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43화 (43/384)

EP.43 꺼진 불씨도 다시 보자

불사자의 몸은 시체나 다름없는 꼴이다. 불사종족의 특성 때문인지 피가 흘러나오지는 않지만, 기괴하게 꺾여 떨어진 팔다리 하며 미동도 하지 않는 흉부에는 생명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른팔은 움직이는데, 이건 나도 잘 모르겠다. 왜 근육이 자치적으로 움직이냐고.

나는 시체를 보며 중얼거렸다.

“물을 뿌리면 일어나려나요?”

흡혈귀가 지적했다.

“아서라. 헛고생하지 말거라. 토인들의 생명은 너희와는 별개의 것. 땅에 닿아있으면 무한한 생명을 지닌 그들이나, 그 탓에 땅과 떨어진 이곳에서는 결코 눈을 뜨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회귀자의 생각으로는 저 불사자가 탄탈로스 내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목격했다고 한다. 눈을 뜰 수 없다면 목격자가 될 수 없었겠지.

흠. 그 방법을 써볼까?

생명력이 완전히 고갈되었다면 해보았자 의미가 없을 것이다. 장작도 없는데 불이 붙지는 않는 노릇이니.

하지만 지난 며칠 불사자가 퍼먹은 콩의 양은 보급계에서도 구멍이 났나 의아해할 수준. 군납비리 수준의 은총을 취했음에도 생명력이 부족하다면 그건 생명이 아니라 양심이 없는 거다.

불씨만 일으킨다면 아마 일어날 것 같은데.

“자, 여러분. 제가 오늘은 신기한 마술 하나를 부려볼게요.”

“마술?”

“네! 그건 바로, 심장 소생의 마술이랍니다! 이 사람을 부활시켜 볼게요!”

짜잔, 하고 양손을 펼치는데, 저쪽에서 어처구니없다는 코웃음이 들린다. 그쪽을 바라보니 흡혈귀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고 있었다.

“헛소리.”

한참 비웃은 흡혈귀는 내 말을 짧게 일축했다.

“네가 신이라도 되느냐? 아니면 심장이 네 장난감이기라도 하느냐? 멈춘 심장을 어떻게 다시 뛰게 만든다는 말이냐.”

“일반인들의 부족한 상상력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신비로움. 그게 바로 마술이죠.”

“그게 되었다면, 마술로 죽은 자도 일으키겠구나.”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흡혈귀는 양산을 어깨에 걸치고는 허리를 곧게 폈다. 이제 관심을 끄겠다는 비언어적 표현이었다.

동시에 심상치 않은 꺼림칙함이 느껴진다.

뼈가 목에 걸린 것 같은 이질적인 감각. 내가 느끼는 감각이 아니라, 흡혈귀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전해진 것이다.

안쪽에서 찌르는 듯한 고통과 함께 느껴지는 불쾌함. 짜증과 더불어 그냥 넘어가기 힘든 거슬림.

아까 회귀자를 상대할 때조차도 방어적이었으나 나름대로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던 흡혈귀였는데. 지금은 오히려 적대감을 보인다고? 이상하네. 솔직히 1200년 전 사람의 입장에서는 심장이 다시 뛰는 것보다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말이 더 충격적이지 않아?

이럴 때는 생각을 좀 읽어야지. 어디, 좀 볼까.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흡혈귀의 생각에 집중했다.

‘심장? 허튼소리. 그리 쉽게 심장이 다시 뛸 수 있었다면, 흡혈귀들은 지금쯤 전부 자기 심장을 가지고 있겠지. 되었다. 신경 쓸 필요 없어. 그건 불가능한 일이니.’

불가능하다는 단정. 이건 뭘까? 굳어버린 사고? 꼰대의 고집?

아니면, 신 포도일까? 손에 넣기를 바랐는데 수도 없이 실패해서, 결국 단념하고야 만 과실을 향한 맹목적인 분노?

‘처음 이백 년을 제외하고, 천 년을 돌아다녔다. 수많은 삶을 경험하고, 세상 모든 것을 눈에 담고, 가장 어두운 비밀과 고귀한 진실을 파헤치고, 신과 악마라는 것들을 두 눈으로 보았다. 하나, 흘러간 시간을 돌이킬 수 없듯, 그중 무엇도 지나간 이들에게 새로이 생명을 줄 수 없었다.’

혹은.

어릴 적 자기를 버리고 간 부모를 증오하면서도 그리워하는, 소중한 것을 너무 일찍 잃어버린 아이의 심정일까.

흐음. 이런 느낌, 신선하다.

보통 한 가지 감정이 있다면 그에 관련된 배경이 명확하기 마련인데, 삶이 너무 길어서인지 이 사건 저 사건이 다 얽혀있어서 정확하게 짚어내기 어렵다.

하긴 12세기 동안 쌓아 올린 탑이 어디 돌 한두 개로 이루어졌겠나. 수천, 수만 개의 자그마한 돌과 모래가 크든 작든 짐을 나눠서 지고 있겠지.

‘심장을 소생시켜? 말도 안 되는 소리. 불가한 일이다. 절대로. 지금껏 그 누구도 찾지 못했으며, 혹 어떠한 조화로 위대한 존재가 그러한 방법을 인간에게 선물하였다면…. 이리 늦게 올 리 없다. 좋은 것들이 전부 시간에 스러지고 난 뒤, 이토록 뒤늦게 올 리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도 안 되고.’

그래도 하나 확실한 건.

흡혈귀는, 자기 심장이 다시 뛰기를.

너무 어렸을 적 잃어버린 생명을 되찾기를 기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흥분했구나. 천 년이나 더 산 것이 뭐 그리 미련이 남았다고. 다 번뇌이고, 욕심이다.’

욕심…. 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에 동의할 수 없다.

삶을 향한 열망은 욕심이라 부르지 않는다. 본능, 혹은 섭리. 기저에 깔린 전제, 혹은 기반. 모든 것의 아래에서 사람들을 떠받치는 정언명령이기에.

흡혈귀를 충분히 읽었다.

그 탓일까, 얼굴에서 미소가 흘러나온다.

천 년 동안 부정당한 일, 절대 불가능할 거라고 믿는 일.

그게 실제로 이루어진다면 흡혈귀는 어떤 얼굴을 할까? 바로 이 눈앞에서,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 그 기적을 실제로 행한다면? 천 년의 실패는 우연처럼 찾아온 한 번의 성공 앞에서 즐거울까? 아니면 절망할까?

궁금하다. 참을 수가 없이 즐겁다.

그래서, 나는 양팔을 벌리고는 소리쳤다.

“좋아요! 모두가 불가능하다 생각할 때, 결국 이루어내고야 마는 것이 바로 마술사의 소양! 티르칸쟈카 교육생이 온 힘을 다해 부정하니 저도 힘이 솟는군요! 알겠습니다, 교육생의 뜻이 그렇다면 저도 마술사로서 온 힘을 다해 이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 말을 들은 회귀자가 미간을 좁혔다.

“마술사?”

“아, 아하! 군국에서 제 별명이 마술사였거든요!”

“뭘 했길래 마술사라는 별명이 붙는 거야?”

“매관매직이요! 감투로 돈을 만들어내는 마술이죠! 그러다 보니 컨셉이 튀어나왔네요!”

'헛소리…겠지?'

아차, 조심하자. 너무 기분을 냈다가는 의심을 살 수가 있다.

크흠흠. 어쨌건.

“자. 먼저 세상에 존재하는 무언가는 하늘에서 똑 떨어지지 않는 이상 그에 맞는 연원과 역사가 있기 마련이죠?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 들어가겠습니다.”

나는 분필을 꺼내려다가, 아까 회귀자를 놀리느라 분필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관없다. 중요한 건 이야기니까.

몸을 돌리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벼락은 천신의 징벌이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순수한 힘입니다! 그러나 그 유명한 번개 도둑 사건 이후, 천신께서는 벼락을 하늘에 되돌려놓은 인간을 어여삐 여겨 그들에게 힘의 사용을 허락하셨죠. 그게 바로 이것.”

말하는 와중 마력을 끌어모은 나는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사람들의 시선 끝에 내 손가락과, 그 너머에서 씨익 웃는 나의 입가가 걸린다.

“볼트.”

파지지직.

노란 스파크가 번쩍인다. 휘발성이 짙은, 금방 사라지면서도 그만큼 강렬한 힘이 공기 중으로 퍼져나갔다.

손가락을 털어 그 잔재를 흩어버리며 말했다.

“전기를 일으키는 힘. 그때부터 인간은 전기를 다룰 수 있게 되었죠…. 힘 자체가 워낙 강렬하고 짧아서, 사용처가 아주 제한적이기는 하지만요. 주로 어디에 쓰이냐면 램프에 불을 붙이거나 각종 장치에 시동을 걸 때, 혹은 철에 생긴 그을음이나 녹을 제거할 때.”

그러면서 슬쩍 꼬챙이를 꺼낸다. 날카로운 꼬챙이를 손으로 쥐며, 나는 모두가 안심하도록 최대한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혹은, 쓸데없이 입이 무거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해서, 굳게 닫힌 말문에 노크할 때 정도? 뭐, 마음에 있는 그을음을 제거하고 솔직하게 만든다는 점은 비슷하죠?”

최대한 완곡하게 표현했음에도, 나쁜 짓은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는 교육생들은 내 말뜻을 알아차렸다.

‘고문….’

회귀자와 흡혈귀에게 동시에 인상을 구긴다. 흡혈귀는 살포시 얼굴을 찡그리며 양산을 내렸고, 회귀자는 책상을 세게 움켜잡았다. 강판이 우그러지는 소리가 다 들린다.

어우야. 이 부분은 얼른 넘겨야겠구나. 나는 빠르게 말했다.

“자아. 군국 공공안전부가 몇몇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기고문… 아니, 전기와 함께하는 평화로운 심문을 하는 과정에서, 굉장히 특이한 사실이 하나 발견되었어요! 한번 심장이 멈춘 사람에게 전기충격을 다시금 가했더니 글쎄! 심장이 다시 뛴 케이스가 빈번하게 발견되었지 뭐예요!”

흡혈귀에게서는 불신이, 회귀자에게서는 비관이 느껴진다. 뭐, 좋다. 아무것도 안 느끼는 것보다는 나으니.

자아. 꼬챙이를 역수로 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싸늘하게 식어있는 불사자의 몸 옆에 쪼그려 앉아 조심스레 심장을 겨누었다.

“그 방법을, 이 불사자에게 한 번 테스트해볼게요. 자아.”

그리고 나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꼬챙이로 불사자의 심장 부근을 내리찍었다.

퍽. 시멘트가 가득 든 통을 찌르면 이런 촉감일까? 기운 빠지는 소리만 나고, 내 꼬챙이는 불사자의 가슴을 손가락 반 마디밖에 파고들지 못했다.

몸이 이상한데? 왜 딱딱하게 굳은 콘크리트 같냐. 내 힘으로는 가슴을 찌르는 것조차 이 꼬챙이로는 안 되겠는데.

나는 꼬챙이를 호주머니에 넣고는 회귀자에게 손을 벌렸다.

“…크흠흠. 꼬챙이로 했다가는 몸이 상하겠는데요? 셰이 교육생, 혹시 머리 맡에 띄워놓은 칼 좀 빌려주실래요?”

“천앵을?”

“천앵, 예쁜 이름이네요. 네, 깨끗하게 쓰고 돌려줄게요.”

회귀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나를 평가하듯이 보았다.

‘저 꼬챙이는 날이 서 있지 않나 봐. 저 남자가 고작 살덩어리 하나 뚫지 못해서 칼을 빌려달라 할 리는 없으니.’

아닌데. 날이 서 있었는데. 언제 어느 때나 쓸 수 있도록 날 잘 갈아놓는데.

‘전력을 다하면 불사자의 몸이 산산조각 날 까 봐 내 칼을 빌려달라 한 거겠지? 어찌 되었든, 나도 그가 어떻게 눈을 떴는지 알면 좋은 입장이니.’

아니, 전력이었는데. 온힘을 다해 내리찍어도 반 마디밖에 못 파고들었는데.

이거, 회귀자 앞에서는 함부로 힘 쓰는 시늉도 하지 못하겠는걸. 자칫하다간 나에게 가진 환상을 깨뜨려버릴 수도 있겠다.

‘적일지도 모르는 녀석에게 내 유일한 무기를 쥐여주는 건 멍청한 짓이겠지만….  흥, 그렇다면 괜히 경계해서 빌려주지 않는 것도 우스운 일이야. 어차피 천앵은 나밖에 다루지 못하기도 하고.’

회귀자는 흔쾌히 손가락을 휘둘렀다. 그러자 보이지 않는 검이 쏜살같이 날아와 내 발치에 틀어박혔다. 천앵은 콘크리트로 된 땅바닥을 세 치 정도는 파고들고는 부르르 떨었다.

“그래. 네 꼬챙이로는 부족해 보이네. 어디 해 봐.”

“고마워요. 잘 쓸게요.”

그나마 다행인 건, 회귀자의 무기인 천앵은 나 같은 사람이 써도 성능을 발휘할 만큼 뛰어났다는 점이다. 이런 칼을 가지고도 못 갈랐으면 큰일 날 뻔했다.

“자아. 메스.”

칼날이 부드럽게 살을 가른다. 불사자의 피는 살아 움직이는 점액 같아서, 가슴을 갈랐는데도 그 피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몸 깊숙이로 숨어드는 것 같았다.

그렇게 조심히 살을 밀어 올리자, 시꺼먼 갈비뼈 안쪽 깊숙이에 심장이 보였다. 여기부터는 억지로 살을 파헤치는 대신 꼬챙이를 비집어 넣었다. 저 아래에 있는 심장, 그 한가운데에 닿을 때까지.

“전기 고문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이왕 하는 김에 심장에 가까운 편이 좋으니까요. 몸 바깥에다 시전하면 마법이 흩어질 염려가 있으니. 어쨌든 이렇게, 멈춰있는 심장에다가 전기를 가해볼까요?”

천앵을 옆으로 던져놓고, 예전에 배운 소매틱을 그대로 행한다. 마력 적성이 없어도 몸 안의 마력을 강제로 뽑아낼 수 있는 제식 마법. 군국이 만들어낸 몇 안 되는 실용적인 발명.

“세트, 테마, 케트, 오벨리.”

그리고 그 개량형.

평소 내 손가락 끝에서 매개했을 마법의 힘을 조금 더 연장한다. 내 손 안의 꼬챙이, 내 수족과도 같은 강철 침 끝부분에 마력이 맺힐 수 있도록 뻗는다. 그렇게 마력장이 꼬챙이 끝을 따라 불사자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마력이 심장에까지 닿았을 때, 나는 마력을 불태우며 주문을 외웠다. 평소보다 조금 더 강하게.

“볼트, 프랭클린.”

빠지직!

불사자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흘러가는 속성을 지닌 전격 마법이 전신을 타고 흐르며 근육을 자극한 탓이다.

마력의 반발 작용에 의해 내 손이 크게 튀어 올랐다. 얼얼한 충격이 느껴진다. 마법 자체는 성공했다. 이제 결과만 나오면 된다.

그리고 직후.

“허업!”

불사자가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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