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 레지스탕스 - 2
마음을 다잡은 카니센은 고개를 홱 돌려 소리쳤다.
“몸을 다 추슬렀으면 빨리 나오도록. 서둘러야 한다. 시간이 많지 않아!”
보급 상자에 숨어들어온 건 알파와 베타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저 안쪽에서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섞인 대답이 들렸다. 그 직후, 부산스러운 움직임과 함께, 두 명이 낑낑거리며 네모난 금속 케이스를 들고는 보급 상자에서 내려왔다.
카니센은 그들을 한 번 보고는,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왔다.
“동지.”
내가 왜 니 동지야, 새끼야. 나는 속으로만 윽박지르며 겉으로는 미소를 꾸며냈다. 카니센은 진중한 얼굴로 나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우리는 동지의 도움이 필요하오. 대신 동지도 우리를 도와주시오. 그러면, 이곳을 탈출하게 해주겠소.”
“탈출? 정말요?”
“물론. 레지스탕스는 군국과 달리, 시민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소.”
하하. 그러게. 그것도 탈출이면 탈출이지. 육체를 버리고 하늘나라로 대탈출.
얼굴 하나 변하지 않는 것 봐. 내가 독심술사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채, 폭탄 설치하는 거 멀뚱멀뚱 보고만 있다가 폭사할 뻔했네.
그래도 여기서 눈치챈 척하면 안 된다. 상대는 기사 급 전력. 아무런 장비도 없는 나는 결코 맞설 수 없는 적수다. 섣불리 빌미를 주지 말고 그가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한다.
쓰게 웃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가 원하는 반응을 보였다.
“탈출? 이 태양도 안 비치는 빌어먹을 곳에서 탈출시켜주는 거죠? 약속한 겁니다?”
“물론이오. 나는 약속을 지키오.”
“맡겨만 주십쇼! 제가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동지!”
카니센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며 생각에 잠겼다.
‘생각보다 감옥의 규모가 크다. 가져온 폭약은 상당한 양이지만, 이걸로도 탄탈로스 완파는 불가능해. 원래 계획대로 절벽을 폭파해 보았자 암반만 무너지고 주요 시설은 무사할 거야. 지금 가장 필요한 건, 최소한의 폭약으로 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 포인트다. 이왕 무저갱에 들어왔으니 지반 자체에 타격을 주고 싶은데.’
담담하게 계획을 세운 카니센은 나에게 말했다.
“이곳에서 며칠 지내셨다고 했지. 그러면, 이 압제자의 감옥이 어떤 구조인지는 대충 알고 계실 터.”
“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번 둘러보기는 했죠. 여기 있던 죄수들 말고는 제가 가장 잘 알 겁니다.”
“좋소. 어딘가 중요해 보이는 장소는 없었소? 그러니까, 무언가 눈여겨볼 만한 것이 있는 장소 말이오.”
“흐음. 중요해 보이는 장소라.”
있지. 너희를 위해 예비해둔 아주 좋은 곳이.
나는 냉큼 손가락을 들어 어느 곳을 가리켰다.
“저기, 지하 무기고. 커다란 강철문이 굳게 닫혀 있는데, 아주 가끔 스스로 열리곤 해요. 저번에 한 번 들여다보았는데 뭔가 많은 것 같더라고요.”
저 안에는 천 년 묵은 흡혈귀가 기다리고 있을 거다. 살아있는 피 도시락 배달이다. 흡혈귀. 맛있게 먹도록. 아, 포장지는 배출불가니까 알아서 처리하고.
“그리고 감옥 1층에 있는 감시실에도 흉악한 죄수들을 다스리기 위한 무기? 장비? 비슷한 게 있던 모양이에요.”
감옥 1층에는 탄탈로스 최종병기, 만나면 반갑다고 팔을 자르려는 회귀자가 있다. 탄탈로스를 무너뜨린다는 소리를 들으면 목까지 자를 거다. 다음에 만날 때는 목 따로 몸 따로 보자.
“저기 저곳은?”
카니센이 가리킨 곳은 감옥 건물과는 따로 떨어져 있는 관리실이었다. 부서진 담장과 무너진 지붕을 가진, 반파되어 잔해만 남은 건물.
으음. 저기는 가면 안 되는데. 너희들을 죽일 만한 무언가가 없거든.
나는 최대한 흥미 없다는 태도로 말했다.
“한 번 가봤는데 별거 없었어요. 부서진 잔해만 가득해서 뭐 건질 것도 없더라고요.”
“부서진 잔해라.”
‘다른 건물은 남아있는데, 유독 저곳에만 부서진 흔적이 가득하다. 누군가 일부러 부순 게 분명해. 그렇다면 오히려 다른 누군가에게 넘어가서는 안 될 것이 있다는 뜻이다. 아니면 쓰다 만 장비가 있을 가능성이 있지. 어찌 되었건, 자원이 부족한 이상 탐색해야 한다면 그쪽부터다.’
그러나 내 말이 오히려 카니센의 관심을 끌어버린 모양이었다.
칫, 확실히 머리가 잘 굴러가기는 해.
그래봤자 내 손바닥 안이지만.
“결정했다! 다들 내 말을 잘 듣도록.”
카니센이 다른 레지스탕스들을 불렀다. 잔뜩 긴장한 채 주위를 둘러보던 레지스탕스들이 황급히 카니센 앞으로 모였다. 아직 굳은 몸이 풀리지 않아, 한 명은 걸어가다가 발을 잘못 디뎌 휘청거리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그들은 긴장한 얼굴로 한 곳에 모였다.
카니센은 레지스탕스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말했다.
“알파, 너는 지하 무기고로 향해라. 혹 폭약이나 무기 종류가 있다면 챙겨서 가져오도록. 우리에게는 무기가 부족하다.”
“알겠습니다!”
카니센은 고개를 돌렸다. 아까 아지에게 총을 쐈던 여자가 힉, 하고 놀라며 총을 꽉 끌어안았다.
“베타. 너는 감옥 1층으로 향해라. 죄수들을 제어하기 위한 무기가 있을지도 모른다. 만일 죄수들을 마주한다면, 최대한 교전을 삼가고 아무렇게나 둘러대며 탐색하도록.”
“네, 네? 탄탈로스의 죄수들과 마주해야 한다고요?”
베타는 자신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카니센은 작게, 그러면서도 분명히 들리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말했다.
“여기서 신중하기로는 네가 제일 낫다, 베타. 총을 쏘는 실력도 제일이고. 교전을 피하면서 탐색하는 건 네가 적임이야.”
“하, 하지만 대장. 방금 봤잖아요. 여기 있는 죄수들은 총알도 잡아채는 괴물이라고요. 초, 총이 안 통할 거예요.”
“우리는 이미 목숨을 걸었다. 여기 내려온 이상 죽은 것과 마찬가지. 여기까지 와서 두려움에 떨 테냐?”
카니센이 혼내듯 베타를 노려보았으나, 베타는 여전히 겁먹은 얼굴이었다. 그녀를 노려보던 카니센은 곧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당장 성격을 바꿀 수 없다. 자신있게 쏜 총알이 이빨에 막혀서 그런지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어. 이럴 때는, 조금 어울리지 않더라도.’
“후우. 알파, 차례를 바꾼다. 네가 1층으로 가라. 베타를 무기고로 보내겠다.”
알파는 성큼 앞으로 나서며 목청 크게 대답했다.
“맡겨주십시오. 저는 겁먹지 않습니다!”
“자신감 넘치는 건 좋으나, 그래도 원칙은 잊지 말도록. 상대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할 가능성이 높다. 교전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 그리고 베타. 너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에 가는 것이니, 대신 네가 가진 군용장비는 알파에게 건네도록.”
“네, 네에….”
베타는 냉큼 등에 지고 있던 커다란 원판을 꺼냈다. 금속으로 주조한 듯한 은빛 원판에는 동심원을 따라 수십 수백 개의 글자가 음각되어 있었고, 가운데에는 주먹이 간신히 들어갈 만한 구멍이 뚫려있었다. 누군가 보았다면 운동을 할 때 쓰는 원판으로 착각할 법한 모양새였다.
그러나 그 정체는 군국이 만든 군용장비, 군장이다.
군장의 원형인 은빛 원판은 그들이 가지고 온 무기 중 가장 강력한 물건이었지만, 베타는 그게 무거운 짐이라도 되는 듯 얼른 알파에게 건넸다.
알파는 강력한 무기를 손에 넣은 게 기쁜 모양이었으나 카니센은 그게 영 마음에 안 드는지 혀를 찼다.
“쯧.”
‘군장은 강력한 무기다. 신중하고 침착하지만 육체적인 힘이 부족한 베타가 착용하는 게 더 합리적이지만…. 어쩔 수 없다. 이미 목숨을 버린 몸. 지금은 재능보다 투지가 필요해. 알파 같은.’
그의 생각을 모르는 알파는 기쁘게 군장을 받아들고는 카니센을 바라보았다.
“대장. 지금 껴도 됩니까?”
“물론이다.”
“아자! 그렇다면!”
카니센의 허락이 떨어지자 알파는 그의 손목을 걷어 생체 단말을 드러내고는 은빛 원판에 난 구멍에다가 팔을 끼웠다.
그 순간, 마력광이 번쩍였다.
금속 원판이 위아래로 분리되었다. 금속이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철컥거리며 모습을 바꾼 원판은, 알파의 팔을 집어삼키듯 거꾸로 거슬러 올라갔다. 딱딱하고 투박한 금속이 알파의 왼팔을 감싼다. 갑판이 팔을 휘감으면 틈새를 잇는 철사가 줄어들며 꽉 조인다.
철컹, 철컹. 규칙적이고 딱 맞물리는, 금속을 다루는 이들이 들으면 오르가즘 비슷한 것을 느낄 소리가 연달아 들린다. 톱니가 돌아가고 요철이 들어맞는다. 그렇게 강철로 만들어진 갑판이 차근차근 빈틈없이 알파의 몸을 뒤덮었다.
어느덧 알파는 강철로 된 거대한 갑주를 입고 있었다. 얼굴을 다 가리는 투구에, 틈새를 메우는 강철 비늘까지. 난 곳 하나 없이 강철로 둘러싸인 그는 희열에 가득 차서 손아귀를 꽉 움켜쥐었다. 주먹에서 금속이 마찰하는 소리가 났다.
“하하!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군국은 세상 모든 것을 무기로 만든다는 나라. 그런 군국답게, 의복 패킷이 세상에 나타난 순간 처음부터 색다른 발상을 떠올렸다.
옷을 패킷으로 만들 수 있다.
갑옷도 옷이다.
그렇다면, 갑옷도 쉽게 벗고 입을 수 있는 패킷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일차원적인 삼단논법을 통해, 군국은 갑옷을 연금하여 패킷으로 만드는 방법을 연구했다.
천으로 만든 옷과 철로 만든 갑옷의 연금 난이도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건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그건 기술자들이 극복해야 할 문제였지.
기술자의 항변이야 어쨌건. 군국은 수많은 인적, 물적 자원을 갈아 넣은 끝에 결국 갑옷을 패킷으로 만드는 기술을 완성했다.
그게 바로 이것. 군장.
군국 연금 마도 공학의 정수였다.
“엄청난 힘입니다. 이게 있다면 누구에게도 질 것 같지 않아요!”
알파가 전능감에 취해 소리쳤다.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금속을 타고 울렸다. 카니센이 기대했던 대로 알파는 군장을 차고도 주눅 든 모습이 없었다.
그게 카니센의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기도 했지만. 카니센이 혀를 차며 말했다.
“허튼소리. 군장은 어디까지나 너에게 힘을 더해줄 뿐이다. 적을 이기는 건 네 기량에 달렸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알파의 뜨거운 시선이 아지에게로 향한다. 조금 지루한 듯 하품을 하고 있던 아지는 묘한 살기를 느끼고는 살짝 눈을 치뜨며 고개를 돌렸다.
와, 죽음을 재촉하네. 주제도 모르고.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자식이 주제도 모르고!'
같은 생각을 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카니센이 눈을 부릅뜨고는 외쳤다.
“알파!”
카니센의 일갈에 알파가 찔끔했다.
“경거망동하지 마! 네 임무에 충실해라! 일단 시야를 다 가리는 바이저부터 벗어! 지금 네가 맡은 임무는 전투가 아니라 탐색이다!”
“네, 네. 죄송합니다.”
‘후우. 도저히 쉬운 게 없군.’
알파가 급히 투구와 바이저를 벗는 사이, 카니센은 이제 남은 이들을 바라보았다. 감마와 델타. 이들은 알파나 베타에 비해 전투력은 떨어지는 보조요원이었기에, 그쪽 부분에서는 거의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대신 델타는 꼼꼼한 성격을 가진 후방요원이었고, 감마에 있어서는 한때 군국에서 기술자로 일했던 인재였다. 특히 무차별 폭탄테러보다 계획적인 폭파가 중요해진 지금 상황에서 감마는 이 파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델타는 여기 남아서, 이….”
그의 시선이 나와 아지 쪽에 향했다. 특히 나보다는 아지 쪽에. 그의 눈에 경외와 공포 비슷한 감정이 맴돌았다.
“이분들을 보호하고 있거라. 위험할 수 있으니까 관리실 근처로는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가능하면… 그래. 공놀이라도 해라.”
“알겠…습니다.”
이야. 꼼꼼한 거 봐. 끝까지 경계를 늦추지는 않겠다는 거지.
나야 몰라도 아지는 개의 왕이다. 마음만 먹으면 여기 있는 모두를 도륙해버릴 수 있는 존재. 경계하는 것도 당연하다.
물론, 개의 왕인 이상 인간을 해칠 수 없으니 말만 그렇다는 거지만. 거기까지는 생각하기 힘들겠지.
“좋아. 감마는 나와 함께 관리실로 간다. 기술자인 네가 있어야 더 명확한 조사가 가능할 테니.”
“넵!”
“그러면 이제 모여라.”
잔뜩 긴장한 레지스탕스들이 손을 모았다. 그들은 손을 겹쳤으나, 나는 그들의 마음이 중구난방으로 흩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구는 공포에 질렸고, 누구는 자기를 과시할 생각밖에 없었다. 멋모르고 친구들을 따라서 왔다가 얼떨결에 이곳에 떨어져, 아직까지 따라나선 걸 후회하는 레지스탕스도 있었다.
그러나 속내는 드러나지 않는다. 겉으로만 보면 조금 잘 안 맞는 어중이떠중이 레지스탕스로만 보일 뿐이다.
“모두. 목숨을 쓰자. 목숨을 써서 증오스러운 군국에게 한 방 먹이자.”
“네, 대장!”
“좋아. 흩어져!”
그래도 그들을 이곳까지 이끈 건 군국에 대한 증오와 서로를 향한 유대감. 최소한의 구색을 갖췄는지, 명령에 불복하거나 주저하는 이는 없었다. 레지스탕스들은 다들 자기가 맡은 장소로 이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