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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의 선물 >
서로의 경지를 알아보는 것도 어느 정도 수준이 맞아야 하는 법이다.
실력 차가 너무 나면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보다 위인지, 아래인지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래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달려들다가, 쳐발린 후에야 ‘아! 나보다 강한 사람이었나.’ 하면서 뒤늦은 후회를 하는 거고.
지금까지 태주와 갈등을 일으켰던 마스터들이 거의 그런 식.
마스터라며 으스대고 덤벼댔지만 죽거나, 죽을 뻔하거나, 한방에 정신을 잃었다.
반면 태주와 금수호, 두 사람은 서로의 무서움을 안다.
금수호는 태주를 보자마자 알 수 없는 위압감에 몸이 위축됐다.
사실 그가 평범한 제약회사 사장이 아니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지리산 마수 토벌 작전에서 어떤 활약을 했다는 것도.
하지만 금수호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김태주에게서 느껴지는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와 위엄, 마치 황제 폐하 앞에 선 기분.
이건 실력이나 재능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그의 눈빛에서 한세상 다 살아본 세월의 연륜이 엿보였다.
왜 주변 사람들이 저 젊은 김태주를 회장님, 회장님하고 부르는지 그 이유를 알겠다.
‘나이가 29살이 맞나?’
태주도 다를 바 없었다.
그도 금수호를 인정했다.
진정한 마스터.
강호 무림으로 비유하자면 10대 고수에는 살짝 못 미치지만 20대 고수엔 충분히 그 이름을 올릴 만한 실력.
그와 서로 싸워보면 깨달을 것이 많을 텐데.
정중히 청해볼까?
비무라도 한번 해보자고.
태주의 의도를 느꼈는지, 금수호는 그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황제의 서신을 읽어내려갔다.
“시, 시작하겠네.”
- 해독제를 만들 때부터 짐은 그대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또한 마인을 처치해 제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구한 노고에도 항상 감사하고 있다.
- 지리산 마수 토벌에서의 그대의 공도 잘 안다. 당장이라도 그대를 황궁으로 입궁시켜 큰 상을 내리고 싶다만, 요즘 황궁이 시끄러운지라, 굳이 입궁을 권하고 싶진 않다.
황궁이 시끄럽다고?
왜?
황위 계승전이라도 벌어지나?
- 그대에게 짐의 불민한 자식들이 접근할지도 모른다. 간곡하게 부탁하니 절대 누구의 편도 들지 말라.
그러자 부연 설명을 하는 금수호 비서관.
“겉모습은 중년처럼 보이시지만 폐하께선 나이가 많으시네. 각성 마스터라고 영원히 사시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황위 계승에 대한 투쟁이 암중에서 펼쳐지고 있지.”
맞구나.
“계승 적격자이신 황태자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다른 황자들이 인정하려 할까? 다들 워낙 잘나신 분들이라, 외가 쪽도 말할 것도 없고.”
최강의 각성자라 칭해지는 황제도 자식만은 어쩔 수 없나 보다.
황제는 자식들이 많다.
정실과 후궁들에게서 얻은 황자와 황녀들, 혈통 탓인지 그들 모두 재능이 뛰어났다.
“일단은 황태자 대 다른 황자들의 대결 구도이지만 다들 서로의 약점만 노리고 있지. 각자 스폰서나 돈줄을 구해서 세력을 확대하려는 건 기본이고.”
태주는 돈이 많다.
명성도 얻었고.
이번 신약이 성공하면 제국 10대 부자 반열에 오를 수도.
그래서 자칫하면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고 오황자님과의 관계를 끊을 필요는 없네. 그건 어쩔 수 없는 우연이었으니까.”
“···.”
태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황자와도 거리를 둬야 한다.
아예 황위 계승전에서 멀찌감치 떨어지자.
“쯧쯧, 내가 그렇게 결혼하지 마시라고 간언을 드렸는데도, 그만 신하들의 꼬임에 넘어가셔서···,”
“···.”
거의 반역에 가까운 발언이지만···, 뭐, 황제의 최측근 금수호니까.
“날 보게! 혼자 사니 얼마나 편한가? 그러니 자네도 결혼하지 마. 험험.”
금수호의 낭독은 계속 이어졌다.
- 내가 그대를 입궁시키지 않은 건, 쓸데없는 구설수 때문에 그대의 행보가 방해받지 않을까 해서다. 그래서 비밀리에 짐의 충직한 비서관을 대신 보내 치하를 내리는 바이다.
- 제국 정보원을 도와 마인을 잡아준 것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방심하지 말라. 마인을 색출할 때 조심, 또 조심하라.
- 지금까지 잡아 왔던 마인들과는 결이 다른 놈들을 만날지도 모른다. 1세대 각성자들도 아직 살아있는데, 1세대 마인이라고 없을까? 만나게 되면 체면 생각 말고 도망쳐라.
“나도 하고 싶은 말이었어. 물론 자네의 실력은 잘 알지만 1세대 마인은 정말로 위험하네.”
각성자가 처음 출현했던 시기는 약 200년 전.
그들을 1세대라고 부른다.
각성자의 수명은 비교적 길다.
마스터라면 200년 정도는 충분히 살 수 있다.
만약 1세대 각성 마스터처럼 200년이 지나도 살아남은 마인들이 있다면?
마인의 등급이 눈앞에 있는 금수호 비서관과 비슷하거나 황제와 맞먹는다면?
황제의 말대로 조심하는 게 맞다.
하지만 독령(毒靈)의 경지에 오르면 그럴 필요성조차 사라지고.
- 그대의 성공이 곧 제국의 성공이 될 거라 믿는다. 만약 어려운 일이 있으면 금수호에게 도움을 요청하라. 그가 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
그리고 편지의 내용이 끝이 났다.
“자, 황제 폐하의 친서는 다 읽었네.”
금수호는 손에서 불을 일으켜 화르륵! 종이를 태워버리며 말했다.
“이젠 황제 폐하께서 내리시는 상을 줄 차례군.”
상?
뭘까?
금수호는 허리띠에 연결되어 있던 작은 가죽가방을 풀어냈다.
익숙한 가방이었다.
지리산 마수 토벌 당시 오진형 군단장이 황실의 지원을 받았다며 가지고 다녔던 그 가방.
설마?
“혹시 아공간 가방을 포상으로 내리시는 겁니까?”
그러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황하는 금수호.
“···미안하지만 이건 내, 내 거라서, 가, 가지고 시, 싶나?”
목소리까지 떨려왔다.
“달라고 하면 주실 건가요?”
“어음, 자, 자네 공이 저, 적지 않으니, 정 원한다면.”
줄 순 있지만 주기는 싫은 모양.
뭐, 무한공간이 있는데 굳이!
“됐습니다. 다음에 돈 벌면 하나 사죠.”
“하하, 그, 그렇지. 곧 사게 될 거라고 믿네.”
그러더니 아공간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호텔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 이건?”
유엽비도였다.
지금까지 사용했던 것과 모양과 크기가 똑같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아공간 가방에서 계속해서 유엽비도를 끄집어냈다.
저벅저벅,
태주가 가까이 다가가자 금수호는 흠칫하면서 놀랐지만 계속 비도를 꺼내면서 말했다.
“자네가 지리산 마수 토벌 당시 사용했던 단검을 입수해서 그것과 똑같은 모양으로 황실 소속 각성 장인이 만들어낸 명품이야.”
“···명품이라 부를 만하네요.”
각성자가 시스템에 의해서 배우는 스킬은 전투 관련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제작에 관련된 스킬도 있다.
아공간 가방과 마법 물품을 제작했다고 추정되는 스킬 각성자가 그 예.
흔히 각성 장인이라고 하는데, 그들이 만들어낸 무구와 장비들은 일반 장인들이 만들어낸 것과 차원이 다르다.
“모두 200자루를 준비했네. 엘리트 마나 결정체와 강철 깃, 거대 도마뱀 발톱, 마나 합금 강철 등의 재료가 들어갔지. 한마디로 엄청 비싸단 말이야.”
들어간 재료도 귀하고 개수도 많다.
한 자루당 가격으로 치면 얼마나 할까?
또한 각성 장인이 만든 장비라 평범할 리도 없고.
태주는 황제가 마음에 들었다.
상당히 통이 큰 양반이다.
“비도 하나하나마다 [날카로움] 옵션과 [파괴되지 않음] 옵션이 걸려 있거든. 웬만하면 잃어버리지 말게.”
태주는 그중 하나를 집어 손으로 집어 표면을 쓸어보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
확실히 구례 장인이 만든 것보다 품질이 뛰어나다.
“하하하, 마음에 드나?”
“폐하께 감사하다고 대신 전해주십시오.”
대박이다.
아공간 가방보다 이게 더 좋다.
“내 선물은 따로 있네. ···아공간 가방은 아니고. 자네가 하는 사업에 도움을 주지.”
“도움이라면?”
“이기언의 방해 공작은 더 이상 없을 거야. 마음껏 뜻을 펼치게나.”
“···괜찮은데요.”
“사양하지 않아도 돼. 이미 시작되고 있을 테니까.”
빈말이 아니었다.
진짜 괜찮았다.
이기언 따위가 뭐라고?
곧 병원에 입원할 놈인데.
※ ※ ※
미리내 그룹.
이기언 회장은 집무실에서 연신 전화를 돌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전화의 목적은 태홍 바이오가 식약청 판매 허가를 받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
“그래, 박국장, 나도 알지. 식약청 로비야 불가능하다는 걸, 하지만 내 요청은 신약을 통과시키라는 게 아니라 막아달라는 거지 않나?”
이기언이 지금 전화하는 사람은 행정부 소속의 고위 공무원, 식약청은 아니지만 식약청장의 동문 후배였다.
“여긴 자유도시가 아니네. 구례 촌구석 제약회사가 감히 뉴서울에서 검증되지도 않은 약품을 팔면 안 되는 것이야.”
전화한 사람은 한 명이 아니었다.
이기언은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인맥을 총동원하고 있었다.
“허허, 고마워. 언제 밥 한 끼 하지. 참! 자네 아들은 회사 잘 다니고 있네. 어찌나 유능한지 밑에서 빨리 승진시키라고 성화야.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거고.”
또 한 통화 끝냈다.
‘후우,’
이기언은 잠시 숨을 돌리며 탁자에 놓인 따뜻한 차 한잔을 마셨다.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오른다.
김태주, 그놈에게 당한 망신.
‘뭐?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덤비라고? 내 그룹은 무사하지 못할 거라니!’
심지어 리더스 클럽에서 퇴출당했다.
‘이고르, 그놈도···,’
천배 만배 복수해줄 생각.
그래서 자신이 알고 지내던 클럽 회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클럽 탈퇴를 종용했다.
창공 길드 한대현 마스터도 마찬가지.
각성도 안 한 놈에게 한방에 나가떨어졌다.
이용 가치가 없어져 길드 후원을 중단했다.
‘내 온 힘을 다해서라도 모조리 죽여줄 테다.’
김태주, 그놈을 효과적으로 처리하려면 본진을 박살 내야 한다.
이미 구례로 사람을 보냈다.
구례 자치위원회를 장악해서 놈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 생각.
백두 그룹에도 경고를 보냈다.
만약 김태주를 도와주기라도 하면 전면전을 각오하라고.
같이 죽는 한이 있어도 백두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그야말로 총력전이었다.
지금까지 한 사람을 파묻기 위해 이렇게 심혈을 기울였던 적이 있었던가?
그것도 시골에서 상경한 듣보잡 촌놈을 말이다.
이미 게임이 끝났다고 보면 된다.
놈은 절대 자신을 이길 수 없다.
바로 그 순간!
똑똑,
노크와 함께 들어오는 비서.
“무슨 일이야?”
“제국 정보원에서 남일복 원장이 찾아왔습니다. 회장님을 뵙고 싶다고.”
“제정원 원장이?”
왜 왔지?
아들과 관련된 문제인가?
아들이 실종되고 경찰에 신고했을 때, 관할 경찰 서장이 자신에게 연락한 바 있었다.
실종 사건이 일어나면 제정원이 개입할지도 모른다고.
알았다고 했다.
원래 매뉴얼이 그렇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또 혹시 모르지 않나?
제정원에서 수사하면 범인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설마, 단서를 잡은 건가?’
그럴 수도 있다.
이기언은 김태주가 자신의 아들을 죽였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럼 증거를 가지고 왔을지도 모를 일.
이기언은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들여보내.”
“알겠습니다.”
똑똑,
다시 노크와 함께 열리는 문.
제국 정보원 원장 남일복이 자신의 각성자 수행원과 함께 집무실로 들어왔다.
“아이고, 남원장님, 매우 바쁘신 분이 어쩐 일로 절 만나러 오셨습니까?”
“바쁘기는요. 일은 밑에 놈들이 다 하는데.”
제국 정보원 남일복은 황궁 내 어떤 파벌에도 속하지 않은 금수호 비서관의 심복.
먼저 악수를 나누고.
으레 하는 인사말을 서로 건넨 후에.
“요즘 회장님 아주 바쁘시더군요.”
“그래 보이시나요? 바쁜 것보다는 사라진 제 아들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려 잠을 못 이루고 있습니다. 하아, 죽었는지 살았는지.”
걱정 섞인 이기언의 말에 씨익 웃으며 말하는 제정원 원장 남일복.
“그러기에 처음부터 자식 교육을 잘하셨어야죠. 망나니처럼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다가 개망신이나 당하고.”
“···네?”
잘못 들었나?
“망신을 당했으면 거기서 멈출 일이지, 경쟁 업체 뉴서울 진출 막겠다고 특허청 공무원 매수나 하고, 그나저나 어디 숨었는지 몰라, 진짜 뒈진 건가?”
뭐지?
아무리 제정원 원장이라도 자신의 면전에서 저런 말을···,
“대체 무슨? 남원장! 지금 정신이 나갔소?”
하지만 남일복 원장의 눈빛은 싸늘했다.
“어이! 이기언이!”
“뭐, 뭐라고? 가, 감히···,”
“닥쳐! 씨발 놈아! 클럽에서도 쫓겨난 주제에.”
“···.”
갑자기 터져 나온 험한 말투에 이기언은 대꾸도 하지 못했다.
“지금 태홍 바이오 신약, 식약청 판매 허가 방해하려고 이쪽저쪽에 전화 돌리고 있는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어, 어떻게?”
그건 비서도 모르는 일이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다.
일대일 전화 통화로만 대화를 나눴지.
···가만!
“호, 혹시 내 전화를 도청한 거요?”
“도청했다면 어쩔 건데? 좆도 안 되는 새끼가, 어디서 수작질이야?”
“어어···,”
남일복 원장의 폭언은 계속됐다.
“나대지 마라! 태홍 바이오 김태주 회장이 뭘 하든, 넌 근처에도 가지 말고 손가락만 빨고 있으면 돼.”
“기, 김태주? 지금 김태주 때문에···,”
“당장 공무원 매수죄로 체포 안 하는 걸 다행으로 알아. 하지만 앞으로도 이런 비열한 짓거리로 김태주 회장을 괴롭히면···, 휠체어 타고 검찰 출두하는 게 차라리 좋겠다는 생각을 들게 해주지.”
이기언은 도무지 영문을 몰랐다.
김태주가 제국 정보원까지 움직일 수 있는 놈이었나?
“날 만난 걸 행운으로 여겨. 헛짓할 거면 계속하든가, 그럼 황궁의 금 비서관님이 널 직접 찾아오실 거다.”
정말 모르겠다.
군부에다, 황자, 리더스 클럽, 백두 그룹 정욱철, 제정원 원장, 황궁비서관 금수호까지?
남들은 단 하나도 맺기 어려운 인맥을,
대체 김태주, 그놈이 누구길래?
< 황제의 선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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