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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으러 왔다가 도리어 잡혀버렸다. >
탁탑신장은 잔뜩 성이 난 얼굴로 선계로 내려갔다.
기회가 왔다.
빌어먹을 신선 놈들, 언제고 한번은 버릇을 단단히 고쳐놓으리라 마음먹고 있던 참이었다.
검선?
물론 강한 놈이긴 하다.
하지만 천선계 장수가 어디 만만한 존재인가?
탁탑도 보패를 가지고 다닌다.
하나도 아닌 세 개씩이나.
첫 번째는 상제가 하사한 ‘팔괘 나침반’
찾고자 하는 대상의 이름과 얼굴을 떠올리면 나침반 바늘이 움직인다.
그래서 죄를 지은 놈이 어디 숨든 금방 찾아낼 수 있다.
두 번째는 ‘천군 소환 풀피리’
이 피리를 불면 천선계에 집결해있는 1만 대군이 순식간에 소환된다.
검선을 발견하면 그 길로 풀피리를 불 생각.
제아무리 검선이라도, 또한 그와 동조하는 신선 무리라도 신장 1만 대군이라면 충분하게 제압할 수 있다.
탁탑은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계속 따라가다가 마침내 선계 넓은 공터에 설치된 기이한 천막을 발견했다.
천막이 있는 곳은 다른 곳보다 유독 어두웠다.
또한 결계가 설치되어 외부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었다.
“흥! 여기 숨어 있었구나.”
탁탑은 허리춤에서 천도 복숭아 가지로 만든 ‘파사(破邪) 방망이’를 빼 들었다.
그가 가진 세 번째 보패.
천도 복숭아 나무를 관리할 때 자른 가지로 만든 방망이, 삿된 기운을 물리치고 결계를 파괴하는 기능이 있어 신장들에게 지급되는 무기.
휘릿!
쿠웅!
탁탑은 파사 방망이로 결계를 부순 후, 천막을 열어젖혔다.
“검선! 어디 있소? 나랑 함께 갑시다. 죄를 지었으면 응당히 벌을···, 음?”
천막 안엔 검선만 있는 게 아니었다.
선계 선인들이 여기 다 모인 것 같다.
“또 왔다. 또 왔어.”
“이번엔 탁탑이구나. 잘하면 상제도 오겠네?”
“귀곡! 결계가 너무 쉽게 깨지는 거 아니오?”
“끄응, 파사 방망이는 어쩔 수 없어서.”
“하필 결정적인 장면에···,”
쏟아지는 질타.
하지만 탁탑신장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앞에 보이는 영상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대체 저게 무슨···,’
네모난 하얀 천에 비친 풍경.
환영은 분명한데, 마치 살아서 움직이듯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인간들, 그들이 나누는 대화.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인 듯한데.
저런 곳은 본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탁탑은 곧 그 환영 속 세상에 점점 빠져들어 갔다.
희한하게도 저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쏙쏙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귀에 대고 말하는 건 뭐지? 허허, 전화기라니,’
등장하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씩 들고 있는 사각형의 물체.
그들이 숨 쉬고 살아가는 도시, 집, 그리고 거실과 방.
전부 다 호화롭고 풍요로웠다.
‘···뭐? 다이어트? 살을 빼기 위해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요지경이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수천 년 넘게 인간계를 왕래했지만 저런 인간사는 처음 본다.
결국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은 잊어버리고 영상에만 몰두하는 탁탑.
‘세상에! 친자확인이라, 요사한 년! 바람을 피워? 쯧쯧, 뻐꾸기 새끼 키우는 게 아니라면 이혼하는 게 당연하지.’
저 안쪽에 자신의 부하들이 와 있다는 것도 알았지만, 탁탑에겐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마디씩 던지는 선인들.
“아주 넋이 나갔구만.”
“난 드라마보다 탁탑 표정 변화가 더 재미있네.”
“이해해줍시다. 누군들 안 저러겠소?”
“그래도 공짜로 보여줄 순 없지.”
“어이, 검선! 어떻게 할 거요?”
검선을 비롯한 선도 도적단들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뭘 어쩌긴! 다른 신장들처럼 우리가 한 달 요금 대신 대납하겠소.”
그러더니 호리병을 기울여 선도를 쏟아내고는.
“독선, 여기 받으시오. 탁탑 요금 선도 25개요.”
“···.”
당군악은 한숨을 푹 쉬었다.
‘이거 장물 아닌가?’
도원이 털려 시중에 풀린 대량의 선도들.
졸지에 장물아비가 되고 말았다.
나중에 조사가 나오면 덤터기 쓸지도 모르는데.
‘···나중이 아니라, 이미 조사가 나왔잖아.’
조사하러 온 신장들이 자신의 본분을 잊고 선인들 틈에서 헤벌쭉한 채, 드라마에만 빠져있어서 그렇지.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다.
선도 복숭아에 장물이라고 쓰인 것도 아니고.
어차피 무한공간에 넣으면 누구도 빼앗아가지 못한다.
“알겠소. 탁탑신장 요금 대납받았소.”
“그리고 팝콘 하나 있으면 한 봉지만.”
“···다 떨어졌소.”
“에잉, 짭짤하니 맛있었는데, ···그 손목시계 팔 생각 없소?”
“꿈도 꾸지 마시구려.”
“허어, 사람 참! 언제 또 물건이 들어오는가?”
“기약이 없소만.”
“들어오면 내게 제일 먼저 말해주시오. 내가 다 사버릴 테니까.”
검선의 플렉스에 다른 선인들의 부러움이 쏟아졌다.
“부자네, 부자야.”
“도대체 선도 복숭아를 얼마큼 털었길래?”
“오늘만 사는 검선(劍仙)이구나.”
“우리도 도원이나 털어볼까나? 아직 많이 남았잖아.”
“일단 이거 마저 보고.”
검선이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아직도 멍하니 영상만 바라보는 탁탑에게 말했다.
“탁탑!”
“으응? 어, 검선. 그렇지 않아도···,”
“의자에 편하게 앉아서 보시오. 내가 대신 요금을 치렀으니까.”
“요금?”
“그거 못 내면 쫓겨나야 하오.”
“···허어,”
“하지만 내가 대신 냈으니 한 달 동안 여기 있어도 되오.”
“고, 고맙소.”
표정이 밝아진 탁탑이 휘적휘적 걸어가 극장 나무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편하게 드라마를 시청했다.
이미 자신이 여기 온 목적을 완전하게 잊은 탁탑이었다.
아니,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하는 것일 수도.
검선과 그 일당들이 신장들의 요금을 대신 내주는 이유가 뭘까?
뻔하다.
물귀신 작전.
공범을 만드는 거겠지.
등선 전에 절대독마로 불리며 교활함의 대명사였던 당군악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악랄하구나. 악랄해.’
진짜 저자가 검선이 맞나?
드라마 몇 편 보려고 도원을 털어?
하지만 검선은 도원에 널린 게 선도인데 그게 무슨 대수냐는 표정, 천도는 건들지도 않았으니까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태연하게 이야기한다.
‘뭐, 알아서 하겠지.’
그나저나 선인들의 컨텐츠 소비력이 엄청났다.
하긴, 극장에서 며칠을 죽치고 앉았는데, 하루에 거의 15편에서 20편을 보는 작자들인데.
영웅전 3부작은 예전에 끝났다.
결국 다른 드라마로 넘어가야 했다.
한참을 고심한 끝에, 당군악은 일일 아침 드라마를 틀어주었다.
일단 이들이 전혀 접해보지 못했던 지구 세상의 이야기, 그리고 편수도 150편이 넘어서 비교적 시간을 길게 끌 수 있다.
이 많은 편수를 어떻게 일일이 다운받았는지, 새삼 태주에게 감사함을 느낀 당군악.
그런데 걸림돌이 하나 있었다.
바로 언어 소통의 문제.
자신이야 삼한제국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지만 다른 선인들은 아니었다.
그 걸림돌은 의외로 쉽게 해결됐다.
학선(學仙) 갈홍 선인이 천리신통(千里神通) 술법진을 극장 바닥에 깔았다.
언어를 직접 번역하는 건 아니다.
당군악이 선인들과 함께 드라마를 시청하면서 이해한 내용들이 마치 텔레파시 천리통처럼 각 선인들에게 전달된다.
즉 당군악이 드라마 배경과 대사들을 머릿속에서 떠올리면, 선인들이 그걸 깨닫는 식으로.
학습기능까지 있어서 시간이 지나면 굳이 술법진과 당군악이 없더라도 언어를 완전하게 습득하는 효과도 볼 수 있단다.
하지만 무려 선도 500개 분의 선기가 필요한 술법진이었다.
당군악은 과감하게 투자를 결정했다.
모자란 선도야 이자까지 쳐서 천천히 주기로 약속하고.
언어의 장벽이 무너지면 보여줄 수 있는 컨텐츠의 범위가 훨씬 넓어진다.
그래서 엊그제부터 술법진을 깔고 일일 아침 드라마를 틀었다.
처음 선인들의 반응은 스토리가 아닌 배경에 집중됐다.
“우주는 넓고도 넓도다. 어떻게 저런 세상이 존재할까?”
“우리가 사는 곳은 그저 티끌에 불과했네.”
“참으로 신기한 세상이로다. 이까짓 선계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야.”
“깨달음을 얻었군.”
“쯧쯧, 이러다 또 등선하겠어.”
드라마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스마트폰, 자동차, 높게 솟아오른 건물, 각종 생활용품과 전자기기들, 상상도 못 했던 문물들도 신선들의 관심을 끌었다.
“보패인가?”
“당연히 보패지.”
“수만 리나 떨어진 사람에게 자신의 음성을 전할 수 있는 물건이 보패 아니면 뭔가?”
“나도 자동차 한 대 있었으면 좋겠군.”
“선계에 도로도 없는데?”
“깔면 되지.”
그러다가 점점 막장 스토리에 빠져들었다.
“아니, 그럼 저 두 남녀가 사실은 남매가 아니었단 말인가?”
“대체 저 여인 아버지가 누구라는 거야?”
“···회장님? 저 늙은이는 딸을 눈앞에 두고도 왜 알아보지 못하나?”
“저저저, 썩을 년! 감히 자신의 치부를 덮으려고 살인 모의를 해? 오냐! 내가 먼저 죽이겠다.”
“거참! 일어서지 말라니까. 화면 다 가리잖아.”
다행이었다.
다소 생소해서 거부감이 들 줄 알았는데.
이런 걸 받아들일 정도면 다른 컨텐츠는 쉽다.
그렇게 막장 드라마를 상영하자마자.
탁탑을 비롯한 신장들이 이곳을 찾아온 것이다.
결국 그들 모두 극장에 눌러앉았고, 반쯤 혼이 나가 입에서 침이 떨어지는 것도 모른 채 영상에 몰두하고 있었다.
‘설마 누가 또 오는 건 아니겠지?’
아마도 올 가능성이 높다.
검선을 잡으러 보낸 신장들이 감감무소식인데 가만있을 리 있나?
그리고 그 예상은 어김없이 들어맞았다.
“···이, 이게 뭔가?”
천선(天仙) 종리 선인이었다.
이번에도 다를 바 없었다.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까맣게 잊어버린 듯한 천선 종리 선인.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음흉하게 웃고 있는 검선 동빈 선인.
‘끝났구나.’
종리 선인도 검선을 잡으러 왔다가 도리어 잡혀버렸다.
※ ※ ※
태주는 간만에 호텔로 왔다.
어제 합빈 교도소에서 마인도 잡아줬고, 공장도 순조롭게 돌아가고.
태홍 생기불끈과 새살쑥쑥이 만족할 만한 품질로 생산되고 있었다.
심지어 식약청에서도 연락이 왔다.
생기불끈 인체실험을 진행하겠다고.
샘플 500병 보내달라는 걸 1,000병 주라고 지시했다.
생각보다 빠르다.
생기불끈이 건강음료라서 그런 듯.
실제로 새살쑥쑥은 여전히 동물 실험 중이었고.
‘이제 슬슬 구례로 가자.’
빨리 가고 싶다.
백홍표도 만나 신선주 한잔 같이 마시고 싶다.
고아원 아이들도 그립다.
창훈이와 순철이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또 수련했는지 확인하고 싶다.
하지만 그전에 완전하게 마무리 짓고 가야지.
백서연이 백두 그룹에 보낼 제안서와 계약서를 준비하고 있었다.
내일이나 모레쯤 정욱철 회장을 만나서 대화를 나눠 볼 생각.
‘좀 씻을까?’
태주는 간단하게 샤워를 한 후, 룸서비스를 시켰다.
그리고 식사를 해결하고 잠시 쉬던 참에.
딩동.
호텔 룸 벨이 울렸다.
누구지?
아마 백서연 아니면 각성 장교 수행원들이겠지.
하지만,
‘어?’
호텔 비디오폰 화면에 나타난 한 명의 노인.
흰색 정장에, 흰색 중절모, 새하얀 백발과 은빛 수염, 흰색의 얼굴 각성 문양.
이건 뭐, 백색 성애자인가?
보기만 해도 평범하지 않아 보인다.
“누구십니까?”
- 자네가 태홍 바이오 김태주 회장인가?
“그렇습니다만.”
- 난 황실에서 나온 궁정 비서관 금수호라고 하네.
“···아!”
태주도 이름을 들어봤다.
황제의 가장 최측근이자, 황제 다음으로 강하다는 각성자.
어쩐 일이지?
아무튼 문은 열어줘야 한다.
누구와는 다르게 정식으로 초인종을 누르고 나타났으니까.
철컥.
띠리링!
태주는 비디오폰에서 방문 열림 단추를 눌렀다.
천천히 안으로 들어오는 금수호.
처음엔 웃으며 들어왔다.
그런데 태주를 보자마자 정색하면서 우뚝 멈춰 섰다.
‘왜 저래? 내가 뭘 잘못했나?’
태주도 금수호를 바라봤다.
순간 든 생각.
‘···강하네.’
확실히 남다른 사람이다.
솔직히 그동안 시스템 각성자들을 살짝 무시한 측면이 있었다.
이정학부터 시작해서 오진형과 사단장들, 그리고 이두창, 이기언이 데리고 온 마스터까지.
그들은 마스터라는 등급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약했다.
하지만 금수호 비서관은 다르다.
그는 진짜다.
마스터라 불릴 자격이 있었다.
일대일로 붙으면 승리를 장담하지 못할 정도로.
혼원무상독령공이 8성에 올랐는데도 말이다.
한편 금수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방에 들어와서 안색을 굳히고 멈춰선 이유.
그동안 말로만 들었다.
실제로 본 건 오늘이 처음.
그가 절대 적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이건 본능에서 오는 두려움
더는 다가가면 안 될 것 같다.
지금 이 거리도 안심할 수 없다.
더 멀찍이 떨어져야 한다.
반면 태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렇게 자신을 경계하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호적인 의미로 금수호 비서관을 향해서 양손을 들었는데.
“저기···,”
바로 그때!
휘릿!
파파팟!
섬전같은 몸놀림으로 어느새 호텔 현관문까지 물러난 금수호.
움찔!
태주도 덩달아 놀랐다.
갑작스러운 금수호의 몸놀림에 무한공간에서 비도를 꺼낼 뻔했다.
이게 뭐 하자는 짓인지.
“···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요?”
“나도 알아. 하지만 몸이 제멋대로 움직여서.”
금수호도 뻘쭘한 듯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일단 들어와 앉으시죠.”
“아니야. 이 거리가 딱 좋아. 여기서 이야기하겠네.”
금수호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내가 온 용건은 황명, 아니, 폐하의 친서니까 부담가질 필요 없이 거기서 듣게.”
황제가 보낸 편지?
“···어음,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나요?”
“천만에! 비공식적인 문서인데,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폐하를 직접 뵐 때나 예를 갖추면 되는 거고.”
무슨 내용일까?
금수호는 황제의 편지를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 잡으러 왔다가 도리어 잡혀버렸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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