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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베꼈네. >
태주가 떠나고 나서 한참 뒤.
천경호의 시체마저 사라져 아무도 없는 호텔 방에 남자 두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한 명은 호텔 사장, 한 명은···.
“여긴가? 그놈이 묵은 방이?”
“···네네.”
“아무도 없군.”
“어, 어디 갔지? 분명 어젯밤까지 있었습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옷장엔 투숙객의 것으로 추정되는 신발과 겉옷까지 있었으니까.
“이름은?”
“숙박부엔 ‘스카이’라고 적혀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가명 같지만.”
“호텔 체크인하면서 삼한 제국 언어를 사용한 것이 확실한가?”
“맞습니다. 제가 통역하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그만 가봐. 내가 따로 조사할 테니.”
“아, 넵!”
호텔 사장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서둘러 내려갔다.
그럴 수밖에.
같이 온 남자는 블랙 마피아 프리 바르셀 지부의 간부였기 때문이다.
블랙 마피아는 유럽 제국에서 가장 큰 빌런 조직이었다.
대도시마다 지부를 두고 유럽의 밤을 지배하고 있었다.
블랙 마피아 간부 마르코 산토스는 천경호가 묵었던 방은 샅샅이 살펴봤다.
‘도망쳤나? 그럼 신발은 신고 갔을 텐데.’
그가 여기 온 이유.
익스퍼트급 각성자 조직원 하나가 죽었다.
비쩍 마른 미라처럼.
죽은 지 오래됐다면 모를까, 전날까지 쌩쌩하던 놈이 갑자기 그리되었다.
죽은 것도 죽은 거지만 원인이 심상치 않다.
그래서 조사에 착수했다.
하루아침에 미라가 된 조직원.
짐작 가는 것이 있긴했다.
사망한 시체를 해부해보니, 완전히 말라붙은 마나 로드.
심증이 확증으로 굳어졌다.
사망한 장소에 주차해있던 자동차에서 블랙박스 영상도 확보했다.
동아시아계로 보이는 남자가 그때는 살아있던 조직원의 정수리에 손을 대자 몸을 부르르 떨면서 형편없이 쪼그라드는 모습이 담겨있었다.
‘분명 뱀파릭 터치였어.’
뱀파릭 터치.
산 자의 생기를 빨아들여 마력을 키우는 흑마법.
게다가 굉장히 숙련도가 높다.
최소 5클래스 이상의 흑마법사는 되어야 그 정도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터, 아니 그 이상일지도.
문제는 그놈이 외부인이라는 점.
흑마법은 블랙 마피아의 조직원이 아니고서는 배울 수 없는 마법이기 때문이다.
‘혹시 흑마법이 유출됐나?’
아니다.
절대 그럴 리 없다.
그나저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 방에 스카이라는 놈이 남긴 기운이 남아있을까?
“데스 디텍션.”
순간!
우우우우웅!
흑마법사 마르코의 손에서 퍼져나가는 불길한 기운.
그리고 짙게 피어나는 죽음의 향기.
‘···이곳에서 누군가 죽었군.’
그렇다면?
“팬텀 비전.”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육신을 떠난다.
영혼이 떠나면서 남긴 찌꺼기, 그걸 잔류 사념이라 부른다.
잔류 사념을 들여다보면 죽기 직전의 상황을 아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파팟!
마치 정지화면처럼 떠오르는 장면.
한 명이 더 있었다.
이 장면은 죽어가는 놈이 남긴 것.
죽은 자의 시야에 한 사람이 싸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죽음 직후에 펼쳤다면 더 좋았겠지만 지금은 시간이 지나서 흐릿하다.
‘스카이란 놈이 둘 중 누구야?’
얼굴을 자세히 볼 수가 없다.
다만 확실한 건 둘 다 인종이 같다는 것.
원숭이 생김새가 거기서 거기지.
‘···아무튼 둘 다 삼한 제국인이겠군.’
그중 하나가 뱀파릭 터치를 사용했다.
어느 놈인지 확실치 않지만.
‘일단 상부에 보고를 해야겠어.’
자신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판단은 높으신 분들이 하겠지.
※ ※ ※
아메리카 공화국.
애틀랜타에 위치한 제약 업체 화이백.
CEO 프레드 밀러는 비서실을 통해 올라온 월매출 보고서를 읽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숫자와 그래프가 매우 인상적이야.”
“앞으로 더 늘어날 겁니다. 드링크제 판매 호조로 다른 약들의 판매 역시 덩달아 상승하고 있습니다.”
“좋아! 이 기회에 공장 증축해서 매출 더 올려보자고.”
“네!”
드링크제, 바이탈 주스(vital juice)의 누적 매출액이 무려 2억 달러가 넘었다.
시판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저 먼바다 건너 삼한 제국이란 나라에서 인기리에 팔리는 생기불끈, 그걸 그대로 카피한 피로회복 드링크제였다.
태홍 바이오 제약회사.
프레드 밀러는 예전부터 이 회사를 주목하고 있었다.
변종 3줄 무늬 모기독 해독제, 포자 독 낙타 고라니 해독제, 그리고 마나와 내상을 치유해 주는 태홍 회복제.
구례에서만 판매되는 약을 입수해서 분석에 들어갔다.
하지만 될 리가 있나?
줄줄이 실패.
김태주가 개발한 약들은 도저히 복제할 수 없는 약이었다.
태홍 바이오가 약의 특허 신청을 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그래도 프레드는 포기하지 않았다.
호시탐탐 약의 비밀을 캐기 위해 산업 스파이들을 대거 삼한 제국으로 보냈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태홍 바이오의 뉴서울 진출, 신약을 출시하려고 특허청과 식약청에 심사 신청을 한 것.
신약이라.
과연 어떤 효능의 약일까?
공장에서 약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신약의 정체는 피로 회복제와 외상 치료제.
입수해서 먹어봤다.
당연히 신약들의 엄청난 효과를 몸으로 체험했고.
프레드는 미칠 것 같았다.
적합자든, 각성자든, 일반인이든, 그 누구에게도 적용되는 피로회복, 또한 외상과 흉터마저도 감쪽같이 복원해주는 외상 치료제.
이게 만약 카피가 된다면?
끝내주는 거지.
다른 약 다 제쳐두고 이것들만 팔아도 된다.
성분 분석에 들어갔다.
그리고 카피에 성공했다.
완전히 성공한 건 아니다.
원래 약효의 80% 정도?
삼한 제국에서 자생하는 토종 약초들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대체재를 찾아내긴 했지만.
계속 연구하면 90% 이상까지 끌어올릴 수 있겠지.
필요한 재료를 확보하고 대량 생산 준비에 들어갔다.
그 기간동안 태홍 바이오는 특허와 식약청 심사를 통과해서 판매를 시작했고.
화이백에서도 바이탈 주스라는 이름으로 피로회복 드링크제를 출시했다.
외상 연고도 마찬가지.
이것도 일반인을 비롯해 각성자와 적합자들에 두루두루 적용되는 신약.
출시하자마자 히트쳤다.
대성공이었다.
아메리카 공화국의 건강음료 시장과 외상 치료제 시장을 단번에 휘어잡았다.
그리고 유럽 제국으로 진출.
바다를 이용하는 것이 불가능해 비행기로 수출했다.
가격이 비싸지긴 했지만 불티나게 팔렸다.
물론 허락받지 않은 약품의 무단 카피는 불법.
어쩌라고?
여긴 아메리카 공화국인데.
이미 특허와 FDA 승인까지 마쳤다.
“태홍 바이오 쪽에선 아직 움직임이 없지?”
“아마도 인지하지 못한 듯합니다. 내수 판매만 해도 힘에 부쳐서 해외수출은 생각도 못 하는 상황이고요.”
“설령 안다고 해도 상관없어. 끝난 사항이니까.”
항의가 들어오던, 국가적 외교 문제로 비화 되든, 전혀 무섭지 않다.
달마다 정치권에 들어가는 로비 자금이 얼만데?
여긴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다.
프레드는 힘도 있고 돈도 있었다.
※ ※ ※
태주는 천경호를 처리하고 바로 구례로 돌아왔다.
천마를 잡으러 간 프리 바르셀에서 뜬금없이 생기불끈의 카피약이 발견됐다.
그것도 아메리카 공화국에서 만든 드링크제.
즉시 회사 본사로 들어가서.
“어머? 회장님!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일이 생각보다 잘 끝나서···, 이것 좀 보세요.”
“응? 무슨?”
태주는 백서연에게 가지고 온 드링크를 꺼내 보여줬다.
“응? 드링크제, 우리 회사 제품은 아닌데.”
“마셔보세요.”
꿀꺽.
백서연은 드링크제를 마셨다.
잠시 후 몸에서 일어난 변화.
“아! ···이거 설마?”
“그래요. 생기불끈.”
“카, 카피 약인가요? 아니면 우연? 이걸 대체 어디서?”
원산지를 확인해보니.
“아메리카 공화국 화이백 제약회사네요.”
“성분 분석이 필요합니다. 생기불끈과 동일한 성분이 맞는지.”
“미친!”
병을 들고 벌떡 일어나는 백서연.
“당장 조사해보겠습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조사는 빠르게 진행됐다.
결과가 금방 나왔다.
“결론적으로 카피약이 맞아요. 몇몇은 약효가 떨어지는 재료가 있지만 주성분은 정확하게 일치해요.”
“하···,”
화이백이라는 제약회사에서 만든 바이탈 주스.
나중에 알아보니 생기불끈뿐만 아니라 새살쑥쑥과 효능이 비슷한 외상 치료제도 판매되고 있단다.
뻔뻔하게 아메리카 공화국 특허까지 받은 채로.
구례에서 파는 약과는 다르게 생기불끈과 새살쑥쑥은 뉴서울 공장에서 만들어진다.
혼원무상독령공, 혹은 오행신공의 기운이 들어가 있지 않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카피가 가능하고.
그래서 특허청과 식약청에 심사를 받았다.
그런데 아메리카 공화국이라니.
“어떡하죠?”
작정하고 카피했음이 분명하다.
그로써 발생할 문제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먼저 공식적으로 항의를 해보고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죠.”
지금 시점에서 세계 각국 간의 무역은 활발한 편이 아니다.
해양 마수들로 인해 바닷길이 끊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품의 수출과 수입은 비교적 안전한 육로와 항공기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삼한 제국과 유럽 제국이 양방향에서 시베리아를 개척하고 있는 이유도 이것과 맞닿아있다.
시베리아 지역은 마수들로 넘쳐난다.
곳곳이 마수 밀집지대이다.
그곳을 토벌하면 끊긴 시베리아횡단철도를 복원할 수 있다.
거의 90%의 진행 속도를 보여주고 있다.
몇 군데 구간만 토벌하면 유럽과 삼한 제국 사이의 기찻길이 열린다.
1년도 채 남지 않은 상황.
그런데 뜬금없이 카피약이 먼저 유럽으로 진출하다니.
‘절대 그냥 못 넘어가지.’
반드시 응징해야 한다.
그냥 내버려 두면 선례를 남길 수도 있다.
베끼니까 되네? 나도 해야지.
“먼저 합법적으로 해결해봅시다.”
“어떻게?”
“국제법이라는 게 있잖아요.”
“···될까요? 300년 전에 있었다던 WTO 같은 국제기구도 존재하지 않는 판에.”
태주의 생각도 그렇다.
그러나 합법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건 일종의 명분 쌓기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따라서 물리적인 방법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사실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는 하다.
“회장님, 합법적인 방법은 제가 맡아서 해볼게요. 백두 그룹과 함께.”
“네, 하지만 정부 쪽 도움도 필요할 겁니다.”
“외교부와 접촉해볼까요?”
“아뇨, 보다 빠른 길이 있어요.”
태주는 백서연에게 금수호 비서관의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아! 금비서관님.”
“잘 도와줄 겁니다.”
황제에게 직통으로 보고가 올라갈 터.
“당분간 저 실험실에 있을 테니까, 알고 계시고요.”
“넵!”
일단은 백홍표와의 약속이 먼저다.
마나 거부증 치료제를 만들어야 할 때.
이번 일로 얻은 교훈이 있다.
해독제나 회복제처럼 복제 불가능한 약을 만들어야 한다.
카피는 엄두도 못 내게 말이다.
※ ※ ※
천계(天界).
다른 말로 대라천이라 부른다.
상제가 기거하는 처소는 자미궁.
오늘은 각각의 계를 대표하는 존재들이 모여 대회합을 여시는 날, 그래서 신장(神將)과 천인, 천녀, 선녀들은 손님맞이에 여념이 없었다.
“다 오셨나?”
“아닙니다. 두 분께서 아직···,”
“누구시냐?”
“도화궁의 서왕모와 선계의 태상노군이십니다.”
“흐음, 이상하구나. 제일 일찍 오시는 분들이었는데.”
그때였다.
자미궁으로 화려한 꽃가마가 들어오고 있었다.
4명의 여우 요괴들이 인간으로 변신해 짊어지고 오는 꽃가마.
“서왕모께서 행차하신다. 모두 예를 갖춰라.”
꽃가마가 자미궁 앞에서 멈췄다.
예의를 갖추는 신장들과 선녀들.
두 명이 여인이 먼저 내렸다.
월궁 선자와 미호 선자였다.
‘응?’
‘무슨?’
‘···어.’
그녀들의 옷차림이 특이했다.
몸에 달라붙어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상의에, 무릎 위를 살짝 가린 짧은 치마, 다리 맨살엔 검정색 모시처럼 생긴 반투명한 옷감을 입고서.
‘마, 망측해라.’
‘눈을 둘 데가 없군.’
‘허허, 미호 선자야 여우니까 그렇다 쳐도, 그 조신한 월궁 선자마저.’
신발은 또 어떻고?
뾰족한 앞굽에 작대기를 끼웠는지 높게 올린 뒷굽까지.
저러면 제대로 걸을 수나 있을까?
그리고 서왕모가 가마에서 내렸다.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왕모도?’
대체 선자와 서왕모가 입은 옷은 어디서 난거지?
선계, 천계, 황천계를 통틀어 여성들은 죄다 하늘하늘한 선녀복을 입고 다니는데.
서왕모의 옷도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옷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품이 있었다.
어떻게 저리 잘 어울리지?
“들어가자꾸나.”
“네!”
“보필하겠나이다.”
서왕모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한껏 즐겼다.
‘촌것들.’
인간의 시간으로 가늠해볼 때, 최소 천년에서, 많게는 수천 년을 살아온 천계의 주민들이다.
그들도 이런 옷을 구경이나 해봤을까?
하늘색 엘메스 원피스에, 팔에는 엘메스 가방, 티파니 목걸이와 귀걸이, 신발은 지미츄우 구두, 스타킹도···.
서왕모 일행이 자미궁 옥석길을 걸어간다.
또각! 또각! 또각!
뒤태가 늘씬하다.
‘서왕모가 저렇게 키가 컸나?’
‘종아리도 얇아 보여.’
‘으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천계의 천인, 신장, 선녀들도
용왕을 따라온 용궁의 신하들도.
염라와 함께 온 황천계의 차사와 사자들도.
그저 입을 멍하니 벌린 채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특히 여자들은 더 했다.
바로 그때!
“까악! 까아악!”
때마침 선학이 저 하늘에서 날아왔다.
“···태상노군도 오시는군.”
선학이 착륙했다.
태상노군이 내렸다.
“모두 예를 갖춰···, 헉!”
그들이 알고 있던 태상노군의 모습이 아니다.
뚜벅뚜벅.
가슴을 활짝 펴고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는 태상노군,
명품 수트에 구두, 머리는 짧게 잘라 왁스로 깔끔하게 정돈하고, 얼굴엔 선글라스, 손엔 맨스 클러치백을 들고서 말이다.
‘···.’
‘허어.’
‘세, 세상에!’
대체 선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 결국 베꼈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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