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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마는 때론 자비롭다. >
여타 다른 재벌 기업과 마찬가지로 이곳 미리내 그룹도 승계권을 둘러싼 암투가 심했다.
특히 미래전략본부실은 말할 것도 없다.
누구에게 줄을 대느냐.
줄을 댄 사람이 어느 위치에 있고, 무슨 성과를 냈는지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다.
하지만 백서연은 포지션을 정하지 않았다.
그럴 정신 있으면 일이나 더 하지.
전주학 차장 같은 경우엔 그룹 차남 이동우의 라인에 올라탄 사람.
이번 포자 독 고라니 해독제를 가지고 오라는 지시도 이동우가 내렸을 것이다.
그는 미리내 바이오 제약회사의 사장이었으니까.
“야! 백서연! 너 이렇게 나올 거야? 이 바닥에서 영영 매장되고 싶어?”
나가는 그녀를 뒤따라 나오며 바락바락 악을 쓰는 전주학 차장.
“이 바닥요? 저 뉴서울 떠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전주학은 잠시 숨을 고르며 타이르듯 말했다.
“그래, 구례로 간다고 했지. 어차피 뉴서울로 다시 올라올 거 아니야? 그 위험한 촌구석에서 썩으려고?”
“네, 거기서 쭉 살 거예요.”
“하아, 좋아. 그럼 제조식만 구해줘. 100억 정도는 줄 생각 있어. 자리를 잡으려면 돈이 필요하잖아. 돈이 싫다면 구례시 캐슬 안에 집 한 채 얻어줄게.”
“꿈 깨시라고 전해주세요. 저 위쪽에.”
그러자 전주학의 인상이 험악하며 변했다.
“너 진짜 죽고 싶냐? 구례라고 해서 미리내 그룹이 아무것도 못 할 줄 알아?”
“협박이시네요. 뭐, 이 정도까지 왔으면 좋게 헤어질 수는 없겠고···, 업무인수인계는 필요 없겠죠? 사직서도 메일로 보내드릴게요.”
백서연은 단호했다.
하루빨리 구례로 내려가고 싶은 마음.
할 일이 많다.
전세방도 빼야 하고, 이사 준비도 해야 한다.
아버지가 직접 도와달라고 전화가 왔다.
평소 이런 부탁 안 하시는 분.
믿을 만한 사람과 회사를 설립하셨는데, 일할 사람이 없다고.
‘태홍 바이오라고 했지?’
최근에 생긴 회사.
하지만 발전 가능성은 충분하다.
모기독 해독제는 이미 출시되어 군부에도 납품했고, 또한 포자독 해독제도 개발 중이라니,
‘회사 조직부터 갖춰야 해.’
그런데 아버지와 동업했다는 사람은 누굴까?
해독제 개발자 같은데.
정체 확인이 우선이다.
목적이 뭔지, 왜 하필 아버지를 선택했는지.
만약 아버지를 바지사장으로 내세워 음흉한 흉계 같은 걸 꾸민다면?
‘일단 만나보고 나서 생각해봐야겠어.’
※ ※ ※
태주와 원생 출신의 레이드 팀은 구례로 돌아왔다.
앞으로 태홍 바이오의 근거지가 될 태주 소유의 빌딩으로.
포자 독 낙타 고라니 해독제 효과도 충분하게 검증했고, 발골해서 가져온 고라니 고기와 사골, 내장, 그리고 독초와 약초들도.
메고 간 배낭들이 가득가득 찼다.
풍성한 수확이었다.
‘당분간 해독제나 만들어야겠군.’
모기독 해독제와 낙타 고라니 해독제, 두 가지만.
재료가 충분치 않다.
그동안 드럭샵을 통해 약초와 독초들을 매입해왔다.
하지만 문을 닫아 재료 공급이 끊긴 상태.
될 수 있으면 빨리 마무리하고 드럭샵 재오픈해야지.
백홍표와 동업해 드럭샵 지분도 소유한 터라 드럭샵에 대한 애정도 생겼다.
보관소와 냉장 저장고에 수집해온 재료와 고라니 고기를 쟁여 놓은 후.
“수고 많았어.”
“네! 형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고아원으로 돌아가서 푹 쉬어.”
“네? 저희들 여기 있을 건데요?”
“왜?”
오히려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태주를 바라보는 백창훈.
“어어, 아버지께서 아무런 말씀 없으셨나요?”
“아! 경호 문제 때문이지?”
“넵!”
“근데 오늘 일 겪고도 그런 생각이 들어?”
“···.”
백창훈의 표정이 머쓱해졌다.
“생각해보니 필요가 없겠네요.”
“그래, 고아원 아이들이나 돌봐. 백사장님도 지키고.”
사실 고아원은 안전할 것이다.
자유 도시 구례에서 고아원은 단 한 군데.
거길 건든다고?
구례 시민들의 분노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나 세상엔 진짜 또라이들이 많다.
구례는 특히 그렇다.
그래서 방심할 수는 없는 노릇.
믿을 만한 사람들이 더 필요하다.
빨리 회사 조직이 갖춰지고 해독제 재료를 손질해줄 인원 정도만 채용해도 다른 약을 추가해 볼 여유가 있는데.
근처 비어있는 땅도 넉넉하게 사뒀으니, 돈 벌면 건물도 새로 올리고.
예산보다 훨씬 일이 커졌다.
적당히 벌어서 자리를 잡으려 했는데.
뭐, 크게 벌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인테리어는 끝났나?’
태주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 5층 꼭대기로 올라갔다.
지하 대피소 다음으로 인테리어를 한 곳이 바로 여기.
‘좋네.’
거주공간으로 꾸몄다.
부엌과 침실, 서재, 거실, 욕조가 갖춰진 화장실···.
‘내 집이구나.’
기분이 묘하다.
처음으로 내 돈 주고 산 집.
마나 거부자로 태어난 죄, 파주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죽을 줄 알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명이 질겼고, 그래서 새엄마에 의해 군으로 쫓겨나야만 했다.
그리고 믿었던 상관에 의한 살해 위협, 전역하고 구례로 와서 짐꾼 생활···, 짧은 시간이지만 파란만장하다.
‘싱숭생숭하기도 하고.’
마침 좋은 사람을 만났다.
이게 가장 큰 소득.
구례가 시작점이 될 것이다.
당당하게 홀로 설 수 있는 기반이 말이다.
슬슬 피곤하다.
잠이나 자야겠다.
※ ※ ※
부스럭, 부스럭.
구례시 변두리 지역, 태주가 사들인 건물 주변.
그곳을 향해 은밀하게 접근하는 일련의 무리들이 있었다.
“크읍!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네. 약빨이 떨어졌나?”
“너 지금 가지고 온 약은 손대면 안 돼.”
“에이, 형님도 제가 또 공과 사는 잘 구별합니다.”
“마약쟁이 말을 어떻게 믿어?”
“형님도 마약···, 애호자 아니십니까?”
“이 새끼가?”
자유 도시 구례는 일반 도시들과는 다르다.
평범한 도시도 양지가 있고 음지도 있는 법이지만 구례의 음지는 매우 어둡다.
구례 슬럼가.
마약이 돌아다니는 건 기본.
폭력, 살인, 강간, 인신매매, 마약···, 온갖 추악한 범죄들이 일어났다가, 일어난 지도 모르고 금방 묻히는 곳.
그 구례 슬럼가에서 활동하는 조직이 있었다.
오랫동안 YJ 약국과 거래해온 빌런들, 조훈석에게서 마약을 공급받고 법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일을 대신 처리해줬다.
“저게 김태주, 그놈 건물이야?”
“그런 것 같은데요? 맨 위층에 불이 커져 있습니다.”
“구례로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부동산 사들이고 지랄이야.”
“모기독 해독제가 대 히트를 쳤으니까요. 포자독 해독제도 곧 나온다고 하니.”
조훈석의 의뢰.
모기독 개발자인 김태주를 납치해 강제로 마약을 투여해 중독시키라는 것.
해독제 제조식을 캐내려는 수작 같은데···,
빌런 조직 두목 비기너 등급 각성자 마상식은 살짝 아쉬운 표정.
‘쯧! 아깝네.’
놈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엄청나다.
당장 모기독 해독제만 해도 얼마인가?
마음 같아선 이놈을 납치해서 제조식을 혼자 독식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
조훈석이 공급하는 마약에 이미 길들어져 있어서.
놈이 마약을 끊으면 어떻게 살라고?
‘원하는 거 들어 주고, 대신 더 많이 요구해야지.’
마약이 이렇게나 무섭다.
자신보다 약한 놈의 뒷구멍을 닦아줘야 하는 신세.
비상계단을 통해 조용조용 올라가는 빌런 조폭들.
이윽고 문 앞에 도착했다.
마상식은 문고리를 잡았다.
한번 비틀면 문이 열릴 것이고, 안엔 놈이 있겠지.
“들어가면 말 섞지 말고 바로 주사 바늘부터 찔러넣어. 마약 맛 한번 보면 눈깔 획 돌아갈 테니까, 조용하게 차에 태우고 돌아가면 돼.”
“흐미, 이 좋은걸···.”
“하아, 이 마약쟁이 새끼가, 입맛 다시지 마라! 네 대가리부터 뽑고 시작할까?”
“아닙니다. 바로 찔러넣겠습니다.”
마상식은 문고리를 비틀었다.
우드득!
문이 열렸다.
※ ※ ※
태주는 놈들이 비상계단을 통해 걸어 올라올 때부터 이미 깨어있었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것, 당군악이 마교에 쫓겨 강호를 떠돌 때 가졌던 습관 중 하나였다.
‘하나, 둘, 셋, 넷···, 총 4명인가?’
어떤 식으로든 공격이 들어올 거란 예상은 했다.
그런데 이렇게 뻔한 식이라니.
하긴!
이 방법밖에 없을 것이다.
점점 여론은 험악해지고, 군납을 통해 재정도 튼튼하고, 거기에 포자 독 해독제가 출시된다고 하니 궁지에 몰렸겠지.
‘빨리 끝낼 수 있겠네.’
무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명분이 만들어졌다.
일단 저놈들부터 처리하고.
태주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벽에 걸린 코트를 입으려고 했는데···,
순간!
두런두런, 문 바로 앞에서 놈들이 나누는 대화.
‘음?’
분명히 들었다.
‘마약?’
이게 웬 떡인가.
독정(毒精)의 성취가 깊어지려면 되도록 다양한 종류의 독을 맛봐야 한다.
마약도 독(毒).
전에 맛보지 못한 새로운 성질의 독.
‘얼마나 가지고 왔지?’
많이 가지고 왔으면 좋겠다.
혼원무상독령공 4성이면 마약 정도야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고.
절대독마 당군악도 강호를 종횡할 당시, 다양한 종류의 마약을 섭렵했다.
양귀비로 만든 앵속, 갖가지 종류의 몽환약, 절정의 무사도 견디지 못하는 극락향, 음양고, 색혼단···,
태주는 침대에서 일어나다 말고 다시 그대로 누웠다.
그리고 동시에,
우드득!
문이 열렸다.
“이 새끼, 자고 있네요?”
“멍청한 놈, 어떻게 경계심이 없어요. 가진 것도 많은 새끼가···, 뭐해? 빨리 주사해. 혈관에다 깊숙이,”
“네!”
똘마니 하나가 자고 있는 태주의 소매를 위로 올렸다.
그리고 주사 바늘을 찔러넣으려는데···,
순간!
덥석!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똘마니의 손을 잡으면서 몸을 일으키는 태주.
“원래는 그냥 맞으려고 했거든?”
당연히 빌런들은 기겁했다.
“씨발, 깜짝이야.”
“···깨어있었네?”
“야! 빨리 찔러!”
“그, 그게 소, 손이 움직이지 않아서.”
태주는 놈의 손에서 주사기를 빼앗으며 말했다.
“깜빡 잊어버렸다. 내가 주사 맞는 걸 싫어해. 아프잖아.”
그리고는 입에 가져다 대고.
“이 마약, 입으로 먹어도 되지? 효과가 조금 떨어지려나?”
“···어, 그걸 왜 머, 먹어?”
찌익!
주사액이 태주의 입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마상식은 황당했다.
갑자기 깨어난 건 그렇다 치고, 마약인 줄 알면서도 입에 넣어?
경구 투여해도 효과가 나타나긴 하지만···,
아깝다.
혈관에 주사해야 좋은데, 그래야 직방인데.
주사기에 든 마약을 한 번에 다 마신 태주.
그리고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마상식과 똘마니들.
“쩝, 맛이 씁쓸하네. ···더 없냐?”
미친놈인가?
“아무렇지도 않아?”
“어.”
“막 환각이 보이고 몸이 붕 뜨면서 기분도 좋아지고, 이런 거 못 느껴?”
“흐음, 몇 개 더 먹어보면 알지도 모르겠다. 있으면 종류별로 다 꺼내 봐.”
“이런 개새끼가!”
마상식이 주먹을 치켜들며 태주에게 다가왔다.
“넌 그냥 기절시켜 데려가는 게 낫겠다. 약도 아까운 놈이야.”
그때였다.
손가락을 들어 총처럼 겨누는 태주,
피식! 핏! 핏!
멈칫!
“···어?”
다가오는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마상식.
무공의 종류엔 자신이나 혹은 특정 세력만이 알고 있는 독문 무공이 있고, 누구나 다 익힐 수 있는 범용 무공이 있다.
그 범용 무공 중 하나가 바로 점혈법.
지풍을 날려 마혈(痲穴)이나 맥문을 짚어 적을 마비시키는 기술.
이래서 인간이 마수보다 쉽다.
마수는 혈을 짚을 수 없으니까.
“혀, 형님!”
“이 새끼 무슨 짓을 한 거야?”
“잡아!”
스슷!
태주의 신형이 흐릿하게 변하더니 어느새 침대에서 사라져버렸다.
“헉!”
“어, 어디?”
“뒤, 뒤에 있···,”
쿡쿡! 쿠쿠쿡!
점혈은 지풍을 날리는 것보다 직접 손가락으로 찌르는 것이 효과가 더 좋다.
침실에서 마네킹처럼 굳어버린 빌런들.
태주는 놈들의 몸을 여유롭게 뒤졌다.
“어이구야. 많이 가지고 있었네. 이거 내가 가지고 가도 되지?”
여기저기서 주사기가 튀어나왔다.
하나씩 입으로 가져가 쩝쩝 맛을 보면서.
“야이, 씨발 놈아!”
“그거 다시 안 가지고 와?”
“너 내가 반드시 죽인다!”
아혈은 짚지 않았다.
왜냐하면 들을 말이 있기 때문이었다.
먼저 스마트폰을 꺼내 카메라 어플을 실행한 후 동영상 모드로 찍으면서,
“자, 이제 말해봐. 이 일을 시킨 사람이 누구야?”
그러자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는 마상식.
“낄낄낄낄, 병신아! 내가 그걸 말할 것 같아? 여기서 죽이든지, 신고하든지 마음대로 해!”
역시 마약에 절어있는 놈이었다.
태주는 마상식의 손목을 잡았다.
“왜? 고문이라도 하게?”
“아니, 치료해주려고.”
“치료?”
“네 몸에서 마약의 기운을 흡수할 거야. 완전히는 말고, 걱정 마. 아주 조금은 남겨줄게.”
“···뭐?”
“그럼 금단증상이 일어나겠지? 넌 엉엉 울면서 애걸복걸할 테고, 제발 주사 한 대만 놔 달라고, 흠, 알고 보면 이것도 고문의 일종인 건가? 아무튼 시작한다?”
“자, 잠깐!”
태주는 혼원무상독령공을 운기했다.
‘마약이라 그런지, 꽤 맛있네.’
맥문을 통해 흡수되는 마약의 기운.
얼마나 착하고 호구 같은 짓인가.
자신을 납치하려고 찾아온 놈에게 마약 치료라는 자비를 베풀다니.
“아, 안 돼! 제, 제에발, 멈춰···,”
마상식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어댔다.
약 기운이 떨어지자 덮쳐오는 금단증세.
“큭! 끄으윽, 키익, 헤으으윽, 학학! 크크극!”
괴기한 음성으로 반쯤 미쳐가는 마상식.
그걸 본 다른 약쟁이들은 공포에 질렸다.
“다, 다 말할게요.”
“조훈석이 시켰습니다!!!”
“전 그냥 따라만 왔어요!”
하여간 양아치들이란.
의리도 없고, 양심도 없다.
이제 증거도 얻었겠다.
다음 차례는?
‘자경단에 신고나 해볼까?’
어떻게 처리하는지 정말 궁금하다.
< 독마는 때론 자비롭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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