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35화 (35/384)

EP.35 웃으면 복이 온다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땅이 스러진 자의 피를 머금고, 끝없는 어둠은 사연이 담긴 이들을 삼켰다. 자애로우신 지모신조차 저주를 내린 무저갱에서 어리석은 아이들은 참지 못하고 또 다른 죄를 저지른다.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기고자 했던 기사는 결국 그를 따라온 네 청년과 함께 유명을 달리했다.

그러나 흐르는 시간은 거대한 강처럼 모든 것을 흘려보내고, 굴곡진 일생을 일상이라는 평탄한 바닥으로 다져놓는다. 어제 있었던 죽음은 누군가에게 알려지지도, 아무런 감흥을 전하지도 못한 채 가라앉고.

예전과 같은 일상이 나를 찾아왔다.

“멍!”

으음. 오랜만에 듣는 것 같은 알람소리다. 나는 뒤척이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아지는 내 손과 팔에 코를 문대며 연신 짖었다. 그러고도 내가 영 일어나지 않자 살짝 깨물기까지 했다.

“멍! 멍!”

“아아, 알았어. 일어날게.”

늘어지게 기지개를 피고, 알람에게 보상으로 쓰다듬기 한 번 해주고, 오늘 분량의 물로 세수를 하고 옆 방의 물로 머리를 감았다. 상쾌한 기분이다. 여기에 따사로운 아침 햇살과 시원한 바람만 있으면 바랄 게 없겠는데.

생체 단말에 교관복 패킷을 끼웠다. 빡빡하지만 움직임에 방해는 없는 교관복이 내 위를 뒤덮는다. 순식간에 옷을 갈아입은 나는 주머니 속에 이것저것을 쑤셔 넣고 나섰다. 아지가 내 곁으로 바짝 따라붙었다.

“아침 먹고 산책이나 가자.”

“멍!”

“오늘 아침은 어제 새로 배급되어 신선하고 깨끗한.”

“멍멍!”

“콩 통조림 스튜야. 괜찮지?”

“멍, 멍!”

다행이다. 개 기억력이 별로라서 그런가, 어제 먹은 메뉴여도 괘념치 않아해서. 아지한테는 앞으로 콩만 먹여야겠다.

아침도 든든하게 차려 먹었겠다, 이제 다음 일을 해야지.

마당으로 나왔다. 아지가 혹시 공놀이인가 하고 눈을 반짝이며 내 뒤를 따라왔다.

오늘은 아니다 이 똥개야. 어제 그렇게 놀았으면 만족할 줄 알아야지. 만족을 못하는 거니, 아니면 벌써 까먹었니? 이때만 기억력이 좋아질 수는 없나?

자꾸 내 앞으로 앞질러서 기대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는 아지를 밀어냈다.

“방해하지 마. 오늘은 엄청나게 힘든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멍?”

“아침 잠 많고 잠버릇도 고약한 어르신을 깨워야 하거든.”

나는 비장한 태도로 흡혈귀가 기거하고 있는 지하 무기고로 향했다. 어둠 속에서도 음산한 기운이 눈에 보일 듯이 넘실거린다. 침을 꿀꺽 삼킨 뒤, 무기고 철문으로 다가가 쾅쾅 두드리며 소리쳤다.

“티르칸쟈카 교육생! 일어나세요! 해가 중천에 떴습니다!”

“멍?”

아지가 의아한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저갱 안에서 태양 따위는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아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 어때. 바깥에는 분명 중천에 떴을 거라고. 반박하고 싶으면 태양 불러 오던가.

나는 손과 발을 사용해서 연신 무기고 문을 두들겼다.

“일어나세요! 언제까지 주무시고 계실 겁니까! 위에서 레지스탕스가 쳐들어와도 드르렁, 이 땅이 붕괴할 위기여도 드르렁. 거, 한 번 죽었으면 답니까? 죽으면 노동이 끝나요, 납세가 끝나요? 몸을 움직일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사회에 공헌할 생각을…!”

“아침부터 무슨 소란이냐.”

내가 냅다 두들기고 있는데, 지하 무기고의 문이 느긋하게 열렸다.

“무례한 놈이로다. 손님으로 왔으면 주인이 몸단장할 동안은 기다려야 하지 않겠느냐.”

“어차피 관 속에 있으면서 몸단장은 무슨….”

한마디 하려던 나는, 문틈으로 나타난 흡혈귀의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당연히 관짝 안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생각했는데, 지금의 흡혈귀는 여느 때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 일어나 계셨네요.”

둥둥 떠 있는 제향나무 관은 지겨울 정도로 그대로다. 그러나 그 위에 흡혈귀가  앉아있다. 다리를 다소곳이 모은 흡혈귀는 고풍스러운 비녀로 머리를 틀어올린 채 어깨에 양산을 살짝 걸치고 있어서, 옛 왕조의 공주가 나타난 듯한 우아함을 뽐내고 있었다. 어둠을 그러모아 만든 새카만 양산은 무게가 없는지 흡혈귀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걸려 버드나무 잎처럼 흔들거렸다.

치렁치렁한 옛 복식. 소매가 워낙 커서 틈으로 새하얀 피부가 슬쩍 드러난다. 천을 많이 써 여유로움을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복식이다. 군국이 보면 기함을 하겠지만, 과거에는 실제로 저렇게 입고 다니곤 했다.

흡혈귀가 한 발 앞으로 걷자, 거대한 강철문이 흡혈귀를 영접하듯 양쪽으로 활짝 젖혀졌다. 철문에 새겨진 새빨간 낙인이 빛을 발했다. 지독할 정도로 느리게, 혹은 시간을 많이 쓰는 방식으로 품위있게 흡혈귀는 지하무기고 밖으로 나섰다.

그녀의 뒤로 철문이 쿵, 하고 닫혔다. 흡혈귀는 관 위에 올라탄 채 중얼거렸다.

“근래 통 시끄러워서 말이다. 도저히 잠들 수가 없더구나. 어째 셋 밖에 없는데 백이 넘게 있을 때보다도 소란스러운 것이냐. 멱 따이는 돼지새끼보다도 시끄럽게 울부짖으니 살 수가 있어야지, 원.”

“와. 안 깨웠으면 더 주무시려고 했어요? 그만큼 자고도 부족해요? 몇백 년 동안 주무셨으면 슬슬 잠도 질려서 도망갈 텐데.”

“…되었다. 내 너랑 입씨름한 것이 잘못이지.”

흡혈귀는 나를 흘겨보고는 관을 다스려 앞으로 나아갔다.

“왜 관에서 나오셨어요?”

“잠에서 깨기로 했다면 단장을 해야지. 그것이 기본 아니겠느냐.”

왠지 날 선 태도로 대답한 흡혈귀는 고개를 홱 돌려 나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아니면. 내가 차려입은 것에 불만이라도 있느냐?”

‘어디, 또 어제처럼 주책이라고 지껄여보아라.’

뭐야. 갑작스러운 이 적의.

아. 설마.

내가 어제 주책이라고 해서 삐진 건가?

흐음. 읽어봐야 하나. 아침이라 독심술하기 귀찮은데, 그래도 안 할 수는 없겠지. 나는 주먹을 몇 번 말았다가 편 뒤 흡혈귀의 생각을 읽는 데에 집중했다.

‘외모를 가꾸고 내보이는 건 본래 예의를 아는 자라면 필히 해야 할 일이다. 정작 자기도 매일 머리에 물을 묻혀놓고 제복까지 차려입는 주제에 나한테만 무어라 면박을 주다니…! 내 저번에는 네 녀석의 부당한 언행에도 말려드는 바람에 반박하지 못했으나, 오늘은 다르다. 이 건방진 녀석에게 본때를 보여주겠어!’

와. 어제 내가 했던 말을 하루 동안 그대로 담아두고 계셨구나. 나이는 많이 드셨는데 속은 왜 이리 옹졸하시담. 이 정도 기억력이면 치매 올 일은 없겠어.

왜 이리 억하심정이 커졌는지는 모르겠으나, 하루 동안 김장한 감정은 푹 익어서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이럴 때 맞부딪히면 진짜 큰일 난다. 조금 풀어줘야지.

나는 최대한 온건하게,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아니요? 차려입은 거에 왜 불만이 있겠어요. 제 눈만 호강하는데.”

“네놈. 옷을 단정히 하는 것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기본적인 예절이거늘… 뭐?”

“저도 인간인데 나무 관이 둥둥 떠다니는 것보다는 예쁜 사람이 차려입은 모습이 훨씬 좋죠. 색색들이 물든 비녀와 옷이 당신의 하얀 인상과 잘 어울려요. 흰 종이 위에 색을 칠하고 기교를 부린 것 같아요. 흡혈귀에게 매료의 마력이 있다고 전해 내려오던 게 공연히 생긴 이야기는 아니었나 봐요.”

“어?”

“세상 사람들이 질투하겠어요. 불로불사, 영생을 살아가는 흡혈귀라 시간조차도 외모를 바랠 수 없으니. 어쩌면 관 속에 계속 계시는 게 세상을 위한 일일지도 몰라요. 그래야 여자들에게서 질투가 사라지고, 남자들이 교만을 저지르지 않을 테니.”

“으, 음….”

어제 하루 동안 씩씩거리면서 몸단장을 한 흡혈귀다. 관에서 나왔다는 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겠다는 뜻이다. 옷을 차려입고 머리를 틀어올린 건 그 의지의 표명.

오랜 시간, 많은 감정을 담아서 준비한 것에는 그만한 보상이 필요하다. 안 그러면 저게 다 한이 되어서 나를 덮칠 테니.

뒷골목에서 사기를 치며 단련된 나의 칭찬에 흡혈귀는 양산을 살짝 기울이며 대답했다.

“흐, 흥. 입에 발린 말은 잘하는구나.”

“아부를 떠는 건 맞는데, 거짓말은 아니에요. 평소에 제 언행을 보셨다면 아시다시피 저는 한 마디 한 마디 진심을 담아서 하는 사람이라, 도리어 마음에 없는 소리는 못하거든요.”

“어제는 나보고 주책이라 했으면서….”

“급한 상황이라서 주책이라고 한 거지, 아름답지 않다는 말은 한마디도 안 했어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허위보고는 군국에서 가장 큰 죄악이라 여기는 행위이고, 티르칸쟈카 교육생이 아름답지 않다는 말은 명백한 허위보고일 테니까요.”

좋아. 드디어 흡혈귀가 입을 다물었다. 고개도 돌리지 않고 양산으로 얼굴을 가린 채 저 멀리 나아갔지만, 독심술로 읽어본 결과 상당히 기뻐하고 있다. 더불어 나에 대한 인상도 조금 좋아졌다.

휴우. 급한 고비는 넘겼고. 자. 이제 회귀자를 데리러 가자.

회귀자는 감옥 1층에서 살고 있다.

교관도 다른 죄수도 없는데 왜 대단하신 회귀자가 아직 그 좁고 답답한 감옥에서 사냐, 라고 묻는다면 고개를 내려 한 번 쳐다보시라고 전하겠다.

회귀자는 자기 감옥 벽을 포함하여, 그녀와 이웃한 방 열 개의 벽을 전부 ‘벴다’. 죄수가 탈출하는 일을 막기 위해 철판까지 넣어 만든 두꺼운 콘크리트 벽은, 조립형 가구처럼 네모반듯하게 잘려서 감옥 한편에 고이 쌓였다. 회귀자는 그렇게 넓어진 감옥을 연무장 겸 거주지로 삼고 생활했다.

사실상 1층은 전부 회귀자의 집이라 봐도 무방했고, 회귀자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1층에 한 발 들어선 순간부터 날카로운 경계심이 우리를 향했다.

“어? 티르칸쟈카? 아지? 그리고….”

회귀자는 방문자의 면면을 확인하고는 경계를 풀었다. 그 와중에도 나를 보고 살짝 얼굴을 찡그리는 게 억울하다. 내가 뭘 했다고.

“여기는 왜?”

“오늘은 긴히 할 말이 있어서요. 따라와요.”

“나 바빠. 할 일 있어.”

“아 씨. 장단 더럽게 못 맞추네. 분명 밖에서는 외톨이였을 거야.”

“…방금 뭐라 지껄였어?”

방으로 들어가려던 회귀자가 적의를 풀풀 풍기며 다시 얼굴을 내밀었다. 단 한 마디로 회귀자를 복귀시킨 한 나는 시치미를 뚝 떼며 말했다.

“중요한 전파사항이 있으니까 제 세미나에 참석해서 들으라고요, 셰이 교육생.”

“중요한 말이니까 잘 들어. 그럴, 시간, 없어.”

‘어제 혈조술에 대해 감을 잡아서 밤새도록 검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귀찮게.’

네 노력은 가상하나 내 알 바는 아니다. 나는 턱을 치켜들며 회귀자가 궁금해할 만한 내용을 슬쩍 흘렸다.

“탄탈로스의 구조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그것도 필요 없어요?”

“탄탈로스의… 구조?”

예상대로, 자기가 모르는 새로운 ‘지식’에 솔깃한 회귀자는 턱에 손을 괴고 고민했다.

‘나는 탄탈로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건 알지만, 여기의 구조나 비밀 같은 것은 아직 잘 몰라. 만일, 탄탈로스의 구조를 알 수 있다면, ’그녀‘가 찾아오는 이유도 알 수 있을까?’

회귀자는 열세 번의 회귀를 반복하며 수많은 지식과 비밀을 파헤쳤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이 세상에는 무엇이 암약하고 있는지. 지금 이 순간 회귀자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심지어 회귀의 특성 때문에 독심술로 마음을 읽는 나조차도 완벽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회귀자가 붕괴하기 전 탄탈로스에 온 건 이번 회차가 처음. 즉, 레지스탕스의 습격을 겪고 알게 된 탄탈로스의 구조에 대해 모를 거라 예상했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겉으로는 주저하는 회귀자였으나, 마음은 이미 기울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몸을 빙글 돌리며 말했다.

“뭐. 변경백도 싫으면 그만이죠. 그럼 전 이만.”

“잠깐.”

걸러들었구나.

감마, 아니, 위크롤, 고마워. 너는 죽었겠지만 너의 지식은 내가 잘 쓸게. 사람은 죽어도 지식을 남기는 것 아니겠니.

“채비할 테니 기다려.”

회귀자가 천으로 구분된 안쪽 공간으로 들어갈 때였다. 호기심을 가지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던 아지가 갑자기 나를 향해 쪼르르 달려오더니 입에 문 것을 툭 떨어뜨렸다. 마법이 깃든 수정으로 가공된, 투명하고 안쪽에서 기이한 빛이 소용돌이치는 동그란 구슬이었다.

“멍! 멍!”

“뭐냐. 공던지기 하자고? 그렇다고 남의 물건을 함부로 들고 오면 어쩌자는 거야.”

딱 봐도 비싸 보이는 것을. 나는 구슬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려 이리저리 살폈다. 이게 무슨 구슬일까. 안쪽에 꽤 많은 마력을 담고 있는 것 같은데. 비싸려나? 아니면 위험하려나?

“아, 그거. 폭탄인데.”

둘 다였다. 나는 급히 구슬을 저 멀리로 내던졌다.

“끄아아아악!”

구슬이 감옥 복도를 따라 멀리 나아간다. 그 틈에 나는 가까운 모퉁이로 도망가서 벽 뒤로 몸을 숨겼다. 제길, 폭탄을 개가 물어갈 수 있는 위치에 두면 어떻게 해! 폭발물은 관리 철저히 해야….

잠깐. 개?

설마, 하는 생각에 벽 너머로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마침 저만치 달음박질 친 아지가 완벽한 자세로 떨어지는 구슬을 받아내는 모습이 보였다.

아, 저거 물면. 혹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을 때, 아지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멍! 멍!”

“아, 안돼. 가지 마! 물지 마! 오지 마!”

겁에 질린 나는 땅을 박차고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킬 즈음에 아지는 이미 내 앞으로 다가온 상태였다.

아지는 눈을 말똥말똥 뜨며 내 발치에 구슬을 내려놓았다. 미처 대응할 새도 없이, 아지가 떨어뜨린 폭탄이 바닥에 닿고 말았다. 나는 양손을 마구잡이로 뻗으며 주저앉았다. 마치 손발로 폭발을 막을 수 있으리라 믿는 것처럼.

그렇게 통, 하고 폭탄이 복도 위에 떨어졌고….

회귀자의 비웃음이 들렸다.

“풉, 큭큭. 멍청이!”

‘방금 겁 먹어서 저런 거야? 저건 용암눈물. 고순도의 마력을 특정한 패턴으로 불어넣지 않으면 절대로 터지지 않는 폭탄인데!’

구슬은 아무런 변화도 없이 데굴데굴 내 발치로 굴러와 툭 부딪혔다. 나는 멍하니 구슬을 주워들고는 회귀자와 구슬을 번갈아 보았다. 회귀자는 나의 망연자실한 표정을 보고는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푸흐하하! 아무리 그래도, 내가 위험한 물건을 아무 데나 놔둘 리가 없잖아!”

“…폭탄이라면서요.”

“폭탄은 맞아. 하지만 내가 터뜨리려고 하지 않는 한 절대 터지지 않아.”

“폭탄이면 위험한 거지 뭔 소리야! 무저갱에 산다고 상식도 무저갱에 빠뜨렸나. 당장 치워요!”

“푸훗. 알았어. 알았어.”

회귀자는 키득키득 웃으며 구슬을 주워들었다. 아지가 고대하는 눈으로 회귀자를 보았으나, 회귀자는 아공간 포켓 안쪽으로 쑥 넣어버렸을 뿐이었다. 아지가 장난감을 빼앗긴 표정으로 회귀자를 노려보았다.

“쳇.”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독심술의 한계를 맛본 느낌이라 찝찝했다.

회귀자가 가진 이전 회차의 지식은, 회귀자가 직접 되새기기 전까지 읽을 수가 없다. 그렇기에 회귀자와 관련된 일이 벌어지면 대처도 늦고 반응도 예상하기 힘들다. 독심술 한정으로 커다란 자부심을 느끼고 있던 내게 처음으로 다가온 시련이었다.

아니, 시련도 아니지. 솔직히 회귀는 좀 규격 외가 아닌가. 그런 상대로 열심히 일하는 독심술이 대견한 거다. 세상이 너무한 거지 독심술이 부족하지 않아.

어쨌든. 다 모였으니 가 볼까. 내 이미지를 깎아먹은 시점에서 뭔가 덧붙이는 게 어리석은 짓이다. 나는 독심술만 이용해 뒤쪽의 상황을 살피며 말없이 4층 관리실을 향해 걸었다.

가는 도중, 흡혈귀가 손을 말고 입가에 대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나쁘지 않은 여흥이었구나. 저 녀석이 호들갑 떠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아무리 경박하다고 한들 꼴사납게 도망치는 모습을 보니 좀 실망스럽구나. 고작 폭탄 따위가 뭐라고.”

“글쎄? 저 반응, 아마 폭탄의 위력을 대충 눈치챘던 것 같아. 이 폭탄은 터지면 반경 3km는 초토화가 되거든.”

“그, 그 정도냐? 고작해야 폭죽놀이에 쓰이는 게 아니었느냐?”

“그 정도 파괴력이 아니면 쓸모가 없으니까. 푸훗. 어쨌든 덕분에 재미있는 꼴을 봤어. 마음 속에 저장해두고 싶을 정도로.”

흡혈귀는 묘하게 경쾌해진 회귀자를 가만히 보다가 툭 내뱉었다.

“네가 웃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응? 그야, 사람이 웃을 수도 있지.”

“보기 좋더구나. 가끔 웃어보는 건 어떠느냐?”

“가끔이라니. 나….”

회귀자는 갑작스레 입을 다물고는 자기 입가를 매만졌다. 그녀의 얼굴에는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것을 방금 상기해낸 사람이 느끼는 충격이 떠올라있었다.

‘…웃었다고?’

언제나 더 강해지려고 했다. 한 줄의 지식이라도 더 얻으려고 애썼다. 이 세상에는 아직 수많은 힘과 비밀이 잠들어 있었고, 회귀자의 1분 1초는 그것을 손에 넣으려는 몸부림이었다.

심지어 어디 갈 수 없는 무저갱에 들어와서도, 회귀자는 검을 휘두르고 힘을 취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웃음이란 감정적인 사치는 너무 생소해서.

‘웃어 본 게 얼마, 아니, 몇 회차만이지?’

어울리지 않은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 것만 같은 이질감에, 그리고 먼 옛날에 느꼈던 감정에 대한 그리움에. 회귀자는 몇 번이고 입가를 쓸었다.

잠시 말없이 행진하는 동안, 스스로 움직이는 관 위에서 편히 앉아있던 흡혈귀가 뭔가 불편한지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비녀 아래 흩날리는 은발이 조명을 받고 반짝이며 낙낙한 옷이 나풀거렸다.

그러나 생각에 깊게 잠겨있던 회귀자는 영 반응이 없었다. 결국 조바심이 난 흡혈귀는 주책을 부려보기로 했다. 흡혈귀는 자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걸었다.

“흠흠. 셰이. 무언가 달라진 게 없느냐?”

“아, 맞아. 티르칸쟈카. 나 어제 실전을 겪으면서 혈조술에 대해 무언가 깨달았는데 그에 대한 조언이 필요해. 저 녀석 말 끝나면 좀 봐줘.”

“…그래. 그러마. 진전이 있었다니 희소식이로구나.”

서운해진 흡혈귀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회귀자와 나를 비교하듯 번갈아 보았다.

하아. 진짜. 내가 다 낯 뜨거워질 정도의 주책이네. 다음에는 그냥 칭찬하지 말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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