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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궁(2) >
황제의 부인은 3명.
후사를 보기로 결심했을 때 3명의 황후를 동시에 맞아들였다.
본처와 첩의 구분은 없다.
모두가 다 같은 황후의 위치.
마나 적합자들이었고.
첫 번째 부인 최황후는 아들 둘만 낳았다.
연년생으로 황태자와 이황자, 어렸을 때부터 앙숙이더니 다 커서도 싸운다.
두 번째 부인 염황후는 아들 하나와 딸 둘.
삼황자와 일황녀, 삼황녀.
세 번째 부인 주황후는 아들 둘과 딸 하나.
사황자와 오 황자, 그리고 이황녀.
오늘 혼다 미쯔이와 김웅방은 두 번째 부인 염황후를 만나기 위해 2번 게이트 앞에 있었다.
둘만 온 것이 아니다.
김웅방의 장인이자 미쯔이 부인의 아버지인 혼다 카즈오도 함께 왔다.
염황후에게 제국 내 일본계 세력들이 줄을 대고 있었으니까.
이미 사망한 염황후의 아버지는 염씨로 창씨개명, 아니 성본 변경을 한 일본계 장성이었다.
황제는 민족 통합정책의 일환으로 그녀를 황후로 받아들였다.
혼다 카즈오와 미쯔이 부인 일행은 염황후에게 줄을 대러 왔다.
그나마 잘 만나주지도 않는 걸 삼고초려 끝에 겨우 약속을 잡았다.
하지만 김태주는 오자마자 1번 게이트를 통해 입궁했다.
미쯔이는 아침부터 계속 기다리고 있었고,
그뿐만이 아니다.
남편 김웅방의 태도.
그가 김태주를 바라보는 눈빛.
김태주를 향한 애틋한 감정.
그것이 혼다 미쯔이는 미치게 만들었다.
“억울한 모양이구나.”
“···아뇨, 그냥 화가 나요.”
어느새 다가와 그녀에게 슬쩍 말을 건네는 아버지 혼다 카즈오.
“그럴 만도 하지, 우린 염황후에게 줄을 대려고 2번 게이트에서 이름이 불리길 목 빠지게 기다리는 중인데 저놈은 황제와 독대를 하려고 들어갔으니.”
왠지 약 올리는 듯한 목소리.
“김태주가 황제와 만나서 무슨 이야길 나눌지 궁금하구나.”
카즈오는 딸이 자신의 말을 듣든 말든 이야기를 혼자 이어나갔다.
“다 가진 놈이야. 돈도 많이 벌었을 테고, 잘나가는 기업체도 있고, 따르는 사람도 있을 테고···, 하지만 놈이 가지지 못한 것이 하나 있지.”
그제서야 아버지를 보며 입을 여는 미쯔이.
“뭐죠? 놈이 가지지 못한 게?”
“땅.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할 수 있는 기반.”
“···으음.”
미쯔이는 아버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챘다.
“이, 이미 쫓겨난 놈이에요. 남편과는 남남이고.”
“호적이야 법원에 재심을 걸어 복원하면 되지. ”
“그건 끝난 문제라 되돌릴 수 없어요. ”
“김태주가 황제에게 부탁하면 넌 막을 수나 있고? 놈은 돈이 많다. 재판하게 되면 반드시 이길 거야. 판사들이 누구 편을 들까?”
“···.”
순간!
“규슈 영지 혼다 카즈오 중장님 일행은 2번 게이트를 통해 입궁하시길 바랍니다.”
카즈오는 피식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잘 생각해보아라. 허나 시간이 그리 많지 않구나.”
사실 혼다 카즈오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김태주가 황제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든 말이다.
황제의 상태가 어떤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안다.
이번 흑악지룡 북상 사태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황제.
병환이 매우 깊다는 소문이 있다.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김웅방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다 해도 신경 쓸 여유조차 없을 것이다.
황제가 죽으면 제국은 황위 계승의 진흙탕 속으로 빠져들게 될 터, 그때가 바로 규슈 영지를 떠나 파주에 정착할 기회다.
※ ※ ※
태주는 비서관의 안내를 받으며 1번 게이트를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를 만났다.
하지만 무덤덤했다.
원망 같은 건 조금도 없다.
도리어 아버지의 행복을 빌었다.
특별한 것이 있나?
부모와 인연을 끊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다만 시간이 아주 많이 흘렀을 때, 그래서 자신의 감정이 희석되었을 때, 한번은 찾아갈지도 모르지.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독립한 이상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먼저 챙겨야 한다.
그럴 목적으로 황궁까지 왔고.
황제에 대한 정보는 미리 조사해 왔다.
200살로 추정되는 황제의 나이.
그럼에도 겉모습은 40대 중년처럼 보인단다.
또한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정보도 확보했다.
리더스 클럽의 이고르 바라노프와의 전화 통화로.
- 황제 폐하께서 요 몇 년 동안 공식 석상에 나타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여러 추측들이 난무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신빙성 있는 건 폐하께서 투병 중이라는 정보입니다.
투병이라, 그랜드마스터가? 대체 무슨 병이길래.
- 병명은 저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황태자와 황자, 그리고 외척들의 움직임을 보면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고르는 황위 다툼을 언급하고 있었다.
- 황제 폐하가 건재했다면 서로 싸울 일도 없었겠죠. 벌써 클럽 내부에서도 편이 갈라졌습니다.
만나면 알게 되겠지.
진짜 병중인지, 아니면 그런 척하는 건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엘리베이터를 타겠습니다.”
황궁 타워 최상층에 올라갔다.
꼬불꼬불한 복도를 지나 정면을 가로막은 철문.
곧 황제와 만난다.
앞에 다가서자 문이 스르륵 저절로 열렸다.
안에는 사방이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방.
“다 왔습니다. 전 여기까지 옵니다.”
“네? 다 왔다니···.”
태주가 안으로 들어가자 바깥문을 닫고 돌아가는 서필명.
동시에.
지이이이잉!
벽면이 열렸다.
그러자 나타나는 벽면 너머 풍경.
수많은 의료기기들이 위치한 중앙 침상에서 상반신만 일으키고 있는 중년 남자, 그리고 그 옆을 지키고 선 금수호 비서관.
‘보안 한번 철저하네.’
황제의 거처니 오죽할까?
단순한 방이 아니었다.
일종의 중환자실 느낌이었다.
‘소문이 맞았구나.’
금수호가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 폐하께 예를 갖추게. 당장 무릎을 꿇고···,”
“아아!”
황제가 금수호를 제지했다.
“됐네. 자네도 안 하는 짓을 왜 남에게 강요하나?”
“저도 처음엔 납작 엎드렸습니다만?”
“지금은 안 하잖아.”
“아니, 김회장은 초면인데 왜 불공평하게···,”
황제는 금수호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손을 들어 태주를 불렀다.
“쿨럭쿨럭, 거, 거기 엉거주춤 서 있지 말고 이리 가까이 오게.”
“네.”
“몸이 좋지 않아서 짧게 이야기하겠다.”
잠시 숨을 가다듬더니.
“금비서관에게 이야길 들었겠지만, 짐은 그대에게 구례 종신 시장이라는 직위를 부여하고자 한다. 부담 가질 필요 없다. 영지 하사와 똑같은···,”
만나자마자 본론부터 꺼내는 황제.
하지만 태주에겐 황제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조금 전부터 계속 풍겨오는 역한 냄새.
오직 자신만 맡을 수 있는, 추악하고 끈적한, 마기의 악취.
‘설마 황제가···,’
아니다.
마인에게서 나는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정상적인 마나도 함께 섞여 있다.
‘강제로 주입된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다.
병상에 누운 이유이기도 할 테고.
황제는 말을 늘어놓다 말고 태주를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불편한 거라도 있나? 내 말에 집중하지도 않는 것 같고.”
“아! 죄송합니다.”
구례 종신 시장 용건으로 황제를 알현하는 입장이지만.
‘확인은 해보자.’
할 건 해야지.
“폐하. 외람되오나···,”
“응? 왜 그러는가?”
“하나만 여쭈어봐도 될는지.”
“어려워 말고 편하게 물어보라.”
“혹시 병환의 이유가 마인 때문입니까?”
흠칫 놀라는 황제와 금수호.
“···어, 어떻게?”
“폐하에게서 마기의 냄새가 납니다.”
“허어, 냄새라···, 말을 들었지만, 그럼 날 마인으로 의심하진 않았나?”
“그 정도는 구별합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인했다.
“맞다. 마인과 싸우다가 일격을 당했다. 천둥벌거숭이처럼 세상 높은 줄 모르고 날뛰다가 큰코다친 셈이지.”
솔직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타공인 제국 최강자인 황제를 이렇게 만들 실력의 마인이 존재한다고?
“내 몸 안에 놈이 남긴 마기의 말뚝이 있다. 마나 로드와 심장, 그리고 이 머릿속에 박혀있지. 시한폭탄 같은 거랄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자신이 직접 이기언을 처리할 때 썼던 방식이니까.
“짐이 그대에게 편지를 보내 경고한 거 기억하는가?”
“네.”
“자네가 얼마 전에 합빈 교도소에서 마인을 검거해 준 건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조심, 또 조심해야 해야 한다. 마인들을 만만히 보지 마라. 난 제국의 인재를 잃고 싶지 않아.”
“···.”
“신경 쓸 필요 없다. 그대는 내 병 때문에 온 것이 아니다.”
황제는 생각보다 좋은 사람 같다.
지배자의 풍모가 엿보였다.
‘고쳐줄까?’
그가 건재하면 제국이 안정될 터.
‘혼원무상독령공으로 밀어버리면···,’
황제의 맥문을 잡아서 마나 로드로 독기를 주입해 마기의 말뚝을 강제로 부수는 방법.
하지만 그러기엔 황제의 몸이 너무 쇠약하다.
강력한 힘으로 파괴해야 하는데, 그걸 견딜 수 있을지나 모르겠다.
말뚝을 없애는 방법은 두 가지.
스스로의 능력으로 해소하거나, 아니면 마나를 남긴 놈이 회수해가거나.
‘하나가 더 있긴 하지만···,’
사실 가장 확실한 방법.
‘가지고 오길 잘했네.’
아마 오늘 이후로 황제는 달라질 것이다.
황제는 화제를 돌렸다.
“어떤가? 구례 종신 시장을 받아들일 텐가? 아직 답을 듣지 못했다.”
맞다.
지금까지도 못 정했다.
책임이 무거워지는 게 부담스럽기도 하고, 반면 제2의 고향이 된 구례를 제국 최고의 도시로 성장시키고 싶은 마음도 있긴 하고.
“제 능력이 구례라는 큰 도시를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됩니다.”
“하하하, 그대면 충분하지. 지나친 겸손은 위선이다. 설사 못 미친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대는 인복이 있는 사람이니까.”
뭐, 인복으로 따지면 어디 가서 꿀리진 않지.
“짐을 보라. 몇 년 동안 이곳에만 처박혀있는데도 제국은 평화롭게 돌아가고 있다. 사람만 잘 쓰면 돼. 그대는 정책의 방향성만 제시해도 충분하다.”
황제의 말에 태주는 결정을 내렸다.
“네, 받아들이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힘을 가지자.
온갖 풍파가 밀려와도 꿈쩍하지 않고 당당히 버티는 힘을.
“곧 승전식 행사가 열릴 것이다. 자네에게도 곧 연락이 갈 테고. 짐도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참석할 테니, 그때 시장직을 제수하도록 하지.”
“황공하옵니다.”
태주는 고개를 숙이고 나서 가지고 온 가방을 탁자 위에 올렸다.
“여기···,”
“이건 뭔가?”
“진상품입니다. 처음 폐하를 뵙게 됐는데, 빈손으로 올 수는 없죠.”
“···혹시 고라니 고기? 그렇지 않아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다. 그거 때문에 입맛이 돌아서 기운을 차렸거든.”
“고라니 고기는 아닙니다. 더 좋은 겁니다. 두 개 넣었습니다. 금비서님과 나눠 드십시오.”
“응?”
“정말 귀한 거라서···, 억만금을 줘도 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폐하의 병세에 도움이 될지도···,”
“대체 뭐길래?”
아무튼 용건은 끝났다.
간단하게 서로 덕담을 나눈 후, 금비서가 밖으로 태주를 안내했다.
“폐하의 상태에 대해선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네. 누가 물어보면 여전히 건재하시다고 말하면 돼.”
“걱정하지 마십시오. 금비서관님.”
태주는 황제의 처소를 빠져나갔다.
금수호는 황제에게 슬쩍 물었다.
“어떠십니까?”
“듣던 대로 대단해. 보기만 했는데도 알 것 같군. 내 상태가 좋을 때 붙었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겠어.”
“어떻게 폐하께선 싸우는 생각밖에 안 하십니까? 그 때문에 이런 고초를 겪고 계시는 데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방이나 열어봐.”
금수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가방을 열었다.
그러자 방안을 가득 채우는 기막힌 향기.
“뭔가?”
“복숭아 같습니다. 크기도 매우 크고.”
“···복숭아?”
살짝 실망한 표정의 황제.
“생각보다 김회장 통이 작군. 난 영약이라도 주는 줄 알았지.”
“쯧쯧, 이번 전쟁으로 돈도 갈퀴로 끌어모았다면서 고작···,”
“그래도 향기는 좋군. 이리 가져오게.”
금수호는 가방을 들어 침상에 기대고 있는 황제의 앞에 놓았다.
“오! 이렇게 큼지막하다니, 자네도 하나 먹어.”
“이따 갈 때 가져가겠습니다.”
별 감흥은 없었다.
귀한 거라고 했지만 그래봤자 복숭아다.
‘뭐, 가지고 온 성의를 봐서···,’
황제는 복숭아 2개 중 하나를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으적,
입안에서 터지는 과즙.
후르릅.
황제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한 번 더 씹었다.
으적, 우물우물.
이제부터는 아예 입을 떼지 않았다.
으적, 으적, 으적···,
복숭아 먹방의 현장.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꿀꺽,
지켜보고 있던 금수호의 입에도 군침이 고인다.
‘하나는 내 거라고 했지?’
슬쩍 손을 뻗어 가방의 손잡이를 잡는 금수호.
하지만 그 순간!
덥석!
황제가 복숭아를 먹다 말고 금수호의 손목을 잡았다.
“자네 지금 뭐 하고 있나?”
“하나는 제 거라서, 좀 전에도 먹어보라고 하셨잖습니까?”
“내가 언제?”
“···네?”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황제.
“뭔가? 그 눈빛은? 짐을 도둑놈 취급하는 눈치인데.”
“기, 김회장도 나눠 먹으라고···,”
“난 못 들었네.”
“···.”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하지만 황제는 이 복숭아가 왜 귀한지 깨달은 후였다.
“내가 자네보다 나이도 많고, 몸도 온전치 않은데, 이 귀한 걸 더 구해주진 못할망정 빼앗아 먹으려고 해? 김회장도 내게 도움이 될 거라 말했지 않은가!”
“아, 아니 그래도···,”
“하아, 내가 너무 오래 살았어. 그때 죽었어야 했는데, 살아서 민폐만 끼치고.”
“···다 드십시오.”
그제서야 만족한 미소의 황제.
어느새 한 개를 다 해치우고, 남은 하나마저도 손에 들었다.
으적, 으적, 으적···,
결국 금수호가 한마디 했다.
“저어, 하, 한 입만···,”
물론 황제는 들은 체도 안 했다.
금수호와는 오랫동안 우정을 나눈 사이지만 이건 도저히 양보할 수 없었다.
이 씨도 없는 복숭아는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한입 베어 물자마자 온몸으로 퍼지는 상서로운 기운.
‘영약 먹었을 때와는 비교가 안 돼.’
몇 년 동안의 투병 생활에서 오늘처럼 몸이 가뿐한 적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떨치고 일어날 수 있을 것 같다.
‘허어, 벌써 다 먹었나?’
황제는 모를 것이다.
이것이 선도(仙桃)라는 사실을.
선기(仙氣)를 담고 있는 선계의 과일이란 것을.
아무리 미약하다 해도 선기는 부정하고 삿된 기운을 물리치는 특성이 있다.
혼탁할 수밖에 없는 마인의 마나와는 천적 관계.
그래서 황제의 마나 로드에 단단히 틀어박혀 있던 마기의 말뚝에,
찌직!
미세한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 입궁(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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