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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고 안엔 뭐가? >
바깥은 아직 조용하다.
마웅샨을 비롯한 군부 독재 저항 세력이 들이닥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부대 내부에선 일이삼백이가 돌아다니면서 독재자 부하 군인들을 해산시키고 있었다.
겁만 주고 달아나게끔.
군인들 중엔 자발적으로 군부에 충성한 놈도 있을 테고, 아니면 협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가담한 놈들도 있을 테지만.
옥석을 가리는 거야 새로운 정부가 알아서 하면 될 일.
태주는 지하실 금고 문을 사람 한 명, 충분히 들어갈 만큼 네모나게 자른 후 안으로 들어갔다.
“와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넓은 내부였다.
그 크기가 얼만지 가늠이 안 될 정도.
역시 독재자 금고 스케일은 상상을 초월한다.
금고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광경,
각종 지폐 뭉치들이 정육면체 모양으로 그득 쌓여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모두 고액권 지폐, 아메리카 공화국의 달러화, 유럽 제국의 유러화, 삼한 제국의 원화···,
현찰 말고도 더 있었다.
각종 채권과 유가증권, 정체를 알 수 없는 종이 뭉치들.
‘은행 금고도 아니고.’
이것들은 버마 공화국 새로운 정부에게 넘겨주자.
알아서 잘 쓸 것이다.
독재든, 혁명이든,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
아무튼 금고 중앙은 현찰이 쌓였고, 그 주위로 문이 달린 방들이 보였다.
다행히 각각의 문은 열려 있었고.
대충 방 하나 정해 안으로 들어가는 태주.
‘이 방 테마는 패션인가?’
마치 백화점 명품 매장인 듯, 수많은 고급 가방과 구두, 지갑 등 잡화를 보기 좋게 진열해놨다.
태주도 사지 못한 물건도 있었다.
주문하면 1년 후에나 받을 수 있는 그런 명품 말이다.
‘전부 쓸어 담아야지.’
어차피 사치품.
남겨놔도 국가 운영에 도움이 안 된다.
‘한동안 백화점 안 가도 되겠네.’
남성용뿐만 아니라 여성용도 많았다.
듣기론 민타누의 애인만 해도 수십 명, 아마 그들을 위한 것일 터.
명품 방을 나와 다음 방으로···,
‘그래, 명색이 비밀 금고인데, 왜 안 보이나 했다.’
번쩍번쩍 빛나는 금괴.
무려 수백 개나 된다.
그러나 별 욕심이 생기지 않았다.
금값이라고 해야 예전만 못하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화폐 가치의 척도가 금본위제가 아닌 결정체 본위제로 바뀐 지 오래됐다.
물론 금 자체로서의 가치는 남아있지만.
‘금괴도 패스.’
다음 방은 보석과 시계 등 장신구.
휘황찬란한 광채를 뽐내는 반지, 목걸이, 귀걸이, 시계···,
부피도 작고, 비싸고, 딱 좋다.
‘오! 득템.’
싹 챙겨서 선계로 모두 보내야지.
진짜 엄청났다.
지금까지 확인한 것만 해도 작은 왕국 하나는 충분히 살 수 있을 정도.
‘생각하면 할수록 개새끼였네.’
독재자, 차별주의자, 부정 축재 3관왕의 민타누.
보이는 것만 그렇지, 파보면 더 나올 수도.
사실 버마 공화국 국민들은 형편이 좋지 못했다.
중산층이 무너진 상황이라 일부 부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가난하다.
그런데 버마가 처음부터 가난한 나라도 아니었다.
인구도 많고, 유전도 가지고 있고, 농업도 발달한 나라.
민타누, 그 새끼 때문에 국가가 이 모양 이 꼴인 거다.
독재자치고 진심으로 나라를 위하는 새끼들이 한 명이라도 있었나?
말로만 국익, 국익 하면서 법을 도구 삼아 죄 없는 반대파들을 억압하고, 자기 쪽에 선 사람들은 범죄를 저질러도 묵인해주고.
자격도 없는 놈들에게 권력이 주어지면 이런 꼴이 일어나는 거다.
어쨌든 다음 방.
‘여긴···, 영약인가?’
이쁘게도 모아뒀다.
유리 진열대에 각국에서 만든 마나 증강제, 즉 영약들이 보호 케이스에 담겨 전시되어 있었다.
진품인 것을 확인시켜주는 보증서와 함께.
‘영약도 남겨둔다.’
품질도 안 좋은데 뭐 하려고 가지고 가?
그 옆방은 장비 창고.
각종 방어구와 칼이나 검, 창 등등의 무기.
개중엔 정말 비싼 엘리트 장비들도.
‘싹 다 패스.’
태주는 현찰이나 금괴, 그리고 레이드에 필요한 영약과 장비들은 일절 손대지 않기로 했다.
버마 정권이 바뀌면 필요한 물건들이니까.
대신 희귀하고 거품 가득 낀 사치품들만 골라 담았다.
‘그나저나 이것들 뿐인가?’
금고 방을 다 돌아봤는데···,
뭔가 놓친 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멈칫!
‘음?’
태주는 아무것도 없는 벽 앞에서 멈췄다.
저 너머에서 익숙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벽이라···,’
태주는 벽을 손으로 두드렸다.
탁탁, 여기저기, 타타탁, 탁탁!
그런데?
타타탕탕.
‘소리가 달라.’
안에 뭐가 있다.
순간,
지이잉!
갑자기 벽에서 튀어나오는 카메라 달린 전자 기기 장치.
‘안구 인식 시스템인가?’
확실하다.
벽 너머 비밀 방이 있다.
자르고 들어가면 되지.
다시 만리비검을 꺼내,
쑤욱!
밀어 넣은 후,
그극, 그그그극,
알맞게 자르고,
“읏차,”
잘린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제법 큰 방이었다.
‘금고 안에 또 비밀 방이라···,’
집무실 같은 공간인 듯.
중앙에 책상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엔 튼튼해 보이는 두꺼운 노트북 하나.
그리고 벽 쪽 진열대 선반엔···,
‘엘리트 마나 결정체?’
여기다 숨겨놨구나.
몇 개일까?
대충 세어보니 약 100개 정도.
많이도 모아뒀다.
‘흐음,’
고민이다.
다 가져갈까?
독재자의 물건이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버마 공화국의 재산.
‘그래도 독재자 처리해줬는데···,’
물론 명품하고 보석 등등 챙기긴 했지만.
결정했다.
가져가자.
전부는 말고 5대5로.
‘누가 5야? ···당연히 내가 5.’
엘리트 마나 결정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선계에서 놀이 공원이 만들어지면 전기가 엄청 필요할 거야.’
간이 발전기 가지고는 그 출력을 감당할 수 없다.
결국 제대로 된 발전 시설을 갖춰야 한다.
태주도 그 부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선계 소형 발전소.
그러기 위해선 엘리트 마나 결정체가 더 많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책상.
서랍을 열어봤다.
‘별거 없네.’
잡동사니들만 가득하다.
그럼 노트북은?
‘켜볼까?’
굳이?
뭐 한다고?
‘아니야. 해보자.’
솔직히 호기심이 생겼다.
이곳이 평범한 장소인가?
두꺼운 금고, 그 안에서도 안구 인식 시스템을 거쳐야 비로소 들어올 수 있는 비밀의 방, 그곳에 있는 노트북이다.
여기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할 수밖에.
태주는 노트북을 열어 전원을 켰다.
암호가 걸려 있을까?
‘역시 걸려 있었어.’
전원이 작동하지 않았다.
버튼 자체가 지문인식.
대체 뭐가 들어있길래?
이왕 한 김에 끝까지 가보자.
태주는 노트북을 챙겨 독재자 민타누와 그 측근을 모아놓은 방으로 다시 갔다.
“괜찮아?”
민타누는 여전히 바닥에 드러누운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다른 놈들은 정신을 잃었는지 아직 깨어나지 못했고.
“허억, 어어억, 너, 너···,”
“쉿! 손가락 좀 빌리자.”
“···뭐? 아, 그, 그건?”
태주의 손에 든 노트북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눈을 크게 치켜뜬 민타누.
“왜 그리 놀라? 야동이라도 들었어?”
“아, 안돼.”
“돼!”
“개 같은 놈···,”
“아, 거참, 말 많네.”
타닥, 타다닥.
태주는 민타누의 아혈을 짚었다.
이제야 조용해졌다.
그리고 놈의 손가락을 노트북 지문인식 장치에 가져다 댔다.
핏!
노트북이 켜졌다.
“···음.”
눈에 보이는 바탕화면.
프로그램 아이콘이 딱 하나 있다.
딸깍.
클릭해보니
[안면 인식을 위해 웹캠 카메라에 얼굴을 정면으로 위치해주십시오.]
‘안면 인식?’
이것도 보안장치임이 분명하다.
벌써 몇 단계인가?
금고에, 비밀방에, 지문인식에, 안면인식에.
태주는 빠르게 노트북을 밑으로 내렸다.
그리고 눈알을 빠르게 굴려대는 민타누의 뒤통수를 잡아 강제로 노트북 화면을 보게 만들었다.
[확인되었습니다. A1153 회원님, 딮 월드의 세상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딮월드? 이건 또 무슨···,’
그때였다.
파밧, 파바바밧!
몇 개의 창이 자동으로 띄워졌다.
일종의 웹브라우저였다.
주로 영어로 된 게시물, 제목 앞에 달린 말머리들.
구인, 구직, 팝니다, 삽니다, 정보 공유···,
언뜻 보면 평범한 듯 보였지만,
[팝니다] : 비기너 등급 각성자 장기 예약판매, 혈액형 O형,(+8)
[삽니다] : 시체 매입합니다. 최소 일반인부터.(+5)
[구직] : 각종 의뢰받습니다. 깔끔하게 처리해드립니다. 쪽지 주세요.(+20)
[구인] : 14세 미만 여아 구합니다. (삼한 제국 한정) 거부자, 일반인, 적합자 가리지 않습니다.(+2)
[팝니다] : MRC 10개, 선착순.(+115)
[정보] : 국가 간 전쟁 발발 임박, 자세한 내용은 결제 후 열람. (+39)
.
.
.
‘하아,’
이게 뭔지 알겠다.
딮웹.
법망을 피해 네트워크의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범죄 커뮤니티.
심지어 삼한 제국도 있었다.
괄호 안 숫자를 보니 댓글도 달려있고.
전쟁 임박은 또 뭐야?
어디서 일어난다는 거지?
“이런 미친 개새끼들이!”
딮웹이 있다는 소문은 들었다.
하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
순간!
“야앙!”
방으로 들어오는 이백이.
“군인들 다 쫓아냈어?”
“앙! 야아아아, 야아앙, 야아···, ”
“아···, 다 쫓아냈는데 마웅샨이 오고 있다고?”
“야앙.”
“그래, 알았다.”
마웅샨이 저항 세력을 규합해서 들이닥친 모양.
그나저나 이 노트북은···,
‘가지고 가야지.’
딮웹에 들어가려면 정해진 특정 도구로, 지문인식, 안면인식을 모두 거쳐야 접속이 가능하다.
접속 도구인 이 노트북은 확보했지만 다른 인증 절차는?
그렇다고 이 독재자 민타누 새끼를 계속 데리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물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태주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러고 나서 쓰러진 민타누의 얼굴과 눈동자를 근접 촬영하고, 찰칵, 찰칵, 손가락 지문도, 찰칵, 찰칵···,
역용술.
얼굴 바꾸는 건 어렵지 않지만, 동공이나 지문까지 똑같이 바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연습으로 극복이 가능하다.
또 하나 더.
태주는 쓰러져있는 민타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렇게 된 이상 놈이 여기 있으면 안 된다.
아무리 익명 접속이지만 딮웹 운영자들은 회원 정보를 다 알고 있겠지.
“넌 행방불명 상태여야 해. 혁명을 피해서 외국으로 도망간 걸로 하자.”
“읍읍읍!”
태주가 뭘 하려 하는지 알았나 보다.
공포에 질려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는 민타누,
스윽,
놈의 목을 잡고 강하게 힘을 주니,
우두두둑!
민타누에게서 생기가 빠져나갔다.
동시에 스슷!
시체는 태주의 무한공간으로 들어갔다.
바깥이 시끄럽다.
저항군이 자택 앞까지 다다른 모양.
“가자, 이백아.”
“야앙!”
사라진 민타누에 관한 사실은 따로 알려주면 되고,
나머지는 알아서 처리하겠지.
※ ※ ※
선계도 밤낮이 있다.
낮에는 천계 꽃을 한가득 따 가지고 온 천인들이 와서 신나게 놀다 간다.
게임, 영화, 전동카 레이싱, 앞마당에서 풋살도 하고, 더우면 음료수와 아이스크림도 먹고.
밤에는 건설 공사.
황천계에서 미리 차사들이 도착해 지옥의 문을 열고 죄인들을 불러들이면서 시작.
천선 종리 선인이 하늘 저쪽에 휘황찬란한 광원을 만들어 띄워 올려 작업에 불편함이 없도록 만들어줬다.
아직은 기초 작업 수준.
환수계나 요마계로 가서 목재와 석재를 구해다 다듬고, 땅을 파서 기초를 다지고, 주춧돌과 기둥을 세우고.
차사와 저승사자들이 죄인들을 감독한다.
간혹 반항하는 놈들이 있지만···,
“저 새끼, 게으름 피우네? 초열지옥(焦熱地獄)으로 보내버려.”
“아, 아니오. 잠시 한눈을 판 것뿐이···,”
팟!
게으름쟁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모습에 잔뜩 긴장한 죄인들.
초열지옥은 죄인이 가장 꺼리는 지옥.
말 그대로 뜨거운 곳이다.
육신이 활활 불타오르면서 녹고, 다시 재생되고, 또 녹고, 재생···,
그에 비하면 여긴 지옥도 아니다.
심지어 일 잘하면 새참, 간식도 준다.
심심해서 작업 현장에 놀러 온 주선 태백 선인이.
“너! 이름이 뭐야?”
“추, 춘삼이요.”
“아하, 네가 그 유명한 춘삼이구나. 이리 와서 소맥 한잔 마시고 해.”
“···소맥?”
혈마 왕춘삼은 주선이 건넨 살얼음 하얗게 낀 유리잔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일 잘해서 주는 거야.”
“가, 감사합니다.”
한 모금 삼키니,
“크아!”
“시원하냐?”
“으어어어···, 네.”
“특별히 안주도 준다. 이거 치킨이라는 건데.”
잘 튀긴 닭 다리도 한입.
바사사삭!
“어때 맛있지?”
혈마는 대답할 정신도 없었다.
치명적인 단짠의 조화.
그리고 살얼음 소맥.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검선의 파운딩과 암바에 영혼까지 제압당해 입 꾹 닫고 무조건 시키는 대로 일만 했다.
그런데 이런 보상이라니.
지옥에 온 이후, 수백 년 만에 먹어보는 음식.
게다가 천상의 맛이다.
‘더 먹고 싶어.’
그러려면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죄인들도 동요했다.
꿀꺽, 꿀꺽, 꿀꺽, 꿀꺽···,
사방에서 들려오는 침 넘기는 소리.
특히 천마는 미칠 지경이었다.
영혼 연결 탓에 소맥과 치킨의 맛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맥뿐인가?
신선들이 입고 있는 옷, 신발, 저 앞에 세워진 전동카, 이곳저곳에 쭉 뻗은 도로까지,
틀림없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세상이 교류하고 있다.
즉, 지구에서 물건들이 선계로 넘어온다는 의미.
대체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여기가 선계인가, 지구인가?
‘난 영혼연결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당군악은 왜?’
아무튼 미칠 것 같다.
저 치킨과 살얼음 소맥,
원래 아는 맛이 무서운 법이다.
먹고 마시는 것.
이 단순한 기본적인 욕구를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
천마의 몸놀림이 빨라졌다.
대성에 이른 천마신공이 위력을 발휘했다.
“···제기랄!”
쪽팔리지만 어쩔 수 없다.
아직까지도 현장에 남아있는 치킨의 찐득한 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팍팍팍팍!
손을 움직일 때마다 푹푹 파이는 땅.
천마군림보로 한발 내디디면 땅이 평평하게 단단히 다져지고, 천근추의 힘으로 기둥을 박고,
그러자 혈마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천마를 노려봤다.
상당히 위협적인 경쟁자였다.
‘이 새끼가···,’
핏덩이 주제에 감히 내 소맥을 넘봐?
혈마도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차사와 저승사자, 신선들도 박수치면서 그들을 독려했다.
“잘한다. 잘해! 안전 따윈 신경도 쓰지 마라. 안전해서 뭐 하게? 몸을 갈아 넣으면서 일해! 어차피 죽을 일도 없잖아.”
< 금고 안엔 뭐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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