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0 레지스탕스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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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렵다.
이곳은 대지모신의 저주를 받은 땅이자, 천신의 눈이 닿지 않는 심연. 죽는 건 두렵지 않았으나, 죽어도 영혼을 구원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그녀를 공포에 질리게 했다.
베타, 아니, 세라피라는 본명을 지닌 신앙심 투철한 소녀는 언제나처럼 품속에 넣어둔 십자가를 꾹 움켜쥐었다.
“아니야. 천신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계셔. 언제나 우리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고 계실 거야….”
그녀의 아버지는 목사였다. 독실한 신자였던 아버지는 주일마다 어린 양들을 이끄셨다. 사람들은 주일마다 기도를 바치며 일주일을 버틸 작은 위안을 얻었다.
그러나 군국이 모든 종류의 종교를 ‘취미생활’이라 규정한 이후, 불경하게도 신은 세금을 내야 할 처지가 되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 세상의 주인이자 만물의 어버이이신 천신께서 어떻게 세금을 내겠는가. 당연히 반발이 생겨났다. 신실했던 그녀의 아버지 역시 누구보다 앞장서서 그 정책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리고 당연히, 군국에 의해 끌려간 이후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는.
증오를 되새기자 두려움이 한결 가셨다. 베타는 깊게 숨을 내쉬며 지하 무기고로 향했다.
“불경하고, 불의하고, 불량한 군국에게 신의 철퇴를.”
정 안 된다면, 그녀 자신이 철퇴가 되어서라도. 군국을 단죄한 뒤 볼품없이 찌그러지더라도.
그녀가 기도하며 한 걸음을 걸었을 때였다.
그때였다. 갑작스레 지하 무기고의 문이 스스로 열렸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베타는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천신께서 길을 열어주셨다 여기고는 입을 꾹 다물고 성큼 한 걸음 내디뎠다. 신앙과 함께라면 그녀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안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캄캄했다. 베타는 자기 팔꿈치를 툭툭 두들기고 손목까지 쓸어올리며, 전신에 있는 모든 마력을 손가락으로 모았다. 베타는 한참을 꼼지락거린 끝에 속삭였다.
“럭스.”
손가락 끝에서 빛이 반짝였다.
빛을 비추는 군국 제식 마법, 럭스. 학교에서 배웠던 수십 개의 제식 마법 중 그녀가 유일하게 쓸 수 있는 마법이었지만, 그녀는 이 정도로 충분히 만족했다. 어두울 때마다 빛을 비추어 길을 찾을 수 있으니 얼마나 편리하고 좋은가.
물론 이 마법을 증오스러운 군국이 개발했다는 것을 떠올릴 때마다 모순적인 기분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원래 빛은 천신의 것이다. 오히려 군국은 빛을 빌려 쓰는 주제에 세금이나 매기는 불경한 녀석들이고. 베타는 그렇게 변명하며 손가락을 높이 들었다.
안쪽의 어둠은 빛을 비추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잠시 스물스물 물러나기만 했을 뿐. 베타는 간신히 발밑만 비추며 점점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자기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채….
그러다.
촛불이 타올랐다. 불길한 빛이 어둠 속에서 피어올랐다.
베타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사방이 피투성이였다. 마치 온 세상을 누군가 피로 저주한 듯한 모양새였다. 새긴 조각이 아름다웠을 석벽에는 음각된 틈 사이로 새빨간 핏물이 흐르고, 성스러운 그림에는 피에 물든 괴물이 덧그려져 있다.
천신을 모독하는 듯한 광경. 하나 베타는 그에 대한 모욕감보다도 공포를 먼저 느꼈다.
피, 붉은색, 어둠, 그리고 미지.
원초적인 두려움이 그녀를 엄습할 무렵.
[네 녀석이더냐. 나의 궁전에서 감히 천신에게 기도를 올린 무례한 이가.]
베타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녀는 황급히 십자가를 움켜쥐며 총을 들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응어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십자가…. 후후. 오랜만이다. 내 이곳에서도 그것을 볼 수 있을지는 몰랐구나….]
그때, 십자가가 붉게 달아오르며 피로 물들었다. 그 불길한 모습에 베타가 황급히 손을 떼었을 때, 구속에서 풀린 붉은 십자가가 허공으로 튀어나갔다.
베타는 떨리는 눈으로 그 궤적을 쫓았다. 피로 물든 붉은 십자가는 거꾸로 서서, 방 한가운데 있는 목관을 향해 날아갔다.
그 직후. 관 안쪽에서 새하얀 팔이 나타났다. 나긋한 손이 십자가를 향했다. 이제는 붉은 역십자가가 된, 베타의 십자가가 창백한 손 위에 놓였다.
새카맣게 칠해진 목관, 피로 물든 역십자가.
상대의 정체를 깨달은 베타가 총구를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저주받을 흡혈귀! 순리에 대항하여 인간이기를 포기한, 악마의 권속 같으니!”
흰 손이 멈칫했다. 신앙으로 무장한 베타는 새카만 어둠 속에서도 기죽지 않고 관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너는 그것을 모독할 자격이 없어! 당장 내려놔, 이 괴물!”
[…오호라.]
콰직.
피로 물든 십자가가 단숨에 찌그러졌다. 신앙이 모독당한 모습에 분노하기도 전, 거기서 느껴지는 항거할 수 없는 힘에 베타는 본능적으로 겁을 먹었다.
[내가 자격이 없다고? 순리에 대항하여 인간이기를 포기했다고?]
관 속에서 물음이 들려온다. 신은 멀고 악마는 가깝다. 그것을 증명하듯, 베타를 시험하는 듯한 악의와 마력이 그녀를 넘본다.
그러나 아직 베타는 신앙을 잃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에는 신앙이 단단히 자리 잡았으며, 그녀의 손에는 총이 있으니. 지금의 베타는 두려울 일이 없다.
베타가 소리쳤다.
“그래!”
[허튼소리.]
끼긱.
관의 뚜껑이 열린다.
제향나무 관. 습기와 냄새를 빨아들이는 특성 때문에 사서와 장의사들이 사랑한 목재. 천여 년 간 그녀를 담아왔던 관의 뚜껑이 열렸다. 어둠이 기름처럼 흐른다. 짙어지다 못해 액체처럼 변해버린 심연이 흘러나온다.
“두려워할 거라면 두려워하라. 포식자인 나는 너희들에게 두려운 존재일지니.”
그곳에서 새하얀 손이 나타났다. 작고 나긋한 몸짓에서 오래된 기품이 배어나온다. 아득한 향취가 느껴진다. 피가 사방에 가득하니 혈향이 짙어야 할 텐데, 지금 나는 향기는 꼭 오래된 서책에서 나는 향 같다. 제향나무 관의 냄새다.
베타가 그 이질적인 향기에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관의 안쪽에서.
“경멸할 거라면 경멸하라. 흡혈귀인 나는 너희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존재이니.”
그녀가 나타났다.
빛이 바랜 것만 같은 새하얀 인상의 소녀였다. 새하얀 피부는 핏기 하나 없어 꼭 잘 닦은 진주 같다.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은색 머리카락은, 색의 부재로 생긴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광택을 내고 있다. 눈동자는 요사스러울 정도로 붉으나 쉬이 눈을 뗄 수가 없이 매력적이다. 오똑한 코에서 미끄러져 떨어지면 작고 앙증맞은 입술이 돋보인다. 신이 고심하여 빚은 듯 아름답게 이어지는 이목구비는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하다. 어깨끈에 매달린 새카만 드레스는 엄숙하고 단정하여 고결한 신부처럼 보인다.
사방을 둘러싼 어둠조차, 은은하게 빛나는 소녀의 빛을 가릴 수 없었다. 사전 지식이 없었다면 그녀를 천사로 알았을 것이다.
“하나, 저주스러운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나를 부정한 것 취급한다면. 나를 저버린 이들이 다시 염치없게도 내가 그들을 저버린 척한다면.”
어긋난다.
인식이, 신앙이.
인간의 피를 빨아먹는 사특하고 괴이한 존재는 천사와 비견될 정도로 아름답다.
천 년을 묵은 흡혈귀라 하였는데 외견은 갓 피어난 소녀에 불과하다.
피가 가득한 공간에서 오래된 서책의 풍취가 풍긴다.
소문으로만 듣던 광기와 흉성은 보이지 않는다. 나긋한 몸짓은 아득한 기품을 담았고, 작은 얼굴은 아찔한 아름다움을 머금었다.
배워왔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흡혈귀의 모습.
“그토록 경애해 마지않는 신의 곁으로 보내주마.”
마주한 현실은 그녀가 배워온 것들과는 너무나 다르다.
지금은 베타를 둘러싼 상식이 없다. 명망 높은 사제의 힘 있는 한 마디도 없다.
그녀는 혼자다.
처음으로 겪는 시험이다. 신앙을 좇을 것인가, 아니면 눈앞에 도래한 힘에 굴복할 것인가.
베타는 결정했다.
신앙이 아닌, 지금까지의 믿음에 대한 관성으로.
“주여! 저를 이끄소서!”
탕.
총탄이 흡혈귀의 눈을 파고든다. 소녀의 머리가 튕기듯 뒤로 젖혀진다. 핏물이 튀기고, 파육음이 들린다. 자기 자신의 손으로 예술품을 부순 것만 같아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결국 유혹을 이겨내고 신앙을 따랐다는 묘한 희열을 느꼈다.
“해, 해냈어. 악마의 꾐에 넘어가지 않았어…. 내가, 내가 흡혈귀를 무찔렀어!”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것이 네놈의 뜻이더냐.”
튀어 나간 핏물이 다시 떠오른다. 세상이 되감기듯 그녀의 목이 돌아온다. 눈을 꿰뚫었던 총탄은 안쪽에서부터 밀려 나와, 땅으로 툭 떨어졌다.
눈동자는 여전히 붉다. 아니, 아까보다도 더욱 새빨갛다.
그 홍채와 마주한 순간, 그녀의 몸이 뱀 앞에 선 쥐처럼 우뚝 멈췄다. 마치 자기 몸이 아니게 된 것처럼. 손도, 발도 쉬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멈춘 세계에서, 하얀 소녀가 창백한 손을 들었다.
“그렇다면 주를 위해 죽거라.”
히히힝.
불길한 투레질. 그가 고개를 돌려보니, 커다란 핏빛 말이 눈을 부릅뜨고 있다. 눈가에서는 새빨간 안광이 번뜩인다.
언제 다가왔을까. 저토록 커다란 존재가 어떻게 이 지하에 있단 말인가.
그런 의문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
베타는 공포에 질려 신음했다.
“아, 아!!”
총을 쏘려고 했다. 그러나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다. 총조차 그녀를 거부하듯, 아무리 잡아당겨도 미동도 없다.
다급히 내려다 보니, 총은 이미 피에 젖어 새빨갛다. 손잡이부터 총구까지 핏물이 스며들며 총신을 지배하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베타는 그녀의 몸조차 명령을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미줄과 같은 핏줄이 그녀의 피부 위에 도드라진다. 피부에 묻은 흡혈귀의 피가 베타의 팔을 구속한 채 억지로 움직이고 있다.
시조 티르칸쟈카의 피는 지배력이다. 먼 과거, 그녀는 이 힘으로 세상의 반을 지배했다. 백성들이 눈치챌 겨를도 없이 다섯 나라와 일흔두 개의 영지가 그녀의 손에 떨어졌다.
선혈의 낙인. 그녀의 일부가 되어, 뜻대로 움직이는 손발이 되었다는 증표.
총구가 베타의 눈동자를 향한다. 스스로의 가장 연약한 부위를 자신의 무기가 노려본다.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 없다. 천 년 동안 재앙으로 불려왔던 흡혈귀의 힘이다. 신앙심이 투철한 정도로는 저항하지 못한다. 베타의 손이, 눈동자가 부들부들 떨리나, 그녀의 몸은 착실하게 자기 주인에게 총구를 겨눴다.
철로 만들어진 차가운 동그라미와, 그 안에 갇힌 어둠이 보인다. 화약 냄새가 풍긴다. 꼭 지옥에서 타오르는 유황의 냄새 같다.
지금은 차갑고 어두운 더 심연은, 그가 손가락을 까딱거리기만 하면 붉게 타오르며 철탄을 내뱉을 것이다. 제 주인도 알아보지 못하는 멍청한 철탄은 말랑말랑한 눈동자를 깨부수고 머릿속을 헤집을 것이다.
절망스럽게도, 인간에게는 미래에 닥칠 끔찍한 모습을 상상하는 능력이 있었다.
투철한 신앙조차 새어 나오는 공포를 막지 못했다. 이빨이 딱딱 떨린다. 파멸을 앞둔 눈동자가 흔들린다. 신앙은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것이라, 저 철탄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할 수 없다. 그녀의 영혼만 보우할 뿐.
“사, 살려주세요.”
신은 멀고, 총은 그녀를 배반했다. 남은 건 아직도 어린 소녀.
그렇기에. 어쩔 수 없다. 평범한 사람에게 목숨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 역시 가혹하리라.
다만, 슬프게도.
목숨을 요구하는 가혹한 시험은, 그 가혹함에 비해 너무 자주 찾아온다.
“예의도, 기품도, 하다못해 기백도 없구나. 한심하도다. 차라리 끝까지 신을 부르짖었다면 친히 타락시켰을 것을.”
흡혈귀가 한탄을 내뱉었다. 짧고 단정적인 한숨이다. 그와 동시에, 한 인간의 명운을 잘라내는 말이기도 했다.
아름다운 손짓이 나비처럼 허공에 흩날린다.
“가거라.”
철컥.
방아쇠가 당겨졌다. 베타가 죽음을 예견하고는 눈을 꼭 감았다.
하지만 총알이 발사되는 일은 없었다.
헛되이 방아쇠 당기는 소리가 났다. 선혈의 낙인이 방아쇠는 당겼을지언정, 노리쇠를 당겨 안에 든 탄피를 빼내고 새로운 탄알을 장전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 아하하.”
살았다. 베타가 희미하게 웃었을 때.
혈마가 발을 내디뎠다.
그것으로 끝이다.
지금껏 온갖 곳을 오갔던 말들이 무심코 짓밟은 잡초처럼.
인간이 별다른 생각 없이 손가락으로 눌러 죽였던 벌레처럼.
한 명의 인간은 한 줌의 핏물로 화했다.
시체도 남지 않았다. 바위에 짓이겨진 벌레의 시체는 눌어붙은 조각으로만 남아있듯, 혈마 랄리온의 발굽에 밟힌 인간은 벽과 바닥의 일부가 되었으니.
티르칸쟈카는 손을 휘둘렀다. 파도치는 핏물이 그 흔적마저도 휩쓸고 지나간다.
그 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흡혈귀는 무례한 침입자를 치웠다. 세상에서, 그리고 그녀의 기억에서.
한 줌의 핏물까지 기억하기에, 혈해(血海)는 너무나도 광활했다.
다만, 그녀의 몸에 조금이나마 상처를 냈던 철탄은 남았다. 티르칸쟈카는 흰 손으로 총탄을 들어올렸다.
금속이 몸을 파고 들어갔던 게 얼마 만인가. 셀 수도 없이 많은 낮과 밤을 되짚어야 할 것이다. 비록 이런 종류의 공격은 흡혈귀의 시조를 조금도 해칠 수 없으나…. 어쨌건 과거 내로라하는 기사들이 시도했고 극소수만 성공했던 업적이었다.
그걸 저렇게 평범해 보이는 소녀가 해내다니.
“조금 따끔하구나…. 요새 사람들은 다 한 수 정도는 숨기고 있나 보구나.”
심지어 티르칸쟈카가 방아쇠를 당겼을 때는 작동하지 않았다. 사용자를 인식하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는 모양.
경계할 필요는 있겠구나.
총을 처음 보고, 처음 맞아본 고대인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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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최고로 좋은 날이야!
인간! 인간이 맛있는 걸 만들어줬어! 고기였는데 콩 맛도 나면서 엄청 맛있었어!
거기에 공놀이도 했어! 인간, 던지는 공, 너무 느려서 살짝 지루했지만! 그래도 좋았어! 공놀이는 놀이로 즐거운 거니까!
거기다, 거기다!
“멍!”
새로운 인간이야! 많아! 저렇게 많은 인간이 떠들고 있으니 흥겨워!
아! 혹시 저 인간들 중에 맹약을 이행할 사람이 있을까?
“멍멍!”
웃으면서 다가가면 좋아해 줄 거야!
같이 공놀이를 하면 더 친해질 거야!
맹약을 이행하지 못해도 괜찮아! 그래도 인간은 인간인걸!
한 명이 나타났어! 나에게 말을 걸었어! 놀자! 즐거워! 즐거울 거야!
즐거워!
즐거워.
즐거….
탕.
….
알아.
나를 무서워하는구나.
나를 두려워하는구나.
다들 겁을 먹었어. 몸을 떨고 있어. 도망치고 싶어 해.
그러지 않는 건, 도망칠 곳이 없어서야.
슬퍼.
내가 기대는 만큼 기대지 않아. 무너질 것 같아. 불안해.
하지만 내가 웃는다면, 계속 기댄다면 언젠가 기대주지 않을까?
조금 더 놀자. 조금만, 조금만 더.
….
전부 떠났어. 나를 두려워해서, 눈도 마주치지 않고 도망갔어. 괴물, 누가 지나가면서 중얼거렸어.
나는 괴물이 아닌걸. 나는 강아지야.
말 잘 듣고, 기다릴 줄 아는 착한 강아지야!
인간의 말을 듣고 어둡고 컴컴한 곳에 왔어. 여기서 오래 기다렸어. 대답이 없어도, 계속, 계속 기다렸어. 인간이 인간들을 무섭게 죽여댈 때에도, 불쾌한 피 냄새가 나도, 두 눈을 꾹 감고는 견뎠어.
나는 착한 강아지니까. 심심해도, 외로워도, 힘내서 기다리는 착한 강아지니까!
…그래도. 다들 나를 무서워하나 봐.
“물어 와!”
이 좋은 인간 빼고.
좋은 인간의 손, 좋아. 나를 자주 쓰다듬어 줘. 머리와 턱을 긁어 줘.
그래도 좋은 인간이 있어서, 나는 좋아!
그렇게 쓰다듬은 뒤, 좋은 인간은 나쁜 인간에게 걸어가. 밝게 웃으면서 손을 들어. 희고 네모난 게 손등에서 툭하고 나타났어! 계속 뭐라고 말하면서 흰 네모를 이리저리 움직여!
어?
푹.
피가 나. 인간이 쓰러졌어. 그리고 움직이지 않아.
“멍?”
죽었어.
응. 죽었어.
인간이 인간을 죽였어. 피가 나. 멈추지 않아. 죽었어.
저번에도 그러더니, 인간끼리 죽이는 건 평범한 일인가 봐.
아니, 오히려. 인간에게 있어 죽음이란… 굶주림이나 질병, 포식자가 아닌, 다른 인간의 모습을 하고 찾아오는 것일 수도.
“후우.”
죽인 인간이 눈을 감고 있어.
나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주고, 공놀이도 하고, 나를 자주 쓰다듬어주는 좋은 인간이야. 가끔 짜증은 내지만, 왠지 때리려고 한 적도 있지만. 나를 무서워하진 않아. 좋은 인간이야.
그런 좋은 인간이, 다른 인간을 죽였어.
나에게는 좋은 인간이지만, 다른 인간에게는 좋은 인간이 아닌가 봐.
그런데.
혹시 말이야.
“멍.”
혹시 너도 내가 무서워?
내가 다가가니, 좋은 인간이 얼굴을 찌푸렸어. 덜컥 겁이 나. 혹시 내가 두려운 걸까?
“엥. 여기 왜 오냐. 배고파? 시체는 먹을 생각 마라. 인간 고기에 맛들이면 내가 위험, 아니지. 사람들이 싫어할 거다.”
알아. 안 먹어. 인간 고기는 별로 끌리지 않는걸. 먹으면 무서워하는 것도 알아.
그러니 먹지 않아. 나는 착한 강아지인걸.
“어어? 야. 지금은 쓰다듬을 시간이 없거든? 나 할 거 있으니까 잠깐 저리 가 봐.”
나는 친해지고 싶어. 무서워지고 싶지 않아.
하지만 만일 무섭다면, 처음부터 알려줬으면 해.
“가라니까! 만져줄 시간 없다고!”
무섭다면 차라리 내가 떠날 테니까.
“야. 됐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네.”
인간이 혀를 차고는 내 머리를 꾹 눌렀어. 하나도 안 무겁지만 움직였어.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나니, 인간이 나를 끌어안고 거칠게 쓰다듬었어.
거칠었지만, 좋았어.
나를 무서워한다면, 이토록 꽉 끌어안지는 못했을 거야.
“됐냐? 됐지? 충분히 많이 쓰다듬었지? 나 사람 담그러 가거든? 너는 사람 못 죽이니까 그냥 식당이라도 가서 냄비나 핥아먹고 있어! 훠이! 훠이!”
그럴게.
나는 인간과 싸우지 못해.
그게 인간과 싸우는 거라면, 좋은 인간을 돕지 못해.
하지만, 그래도.
좋은 인간은 살았으면 해.
네가 죽으면, 나는 슬퍼서 울 거야. 하루 종일 울 거야. 아마 이틀 정도는 먹는 것도 잊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할짝.
아지는 내 볼을 한 번 핥더니, 터덜터덜 식당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침으로 축축해진 볼을 손으로 닦아냈다.
정말 이상한 녀석이란 말이지. 혼자 즐거웠다가, 우울해졌다가.
여전히 개의 생각은 잘 못 읽겠다니까. 분명 인간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태어난 대언자인데, 정작 그 생각은 전혀 모르겠으니.
모르는 게 당연한가? 개의 왕은 기본적으로 모든 개의 대표자, 아니, 대표견. 생각을 읽을 수 있다면 그게 더 문제일지도.
“자, 어쨌든. 찾기는 찾았으니.”
독심술을 너무 쓰느라 머리가 아팠지만 그래도 성과는 거두었다.
지금껏 죽어나간 녀석들은 머릿수만 채우는 떨거지들. 진짜 본대인 카니센과 기술자는 여전히 관리실 내부에 있다. 무언가를 찾아냈는지 움직임이 없다.
흡혈귀는 지하 무기고에 있다. 회귀자는 군장을 낀 적과 맞서 싸우는 중이다.
둘 모두 적을 순식간에 처리하고 나를 도우러 올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문제가 있다면, 둘 모두 그럴 생각이 없다는 점이다.
흡혈귀는 바깥 상황이 어떻게 되든 관심이 없고, 회귀자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거라고 믿으며 일부러 힘을 제어하고 싸우고 있으니.
“염병. 내가 알아서 처리는 무슨.”
지금 당장 달려가서, 회귀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빨리 적을 무찌르게 한 다음, 탄탈로스를 폭파시키려는 카니센을 저지한다.
가능이야 하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것이다. 더불어 나에 대한 경계심이 최고치를 찍은 회귀자라면 믿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 손으로 어떻게든 해야 하나? 아, 이길 자신 없는데.
‘찾았다!’
어라. 이 생각은 감마라 불렸던 기술자인가? 왠 생각이 갑자기 이렇게 크게 터지냐. 다 들리게.
‘탄탈로스의 비밀을 알아냈어! 설마 이런 구조였을 줄이야. 관리실 지하가 파헤쳐지지 않았다면 영원히 몰랐을 거야!’
어? 뭔데? 비밀을 알았다고?
‘하하! 이런 구조라면… 부수는데 폭약도 별로 필요하지도 않아! 무너뜨리는 건 한순간이야! 빨리 대장에게 보고해야 해!’
아니, 잠깐! 진짜?
시간이 없다. 나는 급히 관리실을 향해 뛰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