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암철의 가치(1) >
황제 류태현은 요즘 하루하루가 살맛 난다.
요즘처럼 정치하기 편할 때가 또 있을까?
특별히 뭔가 하지 않아도 제국은 태평성대였다.
무엇보다 MRC 발명, 생산, 접종, 그리고 완치.
그로 인한 사회, 문화, 경제적 효과는 엄청났다.
위대한 혁명이자 미래를 향한 인류의 진보.
20대 초중반을 넘기지 못했던 아까운 인재들이 구원을 받았다.
단순히 목숨을 연장했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동안 숨죽이며 살았던 마나 거부자들이 적극적인 사회 활동으로 공동체 발전의 시너지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게 다 김태주 회장 덕분이다.
그가 삼한제국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감사할 뿐,
“이런 식이라면 황제 자리 내어놓아야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폐하보다 인기가 훨씬 많아졌는데요.”
궁정 비서 금수호가 살짝 놀리듯이 말했지만.
“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야. 제발 넘겨줬으면 좋겠어.”
“···하지만 절대 달라고 하지 않을걸요? 아마 다른 나라로 도망갈지도.”
“흠.”
황제도 생각이 있었다.
지긋지긋한 황제의 자리.
아들이나 딸 중에 똘똘한 놈이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계승해 주고 물러났을 것이다.
자식들이라고는 멍청한 놈들투성이기에 섣불리 넘겨줬다간 나라 망할까 봐,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뿐이지.
그나마 막내가 기대에 부응해주고는 있지만 그다지 눈에 차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라도, 나중에···,’
삼한제국이 계속 번성하려면 지도자가 똑똑해야 한다.
현재로선 김태주 회장 말고는 마땅한 후계자가 없다.
순간,
지이잉!
궁정 비서 금수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응, 날세. 무슨 일인가? 그래, 폐하와 함께 있긴 하지만···, 뭐?”
화들짝 놀라는 금수호.
황제도 궁금한 듯 호기심을 보였다.
“뭔데 그래? 스피커폰으로···,”
“아, 좀! 가만히 계셔보세요. 지금 중요한 이야기 하는 중이지 않습니까!”
“···.”
이 새끼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굉장히 중요한 일 같았으니까.
“왜 간다는데? 초청? 아, 아니, 전엔 콧방귀도 뀌지 않더니만,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건가? 어어, 일단 알았네. 폐하에게 말씀드려보지.”
금수호는 전화를 끊고 황제에게 말했다.
“김태주 회장이 아메리카 공화국으로 간답니다.”
“···뭐? 갑자기?”
“백악관 초청을 받아들였답니다. 지금 백악관에서도 난리가 났다고.”
“허어,”
제약회사 대표가 해외로 출장을 간다는 게 무슨 큰일이겠냐마는, 그 사람이 김태주라는 것이 문제다.
“단순히 초청받아 가는 건 아닐 거야.”
“그렇죠. 목적이 있을 겁니다.”
“뭘 거 같나?”
이유를 알 것 같다는 표정의 금수호.
“사업 확장이겠죠. 지금도 삼한제국 내 공장만으로 약품 생산을 치고 나가기가 버거운 상황 아닙니까?”
맞다.
가장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투자라면 문제 될 것이 있나.
“···투자라, 괜히 호들갑 떨었어. 아무것도 아니었군.”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응? 뭐가 또 있나?”
“아메리카 공화국에서 태홍 바이오 제약 생산공장을 유치하는 게 진짜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어,”
황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건 시작일 뿐입니다.”
“시, 시작?”
“빌리 피트먼, 그 새끼가 공장 유치 하나만으로 만족할 놈입니까?”
“어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고, 다 갖다 바쳐서 김태주 회장을 아메리카 공화국에 눌러 앉히면?”
“그건 안 돼!!!”
큰일 날 소리.
“이 새끼야!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이 씨가 될지도 모르잖아.”
“조심하자는 뜻이죠. 이거, 가볍게 보면 안 됩니다.”
대책을 세워야 한다.
멍청하게 보고만 있을 땐가?
“당장 아메리카 공화국 우리 대사관에 연락해. 아니, 전화 연결만 해줘. 내가 대신 이야기 하지.”
※ ※ ※
아메리카 공화국의 수도는 캔자스시티, 영토의 중앙에 위치하고, 교통도 편리해서 사라진 워싱턴의 대안으로 적당한 장소.
현재 캔자스시티 백악관은 초비상상황.
빌리 피트먼 대통령이 보좌관 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절대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비자는 어떤 걸로 발급해줬나?”
“영구비자입니다. 비자 면제나 마찬가집니다.”
“그걸로 되겠어? 시민권 발급도 추진해봐.”
“이미 하고 있습니다. 명분도 충분하니까요.”
MRC 개발자로서 인류의 희망으로 떠오른 김태주.
그가 아메리카로 온다.
김태주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쓸 수 있는 수단은 다 강구한다.
“철저하게 신경을 써야 해. 최국빈 대우, 아니 그보다 등급을 높이라고.”
“미인계도 써볼까요? 애인도 없고, 결혼도 안 한 거 같은데.”
“응? 애인이 없어?”
삼한제국, 아니 세계 최고의 신랑감이 여자친구도 없다니.
“어···, 혹시 취향이?”
“그럴 수도 있습니다. 접대 인원에 그 분야에서 인기 많은 ‘남자’도 포함시키겠습니다.”
“···어쨌든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퍼부어.”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
이런 기회가 두 번 올까?
“그건 그렇고, 방문 목적이 우리 초대에 응한 거라고는 했지만, 그뿐만은 아니겠지?”
“당연합니다.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겁니다.”
“뭘까?”
“투자 목적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예를 들어 신공장 건설, 혹은 인수합병 같은 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태홍 바이오가 아메리카의 로펌과 접촉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단순한 방문이라면 로펌이 뭐가 필요할까요?”
투자 목적이라.
바라던 바였다.
“둘 중 뭘까? 신공장 건설? 인수합병?”
“제가 만약 김태주 회장이라면 화이백 인수를 선택할 겁니다.”
“근거는?”
“새로 짓는 것보단 훨씬 좋죠. 특히 생기불끈 같은 경우는 카피약을 생산한 경험도 있어 노하우도 있고, 인수만 되면 당장이라도 생산에 들어갈 수 있겠죠.”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화이백을 노리는 게 분명합니다. 유럽 수출도 훨씬 쉬우니까요.”
항공 운송을 이용한다고 하더라도 아메리카 공화국과 매우 유럽은 가깝다.
김태주는 화이백을 인수 합병하길 원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화이백 주가가 얼마나 돼?”
“거래 중지된 상태입니다. 주가가 폭락해서 거의 휴짓조각 수준이라.”
“그럼 장내 거래를 통한 취득은 어렵겠고···, 지분 구조 파악해서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알아보자고,”
김태주는 자신의 딸을 살려준 사람이다.
화이백이 태홍 바이오에 합병되어 공장이 유치되면 서로 윈윈하는 신의 한 수.
그런데.
“사실 걸림돌이 있습니다.”
“무슨?”
“화이백 지분을 가지고 있는 투자자들요. 그들이 인수합병 정보를 입수하면 순순히 지분을 내놓겠습니까? 당장 프레드 밀러, 그놈이 가진 지분만 해도 10%입니다.”
“끄응.”
“또 중지된 주식거래가 재개될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주가가 하늘을 찌르겠군.”
보좌관의 말이 맞다.
정상적인 방법으론 인수가 힘들지도.
“당장은 아무것도 결정된 바 없으니까, 오늘 여기서 오고 간 이야기는 절대 비밀로 해.”
“알겠습니다.”
하지만 소문은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정보는 곧 돈.
백악관 보좌관 회의가 아무리 비밀리에 진행된다고 해도 이런 고급 정보는 반드시 새어나가게 되어 있다.
아메리카 공화국은 극 자본주의 국가다.
돈의 힘이 정치 권력보다 강하다.
화이백 CEO 프레드 밀러가 믿었던 것도 돈의 힘.
그래서 처음 카피약을 인지했을 때도 섣불리 치지 못했다.
MRC 수출이라는 명분이 주어져서 화이백을 날릴 수 있었던 거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다.
돈 냄새를 맡은 하이에나들이 가만히 있을까?
※ ※ ※
구례 태홍 바이오 본사에 임원들이 모였다.
아메리카 공화국 진출에 대한 전략을 짤 때.
태주도 회의에 참여했다.
“현재 화이백 주가는 거래 중지된 상황입니다. 따라서 주식 시장에서 매입하는 건 불가능하고 대신 블록딜로 장외에서 대량으로 매입하면···,”
“이게 참 어렵습니다. 대주주들이 지분을 순순히 내어놓으려 할까요? 특히 화이백 지분 대부분은 투자회사들이 쥐고 있습니다.”
“맞아요. 그들의 탐욕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적정가의 수십 배 이상을 요구할지도.”
화이백.
원래 부도덕한 제약회사로 유명했다.
예를 들어 유아 대사증후군 치료제를 개발한 제약회사가 있었다.
화이백은 그 제약회사의 자금줄을 막고, 적대적 MNA로 회사를 인수했다.
그러고 나선 유아 대사증후군 치료제 가격을 100배나 인상해 버렸다.
20달러밖에 안 하던 약값을 2,000달러로 올려버린 것.
그 짓을 한 놈들이 바로 프레드 밀러와 대주주들이었다.
그 사실은 태주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억지로 인수할 필요는 없어요. 협상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중단합시다. 끌려다닐 필요도 없고.”
“그럼?”
“플랜 B, 신규 공장 설립으로 방향을 틀죠. 뭐, 새로 공장을 지어서 생산하면 그만이니까.”
“시간이 많이 걸릴 텐데.”
“우리가 급할 게 있나요? 까짓거 천천히 팔면 그만이지.”
아쉬운 것이 뭐가 있나?
생기불끈이 사람의 목숨과 연관된 약도 아니고.
“그래도 접촉은 해보세요.”
“네!”
간단한 문제다.
칼자루를 쥔 쪽은 태홍 바이오니까.
그 와중에 황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 아메리카 공화국으로 간다고?
“네.”
- 왜?
“뭐, 놀러도 가고···, 겸사겸사 일도 하고.”
- 얼마나 오래 있을 건가? 곧 올 거지?
“그야 상황에 따라 다르죠.”
- 흐음, 사업에 배 놔라, 감 놔라, 할 처지는 아니지만, 될 수 있으면 빨리 와. 그리고 미국에서의 일정과 수행, 경호는 우리가 전적으로 책임지지. 내가 대사관에 다 이야기해놨네.
이렇게 고마울 데가.
- 그건 그렇고, ···이참에 결혼 생각은 없나?
“···.”
- 생각 있으면 나한테 먼저 이야기하게. 그렇지 않아도 혼기가 꽉 찬 딸들이 있는데···.
“아! 지금 제가 바쁜 일이 있어서, 아메리카 공화국에서 돌아오면 찾아뵐게요.”
- 어, 그, 그래.
태주는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이 양반이···, 갑자기 혼기 꽉 찬 딸 이야기는 왜 나와?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비행기 표도 예약했고, 거기 가서 숙박할 호텔도 정해졌고,
이제 출국이 하루 남은 시점.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선계 배송은 받고 가야지.
MRC 재료인 천계 꽃도 비축해놓아야 하고, 선계 전력 생산을 위한 발전기 모듈 부품도 보내야 하고.
순간!
찌르르르.
‘떴구나.’
여전히 꽉 찬 공유창고.
공유창고와 아공간 가방을 비우고, 지구의 물건들도 집어넣고,
시간은 넉넉하다.
반짝임이 꽤 오래 지속됐다.
그런데 낯선 물건들이 보인다.
구리반지 하나랑, 직육면체 모양의 새카만 철 주괴.
‘이건 뭐야?’
독선이 보낸 물건이다.
당연히 평범한 물건일 리 없다.
“···어?”
거무칙칙한 철 주괴 표면에 칼로 긁은 듯한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뭐지?
천천히 읽어보니.
“오!”
볼품없는 구리반지는 역시 보패였다.
참과 거짓을 판별해 낸다는 황천계 판관들의 장신구.
‘통역 반지보다 더 좋은데?’
바로 껴야지.
이제 사기당할 일은 없겠다.
다음으로 철 주괴.
이 쇳덩어리의 이름이 흑암철.
황천의 기운을 담고 있으며 무려 초열 지옥에서 녹여 제련했단다.
독선은 쓸데없는 물건을 보냈다며 미안하다는 글을 적었지만···,
바로 그때.
태주의 눈이 번쩍 떠졌다.
믿을 수 없는 내용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세, 세상에!’
이게 말이 되나?
마귀와 요괴들이 황천의 기운을 무서워한다고?
진짜일까?
그 말대로라면 이건 보물 중의 보물이다.
‘실험해보자.’
과연 지구의 마수들에게도 적용이 되는지.
아마도 될 가능성이 높다.
선계의 부적도 마수에게 효과가 있었다.
먼저 태주는 백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연씨, 접니다. 네네, 다른 게 아니라 아메리카 출국 일정, 일주일 정도만 연기할 수 있을까요? 아뇨, 특별한 일은 아니고요.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 ※ ※
태주가 구례 종합시장 공방으로 가서 흑암철 주괴를 가느다란 철사로 길게 뽑았다.
그 후, 연구실에서 긴꼬리 쎅토끼 한 마리를 들고, 지리산 마수 밀집지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끼잉? 끼기기기긱! 끼기기기···,”
“무섭냐? 왜 이리 날뛰어?”
쎅토끼 목에 목줄을 채워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했다.
그리고 나무 기둥과 흑암철 철사로 얼기설기 간단한 울타리를 만들어 쎅토끼 주변에 설치했다.
여긴 자이언트 반달곰 출몰 지역.
쎅토끼는 먹이사슬 최하에 있는 마수라, 금방 잡아 먹힌다.
하지만 이 흑암철 울타리라면?
태주는 만리비검을 타고 하늘 위로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기척을 죽여 조용히 아래 상황을 관찰했는데.
‘왔구나.’
풀숲을 헤치고 나타난 자이언트 반달곰 한 마리.
쎅토끼의 울음을 듣고 나타난 모양.
‘···진짜였어.’
분명 쎅토끼를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놈은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그냥 보자마자 도망갔다.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
조금 지나자 흑암철 울타리 주변은 거의 공동화됐다.
마수들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변종 3줄 무늬 모기조차도 접근하지 않았다.
‘미쳤구나. 미쳤어.’
지옥의 금속 흑암철.
마귀나 요괴뿐 아니라 마수들에게도 효과가 있다.
기가 막힌다.
천계 꽃에 버금가는 효용성.
사용할 곳이 너무나 많다.
태주의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예를 들어.
‘흑암철로 철도를 깔면?’
기찻길 주변은 마수 안전지대가 된다.
또한,
‘바다에도 적용되나?’
해양 마수들이 즐비한 넓은 바다에 말이다.
이것도 실험할 필요가 있다.
만약 이마저도 성공한다면?
‘바닷길이 열리는 거지.’
물류 혁명.
그로 인한 세상의 변화.
‘이러면 굳이 아메리카에 공장을 세울 필요가···,’
삼한 땅에 추가 공장을 세워 바닷길을 이용해 수출하는 것이 훨씬 편할 수도,
뭐, 화이백을 인수하는 것도 좋긴 하지만.
‘어쨌든 선택지가 하나 더 늘었네.’
마음이 급하다.
바다에도 적용되는지 빨리 알아보자.
< 흑암철의 가치(1)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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