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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이 다르다. >
선계의 보패인 추적부도 한계가 있었다.
거리가 너무 멀면 가리키는 방향이 흐릿하다.
만리비검을 타고 열심히 북서쪽으로 달려왔는데 도착한 곳은···,
“후우,”
지금은 폐허가 된 바룬의 밀 농장.
놈과 처음 마주친 그곳.
‘그래도 성능은 확실하네.’
어쨌거나 천경호가 여기 있었던 건 분명했으니까.
태주는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천경호의 얼굴, 놈의 행동, 여기서 도망치기 위해 놈이 펼쳤던 천마군림보.
그리고 다시 무한공간에서 추적부를 꺼냈다.
화르르륵!
다시 날아가는 재.
쓰면 쓸수록 점점 효과가 좋아지는 추적부.
‘서쪽.’
태주는 만리비검으로 계속 날았다.
쐐애애애액!
그러다가.
‘···여긴가?’
저 밑에서 SUV 자동차들과 시체들이 보인다.
추적부가 이리로 안내했다.
태주는 밑으로 내려갔다.
‘흐음,’
곳곳에 널린 시체들.
대부분은 머리에 구멍이 뚫려 죽었다.
이미 부패해서 형체도 알아볼 수 없었다.
‘마적이군.’
그런 모양.
중앙아시아 지역에도 도시가 있지만 사이사이 거리가 꽤 멀다.
마수에 의해 철도가 파괴되어 오직 자동차, 혹은 직접 걸어서 오고 갈 수 있고.
근처에 숨어 있다가 여행자나 상인들이 지나가면 습격해서 돈을 빼앗는 마적들이 많다고 들었다.
‘천경호에게 당했네.’
시체 중 하나는 각성자였다.
몸이 바짝 말라서 미라가 된 걸 보아 마기 흡수에 당한 것이 틀림없다.
확실히 위험한 놈이다.
죽은 놈들이 마적이라 그나마 다행.
추적부 하나 더 꺼내서.
화르르륵!
서쪽으로, 또 서쪽으로.
마침내 유럽 제국 초입에 위치한 대도시 기차역 상공에 도착했다.
‘유럽? 멀리도 갔다. 여기서부턴 기차로 이동했군.’
이러다 대륙을 넘어버리는 거 아니야?
추적부도 아깝다.
벌써 3장이나 소모했다.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고.
점점 추적부의 방향이 명확해졌다.
멀지 않았다.
또 서쪽, 계속 서쪽.
결국 최종적으로 도착한 목적지가 프리 바르셀.
‘그래도 대서양은 안 건넜네.’
태주는 밤이 되어서야 프리 바르셀 도시 번화가로 들어섰다.
추적부가 명확해졌다.
가까운 곳에 놈이 있다.
결국,
‘찾았다.’
도심 한가운데 허름한 호텔.
테라스로 나와 음료수 같은 걸 들이키는 천경호.
‘거기 있었구나.’
※ ※ ※
300년 전 전 세계가 멸망의 위기에 처할 무렵 유럽도 아비규환의 지옥 그 자체였다.
마나에 의해 죽어가는 사람들.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
순식간에 유럽 인구의 절반이 죽었다. 곧이어 절반의 절반이 죽었다.
데자뷔 현상.
이런 경우가 한 번 있지 않았나?
중세 유럽을 초토화한 흑사병 말이다.
하지만 전염병이야 감염원을 차단하고 치료제를 개발하면 되지만 마나는 대기에 녹아있어 속수무책이었다.
100년쯤 지나자 마나에 적응하기 시작한 인류.
물론 동식물도 마찬가지였다.
마수들이 나타났다.
당연히 각성자도 나타났다.
국가의 경계가 무너지고, 사람이 많은 도시를 중심으로 국가를 건설해 뭉치기 시작한 유럽.
그 시점에 걸출한 영웅이 나타났다.
알렉스 카이사르 황제.
역사적 위인인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를 합친 초기 각성자 영웅, 알렉스 카이사르는 도시 국가 메가 로마를 중심으로 유럽 정복에 나섰다.
그리하여 세워진 국가가 바로 유럽 제국이었다.
천경호는 유럽 제국 서쪽에 있는 프리 바르셀에 있었다.
기존 바르셀로나는 온난화의 영향으로 바다에 잠겼다.
원래 지역의 동북쪽에 새로 건설된 도시.
유럽의 대도시 네오 베를린이나 수도 메가 로마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낙후됐다.
초거대 마수 밀집지대인 피레네산맥이 바로 프리 바르셀 북쪽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동 인구가 워낙 많다 보니 치안도 그리 좋지 않다.
수많은 빌런 조직들이 프리 바르셀에서 암약하고 있었다.
하지만 천경호의 입장에선 이보다 더 좋은 도시가 없었다.
적당한 빌런 조직 하나 접수해서 쥐어짜면 돈을 모으는 데 편하기도 하고, 간간이 마기를 흡수해 힘도 키우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프리 바르셀에 와서 쓸 돈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며칠 전 마주친 껄렁껄렁한 익스퍼트급 각성자 한 놈을 몰래 쫓아가 마기 흡수로 해치우고, 쓸 돈도 마련했다.
그 돈으로 호텔 방도 잡고, 이렇게 피로회복 드링크제도 사서 마시고.
그나저나 이 드링크, 마시면 마실수록 감탄이 절로 나온다.
육체적 피로뿐만이 아니라 정신적 피로도 해소시켜 준다.
유럽 제국 산(産)이 아니다.
역시 물 건너온 거라 그런지 다르다.
‘지낼수록 마음에 드는군.’
원래 계획은 대서양 건너 아메리카 공화국으로 넘어가 기반을 닦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도 괜찮다.
프리 바르셀.
낙후된 시설의 도시지만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삼한 제국에 비유하면 이곳은 구례와 비슷하다.
지리산 마수 밀집지대 때문에 항상 마수 웨이브의 위협에 시달려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던 도시, 그러나 마수 사냥으로 인한 부가적 이익 덕택에 유동 인구가 많아서 돈의 흐름이 활발한 도시.
김태주가 바로 그 구례에서 성장했다.
해독제를 만들어 돈을 벌고, 고아원을 접수해서 세력을 모은 후, 마침내 삼한 제국 실세로 거듭났다.
‘나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프리 바르셀도 구례와 비슷한 환경이다.
마수 밀집지대, 유동 인구, 넘쳐나는 돈.
‘이곳에 머무는 것도 괜찮겠어.’
굳이 아메리카 공화국으로 넘어가는 것보다는.
‘조직을 하나 접수해야겠군.’
아니지.
이참에 빌런 조직을 모조리 통합하자.
프리 바르셀의 빅보스.
천마 천경호.
나아가 마교까지 건설하면?
김태주가 구례를 기반으로 훨훨 날아오른 것처럼, 자신도 프리 바르셀을 기반으로 힘을 기른다.
‘진작 이리로 올 걸 그랬구나.’
절로 웃음이 나온다.
천마로서 다시 태어났으니, 지구에 마교를 건설하는 건 의무나 다름없다.
천경호는 손에 든 피로회복 드링크제를 들고 자신이 기거하는 호텔 방 테라스로 나갔다.
밤인데도 불구하고 화려한 조명으로 훤하게 보이는 거리.
오고 가는 수많은 사람, 일반인과 적합자, 그리고 각성자.
‘이들을 흡수해 마교도로 삼으면···,’
인종은 자신과 다르다.
언어도 다르겠지.
스마트폰 통역프로그램으로 간신히 소통해야 했으니까.
그러나 여기서도 삼한 제국의 언어를 쓰는 자들도 찾아보면 몇 명은 있을 것이다.
찾아서 종복으로 만든다.
회(會)를 만들 때 그랬던 것처럼 마기를 주입해 심령을 제압해서.
이번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저기도 한 명 보인다.
삼한 제국민 같은 사람이.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하얀색 코트를 입고 자신을 바라보는···,
“···어?”
천경호는 눈을 쉴 새 없이 깜빡였다.
‘뭐지?’
트라우마로 인해 판단력이 흐려진 걸까?
‘기, 김태주?’
알려진 얼굴과는 전혀 다르다.
역용술로 변장했겠지.
자신도 그러고 있고.
그러나 숨길 수 없이 흘러나오는 놈의 기세.
놈이 맞다.
바룬 밀 농장에서 마주한 그놈이다.
게다가 이쪽을 바라보며 빙긋 웃고 있다.
덜덜덜덜.
드링크 병을 든 손이 떨린다.
“마, 말도 안 돼.”
공포에 질린 천경호는 뒷걸음질 쳤다.
※ ※ ※
태주는 너무나 반가워서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 천경호.
어딜 가려고?
츠핏! 츠피피피피피핏!
손에서 기관총처럼 쏘아지는 유엽비도.
“허억!”
천경호는 상체를 뒤로 젖히며 방안으로 굴렀다.
머리카락을 스치며 지나가는 암기.
‘이, 이놈이, 어, 어떻게?’
천경호는 허둥지둥 호텔 방문 앞으로 달렸다.
순간!
스팟! 콱! 떼르르르르르···,
유엽비도가 호텔 방문에 박혀 세차게 떨고 있었다.
김태주가 왔다.
바로 등 뒤에 있다.
“천경호?”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천천히 뒤를 돌아보니.
“···누구? 나, 난 그런 이름 모르는데.”
태주는 피식 웃었다.
“까불지 말고 역용술 풀어. 되다 만 천마 새끼야.”
“무, 무슨?”
역용을 알아차린 건 그렇다 쳐도···, 천마?
분명 들었다.
자신을 천마라고 부르는 소릴.
이건 또 어떻게 알았지?
“강호의 천마 새끼는 무간지옥에 있고, 지구의 천마 새끼는 도망치기나 하고.”
천경호는 당황했다.
모든 게 까발려졌다.
벌거숭이가 된 느낌.
“너도 내가 누군지 알고 있잖아.”
“···.”
“내가 바룬에서 폭우침 시전하는 것도 봤을 테고.”
“···절대독마.”
“그래, 나다.”
영혼 연결자끼리 만났다.
그것도 서로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고.
그런데 폭우침?
“···폭우침이라니, 만천화우가 아니었어?”
“그 어려운 걸 내가 어떻게 익혀? 그냥 흉내만 냈을 뿐이다.”
천경호는 잠시 머리가 띵했다.
만천화우가 아니었다고?
고작 폭우침으로 겁을 먹었다고?
어쩐지.
갑자기 자신감이 차올랐다.
만천화우만 아니라면···,
“흐흐흐, 반쪽짜리 절대독마로구나.”
“그러는 넌? 천마 신공 대성했냐?”
“···.”
천경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김태주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저놈도 대성하지 못했다.
그럼 해볼 만하다.
천경호는 자세를 바로 하고 김태주의 동태를 살폈다.
길다란 코트.
아마 옷 구석구석에 암기가 숨겨져 있겠지.
‘암기만 피하면 돼.’
하지만 김태주에게서 전해지는 지독한 살기.
저릿저릿, 팔뚝에 닭살이 돋을 정도.
어째 더 강해진 듯하다.
바룬 밀 농장에서 보다 더.
“하나만 물어보자. 내가 천마란 건 어떻게 알았지? 그리고 여기 이 장소도.”
“나한테서 들었어.”
“···나? 아! 절대독마 당군악 말이냐? 영혼 연결이로군.”
“그래, 무간지옥에서 천마와 만났다더군. 걔도 널 죽여달라던데?”
“제, 제기랄···,”
가만?
당군악이 천마와 만났다는 말은···.
“낄낄낄, 그 무시무시한 절대독마도 뒈져서 지옥으로 간 모양이구나. 이거 재미있네. 지옥에 나란히 갇혀있는 천마와 독마라니.”
“아닌데? 당군악은 죽지 않았어.”
“뭐?”
“우화등선해서 신선이 됐지.”
“그, 그런 허무맹랑한 개소릴!”
스슷!
태주는 무한공간에서 신령비도를 꺼냈다.
우우우우웅!
영험한 기운을 품은 신령비도가 허공에서 둥둥 떠 올랐다.
“아!”
천경호는 몸으로 체감했다.
저 비도에서 느껴지는, 마기 같은 건 가볍게 부숴버릴 것 같은 상서로운 기운.
“이게 선계에서 넘어온 보패거든.”
천경호는 보기만 해도 정신이 아득해졌다.
“네 영혼과 연결한 천마 새끼는 무간지옥의 죄수, 난 등선한 신선의 영혼···.”
싸늘하게 말을 이어가는 태주.
“애초에 너와 난 격이 달랐어.”
꿀꺽.
천경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하는 수 없다.
‘전력을 다해···,’
도망친다.
천마와의 영혼 연결로 습득한 마교의 무공.
모든 걸 쏟아부으면 도망이 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여긴 도심이라 인질들도 많고.
그런데.
“어때? 기분이.”
“무슨 기분 말이냐?”
“천마와 같은 영혼이라면 강호에 떠도는 소문 정도는 들어봤을 텐데.”
“뭘···,”
“절대독마와 함께 있게 되면 먹지 말고, 마시지 말고, 숨도 쉬지 말라고, 특히 밀폐된 장소에선.”
“아! 독, 독을 말하는 건가?”
천경호는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천마 신공을 익히면 만독불침은 기본으로 장착된다.
마기가 독의 침범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대성하지 않아도 그렇게 된다.
“흐흐흐, 그깟 독이 나한테 통할 것 같더냐?”
“어. 통해.”
“헛소리마라. 난 만독불침···. 어?”
흠칫!
표정이 일그러지는 천경호.
마기의 흐름이 이상하다.
“이제 알았어?”
“아, 아냐. 사기치지 마라! 어디서 개수작을.”
“그럼 움직여보던가.”
“가, 감히! 널 죽여···, 우욱!”
혼원무상독령공 10성의 독기방사(毒氣放射).
독정에 선기가 각인됐고, 그 선기에 독기가 실렸다.
선기가 먼저 마기의 방호막을 뚫었다
그리고 독기가 천경호의 육신을 잠식했다.
매우 은밀하고, 지독하게.
이미 첫 대화를 나눌 때부터.
“커헉!”
울컥.
그의 입에서 붉디붉은 선혈이 토해졌다.
털썩, 주저앉고 마는 천경호.
“지, 진짜 중독? ···왜? 어째서?”
움직일 수도 없었다.
뒤를 이어 덮쳐오는 극악한 고통.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다.
“살려다오.”
천경호는 태주에게 애걸했다.
“사, 살려주면 네 종이 되어서, 크헉! 주, 죽을 때까지 봉사하마. 날 사냥개로 사용해. 황제든, 금수호든, 다 죽이고 삼한 제국을 너에게 바치겠다. 우욱, 그러니 날 해독해···,”
좋은 제안?
웃기는 놈이다.
“역시 소시오패스들은 보통 사람하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달라.”
“뭐···?”
“내가 그걸 못해서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을까, 이 존속 살해범 새끼야!”
우웅!
세차게 진동하는 태주의 독정.
“해도 되는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될 일이 있는 거다. 보통 사람들은 다 알아. 넌 그걸 모르는 놈이고, 그러니 그만 뒈져!”
각인된 만년오공의 분해 독이 방사됐다.
요마계의 극독.
“제, 제발···,”
치치치치칙!
장기부터 녹기 시작했다.
위장, 심장, 간, 폐···.
그래서 겉모습은 멀쩡하지만 내부는 한 줌의 독수,
“···끅.”
천경호는 그대로 절명했다.
시체는 무한공간에 집어넣고.
이제 천마는 하나만 남았다.
무간지옥의 죄수 신분으로 말이다.
‘이제 슬슬 돌아가 볼까?’
스우웅!
태주는 방사한 독을 다시 거둬들였다.
호텔 방 바닥은 깨끗하게 청소해놓고.
순간!
왠지 익숙한 냄새가 태주의 콧속으로 솔솔 들어왔다.
‘음?’
어디서 나는지 찾아봤다.
그러자 바닥에 떨어진 작은 병 하나.
좀 전에 천경호가 테라스까지 나와 마시든 그 드링크제.
‘이거 설마···,’
그 냄새가 맞다.
바닥에 떨어져 다 쏟아졌지만.
‘더 없나?’
태주는 호텔방 냉장고를 열었다.
그러자 똑같은 모양의 드링크제가 10병이나 들어있었다.
하나 돌려 따서 마셔봤는데.
‘틀림없어.’
생기불끈이다.
그러나 상표는 생기불끈이 아닌 ‘바이탈 주스(vital juice)’
‘어디서 만든 거야?’
제조국이 라벨에 적힌 제조국.
메이드인 알오에이(Made in R.O.A)
즉 리퍼블릭 오브 아메리카 (Republic of America), 아메리카 공화국이었다.
‘혹시 카피?’
태주는 나머지 드링크제를 무한공간에 집어넣었다.
일단 돌아가서 조사해보자.
< 격이 다르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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