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입궁 이후(2) >
구례에서의 일상은 변함없었다.
간만의 휴식이다.
뉴서울 지점도 폭발적인 매출 성장에 힘입어 안정적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게다가 전쟁도 끝났겠다, 제정원에서도 마인 수사 요청이 오지 않고.
그저 일이삼백이와 침대에서 뒹굴다가, 배고프면 선도 하나 꺼내 먹고, 심심하면 백화점이나 마트에 가서 독선 당군악에게 선물할 물건을 사서 무한공간에 쟁여뒀다.
선도는 하루에 하나씩 꼭 먹을 생각.
희미하지만 선기가 점점 조금씩 늘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무한공간이 미세하게나마 넓어지고 있었고.
슬슬 신약 개발을 할 시기.
이미 생각해 둔 약이 있었다.
그전부터 염두에 뒀다.
바로 마나 거부증 치료제.
마음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얼마 전까진 마나 거부자였는데.
하지만 태주로서도 매우 난이도가 높아서 고민만 하고 있던 차였다.
왜 어렵냐고 하면 마나 거부증이 선천성 질병이기 때문이다.
강호 무림에서도 ‘절맥증’이라고 부르는 증상이 있다.
거기서도 고치기 매우 어려운 병이다.
인위적인 방법으로 혈맥을 타통시키고, 벌모세수를 이루면 낫는다지만 그게 어디 쉽나?
절맥증은 혈맥이 막혀 기의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아 시름시름 앓다가 20 초반을 넘기지 못하고 단명한다.
여기까지 보면 마나 거부증과 비슷하지만 서로 본질적으로 다르다.
절맥증은 기의 축기와 순환이 안 되는 것이고, 마나 거부증은 아예 마나 자체가 독으로 작용한다.
즉 절맥증보다 치료하기 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마리는 잡았다.
선도?
그건 안된다.
제국만 해도 마나 거부자 숫자가 얼만데?
최소로 잡아도 200만, 혹은 그 이상.
그리고 선도가 마나 거부자에 효과가 있을지도 불확실하고.
그렇다면?
성공적으로 마나 거부증을 극복한 사람을 사례로 삼아, 어떻게 고쳤는지 들여다보면 된다.
그게 누굴까?
여기 있지 않나.
태홍 바이오 회장 김태주.
태주는 독으로 마나 거부증을 극복했다.
물론 혼원무상독령공이란 절세 신공이 있었기에 가능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독이 자신의 체질을 변화시켰다.
답은 독에 있다.
해독제가 아니라 독약을 만들어보자.
독을 이용해 마나 거부자들의 체질을 개선시킨다.
그러기 위해선 더 많은 독이 필요하다.
전엔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독 말이다.
바닷가로 가서 싱싱한 복어알을 듬뿍 넣어 알탕도 끓여 먹고, 온갖 종류의 뱀을 잡아서 팔뚝에 독니를 박아넣어 보기도 하고, 지리산 밀림에 가서 변종 장수말벌 집을 툭 건드려 벌침에 쏘여 보기도 하고,
‘한 번쯤은 해외로 나가봐야 하는데···,’
다른 환경에서 생성된 독물들을 맛보고 싶다.
아열대 구례보다 더 더운 찐열대 기후라든가, 아니면 사막이라든가.
전갈이나 독거미, 독개미, 각종 파충류와 양서류, 그리고 독을 가진 식물들.
해외로 가는 건 어렵지 않다.
검선의 검, 만리비검이 있으니까.
승전식 끝나고 일정을 짜보기로 하고.
그 와중에 태주는 승전식 연기 소식을 언론을 통해 들었다.
황제의 병환이 심상치 않다는 보도도.
‘뭐야? 선도 안 먹은 거야?’
아니면 선도를 먹어서 증세가 더 악화되었거나.
알아보려고 스마트폰을 든 순간 금수호 비서관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여보세요? 금비서관님.”
- 자네도 소식 들었나? 다름이 아니라···,
금수호가 태주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선도가 효험이 있다, 너무 감사하다, 완전한 회복을 위해서 잠시 시간을 가지는 중이다, 그래서 승전식을 연기했다···.
- 폐하께선 지금 마기를 몰아내느라 혼자 폐관 중이시네. 그래서 내가 대신 전화하는 걸세. 김회장, 정말 고맙네. 덕분에 마기의 말뚝을 두 개나 없앴어.
겨우 두 개?
“총 몇 개였습니까?”
- 7개. 5개밖에 안 남았네. 이젠 시간문제야.
시간이 너무 걸린다.
승전식까지 말뚝을 다 없앨 수 있으려나?
황제가 건강하다고 사람들에게 큰 소리 떵떵쳤는데.
‘거짓말한 꼴이잖아.’
그냥 차도가 있는 수준이어선 안 된다.
예전의 그 모습 그대로 돌아가야 한다.
또한 태주도 궁금했다.
건강했을 때 황제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어차피 시간문제라고 하니 기다릴 것 없이 앞당겨주자.
“흐음, 제가 먹던 술이 있는데···, 그걸 마시면 빨리 효과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선도 50개짜리 신선주.
단지에 담긴 술을 소주병에 옮겨 담았다.
그래서 나온 소주병이 여덟 병.
병당 복숭아 6개 정도의 선기가 있다고 보면 될 터.
그중에 두 병은 마셨고 백홍표 형님, 백서연 총괄경영자, 수제자인 순철이와 창훈이에게 각각 한 병씩, 지금은 두 병이 남았다.
- 술? ···그것도 혹시 귀한 건가?
“네.”
- 복숭아처럼?
“그보다 더 귀하고, 구할 수도 없어요.”
- 으, 으음···,
“드릴까요? 딱 한 병 남았거든요.”
- 사실 폐하께서 그대에게 받은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지 고민 중이었네. 그래서 선뜻 달라고 하기엔 너무 염치가 없군.
“저한테 사시면 되죠.”
- 오! 그렇군. 그럼 가격은 뭐로 치를까? 돈? 금? 보석?
“요즘 엘리트 마나 결정체가 부족하긴 한데.”
- 알겠네. 내 당장 구례로 가지.
몇 개라고 말도 안 했는데,
달랑 하나 가지고 오진 않겠지?
어디 한번 지켜보자.
금수호 비서관이 구례에 도착한 시간은 전화를 끊고 나서 3시간 후, 기차가 아니라 항공기를 이용한 것 같다.
태주는 태홍 바이오 본사에서 금수호와 만났다.
만나자마자 가지고 온 여행용 캐리어 두 개를 태주에게 건네는 금수호.
“가지고 왔네.”
“···이건?”
“황궁 비고에서 꺼내 온 거야. 일단 100개 정도, 더 가지고 오려면 장부에 기록을 남겨야 해서.”
“···.”
엘리트 마나 결정체가 무려 100개란다.
그것도 기록에도 남지 않는 물건.
마수와 투쟁하면서 영토를 넓힌 제국의 역사를 생각하면 그동안 쌓아둔 결정체의 숫자는 셀 수도 없이 엄청날 테지만.
‘···기대 이상이야.’
물론 신선주에 비하면 모자란다.
태주는 무한창고에서 미리 꺼내놓았던 신선주 한 병을 코트 주머니에서 꺼냈다.
“여기 있습니다.”
“···소주?”
“겉만 소주병입니다. 내용물은 달라요.”
“아!”
“이것도 폐하와 같이 드세요.”
“···응?”
뭔가 생각났는지 스마트폰을 꺼내는 금수호.
“다, 다시 말해줄 수 있나?”
“뭘···?”
“방금 했던 말.”
태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무슨 말을 했지? 그냥 폐하와 같이 드시라고···, 아!’
설마?
“혹시 복숭아 못 드셨어요?”
“···.”
“한 입도?”
“···.”
그런 것 같다.
아마 권력으로 눌렀겠지.
황제의 마음도 이해가 가고, 금수호 마음도 이해가 가고.
그래서 또 녹음 어플이 실행되고 있는 스마트폰에다 또박또박 말했다.
“황제 폐하, 그리고 금비서관님, 두 분 꼭 같이 드세요.”
그제야 만족한 미소의 금수호.
솔직히 측은해 보인다.
황제 다음으로 권력이 강한 사람인데.
이번엔 먹었으면 좋겠다.
※ ※ ※
파주 영지.
김웅방 준장은 밤늦게까지 집무실에서 업무에 여념이 없었다.
작은 영지이지만 할 일이 많다.
기본적인 행정업무, 세금과 재무회계, 치안, 영지 건설, 영지민 복지···,
이것 말고도 더 있다.
황제가 내리는 영지는 거의 마수 밀집지대 부근에 있다.
파주 영지도 마찬가지.
과거 DMZ라고 불리었던 지역.
그 옆에 연천 영지, 철원 영지도 DMZ 근처.
주기적으로 마수 토벌을 해서 숫자를 조절해야 한다.
이것 때문에 영지의 예산이 살살 녹는다.
토벌을 위해선 엄청난 비용이 필요하다.
각성자와 적합자를 비롯한 영지 상비군, 혹은 민간 용병 고용 비용, 무기나 장비, 전투 소모품···, 마수 부산물 판매로 일부는 충당 가능하지만 그래도 항상 부족하다.
이렇게 매년 예산에 허덕이는 이유는 파주 영지가 가진 한계 때문.
내세울 만한 수익산업이 없어 기반 시설이 부족하고, 주 세금 수입원인 영지민 숫자도 많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도 김웅방은 예산을 쥐어짜느라 잠을 잘 생각도 못 했다.
순간!
똑똑.
집무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
“아직 일이 많이 남았어요?”
파주 영지 안주인 혼다 미쯔이였다.
“곧 끝나가오. 먼저 자지 그랬소?”
“그럴 수야 있나요? 가장이 아직 일하고 있는데.”
그러면서 따끈따끈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책상 위에 올렸다.
“마나 십전대보탕이에요. 이거 마시고 하세요.”
“···흐음.”
김웅방은 미쯔이가 만들어온 보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어째 실망한 듯한 그의 표정.
“후우,”
한숨 푹 쉬더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마음을 정한 모양이군.”
“네?”
“결국 선을 넘기로 한 거요?”
“···무, 무슨 말을?”
“당신은 마스터를 너무 우습게 보는구려.”
김웅방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미쯔이가 움찔, 한걸음 물러났다.
갑자기 남편이 달라 보였다.
“이해는 하오.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에, 매번 처가에 손을 벌려야 하는 내가 한심해 보였겠지.”
“여보! 대체 왜 그러세요?”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소? 남편에게 독약을 먹이려 하다니.”
“···아.”
당황한 미쯔이.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어떻게 알았을까?
하지만.
“뭐, 뭐라고요? 내가 독살이라도 하려고 했단 말이에요?”
“그럼 이 보약 당신이 먹지 그러오? 지금 여기서.”
“···.”
미쯔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황궁 게이트에서 태주를 만난 이후로 행동이 이상하더군. 게다가 당신은 적합자 아니오. 마스터쯤 되면 적합자가 품은 살기 정도는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소.”
“오, 오해에요.”
“그럼 먹어보시오.”
“···아아아.”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 미쯔이.
다 들통났다.
“여, 여보,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나 봐요. 아, 아버지, 아버지가 시킨 일이에요.”
“알고 있소. 당연히 혼자 계획하진 않았겠지.”
“···그, 그럼?”
김웅방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 전에! 당신이 태주를 죽이려 한 사실을 모를 줄 알고? 그때는 문제 삼지 않았지. 태주도 죽지 않았고, 또 가정도 유지하고 싶었기에, 그런데 그게 내 실수였어.”
혼자 미쯔이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역시 남편은 알고 있었다.
모두 다!
빠져나갈 길이 없다.
용서를 구하는 방법 말고는.
“요, 용서해 주세요. 살아온 세월을 생각해서라도 한 번만···,”
“하아,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용서는 하나밖에 없소.”
“뭘···,”
“죽이진 않으리다. 당장 짐을 싸서 규슈로 떠나시오. 이혼장은 추후에 보내지.”
“···.”
이혼.
그 말을 듣자마자 미쯔이의 표정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날 내쫓고 태주를 다시 불러들일 생각인가요? 그놈에게 영지를 물려주려고?”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군. 태주가 이깟 영지에 신경이나 쓸 것 같소?”
“무슨···?”
이깟 영지라니.
그거 때문에 배다른 자식과 남편까지 죽이려 했는데.
“폐하께서 구례시를 태주에게 하사한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소. 이번 전쟁의 일등 공신이 되는 건 거의 확실하고.”
“마, 말도 안 되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되는 거였소. 그러나 당신과 당신 아버지의 조급증이 일을 망친 거지.”
미쯔이는 원독에 찬 눈빛으로 김웅방을 노려보며 말했다.
“끝까지 제 탓이네요. 당신 잘못은 하나도 없어요?”
“···너무 많지. 지금 이 독약을 당장 들이키고 싶을 정도로,”
“지금 그렇게 하지 그래요.”
“나 혼자만으론 부족하오. 우리 천천히 같이 말라 죽읍시다.”
급기야 화를 못 이긴 체 몸을 부들부들 떠는 미쯔이.
“두고 봐!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날, 그녀는 두 아들 김태평과 김태천을 데리고 파주 영지를 떠났다.
※ ※ ※
선계에선 검선이 펼칠 검술을 두고 토론이 벌어졌다.
“검선의 검이라면 하나밖에 없지. 천둔검법(天遁劍法)!”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검선,
하지만 당군악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대체 제정신이오? 보통 사람이 익힐 검술이 필요하다고 했잖소! 따라 할 수 있는 걸 골라야지.”
“어···, 맞네. 그럼 태극혜검?”
“그것도 탈락. 무림인 중에서도 요결을 이해하는 자가 몇이나 될까?”
“천하삼십육검은?”
“어림도 없지. 종남파 장문인이나 익히는 것을.”
“이십사수 매화검법도?”
“그보다 더 쉬운 걸로.”
도문 출신답게 검선의 입에서 도가 절세 신공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결국 채택된 건 복마검법(伏魔劍法).
앞에 말한 검법에 비해 익히기 쉽고, 무엇보다 마(魔)를 굴복시킨다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신선들이 모여 촬영할 장소를 선정했다.
역광이 들어오는 곳은 피하고, 조명이 부족하면 술법을 부려 빛을 더하고.
대본도 마련했다.
검선의 검수를 받아 당군악이 직접 썼다.
영상 촬영자는 귀곡 선인.
머리가 원체 좋은 신선이라 태블릿을 몇 번 만지작거리니 금세 사용법을 터득했다.
더빙 역할도 당군악이,
검선은 삼한제국의 언어를 모르기 때문이다.
마침내 태블릿 렌즈 앞에 선 검선.
당군악이 손을 번쩍 들었다.
“레디···,”
모두가 숨을 죽였다.
“액션!”
카메라 어플 작동 시작.
형형한 눈빛, 바람에 휘날리는 긴 수염, 검 끝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검선이 한 걸음 나아갔다.
“복마검법 제일초, 격검축마(擊劍警魔), 검을 휘둘러 마귀를 쫓아내다.”
당군악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검선의 검이 허공에 수놓아졌다.
동시에 시작되는 해설.
“검 옆면으로 적을 강하게 후려치는 걸로 초식을 시작한다. 이때 오른발을 같이 내디디면서, 기운은 곡지혈에 일푼, 노궁혈에 일푼을 주되, 합곡혈을 닫고 소지혈로···,”
일초식 촬영은 4번 반복됐다.
정면에서, 오른쪽에서, 왼쪽에서, 뒤에서.
그리고,
“컷!”
“수고하셨소.”
“고생했소이다.”
“역시 검선이야! 금방 끝나겠군.”
초식 시현을 마치자마자 황급하게 뛰어오는 검선.
“독선, 괜찮았소?”
“아주 잘 빠졌소이다.”
“어디 봅시다.”
태블릿에서 촬영된 영상이 재생됐다.
신선들도 우르르 몰려와 함께 구경했다.
하지만 점점 굳어지는 검선의 얼굴.
“흐음···,”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
“다시 갑시다.”
“음? 왜···?”
“표정이 별로야. 너무 굳어있어. 자연스럽지 않아.”
“지금 표정이 중요한 게 아니지 않소.”
“나한텐 중요하오! 다시 갑시다.”
“···.”
아무래도 촬영이 길어질 것 같다.
신선들도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한마디씩 했다.
“지가 배우인지 아나?”
“그럴 거면 메이크업부터 하고 오지.”
“자칫하면 장편 영화 한 편 찍을 기세야.”
“쯧쯧, 저게 말로만 듣던 연예인병이군.”
그러나 검선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 입궁 이후(2) > 끝
ⓒ 꾸찌꾸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