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29화 (29/384)

EP.29 레지스탕스 - 4

머리에 커다란 침이 박힌 델타는 표정조차 바꾸지 못했다. 경련이 이는 얼굴에서 간신히 입술만 뻐끔이며 힘겹게 단어를 빚어냈을 뿐.

델타가 힘겹게 말했다.

“이, 게, 무, 슨….”

“어라? 카드가 어디갔지? 잔, 짜잔! 여기 있었네요!”

푸욱. 나는 그의 머리에 틀어박힌 꼬챙이를 빼냈다. 마개를 빼자 고였던 피가 봇물 터지듯 피가 콸콸 흐른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델타는 고장 난 것처럼 삐걱거리며 총을 다시 움켜쥐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손은 계속 어긋난 위치만 헛되이 움켜쥘 뿐이었다. 방아쇠를 향해 팔을 뻗는데 자꾸만 오른쪽으로 휜다.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이 처량했다.

빼낸 꼬챙이를 휙 뒤집자, 방금 누군가의 머리에 들어갔다 나온 꼬챙이는 어디 가고 핏자국이 묻은 한 장의 카드가 나타났다. 나는 카드를 흔들어 핏물을 털어내고는, 델타를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지금까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은 꽤 괜찮은 관객이었어요, 하지만 저는 마술사!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거든요.”

“으, 나, 를.”

“마술사는 쇠사슬에 묶여 강에 빠지든 불 붙은 폭약이 가득한 곳에 갇히든, 결국에는 살아서 빠져나와야 하죠. 그러니 당신들이 보여주는 희대의 폭탄 자살쇼에 참가할 수는 없어요. 미안해요! 저는 탄탈로스를 무대로, 여러분들을 상대로 탈출쇼를 하기로 했어요!”

델타의 몸이 땅으로 푹 쓰러졌다. 뇌가 망가진 그는 더 이상 대꾸하지 못했다. 드문드문 끊어지는 생각만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알릴 뿐.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쪼그려 앉아서 그와 눈을 마주쳤다.

‘우리, 목적을, 처음부터, 알고 있.’

“당연히 알죠. 어떻게 모르겠어요. 죽을 각오를 한 당신들이 뒷생각까지 하면서 쳐들어올 리 없잖아요?”

‘알면서, 나를, 속이려고.’

“속였다, 라. 글쎄요? 누가 먼저 속였을까요? 그럴 생각도 없으면서 탈출시켜준다는 당신 대장? 아니면 고결한 척, 고민하는 척 뒤에 숨어있었으면서, 침묵으로 그 거짓을 방관한 당신? 당신은 속이지 않았다, 고 말할 수 있어요?”

‘아니, 야. 나는.’

“당신이 얼마나 고결하고자 하든, 별로 상관 없어요.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은 정의는 소화되지 않은 토사물과 비슷하거든요. 당신이 당신 자신의 감정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든, 그것을 대의로 포장하든. 당신의 정의는 결국 자기애의 표현일 뿐이에요.”

‘내, 생각을. 읽.’

생각이 점차 흐려진다. 머리에 난 구멍에서는 피가 빠져나가고, 다른 쪽으로는 피가 고인다. 불균형으로 인해 생긴 압력이 그의 뇌를 스스로 짓누른다. 뇌가 망가질수록 의식 역시도 무너진다.

마지막 생각이 늘어졌다. 책 말미를 장식할 최후의 한 단어를 길게 늘려쓰듯, 남은 미련이 관성처럼 길게 이어졌다.

한 권의 책이 완결을 고하고 있다.

그의 생각을 충분히 읽은 나는, 그와 눈을 맞추며 속삭였다.

“안녕히 가세요, 엘시 클락. 당신은 실패한 테러리스트예요. 당신의 과거가 어떻든, 아무리 변명을 해보든. 그게 당신을 바꾸지는 못할 거예요.”

‘아, 아, 아.’

“하지만 저는 당신을, 당신의 최후를 기억할게요.”

‘아.’

“안녕.”

생각이 끊겼다.

한 권의 책은 이것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코드네임 델타, 본명 엘시 클락의 육신이었던 그것은, 이제 한 구의 시체가 되어 땅 위에 널브러졌다.

나는 손으로 시체의 눈을 쓸었다. 부릅떠있던 시체의 눈이 감긴다.

그것으로 끝. 평범하고 짧은 생애는 이것으로 끝났다.

“후우.”

다행히 피를 닦을 필요는 없다. 시체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그게 세상의 이치인 것처럼 지하 무기고를 향해 굴러가고 있었으니까. 흡혈귀가 존재하는 한, 묻은 피를 닦아내는 귀찮은 일을 할 필요는 없다.

나는 뻐근한 어깨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자. 일 하나는 끝냈고.”

다음은 대장이다. 폭탄을 가지고 간 그를 잡지 않으면, 이 일이 끝나지 않는다.

자. 대장.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생각을 좀 읽어볼까.

눈을 감았다. 독심술을 흩뿌렸다. 안개처럼 스며들듯 넓어진 시야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생각을 더듬어 올라갔다.

.

..

...

“구천구백구십. 구천구백구십일. 구천구백구십이….”

후웅. 후웅.

보이지 않는 검이 공간을 가른다. 무게도, 두께도 없는 검, 천앵이다. 두께가 없는 검에서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리는 이유는, 최소한의 무게감을 느끼기 위해 검날을 눕히고 휘두르기 때문. 그런데도 날카로운 검풍이 사방을 찢을 듯이 퍼져나갔다.

“…만.”

만 번째 휘두르기가 끝났다. 땀이 방울져 흐른다. 낙낙한 바지는 통풍이 잘되는 재질이나,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식히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셰이는 귀밑까지 살짝 내려오는 단발을 훔쳤다. 끝에 아롱진 땀방울이 땅으로 떨어진다.

무심코, 충동적으로. 떨어지는 땀방울을 벤다. 한 번, 두 번, 다섯 번, 열 번. 겹쳐 벤 참격.

한 번의 떨어짐은 총 삼백구십이 번의 작은 충돌로 바뀌었다. 조각 난 땀방울은 바닥에 닿자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후우.”

셰이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완성된 자세다. 지난 13번에 걸친 회귀 동안 나름의 고찰을 거쳐 만들어낸, 군더더기 없는 중단세.

무게 없는 검, 천앵을 쓰기에 좋은 자세였다. 무게가 없기에 미리 힘을 저장해둘 필요가 없는 천앵은, 중단세를 취한 채 손목만 돌려도 천변만화를 끌어낼 수 있다.

물론 세상 만물이 다 그렇듯 측면은 왼쪽 오른쪽 두 방향이라, 힘을 미리 담아두지 못하는 점은 그 자체로 단점이 되기도 한다. 일격, 일격의 무게가 부족한 것이다.

다만, 그것은 땅의 검 지잔(地潺)을 얻으면 해결될 문제.

그러니까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단련이다. 지잔을 얻기 전까지, 강력한 보검이 그녀의 힘을 가리기 전까지 한 꺼풀 벗어내야 한다.

그것을 위해 찾아온 탄탈로스이며, 그것을 위해 배운 혈조술이다.

셰이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완성된 자세다. 흠잡을 곳이 없다. 그러나 더욱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완성을 무너뜨려야 하며 없는 흠도 잡아내야 한다. 하나의 껍질을 무너뜨려야 더 큰 세상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옛날,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초기 회차. 아득바득 살아가기 위해 휘둘렀던 낭인의 검술은 반쯤 초월한 지금 그녀의 발목만 잡을 뿐. 오랜 세월 그녀를 지탱하고 그녀와 같이 죽어갔던 검술도 버릴 때가 왔다.

완전히 무너뜨리고, 새로 쌓기 위해.

셰이는 다시 천앵을 잡았다.

“후우. 후우.”

탄탈로스에서 꽤 많은 것을 얻었다. 이야기로만 들었던 탈옥 사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흡혈귀와 개의 왕까지 만났다. 거기다 예상치 못한 변수까지.

…변수.

검이 삐걱인다. 궤적이 비틀어졌다. 셰이는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고 이를 악물었다.

태평하고 느긋한 인상의 그. 그를 떠올릴 때마다 셰이는 뭔가가 어긋나는 기분을 느꼈다. 셰이가 아는 미래에는 존재하지 않는 자. 그러나 그는 확실한 존재감을 내뿜으며 이곳에서 지내고 있다. 아지와는 그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이고, 티르칸쟈카 역시 그를 은근히 신경 쓰고 있다. 이대로 사라져도 그 존재감은 확실하게 각인될 터.

무엇보다 셰이, 그녀도 과하게 그를 신경 쓰고 있었다.

“치잇. 거기서 걸리지만 않았어도….”

엮일 때마다 말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기분은 나쁘지만, 그렇다고 그 남자가 나쁜 짓을 했냐면 그건 또 아니다. 무언가를 할 때마다 묘하게 불쾌할 뿐.

더불어 그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셰이가 쓴 은신술을 단숨에 꿰뚫어 보고 엿들을 것을 예상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전력을 다해 싸우면 이길 수야 있겠지만, 딱히 적대하는 기색이 없는 지금 굳이 모든 것을 소모해가며 사생결단을 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셰이가 내린 결론은 잠정 방관. 싸움을 걸지 않는 한 공격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방심한 상태에서 기습이라도 당하면 곤란하겠지만….

“곤란하긴. 오히려 좋지. 믿지 못할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니까.”

그러다 죽는다면 다음 회차로 넘어가면 된다. 그때부터 그 남자는 셰이와 엮이는 순간 사지가 잘린 채 추궁당하는 꼴이 될 것이다.

잡념이 섞였다. 셰이는 생각을 털어내듯 검을 휘둘렀다.

이천 번째, 검을 휘둘렀다. 땀방울은 바닥을 적시고, 호흡은 슬슬 가빠져 오나, 여전히 만족스럽지가 않다. 새로 익힌 혈조술로 힘을 담자니 균형이 어긋나고, 낭비 없이 깨끗하게 그으면 예전 검술로 회귀하는 느낌이다.

피. 피를 온전히 이해하고 몸에 흐르는 무게를 느낄 수 있다면 뭔가 달라질까 했는데.

그녀의 재능으로는 부족한 걸까. 그녀의 모든 힘을 담아낼 자세를 찾지 못하는 걸까.

이럴 때 도움이 되는 대련 상대라도 있었다면…. 예를 들어, 그 밑바닥을 알 수 없는 남자 같은….

“엇!”

너무 골똘히 집중했나.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검 휘두르는 것을 멈춘 셰이는 깊게 숨을 고르며 불청객을 노려보았다.

불청객은 두터운 갑주를 입고 있었다. 셰이는 단숨에 그 모델을 파악했다. 군국의 군용장비, 군장. 저 낙후된 디자인에 관리가 부실한 흔적을 보니, 노후로 폐기할 모델을 누군가 훔쳐 쓰고 있는 모양이다.

셰이는 옷 소매로 얼굴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레지스탕스?”

“뭐, 뭣? 어떻게?”

청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간단한 논리다. 비록 노후된 모델이라고 하나, 군국이 군사기술의 정수인 군장을 방치할 리는 없다. 전부 수거하여 폐기하거나, 분해하여 새로운 군장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

그럴 모델을 착용한 사람이 있다면, 폐기 예정인 군장을 훔치거나 탈취한 사람일 터.

그렇다면 레지스탕스밖에 없다.

잠깐 당황한 불청객은 불편한 감정을 웃어넘기며 말했다.

“하하. 우리 레지스탕스의 명성이 널리 알려진 모양이군. 이런 어린 소년도 우리를 알아보다니…. 소년, 너도 노역자니?”

“아니. 죄수인데.”

셰이는 짧게 대답했다. 대화를 더 이어나가고자 할 의지가 없이 내뱉는 말이었다.

그때 셰이는 문득 청년의 말에서 이상한 부분을 발견했다. 그보다 너‘도’라니? 지금 이곳에 노역자는 없을 텐데?

그 점을 지적하기 전, 청년이 먼저 호들갑을 떨었다.

“이토록 어린 소년을 탄탈로스에 가두다니! 군국은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한 나라군! 이 어린 소년이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도시 한복판에 죽치고 앉아서 나를 이기면 금화를 주겠다고 했어. 우글우글 몰려든 사람을 하나하나 쓰러뜨렸지. 나중에는 군대가 와서, 그들도 전부 쓰러뜨렸어. 그러니까 장성이라는 사람이 와서 나를 잡아가더라고.”

“응?”

청년은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상대가 예상과는 다른 대응을 보이자, 그는 이제야 셰이를 제대로 볼 생각이 들었다.

잘 못 먹었는지 가냘프고 얇실한 몸이다. ‘사내’인데도 태생부터 뼈가 가는 듯, 낙낙한 바짓단 아래 보이는 얇은 발목은 살짝 치면 금방 부러질 듯하다. 싸움에 적합한 육체가 아니다.

하지만 안광이 서린듯한 형형한 눈빛에는 한 톨의 두려움이 없었으며, 올곧은 자세는 잘 벼린 칼처럼 날이 서 있었다.

인간이 아니라 한 자루의 검 같았다. 숨을 쉬는 것조차 섬뜩하며, 가만히 서 있어도 상대를 베어낼 것 같은.

청년은 본능적으로 군장을 조정했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갑주가 움직이며 목과 턱 아래쪽을 덮었다. 셰이는 아직 적의를 발하지도 않았는데, 지레 겁을 먹어서 급소를 보호한 것이다.

셰이는 베어낼 듯한 시선으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탄탈로스에, 레지스탕스가 온 이유…. 설마 죄수들을 구출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겠고. 테러하러 왔지?”

정곡을 찔렸는지, 청년은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소리쳤다.

“무슨 소리를! 우리가 테러리스트라도 되냐!”

“응.”

딱 잘라 말한 셰이가 차갑게 말했다.

“레지스탕스… 비전도 없이, 그저 막연한 불만을 가진 떨거지들. 너희가 하는 일이라고는 불나방처럼 달려들어서 테러하는 일뿐….”

직접 겪고 느낀 듯한, 아니, 실제로 겪었던 실망과 환멸. 셰이의 목소리에 차가운 단정이 담겼다.

청년은 셰이의 감정을 느꼈는지 흠칫했다.

“사상교육에 너무 물들었나 보군! 우리는 레지스탕스, 자유를 위해 저항하는 단체다. 부당하게 권력을 움켜쥔 군사 정부를 무찌르고 이 나라에 진정한 자유를 줄 것이다!”

“해봤는데, 별로 바뀌지 않더라고. 아니, 더 나빠졌지.”

“그게 무슨 소리냐?”

“이해할 필요 없어. 설명해줄 생각도 없고.”

셰이는 천앵을 어깨에 걸치고는 청년을 노려보았다.

“탄탈로스를 무너뜨리려고? 웃기는 소리. 너희 같은 쥐새끼가 찍찍거리며 갉아먹는다고 무너질 탄탈로스가 아니야. 너희는 실패할 거야. 왜냐면, 아직 무너질 때가 아니거든.”

“아니! 우리는 성공할 것이다! 대장이 이미 작업 중이야. 작업이 끝나면 이 전설적인 감옥이 무너지고 우리는 해방자로 기록될 것이다!”

청년은 흥분을 참지 못하고 그렇게 소리쳐버렸다. 셰이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방금 자기 입으로 말했네. 테러하러 왔다고.”

“흡!”

스스로 말했으니 이제 부정할 수조차 없다. 청년은 얼굴을 콱 찌푸리더니, 위협적으로 팔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제법이구나. 꼬마. 유도신문이라니.”

“병신. 그냥 니 입이 싼 거지. 이게 유도신문이면 군국 보안청의 프로파일링은 독심술이겠다.”

연이은 도발에 청년의 이성이 끊어졌다. 대장의 충고도 잊은 채, 청년은 적의를 불태우며 소리쳤다.

“그래! 탄탈로스는 무저갱 너머로 사라진다! 우리는 이 압제의 상징을 무너뜨릴 것이다! 그래서, 어쩔 거지?”

“탄탈로스가 무너지면 너희도 무사하지는 않을 텐데?”

“상관없다! 우리는 죽음을 각오하고 왔어! 레지스탕스는 언제나 나라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있다!”

“흠. 나라라.”

나라 운운하는 사람 치고 제정신인 사람이 없더라. 셰이는 피식 웃으면서 팔을 들었다.

“글쎄? 그 남자가 가만히 두고 볼 것 같지는 않지만.”

탄탈로스는 무너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1년이 조금 안 된 시점, ‘그녀’가 찾아온다. 그 이후 탄탈로스는 무너지고 그 아래에서 진정한 절망이 기어 나온다. 종말의 조각들, 가만히 놔두었다면 그들만으로도 세상에 종언을 고할 수 있는 괴물들이.

그렇기에 이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셰이가 없던 시절에도 한 줄의 언급조차 남지 않은 이들이다. 고작 몇 명의 테러리스트 때문에 무너질 탄탈로스였다면 무저갱이라 불리지 않았겠지.

그녀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문제다. 아마 그 남자가 알아서 잘 처리하겠지. 이런 일에 능숙해 보였으니.

“그와는 별개로, 나도 너희를 가만히 둘 이유 없지?”

스릉.

청명한 울림이 들린다. 셰이가 천앵을 뽑아 허공을 휘저은 것이다. 검명(劍鳴)조차 예기를 지닌 날카로움이 세상에 드러났다.

셰이가 사납게 중얼거렸다.

“허수아비가 제 발로 찾아왔는데 말이야.”

“허수아비?!”

그에 맞서, 사내는 급히 군장을 조작했다. 뒤로 젖혀진 투구가 철컥 솟아오른다. 얼굴에 단단한 투구가 씌워지고 바이저가 내려왔다. 목과 겨드랑이와 같은 약점에 강철 비늘이 돋는다.

강철이 맞물린다. 철컥, 철컥. 규칙적이고 기계적인 소음이 그를 감싼다. 다리에 각반이, 팔에는 건틀릿이, 철갑탄 여섯 발이 장전된 왼손의 총구와 칼날도 찢어발기는 거대한 대검이 달린 오른손이 나타났다.

완전히 무장한 청년이 셰이를 향해 포효했다.

“허수아비라고? 아니! 이게 바로 군장이다! 맨몸에 불과한 네가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생체 단말이 있고, 연금을 보조할 마력이 있으며, 그것을 지니고 움직일 힘만 있다면.

평범한 사람들도 기사 급 무력을 휘두를 수 있게 하는 전신연금장비. 군장.

그 힘을 두른 청년이 위협적으로 걸어가며 소리쳤다.

“말을 함부로 한 것을 후회하게 될 거다!”

“흐으음. 맨몸. 맨몸이라….”

정작 셰이는, 군장을 앞에 두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대신 가늠했다. 상대와 자신의 힘을, 그리고 자신에게 부족한 점을.

“좋아. 마침 아슬아슬한 실전이 필요했으니. 맨몸으로 상대해줄게.”

직후, 셰이는 기공의 운용을 멈췄다.

칼날에 두른 마력도 거뒀다.

이제 여기 서 있는 건, 분에 넘치는 보검을 들고 있는 연약한 소녀.

오직 한 개인의 기예와 경험만으로, 군국의 피와 역사가 쌓아 올린 병기를 넘어서야 한다.

할 수 있을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셰이는 웃었다.

“해보는 거지.”

죽어봤자, 죽기밖에 더하겠어.

소녀는 보이지 않는 검 한 자루를 들고, 기동하기 시작한 군장에게 다가갔다. 금속이 맞물리는 소리를 맞이하여 천앵이 가늘고 길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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