수 있을 만큼의 강자였다. 행동으로 증명했다.
‘아, 쪽팔려.’
백창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저런 사람에게 위험하다느니, 다음에 오자느니, 나만 믿고 도망치면 살 수 있다는 말까지 했다.
태주도 말이 없었다.
‘···씨발!’
하필 나타난 게 폭풍 족제비라니.
일섬으로 하나하나 조지기에 너무 많은 숫자.
족제비 무리와 마주치고 난 뒤 한참을 고민했다.
유엽비도를 날려 한 마리씩 처리할까?
20마리인데 하나라도 놓치면?
자신에게 달려드는 거야 오히려 고맙지만, 한 마리라도 빠져나가 팀원들을 덮치면?
백홍표 사장 볼 낯이 없어지는 거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비폭을 사용했다.
아아아! 저 아까운 암기들.
‘···회수는 포기.’
어느 세월에 저 많은 암기를,
아깝지만 내버려 두자.
어차피 찾으려고 해도 못 찾는다.
당군악은 씀씀이도 크고, 강호 최고의 재력을 자랑했는데, 지구의 자신은 왜 이리 궁상맞을까? 돈은 돈대로 벌고 있으면서.
열심히 노력해야지.
혼원무상독령공 7성에 오르면 손 한번 뻗는 것으로 암기를 회수할 수 있다.
태주는 아직도 얼이 빠져있는 백창훈에게 말했다.
“봤냐?”
“···어음, 봐, 봤습니다.”
“이젠 내가 앞장서도 되겠지?”
“넵! 입 꾹 닫고 따라가겠습니다.”
다시 안쪽으로 들어가는 태주의 일행.
드디어 만났다.
포자 독 낙타 고라니를 말이다.
이번에도 놈은 사람을 피하지 않았다.
역시 학습효과 때문, 보고도 지나갈 것이라고 여기는 듯.
태주는 팀원에게 이번에 새로 만든 해독제를 나눠줬다.
바르는 해독제와 먹는 해독제 두 가지.
“이건 먹고, 이건 발라. 너희들이 잡아봐. 난 뒤로 빠져있을 테니.”
“넵! 형님!”
백창훈이라고 포자 독의 위험성을 왜 모르겠나?
그러나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이미 모기독 해독제를 만들어낸 사람, 그리고 좀 전에 보여준 놀라운 능력까지.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는 고라니를 슬그머니 포기하고.
들고 있던 검으로 냅다 목을 찌르니!
“으아아아아아아악!”
기분 나쁜 고라니 비명이 들리고.
포퐁! 퐁!
등에 달린 혹이 터졌다.
터져 나오는 극독의 포자.
태주는 즉시 혈인독장으로 포자 독을 끌어당겼다.
너무 많이 노출되면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조금씩.
그래서 팀원들에게 간 포자 독은 그리 많지 않았다.
모기독 해독제 시험해 볼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포자 독은 사람을 죽이는 독.
물론 완벽하게 해독될 거라 자신했고, 확인 절차도 끝냈지만.
“어때?”
“괜찮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그래?”
잘 됐다.
몇 마리 더 잡으면서 노출되는 포자 독의 양을 늘려보자.
“참! 너희들 도축할 줄 알아?”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좋아! 같이 도와주면서 해봐.”
낙타 고라니 고기는 무조건 챙겨야지.
포자 독 해독제가 본격적으로 출시되면 고라니 씨가 마를지도 모르니까.
※ ※ ※
올해 30살, 백서연은 삼한제국 수도 뉴서울에 위치한 미리내 그룹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녀는 구례 자유도시 백스 고아원 출신.
그녀의 나이 10살에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아빠의 친구인 백홍표가 자신을 거둬주었고.
그의 지원으로 초중고를 졸업, 뉴서울 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해서 마침내 대기업 본사까지.
백서연은 어릴 적부터 머리가 똑똑했다.
거기에 악바리 근성으로 노력까지 합쳤다.
이런 사람을 보통 천재라고 부른다.
입사하고 나서도 그녀의 천재성은 빛을 발했다.
그룹 미래전략본부에 배속되어 여러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최연소 과장 직급에 올랐다.
하지만 회사 생활이라는 게 그렇듯, 일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동료들과의 유대관계, 상사에게도 잘 보여야 하고, 사내 정치에 발을 담가야 하고.
백서연으로서는 이런 모든 것들이 힘에 부쳤다.
고아원 출신에, 친척 하나 없는 고아, 뉴서울엔 그녀가 맘 편안히 기댈 곳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구례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래도 꾹 참았다.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신신당부하셨기 때문이다.
구례를 떠난 이상 돌아올 생각은 말라고, 여긴 쳐다보지도 말라고, 나중에 이 정도면 성공했다, 싶을 때 한번 들리라고.
섭섭했지만 백서연은 이해했다.
그녀라고 아버지 마음을 왜 모르겠나?
그때였다.
“어이, 백과장?”
“네, 차장님.”
“잠시 나 좀 보지.”
전략본부에서 그녀의 상사인 전주학 차장.
용건이 있는 모양.
백서연은 차장실로 들어갔다.
“긴말할 것 없고, 자네 구례 고아원 출신이지? 백스 드럭샵의 백홍표 사장이 원장이고.”
음? 아버지 이름이 여기서 왜?
“맞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혹시 신문 봤나? 태홍 바이오, 군부와 계약한 기사 있잖아.”
“아, 포자 독 낙타 고라니 해독제 말씀이시죠? 당연히 읽어봤습니다.”
“그럼 백홍표 사장이 운영하는 드럭샵이 태홍 바이오 자회사라는 것도?”
“네?”
백서연은 깜짝 놀랐다.
구례에서 포자 독의 해독제가 개발 중이라는 것까진 알았다.
자유도시 특성상 여러 신약이 많이 만들어지고, 시판되는 곳이 바로 구례.
그런데 아버지의 드럭샵이 태홍 바이오 소속이라고?
“몰랐나 보군. 그럼 당장 구례로 내려가.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에서 손 떼고.”
“무슨 일로요?”
“백홍표 옆에서 지켜보라고. 해독제 개발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효과는 확실한지, 개발자 김태주라는 사람은 누구인지.”
눈썹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 가는 백서연.
보통 그녀가 심기가 불편할 때 짓는 표정.
“해독제 실체가 확인되면 어떻게 하는지 알겠지? 제조식 거래 계약을 맺든, 로열티 계약을 하든, 몰래 훔치든, 반드시 제조식을 확보해야 해.”
지금 스파이 짓을 하라는 건가?
키워준 아버지에게서 해독제 제조식을 빼오라고?
“내가 모시는 분이 누군지 잘 알지? 이번 일만 잘하면 책임지고 내 후임으로 진급시켜주지. 만약 거절하면···, 말 안 해도 알 거야.”
기가 찼다.
아무리 포자 독 낙타 고라니 해독제라고 해도 그렇지.
“어차피 약이 나오면 금방 카피할 거야. 자네도 알잖아! 우리 미리내 제약 연구소 수준이 어떤지, 다만 시간을 절약하자는 것뿐이야.”
“···.”
“빨리 말하게. 할 건가, 아니면 하지 않을 건가? 차장 승진의 기회야. 물론 난 부장으로 올라가고.”
아열대 기후에서만 자생하는 변종 3줄 무늬 모기와는 달리, 포자 독 낙타 고라니는 삼한제국 전역에 존재한다.
개체수도 어마어마하게 많다.
오죽하면 웨이브가 일어날 때 사람들을 가장 많이 죽이는 마수 중 하나라고 소문이 났겠나.
포자 독 해독제를 확보하면 제약회사로는 떼돈을 벌 터.
“저는 하지 않···,”
순간!
지이잉!
주머니에서 울리는 스마트폰.
백서연은 스마트폰을 꺼내 통화 거절 버튼을 누르려다 멈칫했다.
‘아버지?’
구례에서 걸려온 전화.
너무 반갑기는 하지만 한편으론 걱정도 들었다.
“잠시 전화를 받아도 되겠습니까?”
“흐음,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빨리 결정을 내리게, 나도 보고하러 가야 하니까.”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
통화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리는 전주학 차장.
이윽고, 전화를 끊고,
“그래, 결정했나?”
“네, 결정했습니다. 구례로 내려가겠습니다.”
“오! 잘 선택했어. 그럼 세부 사항을 논의···,”
“단!”
백서연이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전주학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사직서 낼게요. 회사 그만두겠습니다.”
“···뭐, 뭐?”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럼 이만.”
“야야! 백서연! 백과장! 너 미쳤어?”
미치긴!
얼마나 기다렸던 일인데.
이깟 회사 따윈 조금의 미련도 없었다.
< 비폭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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