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8화 (8/384)

EP.8 지하실에는 괴물이 산다

좆됐다.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론이다.

아무래도 나는 좆된 것 같다.

지하 무기고로 한 걸음 내디딘 순간 후회가 밀려 들어왔다. 아마 고래의 아가리 속에 들어가도 이보다는 마음이 편하리라. 최소한 고래는 인간의 피를 주식으로 삼지는 않으니까.

인간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 그 괴물이 몇십 년간 기거한 밤의 영지다. 내가 발을 들인 순간부터 내 몸을 돌아다니는 피는 내 것이 아니었다. 핏줄 아래에서 날뛰는 피가 한쪽으로 쏠린다. 내 몸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야 할 것이 흠칫거리며 자꾸 탈선하려고 든다.

독심술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흡혈귀가 작정하고 나를 죽이려고 한다면, 그런 살의를 품은 순간… 저항할 새도 없이, 내 몸은 비쩍 마른 미라가 되어버릴 테니까.

회귀자는 괜찮은가? 기감이 예민한 만큼 더 큰 압박감을 느끼고 있을 텐데.

‘엄청난 기운이야. 전 회차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힘…. 하지만 이 시점은 [그 사건]이 벌어지기 전이야. 더 난폭하려나, 아니면 온건하려나? [그 문제]가 해결되기 전의 티르칸쟈카는 나에게 힘을 빌려주려나.’

[그 사건]이 뭔데? [그 문제]가 뭐야? 제발 너만 아는 생각하지 말고 회상이라도 해주면 안 될까?

‘고민하지 말자. 아직 티르칸쟈카와 겨룰 정도의 힘을 되찾지는 못했으니까. 죽으면 죽는 거지, 뭐.’

좋아. 여기까지다. 회귀자와는 엮이지 않는 게 상책이라는 사실이 판명났다. 누군가에게는 되돌아갈 수 있는 수많은 목숨 중에 하나지만 나에게는 하나뿐인 삶이라는 말이다.

죽으면 죽어야지? 이런 사상을 가진 사람과 함께한다면 정말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르다.

나는 몸을 빙글 돌려 문 밖으로 향했다.

“자. 셰이 교육생. 볼일이 있는 건 셰이 교육생일 뿐이니, 저는 이만 물러가보….”

쾅.

내 눈앞에서 철문이 닫혔다. 기이한 붉은 빛을 내는 낙인이 어림도 없다는 듯 눈앞에서 번쩍였다.

망연자실한 나를 보고는 회귀자가 코웃음을 쳤다.

“응. 잘 가. 갈 수 있다면 말이지만.”

퇴로가 막혔다. 내 몸뚱아리조차 보이지 않는 칠흑같은 어둠이 나를 감쌌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회귀자의 뒤를 따랐다.

“왜. 돌아갈 것처럼 말하더니?”

“생각해보니 셰이 교육생이 무슨 이유로 지하 무기고를 방문했는지 파악해야 하군요. 잠시만 동행할까요?”

“그러든가.”

어차피 여기까지 들어온 이상 운명공동체. 회귀자는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벽을 짚고는 더듬더듬 나아갔다. 발밑도 보이지 않은 데다 미묘하게 미끄러워서 한 걸음 내딛는 데에도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했다.

젠장. 곧 계단이 이어질 텐데. 이러다가 저 아래까지 미끄러지는 거 아니야? 군국 교관이라는 작자가 무기고에서 미끄러졌다간 비웃음을 넘어 의심까지 받게 될 텐데.

그보다 이런 어둠에서 회귀자는 어찌하려나.

‘칠색안七色眼 개안, 청안靑眼.’

그때, 회귀자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을 찔렀다. 반짝이는 눈물이 그녀의 눈에 맺히더니 파랗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빛을 삼키는 암흑 속에서도 푸른 불꽃은 사물의 윤곽을 쫓았다.

‘칠색안의 오색, 청안은 깊이를 보지. 흡혈귀가 그러모은 어둠도 꿰뚫어 볼 수 있어.’

별의별 기술도 다 있네. 능력이라고는 독심술밖에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청안은 선과 면으로 된 세상을 본다. 빨리 움직이는 물체나 윤곽이 흐릿한 둥근 부분은 잘 감지하지 못하지만, 어둠 속에서도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회귀자는 이곳저곳으로 푸른 시선을 던졌다. 꽉 막힌 천장과 벽이 시야를 가로막는다. 유일한 통로는 저 아래로 향하는 것뿐. 회귀자의 시야에 멀리 뻗은 사다리처럼 촘촘히 좁아지는 사다리꼴 모양 선이 흐릿하게 나타났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었다.

회귀자는 약간의 고민도 없이 계단을 향해 발을 뻗었다. 한 두어 걸음 내려가다가, 문득 나를 슬쩍 돌아보았다.

‘어디, 네가 이 어둠 속을 헤쳐나갈 수 있나 볼까?’

고맙다. 내 쪽을 봐줘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내 바로 앞부터 계단이 시작되고 있었다. 심지어 모퉁이가 깨져서 반쯤 깎여나간 계단이었다. 섣불리 발을 디뎠으면 그대로 저 아래까지 굴러떨어졌을 것이다.

휴, 다행이야. 나는 깨진 계단을 피해 조심히 발을 디뎠다. 그러자 앞쪽에서 칫,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났다.

‘흡혈귀가 그러모은 어둠도 간파했다고? 도저히 바닥을 알 수가 없는 남자야. 멍해 보이는 녀석이 나의 천앵과 흡혈귀의 어둠도 파훼하고는….’

이래서 사람은 좀 아랫물에서도 경험을 해보아야 한다. 회귀하면서 맨날 검성이나 성녀처럼 대단한 사람이랑 만나다 보니, 진짜 평범한 사람을 보고도 가늠을 못하네. 서민체험이 필요한 이유다.

어쨌건 나와 회귀자는 나란히 지하를 향했다.

‘왜 이리 가깝게 걷는 거야? 거슬리게.’

회귀자는 내 접근을 부담스러워한 모양이지만 나는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그녀의 시야를 빌려 쓰는 지금 거리가 벌어졌다간 내 발밑을 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반쯤 업혀가는 심정으로 회귀자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그렇게 지하 무기고에 도착한 뒤, 회귀자는 푸른 눈동자로 벙커를 돌아보았다.

유사시에 벙커로 활용될 수 있는 무기고에는 기다란 복도와 양옆으로 난 널찍한 방이 있었다. 혹여나 비상 사태가 일어난다면 저 좁은 방 안에 숨어 구조를 기다리라고 만든 공간인데, 그 안에는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회귀자가 푸른 눈으로, 저 안쪽에서 이쪽을 엿보는 희미한 그림자들을 노려보았다. 머리가 천장에 닿을 듯한 커다란 말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사역마인가? 대전 때 대부분을 잃었다고 들었는데… 아직 혈마 랄리온은 건재한 것 같네.’

지하 무기고를 도대체 어떻게 쓰고 있는 거야. 왜 커다란 말이 혼자 벙커를 다 쓰고 있는 건데. 것보다 사역마 주제에 나보다 좋은 방을 쓰다니. 인권을 보장하라.

혈마에 잠시 시선을 던지던 회귀자는 다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나도 허둥지둥 그 뒤를 따랐다.

기다란 복도 끝, 그곳에는 이질적인 문이 있었다.

효율성과 합리성을 중시하는 군국은 문이나 벽에 예술을 섞지 않는다. 문의 용도는 공간을 개폐하기 위함이며 벽은 공간을 구분 짓기 위함이니, 그 이상의 것은 사치라는 논리다. 차라리 문에 따로 장식을 달고 벽에 액자를 걸지언정, 철로 된 문에다가 조각을 새겨넣고 벽에다가 벽화를 그리는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인 행위는 죄악처럼 여겼다.

허나, 그런 군국마저도 시조의 앞에서는 신에게 빌고 싶었던 모양이다.

통짜 강철로 주조된 그 문에는 성경의 삽화로 어울릴 법한 그림이 음각되어 있었다. 벽에는 커다란 날개가 달린 아름다운 천사가 나팔을 부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나팔의 방향은 저 안쪽 문을 향해 있어서, 혹여나 불길한 자가 문을 열고 나오면 즉시 징벌을 내릴 것 같았다.

교회에서나 볼 법한 조각과 벽화. 지하 무기고는 어두웠으나, 조각과 벽화는 내 눈으로도 똑똑히 보였다.

그야, 이 어둠 속에서, 그 장엄한 조각과 성스러운 그림은.

피로 축제를 벌이는 것처럼, 선혈에 젖어 붉게 빛나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 그림과 마주하고는,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저기. 셰이 교육생.”

“왜?”

“이만 돌아갈까요?”

“겁이라도 났어?”

“네.”

내 솔직한 대답에 회귀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너무 무섭잖아. 이거. 차라리 안 보이는 편이 나았다고.

성황청에서 이 광경을 봤다면 신성 모독이라며 이단심문관을 파견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시조 티르칸쟈카라는 말을 듣는다면 재빨리 파견을 취소하고는 못 본 척할 것이다. 그건 이단심문관의 피만 선물해주는 꼴이 될 테니까.

흡혈귀의 시조란 그런 존재다. 내가 강하든 약하든, 두려움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존재.

회귀자가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생각보다 겁이 많네.”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있는 거죠. 위험에 대한 두려움은 생존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요.”

“그런가?”

‘그래서 내가 열세 번이나 죽은 것일지도.’

아. 생각해보니까 그러네. 너는 죽어도 상관없잖아. 갑자기 억울해졌다.

“너는 겁이 난다는 녀석이 그녀를 어르신이라고 불러?”

“어르신 맞잖아요?”

“에휴. 말을 말자.”

말을 말자라는 건 자기 꼴리는 대로 하겠다는 뜻. 회귀자는 성큼성큼 걸어가서는 문에 손을 댔다. 그다지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문이 저절로 열렸다. 꼭 먹잇감을 기다리는 짐승의 아가리처럼.

“아, 망할. 대지모신이시여.”

어쩔 수 없다. 어차피 먹혔다면 입 안이나 목구멍 너머나 별 차이 없겠지. 문이 닫히기 전에 나는 회귀자를 따라 마지막 방으로 들어갔다.

조명과 전등이 일상화된 현대와는 조금 시대착오적인 횃대가 벽에 걸려있다. 쇠못과 정으로 돌을 직접 깎아 새장처럼 만든 뒤, 거꾸로 뒤집어 만든 고상한 횃대였다. 한 땀 한 땀 조각한 둥지 모양 장식에는 장인의 혼이 깃들어, 저 안쪽에서 금방이라도 불사조가 날개를 펴며 솟아오를 것만 같다.

피처럼 붉은 불꽃이 하늘을 탐하며 위로 솟구친다. 그러나 불꽃의 비상은 오래지 않았다.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 무저갱에 있는 어떤 감옥의 지하층. 하늘까지 날아가기에는 너무나도 가혹한 곳이다. 툭, 천장에 닿은 불꽃이 바스러지며 빛의 시체가 사방으로 흩날린다.

애꿎게도 빛은 스러지기에 의미가 있다. 어슴푸레 비치는 마지막 방. 천장에 부딪혀 산란된 빛이 붉은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 덕분에 나는 방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방팔방이 새빨간 건 단지 불꽃이 붉은색이어서만은 아니었다. 피. 수천 리터는 될 법한 피로 도배가 되어있었다. 천장에도, 바닥에도, 벽에도. 방 자체가 커다란 심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너무나도 많은 피가 꿀렁이며 흐르고 있다.

허나, 이토록 많은 피가 흐르고 있음에도 혈향조차 나지 않았다. 피의 냄새도 피의 일부. 시조의 권능 아래 있었으니까.

티르칸쟈카가 허락하지 않는 한, 나와 회귀자는 피냄새조차 맡을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연유로 나를 만나러 왔느냐?]

방 한가운데 있는 새카만 목관. 귀중한 제향나무로 몸체를 짜고 정성스레 옻칠을 한 뒤, 날개가 달린 붉은 십자가를 새긴 절품. 그 안에서 하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피가 날뛴다. 혈관 아래에서 나의 생명을 위해 헌신해야 할 피가, 그리운 임을 맞이하러 버선발로 뛰쳐나가려고 들었다.

압도적인 권능. 그것과 마주한 회귀자는.

“티르칸쟈카. 거래를 제안하러 왔다.”

흡혈귀를 마주하고는 당당하게 말했다.

“나에게 혈조술을 가르쳐 줘.”

느닷없이 찾아와 기술을 가르쳐달라는 말. 어이없을 법도 하건만, 흡혈귀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천여 년의 세월동안 무언가를 얻기 위해 그녀를 찾아온 사람은 네 자릿수가 넘었으므로.

피를 조종하는 권능. 오랜만에 듣는 그 이름에, 흡혈귀는 조용히 되물었다.

[나의 권속이 되고자 하는 것이냐?]

흡혈귀가 되면, 몸 안에 시조의 피를 받아들이면 자연스레 피를 다스리는 권능이 생긴다. 예전부터 불로불사를 노리고 시조의 피를 탐하거나 요구해온 이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흡혈귀는 약간의 진부함까지 느끼며, 회귀자를 향해 그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이냐고 물었다.

그러나 회귀자는 흡혈귀가 될 생각이 없었다. 대신, 더 깊고 근원적인 것을 요구했다.

“아니, 그런 방식으로 얻을 생각 없어. 흡혈귀가 되기 이전에 네가 배웠던 그 기술을 가르쳐 줘.”

아주 짧은 순간, 감정이 요동친다. 저 관 속에서 격한 당혹과 혼란이 일어났다. 한순간 방 안의 모든 핏물이 조여들 듯 모여든다.

하지만 상대는 천 년을 넘게 살아온 흡혈귀다. 고작 이 정도 일로 피가 뜨거워지는 일은 없다. 흡혈귀가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대꾸했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아냈지?]

회귀자는 흡혈귀를 마주했다. 오직 회귀자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을 하면서.

‘저번 회차의 네가 알려주었지.’

미소를 지은 회귀자는 잠깐, 아주 잠깐 감상에 잠겼다.

흡혈귀가 흡혈귀로 변하기 전, 그녀도 한 명의 인간이었을 때. 그때 소녀는 피를 다룰 수 있더랬다. 의원인 아버지를 도와 열심히 의원을 꾸려나가던 작은 소녀 덕분에 수많은 사람이 덕을 보았다. 인간일 적에는 기껏해야 흐르는 피를 멈추는 정도밖에 안 되는 능력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의 미소를 버는 데에는 충분했다.

이전 회차의 흡혈귀는 그 사실을 넌지시 말하며, 자신에게 배우라고 조언하고는… 조용히, 아무도 추모하지 않는 숨을 거두었다.

회상이 끝났다. 나는 심해에서 튕겨 나오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이게 회상이구나. 너무 짧고 단편적인 기억이었지만, 나름의 성과는 있었다.

회귀자의 기억을 조금 읽었을뿐더러, '재앙'에 대한 정보도 조금 알아냈으니.

아무래도 재앙이 오기는 오는 모양이다. 시조 티르칸쟈카라는 괴물조차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을 정도로 강력한 재앙이.

[다시 물으마.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아냈지?]

“가르쳐주면, 알려줄 수도 있는데?”

[…호기롭구나.]

짧은 침묵. 느릿한 생각. 수천 수백 가지 상념이 스치고 사라진다. 그러던 어느 순간. 흡혈귀의 관심은 나에게로 향한다.

[그쪽은. 어떻게 생각하지?]

아니, 갑자기? 분명 조용히 있었는데 나를 왜 지목한 거지. 나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어르신 뜻대로 하십시오.”

[…어르신?]

어라? 방금 피가 꿈틀거렸다. 발끈한 건가? 나는 다급히 말했다.

“직무가 나이보다 우선이니 호칭은 교육생으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티르칸쟈카 교육생께서는 어, 춘추가 좀 많으신 터라. 군국은 고령자 교육생을 대상으로는 별다른 지시나 명령을 내리지는 않는 편입니다. 저도 그렇고요. 교육대를 벗어나는 것만 아니라면 자유롭게 행동하실 수 있으니, 계속 여기 누워 계셔도 상관은.”

핏. 무언가 시커먼 것이 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주 얇은 실금이 생긴다. 그 틈을 비집고, 자유를 되찾은 피가 느릿하게 흡혈귀에게로 날아든다. 호랑나비처럼 팔랑거리면서.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살의가 없었기에 피하지는 않았지만, 피하려고 해도 딱히 변하는 건 없었을 것이다.

섬뜩함을 느낀 나는 숨을 크게 들이키며 말을 멈추었다.

안쪽에서 은은한 노기를 띤 목소리가 들려왔다.

[…늙었으니, 방에 처박혀서 그대로 있어라?]

“아니요. 딱히 그런 건 아니고. 지금까지 계셨던 대로 계속 해주시면.”

[듣기 싫다.]

까만 관 뚜껑이 열렸다. 겉과 같이, 관 안쪽도 새카만 어둠으로 가득하다. 그 어둠을 헤치고, 희고 가녀린 손이 들린다.

허공을 날아가던 내 피는 그녀의 손에 내리 앉았다. 그리고는 마른 땅에 비가 온 것처럼 스며들었다.

내 피를 수확한 흡혈귀에게서 옅은 불쾌감이 느껴졌다.

[…역시, 피조차 맛이 없구나. 나와는 완전히 상극이야.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녀석이로구나….]

하지만, 그렇기에.

그리고 이후, 관이 몸을 일으켰다. 넘실거리는 어둠으로 자신을 밀어 올리고서 나와 회귀자를 마주 보았다.

[나는 본디 순결한 처녀의 피만을 취한다. 너희와 같은 남자들의 피는 보통… 재료로 쓰는 편이지.]

여전히 관 안쪽은 어둡다. 생기 없이 하얀 손 만이 관 틈으로 나와 있을 뿐. 그 손으로 이제 다른 피가 날아들었다. 문을 열기 위해 흘렸던 회귀자의 피였다.

흡혈귀는 그 피로 손을 축이고는 말했다.

[하지만 네 피는 괜찮더구나. 남자치고는…. 처음 있는 일이다. 내 살며 남자의 피를 자처해서 마시다니….]

그야 여자니까…. 저딴 남장으로도 흡혈귀는 회귀자가 여자일 가능성을 떠올리지도 못하는 모양이었다. 회귀자는 긍정적인 신호에 주먹을 꽉 쥐었다.

흡혈귀가 느긋하게 말했다.

[좋다.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마.]

“고마워.”

[…오랜만에 손님을 맞이하니 피곤하구나. 이만 나가보아라.]

흡혈귀는 그 말만 하고는 관의 뚜껑을 닫았다. 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회귀자는 폴짝폴짝 뛰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필사적으로 표정을 다스렸다.

‘아자! 성공했어! 이렇게 수월하게 성공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들뜬 마음을 억누르며 회귀자는 조심스레 물었다.

“언제 시작할 거야? 최대한 빠르게 했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다음번 달이 기울어질 때 시작할까.]

약 한 달 뒤라는 의미였다. 당연히 한시가 급한 회귀자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뭐? 너무 늦어. 내일부터 시작해.”

[무엇이 그리 급하느냐? 지금 시작하나 한 달 뒤에 시작하나 별 차이 없는 것을….]

“차이 있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인내심을 갖거라. 달이 차고 기우는 건 밤의 여신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는 것이니. 그 정도 시간은 있어야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음이라.]

둘이 또 뭔가 말다툼을 하고 있다. 갈등을 해결하기 내가 나서야 할 땐가.

“어허! 셰이 교육생!”

나는 짐짓 호통을 치며 회귀자를 막고 나섰다.

“당신에게 한 달은 긴 시간일 수도 있지만, 1200여 년을 살아오신 티르칸쟈카 교육생에게는 찰나와 다름없는 짧은 시간입니다! 조금 더 상대방을 신경 써주십시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한 듯하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상대적인 법. 저분께서는….”

“…너야말로 상대를 신경 쓰는 게 어때?”

응? 뭐가. 나는 이미 충분히 상대를 신경 쓰고 있는데. 상대를 얼마나 극진하게 여겼으면 이렇게나 비위를 맞추고 있겠니.

우리 둘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그때, 관 속에서 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내 행동이 느릿한 것도, 다 내 나이가 너무 많아서이다?]

“아니, 별로 뭐라 하는 건 아니고. 이 버릇없는 녀석에게 연륜의 차이를 알려주려고.”

[오냐. 그렇다면 익일부터 당장 시작하도록 하지.]

원하는 바를 이룬 회귀자가 기뻐하는 사이, 흡혈귀는 나를 시야에 담으며 한마디를 보탰다.

[너희 둘 다, 말이다.]

“네?”

아니, 갑자기 나는 왜.

내가 뭐라 반박하려는 순간이었다.

[이제 그만 가거라.]

세상이 멀어졌다,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나와 회귀자의 몸이 절로 움직였다. 아니, 우리가 움직인 게 아니었다.

벽이, 바닥이, 문이.

복도가, 천장이, 방이, 계단이- 앞으로 밀려났다. 세상이 뒤에서 앞으로 스쳐 지나간다. 정박한 배에서 세차게 흐르는 강물을 보는 것처럼, 어둡고 물컹이는 액체가 우리를 지나쳐 흘러, 왔던 길을 그대로 답습하여-.

어느새 우리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로 지하 무기고의 입구에 서 있었다. 쿵, 하고 강철문 닫히는 소리가 나를 현실로 되돌려놓았다.

“미친.”

왠지 들어갈 때부터 범의 아가리에 들어간 기분이더니.

말 그대로, 저 안쪽은… 흡혈귀의 몸속이나 다름없었다. 방금은 흡혈귀가 우리를 뱉어낸 것이다.

회귀자는 익숙한 듯 몸을 탈탈 털고는 말했다.

“큭큭. 한심한 꼴이네. 놀랐니?”

“…딱히요.”

존나 무서운 괴물이 사실 초월적으로 무서운 괴물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내가 대답하자, 회귀자는 입을 가리고 웃으면서 나를 비웃었다.

“내가 조언 하나 해줄게. 티르칸쟈카의 앞에서는 나이를 말하지 않는 게 좋아. 그게 여자의 마음이라는 거야.”

회귀자는 잔뜩 으스대고는, 가볍게 몸을 돌려 걸어갔다. 나는 멀어지는 회귀자를 차게 식은 눈으로 보았다.

딱히 여심을 몰라서 그렇게 한 건 아닌데.

뭐, 됐다. 쟤도 나한테 뭘 설명하지 않았으니, 나도 굳이 설명하지는 않으련다.

나는 손발을 탁탁 털며 몸을 돌렸다. 아이고. 너무 긴장해서 허리가 다 아프네. 오늘은 그만 일찍 들어가서 쉴까. 식당에 가서 남는 통조림 없나 살펴봐야겠다….

하고 몸을 돌릴 그때.

“멍.”

들려서는 안 될 소리가 들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공놀이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내 냄새를 뒤쫓아가고는, 콘크리트 잔해 더미를 헤집으며 가죽 공을 찾아온… 아지가 있었다.

설마. 설마….

“멍!”

툭. 공이 떨어진다. 내 발치 앞으로. 그리고 아지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공을 코로 톡톡 민다.

의미는 뻔하다.

공이나 던져라. 인간.

“저, 아지야.”

나는 역사상 다시 없을 협상을 시도했다. 개의 왕과 한 인간. 종족과 종족을 넘어서 극적인 타협을 위해 위대한 시도를 했다.

“오늘은 그, 내가 많이 피곤하거든? 그러니까 그.”

“멍! 멍!”

“…조금만. 미루면….”

“멍! 약속!”

팍팍. 아지는 불만스러운 듯이 앞다리를 휘저었다. 풍압이 내 옷자락을 뒤흔든다. 뭔가 점점 가까워지는 게, 공을 던지지 않겠다면 이 앞발로 너를 후리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약속이라는 말은 또 언제 배웠대. 후, 도대체 개한테 약속처럼 쓸데없는 걸 가르쳐준 사람이 누구야? 책임질 능력이 없는 아이에게는 약속을 가혹하게 가르치는 거 아니야. 쟤가 약속을 어겨도 나는 아무런 대가를 못 받아내는데 내가 약속을 어기면 억지를 부릴 구실을 만들어 준다고.

“으르르.”

이렇게 말이야. 나는 보이지 않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 미안, 내 어깨야. 오늘은 250구 안으로 끝내볼게.”

억지로 등판하면 이런 느낌이려나. 나는 공을 잡아들었다. 활짝 웃는 아지의 얼굴이 너무 아니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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