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
태주 일행이 아메리카로 떠난 시각.
백서연은 삼한제국에 남았다.
해야 할 일이 있다.
김태주 회장님에게서 조선소가 필요한 이유를 들었기 때문이다.
‘뱃길이 열릴지도 모른다고?’
그 말을 한 사람이 회장님이 아니었다면 개소리하지 말라고 면박이나 줬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백서연은 태주의 말을 굳게 믿었다.
그가 뱃길이 열린다고 했으니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먼저 조선소 물색.
대형 컨테이너선을 건조할 수 있는 규모여야만 한다.
마침 적당한 곳이 있다.
거대한 조선 산업단지가 위치했던 양산.
50년 전쯤에 제국의 국책 사업으로 새로 건설한 조선소였다.
그러니까 해양 엘리트 마수가 출현하기 직전에 말이다.
인류는 오만했다.
처음엔 거대한 선박의 크기에 엘리트 마수들도 피해 다닐 거라 예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하필이면 양산 조선소에서 첫 번째 초대형 선박이 건조되자마자 엘리트 해양 마수의 습격이 시작됐다.
바다 곳곳에서 엘리트 해양 마수의 공격을 받아 침몰하는 선박들.
양산 조선소는 새로 만든 배를 띄워보지도 못하고 망해버렸다.
현재 양산은 평범한 어촌 지역.
가두리 양식과 근해 어업으로 먹고사는 곳.
백서연은 직접 양산으로 현지 조사를 나갔다.
혼자 가기 뭐해서 지리산 방어군단에 연락해 도민수 소령을 불렀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조선 산업단지의 모습.
가동이 중단된 양산 조선소.
텅 빈 도크들만이 남아있었다.
삭막하고 을씨년스러웠다.
그런데.
“서연씨, 저기 보세요.”
도민수가 손가락으로 뭔가를 가리켰다.
“네? 어딜···,”
“저 컨테이너선 보이시죠?”
“어머?”
바다가 아닌 육지에 올라와 있는 엄청난 크기의 대형 배, 길이만 해도 400m 가까이.
“저게 뭔질 아세요?”
“···배잖아요.”
“겉모습은 그렇지만 양산의 명물인 선박 호텔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난다.
50년 전, 양산 조선소에서 처음 만들어 띄워보지도 못한 초대형 컨테이너선.
흉물로 변해버릴 위기에 처했지만 한 숙박 업체가 배를 싼값에 인수해 내부 개조를 거쳐 호텔로 만들었다.
인기가 있었다.
해안가 바로 옆에 위치해 풍경도 좋았고, 무엇보다 배를 개조해 만든 호텔이라는 장점이 있었기에
“꽤 잘 보존되었죠? 매년 페인트칠도 해서 녹도 슬지 않았고.”
“괜찮네요.”
“하지만 이 호텔도 사정이 좋지 않대요. 처음엔 배 호텔이라는 특징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경영 상태가 방만해서 매물로 나왔답니다.”
“그래요?”
가만!
백서연의 눈이 반짝였다.
김태주 회장님이 조선소를 알아보라고 한 목적이 뭐겠나?
배를 만들어 바다에 띄워보려는 것.
그런데 이미 만들어진 배가 있다면?
구조가 변경되었다고 해도 다시 원래대로 돌리면 그만이다.
새로 만들기보다 훨씬 쉽고 빠르다.
“저 호텔에 식당도 있겠죠?”
“당연하죠. 하지만 맛이 더럽게 없다던데.”
“그럼 가봐요. 정말 맛이 없는지,”
“네! 가시죠.”
배도 고픈데 잘 됐다.
정작 관심 있는 건 매물로 나온 배 호텔의 가격이지만.
※ ※ ※
태주가 탄 전세기는 마수 안전 항로를 통해 아메리카 공화국으로 가는 중.
‘전세기라···,’
타보니까 마음에 든다.
푹신한 침대, 쾌적한 화장실, 심지어 샤워도 할 수 있다.
비행 마수 출몰 지역을 피하느라 이리저리 돌아가는 건 별로였지만.
‘나도 하나 주문할까?’
전용기 탈 만큼의 재력은 된다.
흑암철 물량이 충분하면 그걸로 비행기를 제작해도 되고.
캔자스시티 공항에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다.
시간이 꽤 걸릴 것 같다.
그래서 비행기 안에서도 회의가 이뤄졌다.
태주와 함께 비행기를 탄 태홍 바이오 뉴서울 지점의 마석우 부장이,
“회장님, 제정원 문경식 차장이라는 분이 문건을 보내왔습니다.”
“아···, 내용은 뭐죠?”
“화이백 지분 구조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제정원 일 잘하네.
화이백 인수하겠다고 입에서 꺼낸 적도 없는데.
물론 인수 합병을 한다면 화이백이 최적의 회사라는 건 누구나 예상 가능한 사실이긴 하지만.
태주는 보고서를 천천히 살펴봤다.
4명의 대주주가 50%가 넘는 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
카피약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갈 때 화이백 주가는 200달러대, 역대 최고가였다.
그러나 CEO 프레드 밀러가 구속되고 생산 중지 명령이 떨어지자 추락한 주가는 70달러대.
고점 대비 3분의 1 가격으로 하락했다.
이 정도면 인수할 만하다.
그러나 대주주들이 가만히 있을까?
보고서엔 최근에 알아낸 듯한 몇 가지 정보들도 적혀있었다.
태홍 바이오의 화이백 인수 의향이 확인되면 중지된 주식거래가 재개될 수 있다는 예측.
마석우 부장이 심각한 목소리로 태주에게 말했다.
“화이백은 거의 부도 수준까지 몰렸죠. 그런데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회사의 주식을 다시 거래한다? 분명 배후가 있습니다.”
태주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주식거래가 재개되면 인수가 어려워질 겁니다.”
“그렇겠죠.”
“아마 최고점인 200달러 이상 돌파할지도 모릅니다.”
이미 세계적인 제약회사로 발돋움한 태홍 바이오.
무조건 성공이 보장되어 있었다.
생기불끈이 다시 판매된다고 생각해보라.
MRC보다 몇 배 더 많은 이익을 거둘 수 있다.
주식거래를 재개하도록 조종하는 놈들이 누구겠나?
탐욕스러운 대주주들이겠지.
순순히 당해줄 수 없다.
“계획을 수정하겠습니다. 화이백 인수는 후 순위로 미룹니다.”
“어···, 그럼?”
“일단 신공장 건설로 초점을 맞추세요.”
사실 그마저 안 할 수도 있다.
흑암철 수량만 확인하면.
“그럼 주주들과 접촉하지 말까요?”
“네, 후 순위가 아니라 그냥 폐기해도 좋습니다.”
사실 태주는 확신하고 있었다.
황천계에 엄청난 물량의 흑암철이 있을 거라고.
같은 영혼이기에 누구보다 당군악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
만약 물량이 적었다면 흑암철 주괴를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천계 꽃을 보낼 때도 같았다.
마나 거부증 치료제를 만들고 남을 만큼 충분했기에 샘플을 보낸 거였다.
솔직히 흑암철의 존재를 미리 알았다면 아메리카로 오지도 않았을 터, 가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나선 거지.
이윽고,
태주가 탄 비행기가 캔자스시티 공항에 착륙했다.
공항 측 배려로 입국 수속도 생략한 채 입국장을 통해 밖으로 나왔는데,
“어···,”
“무슨 사람이?”
“많네요.”
“지나갈 틈도 없겠네.”
그를 환영하기 위해 모인 수많은 인파.
피켓을 들고 태주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김태주 회장님의 아메리카 방문을 환영합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메리카 마나 거부자 가족 모임.>
<태홍 바이오의 성공적인 아메리카 진출을 기원합니다.>
기자들이 떼로 몰려왔다.
촤라라라락! 촤라락!
사방에서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방문 목적이 궁금합니다.”
“회장님! MRC 4차 출고는 언제쯤 진행되는 겁니까?”
“이전보다 물량이 줄어들 거란 예측이 있는데, 사실입니까?”
“생기불끈과 새살쑥쑥 생산은요?”
“아메리카 국민들이 피로회복 드링크제 출시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태홍 바이오가 아메리카에 진출한다는 소문도 있던데 진위를 밝혀주십시오.”
저지선을 뚫고 기자들이 몰려왔다.
앞으로 걸어 나갈 수도 없을 만큼.
다행히,
“회장님! 이쪽으로, 저희가 수행하겠습니다.”
백악관에서 나온 경호원들이 태주 일행을 둘러쌌다.
하지만.
“우리가 모시겠습니다. 삼한 대사관에서 나왔습니다. 회장님.”
아메리카 주재 삼한 대사관에서도.
그러자 작은 다툼도 일어났다.
“여긴 아메리카입니다. 손님 대접은 우리가 하는 게 맞죠.”
“회장님은 우리 국민인데요? 걱정하지 마시고 돌아가세요. 삼한 대사관에서 책임집니다.”
난리가 났다.
환영인파에, 기자에, 백악관에서 나온 사람들, 대사관에서 나온 직원들, 태주가 정리했다.
“그냥 같이 갑시다.”
“네? ···네.”
“어디로 먼저 갈까요?”
“기자회견장이 마련되어 있습니다만, 원하지 않으시면 취소해도 괜찮습니다.”
“아뇨, 가보죠.”
마침 잘 됐다.
좀 전에도 기자들이 질문을 해왔다.
인수 합병에 대한 의도를 떠보려는 모양인데, 확실하게 결정지어 주지.
태주는 기자회견장으로 이동해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처음엔 간단한 질문들로, MRC를 개발하게 된 계기, 인류의 구원자가 된 소감이 어떠냐, 돈은 얼마나 많이 벌었냐, 결혼할 생각은 없냐? 취미는 어떻게 되냐···,
자연스럽게 대답해줬다.
물론 영어로.
통역 반지가 있으니 얼마나 편한지.
그러다가.
“회장님, 이번 방문 목적에 아메리카 공화국에 대한 투자 목적도 있으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혹시 그럴 의향이 있으신지.”
“글쎄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만,”
“만약 투자하신다면 인수 합병입니까? 예를 들어 화이백 같은···,”
올 것이 왔다.
태주는 질문을 한 기자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화이백 인수 합병은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네?”
당황한 듯한 기자의 표정.
보통의 사업가들은 저렇게 단호하게 이야기하는 일이 잘 없다.
대충 두리뭉실하게 표현하는 법인데.
“···전혀요?”
“네, 절대로.”
“앞으로 바뀔 여지는···,”
“없습니다.”
웅성웅성, 기자회견장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럼 신공장을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고민 중입니다. 그것도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았어요.”
또 다른 기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질문하세요.”
“먼저 MRC를 발명해주신 것에 대해 회장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별말씀을.”
“하지만 아메리카 공화국 시민들이 생기불끈 피로회복 드링크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록 카피약이었지만 그로 인해 삶의 질이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그런가요?”
“네, 그래서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하루 빨리 진품 피로회복 드링크가 아메리카 공화국에서 유통되기를.”
기자의 말이 맞다.
아예 안 먹어봤으면 모를까.
그래서 태주도 화답했다.
“네, 최대한 빠르게 생기불끈과 새살쑥쑥이 아메리카 공화국에 공급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자 처음 인수 합병에 물어봤던 기자가,
“대체 어떤 방법으로요? 신공장을 세우신다면 몇 년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설마 수출을 염두에 두시는 것도 아닐 테고, 이럴 거면 차라리 화이백 인수 합병이 가장 편하고 합리적인 방법 아닙니까?”
태주는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하며 의문을 표했다.
“이상하네요. 아까부터 계속 화이백 인수를 언급하시는데, 제가 그렇게 대답해주길 바라는 겁니까?”
“···네, 네?”
“아니면 누가 질문하라고 시켰나요?”
모두의 시선이 그 기자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어쩔 줄을 몰라 허둥거리다가,
“절대 아닙니다. 시키긴 누가 시킵니까? 단지 제 의견일 뿐입니다. 모두가 만족할 방안이 화이백 인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잉,
판관의 반지가 진동했다.
역시 거짓말이었다.
슬슬 끝내자.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화이백을 인수할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조용해지는 회견장.
“그러나 제 이름을 걸고 약속드리죠. 늦어도 6개월 안에 생기불끈과 새살쑥쑥을 아메리카 공화국으로 공급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태주는 기자회견장을 빠져나갔다.
마석우 부장이 재빨리 옆에 붙어서 물었다.
“회장님, 숙소로 모실까요?”
“으음, 이후 일정은요?”
“오늘은 없습니다. 그리고 백악관 만찬은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틀 뒤로 잡았습니다.”
“그래요? 그럼 일단 푹 쉬고 내일 백화점으로 가봅시다. 쇼핑이나 해야겠어요.”
빌리 피트먼 대통령과의 만남은 모레.
내일은 쇼핑.
백악관 만찬보다 중요한 것이 쇼핑이다.
물건 쓸어 담아야지.
※ ※ ※
태홍 바이오 김태주 회장의 입국 기자회견.
데이비드 모건과 투자자들도 생방송을 통해 지켜보고 있는 중.
“미친!”
이게 뭔가?
절대 화이백을 인수할 일이 없을 거라고?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니.
기자회견 직후, 주식거래가 재개되도록 미리 손까지 써뒀는데.
실제로 나스닥 시장에서 중지된 화이백 주식거래가 풀렸다.
하지만 폭등은커녕 더 떨어지고 있었다.
70달러대로 시작한 주가가 지금은 30달러대.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
김태주의 말 한마디에 이렇게 됐다.
원래 주가는 현재가 아닌 미래 가치에 의해 움직인다.
미래가 보이지 않으니 더 떨어지는 건 당연했다.
애초 거래 중지는 누가 주도했나?
자신들이 스스로 했다.
카피약 사태 때문에 하락의 폭이 너무나 심해서 더 떨어지지 않도록 손을 썼다.
반등의 기회를 잡을 때까지, 사람들의 기억에서 카피약 분쟁이 지워질 때까지, 그리고 호재거리를 찾아내어 주가 상승을 유도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화이백은 저력이 있는 회사다.
가지고 있는 특허만 해도 몇 개인데.
그러나 김태주, 저놈 때문에 반등의 기회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퍼킹!”
“망할 놈!!!”
“···죽여버리고 싶군.”
학실하게 인수하겠다는 답변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모호하고 애매한 표현이면 충분했다.
예를 들어.
- 고심하고 있다.
- 내부적으로 조율 중이다.
- 아직 결정하진 않았지만 가능성은 열어두고 있다.
- 적당한 가격이면 생각해 볼 수도.
이 정도 답변만 얻어내도 언론이 부풀려서 기사를 낼 것이고, 그럼 주가는 폭등하게 될 것이 뻔했다.
그런데 저렇게 단호하게 선을 그어?
“블러핑이 아닐까요?”
“그럴 겁니다. 주가를 의도적으로 떨어뜨려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수작일 테죠.”
“욕심 많은 새끼가, 감히 장난질을 쳐.”
조금 비싸게 사면 어때?
수년 안에 그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는데도 말이다.
“6개월 안에 생기불끈과 새살쑥쑥을 아메리카 공화국으로 공급하겠다고 호언장담한 걸 보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 기간동안 화이백을 인수하겠다는 거겠죠. 백악관과 짜고.”
다른 의견도 있었다.
“설마 수출이라도 하려는 건가?”
“어림도 없지, 비행기로 실어나르겠다고?”
“···아공간 가방이라면요?”
“아공간이라.”
데이비드 모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아공간 수납공간이 얼마나 된다고, 겨우 컨테이너 하나 분량이요. 아공간 가방이 100개, 아니 1,000개 있어도 모자랄 거요.”
아공간 가방으로 생기불끈 수출은 턱도 없다.
전 세계로 풀린 아공간 가방을 다 모아도 100개가 안 될 텐데.
“대형 선박이라면 모를까, 컨테이너를 2만 개 정도 적재할 수 있는 초대형 배 말이오.”
“그건 아공간 가방보다 더 현실성이 없지.”
“그래요. 바다를 어떻게 건너겠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화이백 인수 말고는 아메리카 진출이 어렵다.
분노에 찬 표정으로 말하는 데이비드 모건.
“일단 내가 김태주를 만나보겠소. 백악관 만찬에서.”
만나서 똑똑히 각인시킬 것이다.
개수작하지 말라고.
<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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