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 붉은 연합
밥을 다 먹었으니 설거지는 내 몫이었다. 이건 진짜 억울하다. 내가 한 음식의 반은 개의 왕이라는 녀석이 빼앗아먹었는데 설거지는 왜 온전히 내가 해야 해? 이게 세상이냐? 이게 나라냐?
아, 군국은 나라 같지도 않은 유사 국가였지.
배부른 아지가 땅바닥에 널브러져서 하품을 하는 동안, 내가 투덜거리며 뒷정리를 했다. 아지는 내 노고를 보고도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지 그릇은 새 것처럼 깨끗하고 반질반질하다는 점일까.
‘이 남자, 그래도 밥은 먹나 보네. 일단 인간은 맞는 듯한데.’
마침 식당 바깥의 복도에서 생각이 들려왔다. 회귀자가 바깥쪽 벽에 찰싹 붙어서는 안쪽을 살피고 있었다. 흘러들어오는 생각을 읽은 나는 얼굴을 콱 찌푸렸다.
누가 누구보고 인간이 아니라는 건지.
이봐. 인간이 단련하면 검기를 뿜을 수도 있어. 마법도 쓸 수 있지. 몸이 단단해지기도 해.
어떤 사람은 타인의 표정과 시선, 호흡을 주의깊게 살피고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맞출 수 있어. 나만큼은 아니지만 말이야.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시간은 못 돌린다고. 제일 인간 같지도 않은 게 나한테 뭐라고 하네.
‘…그보다 아지는 저딴 가벼운 남자를 왜 따르는 걸까. 밥까지 차려 먹은 걸 보면 벌써 마음을 연 것 같은데. 혹시 나도…?’
"크흠!"
생각을 끝마친 회귀자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아지에게 눈을 맞추며, 평소보다 살짝 높은 톤으로 인사했다. 어색하기 그지 없는 태도였다.
“아, 안녕. 아지야? 맛있게 먹었니?”
“멍….”
허나, 세상에서 가장 팔자가 좋다는 게 배부른 개다. 늘어진 아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꼬리만 흔들었을 뿐이다. 회귀자는 살짝 낙담하며 든 손을 내렸다.
‘반응이 시원찮아. 내가 남장…해서인가? 아니야. 저 남자는 잘 따르잖아. 칫,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공놀이, 그 빌어먹을 공놀이!
너도 봤잖아!
제발 나를 따른다 뭐다 하기 이전에 공 던지기나 좀 해줬으면 좋겠다. 개 좋다는 사람은 꼭 자기가 일은 안 하고 권리만 챙기려고 든다니까? 친해지고 싶다면 제대로 놀아주고, 그 책임을 끝까지 지라고.
에휴. 그래도 기척은 냈으니 아는 척은 해야겠지. 나는 수돗가에서 몸을 돌리고는 회귀자를 보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셰이 교육생. 아침은 드셨습니까?”
일상적인 안부를 전한 나는 문득 냄비에 콩 스튜가 남아있는 것을 보았다. 만일 회귀자가 아침을 아직 먹지 않았다면 예의상 저 스튜라도 건네야 할 판이다. 그렇지 않다면 ‘너 안 먹었니? 안타깝다. 나는 먹었는데~’이라 놀리는 기만이 될 테니까.
콩이 든 압축통조림 하나를 제대로 조리하면 4인가족이 하루 종일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양이 나온다. 하지만 방금 돼지같은 녀석이 반이나 처먹어서 남은 양도 얼마 안 된다. 이 아까운 걸 나누어야 한다니.
하지만 괜히 밉보였다가 쓱싹 닦이는 것보다는 낫겠지. 내 살점을 떼어내는 기분으로 회귀자에게 제안했다.
“혹 안 드셨다면, 제가 직접 요리한 군국 특제 콩 통조림 요리라도 챙겨드릴까요?”
“신경 쓰지 마. 알아서 잘 먹고 다니니까.”
“네? 식당은 여기인데 뭘 잘 먹고 다닙니까. 혹 식량을 빼돌리기라도 했습니까?”
“나만의 비상식량이 있어.”
짧게 대답한 회귀자는 냄비 안에 든 콩 통조림 요리에 지긋지긋한 시선을 던졌다.
‘콩 통조림… 저 지겨운 음식은 회차 초반부 아니면 먹고 싶지도 않아. 매일매일 한 상이 차려지는 보물 만한전석(滿漢全席)을 구한 건 정말 신의 한 수였어. 1인용이기는 하지만, 최소한 내 먹을 것은 보장되니까.’
무심코 생각을 읽다가 역으로 기만질을 당해버렸다.
나는 개랑 먹이 경쟁을 하면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데 누구는 매일같이 한 상 차려지는 보물을 끼고 산단다. 이게 나라냐, 진짜?
내가 독심술사이기는 하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참 신기하다. 이성적으로 보면 내 밥을 빼앗아 먹는 개보다 자기 몫은 알아서 챙기는 회귀자가 훨 낫지만, 지 혼자 잘먹고 잘사는 꼴을 보면 배알이 뒤틀린다. 꼭 만한전석 잃어버리고 굶주렸으면 한다. 이게 인간의 이기심인가?
닦고 있는 그릇이 오늘따라 처량하다. 내 식사는 이 조그만 그릇에 담긴 음식이 다였는데. 이게 꽉 차 있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더니, 지금은 그릇도 마음도 텅 비었구나. 이게 상대적 박탈감인가.
“설거지는 아직 멀었어? 슬슬 끝내고 채비해.”
멍하니 있는데 회귀자가 나를 재촉해왔다.
“무슨 채비를 합니까?”
“뭐긴. 티르칸쟈카와 만나러 가야지. 혈조술을 배워야 하니까.”
“제가 그걸 왜 배워야 하죠?”
나의 짜증스러운 대꾸에 회귀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티르칸쟈카가 그렇게 결정했으니까?”
“제길. 나이가 벼슬이지, 벼슬이야.”
씻던 그릇을 대강 던져놓은 나는 손을 탈탈 털며 나갈 채비를 했다. 내 마뜩잖은 태도에 회귀자는 의아해했다.
“흡혈귀가 되지도 않고 그 힘을 얻을 수 있는 기회야. 너에게도 나쁜 일은 아닐 텐데?”
“그러면 뭐합니까. 배우는 데 한참 걸릴 거 아니에요. 그렇게 해봐야 얻는 건 고작해야 피를 다루는 능력. 뭡니까, 그게. 아무리 해봐야 흡혈귀 하위호환이잖아요.”
시조라고 불리는 흡혈귀가 죽지 못하는 몸이 되고 나서도 한참 뒤에 완성시킨 기술이다. 심지어 다루는 건 자신의 피. 여차하면 내 목숨이 날아간다. 시간이나 목숨이 남아도는 사람이나 배울 수 있는 기술이다.
예를 들면 회귀자처럼 말이야.
애초에 내 목표는 살아남는 것이지, 강해지는 게 아니다. 그리고 강해진다고 더 잘 사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딱히 강해지고 싶지도 않아요.”
문득 흘린 본심 한 마디. 말을 내뱉고 나서 아차 했지만, 감각이 예민한 회귀자는 그걸 듣고야 말았다.
‘…거짓말 같지는 않아. 정말 강해지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은데. 하지만 실력제일주의인 군국의 군인이 저런다고?’
괜히 말했나 싶지만, 이미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나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는 회귀자를 지나쳤다. 회귀자는 태연히 문을 향하는 내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정체를 모르겠다고는 했지만, 나는 이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 가진 힘에 비해 초연하고 털털한 태도에, 묘하게 권위주의를 부정하는 듯한…. 아지를 인간이라 취급하지 않지만, 정작 아지에게는 친절하게 대해. 저 까다로운 아지가 따를 정도라면….’
짧게 판단을 마친 회귀자는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그는, 군국 상부의 명령에 저항하다가 좌천된 군인이 아닐까? 최소 장교 급. 그렇지 않다면 설명이 안 돼. 가진 힘이나, 아지나 티르칸쟈카에게 보이는 태도가!’
가끔, 이라고 하기에는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나는 전부터 계속 떠오른 생각을 다시 한 번했다.
저 여자, 회귀라도 해서 다행이라고.
‘군국은 8회차 때 한 번 멸망시킨 이후 손 놓고 있었지만, 어쩌면 저자를 열쇠 삼아서 더 깊숙이 들어갈 수도 있겠어!’
아니, 취소다. 나라 하나 손쉽게 멸망시키는데 뭔 다행이야.
그보다 군국이 멸망했다고? 그 사실, 혹 내가 알아낸다면 비슷한 일 할 수 있을까? 나도 이 나라 깽판 한 번 쳐보고 싶은데.
내가 회귀자의 생각에 집중하려는 때였다.
‘끄어어….’
흠칫.
나는 급히 몸을 돌리며 저 안쪽을 바라보았다. 내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회귀자가 의아한 듯이 나를 보았지만, 나는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방금 들린 마음의 소리. 그건 회귀자의 것도, 아지의 것도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도저히 정체를 알 수 없는 흐릿한 의식.
착각인가? 아니, 그럴 리 없다. 분명 저 안쪽에 뭔가,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는 뜻인데.
“뭐해? 멈춰서고.”
“아니, 그냥… 누가 있는 것 같아서.”
“어디?”
희미하게 이어지던 생각이 끊겼다. 죽었나? 잠들었나? 쓰읍, 신경 쓰이지만, 독심술이 끊겼다면 내 능력으로는 찾을 수 없겠지.
일단 흡혈귀 일부터. 나는 관심을 끊고는 회귀자와 함께 마당으로 나섰다.
탄탈로스는 어둡다. 저 먼곳에서 날아오는 태양의 빛조차도 대지모신의 지엄한 분노 앞에서는 어설프게 머리를 긁적이며 저문다. 무저갱, 밑바닥 없는 구멍에는 바닥이 없기에 높이조차 없다. 티끌만한 구멍도 억지로 비집고 들어오는 햇빛조차 무한의 공간은 넘을 수 없는 장벽이니.
그렇기에 탄탈로스는 빛을 자급자족해야했다. 놀랍게도 인간은 마력으로 빛을 만들어내는 경지에 이르렀으니. 신의 은혜는 인간의 업으로 대체할 수 있었다.
비록 그 질이 한없이 낮다고 해도.
탄탈로스의 마당에는 일선이 있다. ㄴ자로 되어있는 감옥 건물과 그 테두리 안에 딱 들어오는 마당. 거기까지는 탐조등이 사람을 쫓지 않는다. 넓게 퍼지는 주간등이 안쪽을 공평하게 비추며, 밤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결실이 흩뿌려진다.
그러나 그 너머, 내가 처음에 떨어졌던 조금 외곽의 땅. 군국이 정해놓은 각진 사각형을 넘어 잘린 부분에 발을 디디면. 그때부터 탐조등은 맹렬하게 사람을 쫓는다.
탄탈로스에는 탈주자를 쫓을 병력도, 탈주자가 도망칠 곳도 없지만. 군국은 고집스러울 정도로 그들을 단속한다. 너희들이 이곳을 벗어나선 안 되는 죄수라는 것을 강조하듯이.
“티르칸쟈카는 어디…. 아.”
탐조등이 닿아야 할 땅. 그곳에 티르칸쟈카는 누워있었다.
사실 누워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직 보이는 건, 어둠 속에서도 불길하게 빛나는 새빨간 십자가뿐.
빛을 싫어하는 흡혈귀는 전등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본래라면 탐조등이 지정 범위를 벗어난 그녀를 쫓아야 했으나, 붉게 타오르는 불길한 기운에 겁이라도 먹었는지 못 본 척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저기로 가야겠죠?”
“당연하지.”
“아아. 저쪽은 눈부셔서 싫은데….”
“왜, 빛이라도 베어줄까?”
그게 왜 되는 건지 묻고 싶지도 않다. 저 멀리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관짝을 향해 영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걷고, 걸어서. 탐조등의 영역에 발을 디딘 순간. 나는 곧 내 등을 태울 듯이 쫓아오는 빛을 기다리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빛이 내 등 뒤를 쫓는 일은 없었다. 탐조등은 나까지 못 본 척, 엉뚱한 곳만을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어라? 뭐지?
[내가 저것들의 눈을 가렸다.]
어두운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의 것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관 속에 가만히 누워있는 있던 흡혈귀, 시조 티르칸쟈카는 어둠을 매질로 삼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밝은 것은 질색인데, 저 빛은 한층 더 거슬리는구나. 날카로운 것이 햇빛보다 더해. 너희들도 같을 거라 여긴다.]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편한 대로 하십시오. 어차피 저희는 적은 빛만 있어도 충분히 보입니다. 이럴 때는 저희가 맞춰드려야지요.”
[….]
‘묘하게 기분이 나쁘구나…. 어째 나를 눈이 침침한 노인 취급하는 듯 느껴지지?’
흡혈귀의 생각을 듣자 나는 억장이 무너질 것 같았다.
도대체 왜 저러지? 피해의식이라도 있나? 노인이라 취급하는 것도 맞고 눈이 침침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맞지만, 아직 그런 티는 안 냈는데!
흡혈귀는 나를 무시무시할 정도로 노려보다 천천히 목소리를 냈다.
[어찌하건, 이 수업은 매우 가혹할 것이다. 피를 다루기 위하여 필시 피를 흘려야 할 따름이니. 도중 너희들에게 위험한 일이 닥칠 것이다.]
관 속에 있는 흡혈귀가 음산한 목소리를 냈다. 살짝 벌어진 틈으로 붉은 피가 방울방울 떨어졌다. 마치 곧이어 우리가 처할 상황을 보여주듯이.
[그래도 하겠느냐? 고난을 극복해보이겠느냐?]
짓궂은 어른들이 들려주는 동화나, 어두운 숲에 내려오는 전설에서 등장할 법한 제안이다. 시조라 불리는 흡혈귀가 멋모르는 인간에게 건네는 시험.
겁을 먹을 만한데도, 회귀자는 한 점의 두려움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오한 바야. 나는 준비가 되었어.”
열세 번이나 죽고 되살아난 인간에게는 시조의 공포조차도 넘어야 할 벽이었으니. 넘실거리는 기운과, 꿈틀거리는 핏물을 보고도 회귀자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흡혈귀는 회귀자의 태도에 흡족해했다.
'제법 기개가 있는 소년이로구나. 흐음. 가르치는 맛은 있겠어. 딱 그 정도.'
이제 흡혈귀의 시선은 나를 향했다.
[네놈은?]
으음. 나는 좀.
관 속에 있는 흡혈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흡혈귀가 끌어들인 어둠은 너무 짙어서, 불과 다섯 발짝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도 관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다.
표정도, 얼굴도 보이지 않으니, 일반 사람이면 저 뒤에서 흡혈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감히 짐작도 못하겠지.
하지만 나는 그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본디 제자라고 하면 스승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도리. 그 어떠한 명이라도 감히 거부할 수 없도다.’
흡혈귀는 나를 골려줄 생각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것이 사승관계이니. 건방진 네놈에게 존경심이라는 것을 넣어주마. 나를 늙은이 취급을 했으니 늙은이의 방식으로 너를 다스려주지.’
생각하는 게 어쩜 이리 고전적일까. 사승관계라니 언제 적 이야기야.
나를 가르친다고 나선 게 합법적으로 나를 괴롭히기 위함이라니. 진짜 쪼잔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이 와중에도 마구잡이로 힘을 휘두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른스럽다 해야 할까.
원래도 배울 마음은 없었다만, 흡혈귀의 생각을 읽고 그 뜻이 더 확고해졌다. 나는 냉큼 고개를 저었다.
“저는 배울 생각이 없습니다만.”
[…뭣?]
흡혈귀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설마 내가 자기 제안을 거부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은 모양인지, 목소리마저도 떨리고 있었다.
[배우지, 않겠다고? 이 내가 친히 가르치겠다는데?]
“아아. 네.”
[내 살며 몇 명에게 가르침을 내린 적이 없거늘. 이 나와 사승관계를 맺을 기회인데, 그것을 마다하겠다고?]
정말로 믿기지 않는지 몇 번이고 확인하려고 들었다. 아니, 글쎄. 진짜 필요 없다니까.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저기, 사승관계는 군국이 아니라 왕국 시절에도 타파했던 건데요. 그 폐단이 너무 심해서.”
[어째서?]
“어째서라니. 먹튀가 많아서죠. 사승관계랍시고 극진히 대접받으며 몇 년 노예처럼 부려먹다가, 거들먹거리며 가르쳐주는 게 쓰레기 같은 무술이나 마법인 경우가 워낙 많아서 난리잖아요. 재판이 일어나면 반 정도는 사승이나 도제 간의 소송인데 그걸 듣는 국가도 지겹죠. 그래서 결국 금지했잖아요. 미엔 제국 같은 천 년 넘은 나라에나 흔적으로 남은 걸 자꾸 들고 오시면.”
흡혈귀는 기가 차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은은하게 노기가 서린 목소리로, 흡혈귀는 나를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혈조술이다. 이 나를 불멸의 존재로 만든 권능이란 말이다. 네놈이 감히 그것을 잡학 취급을 해?]
“아니요, 아니요. 제가 언제 혈조술이 낡은 기술이라고 했습니까. 사승관계가 낡은 관습이라고 했죠. 그리고….”
이런 말하기는 뭣한데. 어쩔 수가 없다. 괜히 비위를 맞춘답시고 평생 묶일 목줄에 매일 수는 없잖아.
목줄이 찬란한 금 목줄이라면 한번 눈 딱 감고 매이겠다 할 수 있지만, 만든지 천 년도 더 지난 낡은 줄이라면 걸치는 게 손해다.
나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혈조술은 그, 먹튀까지는 아닌데. 좀 낡은 기술이죠?”
쿠구궁.
탄탈로스가 흔들린 건, 내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핏물이 끓어오르고 있다. 흡혈귀의 불쾌함이 형상화된 탓. 넘실거리는 어둠 속에서 흡혈귀가 불쾌감을 표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싶다. 제자로… 받아주세요! 하고 빌고 싶다. 그래서 이 압박감에서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그 경우 그려지는 미래는, 죽기 직전까지 계속되는 훈련. 뭘 할 시간도 없이 흡혈귀의 수발을 드는 노예와 비슷한 삶.
사실 그렇게 사는 거야, 지금이랑 별 차이가 없다. 문제는 가르침을 받으며 '시험'을 받는 거다.
만일, 시조의 가르침을 받은 끝에 한계에 부딪혀 내 밑바닥을 보였다간… 잔뜩 부풀어 오른 내 평가에서 거품이 걷히고 만다. 허세만으로 이룬 이미지가 소모되고 만다.
내가 별 볼 일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들통나버린다.
그건 진실이지만 결코 들켜서는 안 될 진실. 회귀자의 미래에서 본 나의 죽음.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영향력은 남겨두어야 한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오호라.]
흡혈귀는 좋든 싫든 옛날 사람이다. 나이 든 사람들이 노인 취급을 받는 걸 싫다고 하지만, 정작 진짜 친구 대하듯 하면 무례하다며 화를 낼 것이다.
어른이 편하게 대하라고 말했다고 진짜 편하게 대하는 멍청이는 없을 거라 믿는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나이만큼이나 점잖아서 살짝 화가 나도 누구처럼 칼이 나가지는 않는다는 거지.
나는 급히 말을 덧붙였다.
“천 년 정도 권능을 쌓아 격을 이룬 티르칸쟈카 교육생 정도면 쓸만하지, 솔직히 기술만 따지면 벌써 천 년 전의 기술이잖습니까.”
[호오…. 네 놈, 끝까지….]
“아니, 딱히 뭐라 탓하는 게 아니라. 그 힘 자체가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점이 있다는.”
[지금, 혈조술이 엉터리라고?]
콰득. 내 옆의 공간을 무언가가 물어뜯었다. 뭔가 해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아보았다.
새빨간 핏빛 말이 나를 노려다 보며 되새김질을 하고 있었다. 뭘 씹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무엇을 씹고 싶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는데, 혈마의 눈이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퉤. 혈마가 침을 뱉자 콘크리트 바닥이 녹아내린다.
아,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사역마의 생각은 안 읽히는구나….
[가만히 두어라, 랄리온.]
히히히히힝-.
땅이 들썩이는 투레질. 인주 묻은 도장처럼, 붉은 말발굽이 콘크리트 바닥에 선명히 새겨졌다.
음. 여기 너무 강한데. 아무래도 선택을 잘못했나?
[오냐. 그렇다면 너는 지켜만 보고 있어라. 나중에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다.]
지켜보기도 싫다고 말하면 진짜 죽으려나? 좋아. 이건 일단 고개를 끄덕이자.
내가 굳건한 태도를 유지하자, 심통이 난 흡혈귀는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회귀자를 향했다. 커다란 관이 땅 위를 미끄러지며 회귀자의 옆에 바싹 붙었다.
[소년. 네 이름이 무엇이냐?]
“셰이라고 해.”
[그래. 셰이. 너는 나의 가르침을 따르겠느냐? 그 과정은 고통스러울 수도 있고, 위험할 수도 있다. 하나 그 끝은 필시 창대하리니. 성심껏 너를 가르칠 테니, 내 의지를 의심하지 않고 수학하겠느냐?]
회귀자는 고민도 하지 않았다. 죽더라도 회귀하면 되니까, 라고 간단히 넘어간 회귀자는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말했다.
“물론이야. 맹세할게. 하지만.”
회귀자가 몇 마디를 덧붙였다.
“이곳저곳에서 배운 게 많아서, 온전히 네 뒤를 잇지는 못할 거야.”
[상관없다. 하나만 약조하거라.]
“할 수 있는 거라면. 뭔데?”
핏물이 허공에서 뭉쳤다. 새빨간 풍선처럼 부풀어오른 핏물은 손가락 모양이 되어 나를 가리켰다.
[저 건방진 놈을 꺾겠다고!]
회귀자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그 질문을 받았다.
“나도 바라던 바야.”
어? 나? 갑자기 어째서?
졸지에 공동의 적이 되어버린 나는 눈만 끔뻑이며, 두 여자의 연합을 지켜만 보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