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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약을 위한 준비 >
황제가 사정의 칼날만 휘두른 건 아니었다.
태주 이후로도 진짜 공신들에 대한 훈장 수여식이 진행되었다.
황제와 금수호, 그리고 김송겸 합참의장이 따로 작성한 명단에 적힌 공신들.
그리하여 승전식이 끝났다.
황제와 별도의 만남은 없었다.
금수호의 말에 따르면 황가의 기강을 세울 계획이라 매우 바빠질 예정이란다.
태주는 서필명의 안내를 받아 행사장을 빠져나왔다.
“김회장님, 지금 나가시면 매우 귀찮을 겁니다. 조용한 곳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다가 나가시죠.”
아마 황궁 밖을 나가자마자 기자들이 달려들 터, 그들 뿐인가?
제국의 새로운 실세로 떠오른 김태주를 만나기 위해 온갖 어중이떠중이들이 다 달려들겠지.
그래서 행사장 옆에 딸린 사무실로 들어갔다.
이 기회를 빌려 서필명 비서관에게 은근하게 말을 건네는 태주.
“혹시 알고 계세요? 파주로 파견 근무 나갈지도 모른다는 거.”
“네, 조금 전에 금비서관님에게 들었습니다.”
“미안해요. 괜히 저 때문에, 졸지에 뉴서울에서 떠나게 됐네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번잡한 도시를 떠나 한가로운 곳에서 몇 년 살아보는 것도 제겐 새로운 경험이라서요.”
한가로운 생활이라.
과연 그렇게 될까?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절대 한가롭지는 않을 겁니다. 조만간 엄청나게 바빠질 거예요.”
“네···?”
“파주를 제국 남부 지역에서 손꼽히는 대도시로 만들어볼 작정이거든요.”
“아!”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초기 투자 비용이 많이 들겠지만 성공하면 몇 배의 이익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서필명 비서관, 아니 행정관님이 많이 도와주셔야 해요.”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대신 연봉은 지금 받는 돈의 2배를 드리죠.”
“흠. 그건 안 됩니다.”
서필명은 불가능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전 아직 공무원입니다. 파견되어도 똑같을 거고요. 정해진 월급만 받아야 합니다.”
“그럼 공직 관두고 넘어오세요. 파주에 정착하시면 연봉 3배 챙겨드릴게요. 연봉 협상은 1년마다 가능합니다.”
“네? ···황궁 비서관 연봉이 생각보다 꽤 많습니다. 대기업 부장급인데요?”
“상관없습니다. 무조건 3배. 또한 종신고용 보장,”
“···어.”
서필명의 눈동자가 마구마구 흔들렸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자.
“그리고 분기별로 보너스도 지급하고, 자녀가 있으면 학비 지원에, 차량 지원, 집도 공짜로 드립니다.”
황궁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이다.
이 정도는 질러야 영입할 수 있지.
그래도 급하게 강요하진 말고.
“천천히 결정하세요. 기다리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참! 부탁이 있는데.”
“뭐든 말씀하십시오.”
“가방 하나만 구해주실래요? 볼링공 두 개 정도 들어갈 만한 크기에, 잠금장치가 되어 있는 걸로.”
“바로 구해드리겠습니다.”
서필명이 나가고, 잠시 홀로 시간을 보내는 태주.
‘파주라···,’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곳은 구례지만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파주다.
먼저 대규모 건설공사를 통해 기반시설부터 다지자.
‘약품 공장도 지어야겠어. 어차피 새살쑥쑥과 생기불끈 생산량이 턱없이 모자라니까.’
아직도 사람들은 생기불끈 드링크제를 구매하기 위해 아침부터 약국이나 마트 앞에 줄을 서야 하는 실정.
그래서 수출은 엄두도 못 낸다.
삼한제국 수요량의 절반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판국인데.
‘영토도 넓혀야지.’
파주는 서해 바다를 끼고 있는 해안 영지.
동쪽은 연천 영지와 맞닿아있고, 북쪽엔 DMZ 마수 밀집지대가 있다.
영토 확장은 마수 밀집지대를 토벌하면 된다.
제국법에 의해 마수를 완전하게 몰아낸 땅은 바로 영지로 귀속할 수 있다.
‘DMZ는 일이삼백이만 풀어도···,’
혼자서 토벌이 가능할 것이다.
비욘드 엘리트를 제외하면 일이삼백이보다 강한 마수는 없다.
‘그리고 구례에서 열심히 수련 중인 제자들도 있고.’
갑자기 할 일이 많아졌지만 기분은 좋다.
‘파주하고 구례 왔다 갔다 하려면 정신없겠구나.’
순간!
똑똑,
사무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
‘벌써 가방을 구해왔나?’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한 사람,
“···응?”
“형님!”
오황자 류진철이었다.
“황자님”
“에이, 진철이라 불러주세요. 저 이제 완전 개털 됐는데.”
“어떻게 여길?”
“흐흐, 행사장 나가시는 거 보고 몰래 따라왔습니다.”
개털이 맞긴 하지.
황자, 황녀들이 다 황궁에서 쫓겨나게 생겼으니까.
하지만 태주가 알기론 오황자 류진철은 황위 계승 투쟁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다.
그런데도 쫓겨나나?
황제가 단단히 마음먹었나 보다.
“아바마마께선 한번 내뱉은 말은 무조건 지키시거든요. 저도 예외 없을 겁니다.”
“고민이 많으시겠어요. 계획은 세우셨습니까?”
“네! 세웠습니다. 그래서 여기 왔고요.”
그래서 여기 왔다니?
류진철은 태주 앞에 무릎을 털썩 꿇으면서 말했다.
“회장님! 저 취직 좀 시켜주십시오.”
“어···,”
“형님이 안 받아주시면 굶어 죽을지도 몰라요.”
왜 왔나 했더니.
“무슨 일이든 다 하겠습니다. 아무 데나 꽂아주세요. 월급? 재워주고 먹여주시면 그걸로 만족할게요.”
“···.”
어쩔 수 있나?
뉴서울에 진출하면서 도움도 많이 받았다.
스폰도 아니고 취직시켜주는 건데.
“진짜 무슨 일이든 할겁니까?”
“나쁜 짓 빼곤 다 합니다.”
“알았어요. 채용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호칭은···,”
나름 각성자에다 익스퍼트니까.
“류과장으로 하죠.”
“넵!”
순간! 문이 열리고 서필명 비서관도 들어왔다.
“회장님 가방 구해왔습니···, 어? 황자님, 여긴 왜?”
“황자 아닙니다. 앞으로 류과장이라고 불러주십시오.”
“···.”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당분간 류과장은 서필명과 함께 파주에서 일하면 되겠다.
※ ※ ※
뉴서울 중앙역.
김웅방 준장은 떠날 준비를 마쳤다.
목적지는 제국 최전방 시베리아 개척 사단.
금수호 비서관이 중간에서 연결해줬다.
아직 보직은 받지 않았다.
편하게 안주할 생각은 없다.
무조건 최전방에서 마수와 싸울 생각.
황제 폐하껜 이제 전처가 된 혼다 미쯔이와 두 아들을 용서해 달라고 부탁했다.
흔쾌히 승낙하셨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두 아들 역시 천륜으로 맺어졌다.
살길은 열어줘야지.
기차 시간이 다 됐다.
김웅방은 가방을 들고 승강장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바로 그때!
“김웅방 준장님?”
“음? 누구?”
“황궁 비서관 서필명이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김태주 회장님과 함께 일할 예정이고요.”
“아!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거, 김태주 회장님이 보내신 겁니다.”
서필명은 김웅방에게 가방 하나를 건넸다.
“누구에게도 주지 말고 반드시 혼자 드시라고···, 그럼 전 이만.”
먹는 건가?
도시락이라도 보낸 모양.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가방을 받아든 김웅방.
그리고 기차에 올랐다.
자리에 앉아 태주가 보낸 가방을 열어봤는데,
‘응? 복숭아?’
볼링공만 한 복숭아가 2개.
또 작은 병도.
‘이건 술 같고···,’
그러고 보니 태주와 술 한잔 함께 나누지 못했다.
언젠가 마음이 가벼워졌을 때 꼭 같이 한잔해야지.
가방 안엔 약도 한가득 들어있었다.
한 알에 500만 원이나 하는 태홍 회복제가 무려 30개,
‘후우,’
어디 가서 죽지 말라고 챙겨준 모양.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못난 아비였다.
기차가 시베리아로 출발했다.
그래도 마음이 따뜻했다.
※ ※ ※
태주도 뉴서울 역에 있었다.
‘잘 전해졌겠지?’
생각 같아선 아버지에게 직접 전하고 싶었지만 자신을 만나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고, 또한 서로에겐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서필명과 류진철 황자, 아니 류진철 과장은 곧바로 파주에 내려보냈다.
거기서 영주관 관리들에게 인수인계를 받게 할 예정.
태주는 구례로 가서 사람들을 만나 향후 계획을 논의하고 나서 파주로 갈 생각이었다.
뭐, 파주야 가까우니까.
당분간 두 군데 왔다 갔다 하면서 기초를 잡아야지.
만리비검 타고 나르면 금방.
혼자서 기차를 타고 구례역 승강장에 내렸다.
그리고 역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는데.
‘···뭐야?’
구례 역 안에 가득 찬 사람들.
“오셨다!”
“축하드립니다!”
“김태주 회장님, 아니 시장님 만세!”
곳곳에 플래카드와 팻말도 보였다.
<김태주 회장님의 금의환향을 축하드립니다.>
<구례시 발전에 큰 힘이 되어주십시오.>
<구례 시민들도 파주의 발전을 염원합니다.>
<파주와 함께 나아가는 구례!>
백서연, 백홍표를 비롯해 제자들, 그리고 이정학 길드장을 비롯한 전(前) 상임위원들과 자치위원들까지.
짝짝짝짝!
박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꽃다발도 목에 걸렸다.
‘쯧, 쑥스럽게.’
※ ※ ※
태주는 백서연과 함께 태홍 바이오 본사로 먼저 왔다.
“파주에 공장을 지어야겠어요.”
“네, 그렇지 않아도 제가 먼저 건의드리려고 했습니다. 요즘 구례도 땅값이 올랐고 뉴서울도 마찬가지라, 파주가 최고 적격지입니다.”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는 백서연.
“생기불끈과 새살쑥쑥 추가 생산이 너무 급해요. 백두 제약도 전체 라인을 밤낮없이 돌리고 있지만 기존 주문량도 맞추지 못하고 있어서.”
그런 이유로 현재 추가 주문도 받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회사의 매출과 순이익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돈을 벌었으니 빨리 재투자해야지.
“해외 수출도 해야 하니까, 될 수 있으면 크게 지읍시다.”
“네, 그것까지 감안해서 계획을 세워볼게요.”
파주는 너무 낙후되어 있다.
아예 신도시를 건설할 생각으로 달려들자.
그러기 위해선 대규모 공사를 맡아 줄 건설 회사도 선정해야 한다.
태주는 정욱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백두 그룹의 주력은 건설 부문.
- 김회장! 전화 오길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었어. 자네 덕분에 살았네. 이황자와 스폰 계약을 했으면 어떡할 뻔했나! 지금 다른 기업들은 난리가 났어.
정욱철 회장 말대로였다.
황제 와병설, 혹은 조기 사망설에 배팅하고 황자와 황녀들에게 붙었던 대기업들이 싸그리 갈려 나가고 있었다.
“하하. 다행이네요. 다름이 아니라···,”
태주는 정욱철에게 파주 개발 계획에 관해 설명했다.
- 알겠네. 백두 건설에서 수주를 맡겠네. 이익 생각하지 않고 정성을 다할 거야. 곧 실사팀 구성해서 파주로 내려보내지.
“고맙습니다.”
- 아이고, 도리어 내가 감사할 일이지. 간만에 초대규모 건설 프로젝트인데, 참! 나도 파주에 투자하면 안 되겠나? 곧 대도시가 될 파주 아닌가. 아파트도 짓고, 마트, 백화점에 호텔도.
“저야 대환영이죠.”
- 흐흐흐, 우리 끝까지 같이 가세. ···그건 그렇고 자넨, 결혼 생각은 없나? 애인은 있는지 모르겠군.
“···너무 바빠서 연애는 신경도 못 쓰고 있습니다만,”
- 그래? 그거 잘됐군.
잘됐다니, 이거 욕 아닌가?
이제 시청에 갈 시간.
시청 공무원들이 새로운 시장 부임을 기다리고 있었다.
태주는 회사에서 나와 미리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에 올라탔다.
“회장님! 어디로 모실까요?”
“구례 시청으로 가요.”
“네!”
그때였다!
찌르르르,
머릿속에서 울리는 배달 완료 신호.
‘좋아!’
이때만 기다렸다.
황제에게 받은 아공간 가방.
미리 가득 채워놓았다.
아공간 가방엔 컨테이너 하나 분량의 물건이 들어간다.
즉 기존 공유창고보다 훨씬 크다.
하지만 이것도 크기 제한이 있는지라 비교적 작은 물건들만 들어간다.
1차 실험은 끝냈다.
이 아공간 가방이 무한공간에 수납이 되는지에 대한 실험.
결과는?
성공!
별다른 충돌 없이 무한공간에 잘 들어갔다.
넣다 뺐다 해서 그 안에 물건이 잘 들어있는지 확인까지 마쳤다.
이제 공유창고에 들어가기만 하면 끝난다.
‘선계 물건부터 빼고.’
선도도 있고, 편지도 있고, 각종 암기도 들어있었다.
‘오!’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암기들.
비욘드 엘리트 마나 결정체를 이용해 만든 무기.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것도 있었다.
‘이게 왜···,’
자신이 당군악에게 보내줬던 태블릿.
매번 두세 개씩 보냈었다.
‘이 안에 든 건 다 봤나?’
그렇다고 해도 다시 보낼 필요는 없는데.
‘이제 넣어보자.’
공유창고에 아공간 가방이 들어가는지.
스슷!
‘아싸!’
들어갔다.
태주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머지 공간도 각종 상품으로 집어넣고.
그리고 미리 써둔 편지도.
물량 대폭발.
지금 보낸 것이 여태까지 보낸 양보다 더 많다.
왜 더 일찍 실험해볼 생각을 못 했지?
기뻐할 당군악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제 편지나 읽어볼까?’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몰라도 전에 편지보다 매우 길었다.
첫 문장을 보니 선계에서의 일상이 적혀 있는 듯한데.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순간!
‘···뭐?’
태주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세상에!
‘태, 태블릿이 그거였어?’
미처 상상도 못 했다.
서둘러 태블릿을 꺼내 앨범에 저장된 영상을 확인했다.
거기엔 신선이 있었다.
‘와!’
근엄하고 고귀한 검선의 풍모.
보기만 해도 존경심이 무럭무럭 솟는다.
그리고 당군악의 해설과 함께 시전되는 복마검법의 초식.
실로 아름다웠다.
검의 신선이 보여주는 고매한 검술의 경지.
비록 검술에 대해선 큰 관심이 없었지만 지금 이 장면은 태주에게도 커다란 감동이었다.
상상이나 했을까?
선계에서 노니는 신선을 태블릿을 통해 볼 수 있다는 걸.
그런데 영상이 하나 더 있었다.
이건 또 뭘까?
태주는 동영상을 실행했다.
- 그 뭐더라? 콜라? 그게 참으로 시원하고 맛나더이다. 그냥 그렇다고.
- 드라마 보니까 칵테일이라는 게 나오던데? ···진심 궁금해서 하는 말이오.
- 이를테면 백과사전이라든가.
- 바이크? 할리 뭐라던데, ···그렇다고 보내 달라는 건 아니오, ···헌데 다리가 조금 아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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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아아!’
눈물이 차올라 고개를 들었다.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신선들이 너무 불쌍하고 안타깝다.
선계라는 감옥에 갇혀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원하는 것들이 고작 콜라, 칵테일에, 백과사전, 오토바이 등이라니.
철저하게 준비해야겠다.
모든 일에 앞서서 최우선으로 처리해야 한다.
솔직히 태주는 선계로 물건 보내려고 돈 버는 거다.
하지만,
‘할리 바이크가 문제인데···,’
무한공간에 들어갈지 모르겠다.
그게 들어가기만 하면 공유창고에도 넣어질 것 같지만.
‘안 되면 되게 해야지.’
오늘부터 주식은 최상품 선도 복숭아.
목이 마르면 신선주 들이키고.
할리 오토바이?
반드시 넣고야 만다.
‘무한공간 구역 설정도 다시 해두자.’
신호가 오면 재빠르게 넣을 수 있게.
※ ※ ※
한편 선계(仙界)에서도 대규모 건설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 도약을 위한 준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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