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46화 (46/384)

EP.46 하트비트

낮과 밤을 구분하는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일까.

당연히, 그것은 빛의 유무이다.

빛은 세상을 비추며, 험난한 이 세상에서 앞을 분간할 힘을 선물한다. 빛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코앞에 죽음이 닥쳐와도 세 살배기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얼굴을 들이밀지도 모른다.

미지는 용기가 아니라 공포다. 암흑 속을 한 발자국 나아갈 때, 보이지 않는 송곳니가 목을 후벼 파지 않는 것은 용기로 이루어낸 성과가 아니라 단지 운이 좋기 때문. 그것을 깨달은 평범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어둠 속을 피하게 된다.

만용을 부리다 돌아오지 않은 자를 교훈 삼아서.

“일어나보거라.”

그렇기에, 밤은 늘 경계의 대상이었다. 알 수 없음은 곧 공포이며 두려움이니.

인간이 집을 짓고 불을 피운 일 역시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마련한 자구책. 공포를 덜기 위해 낯익은 것으로 주변을 채우는 행위이니.

“일어나거라.”

“하아아압!”

그래서 이 밤중 누군가 내 방에 침입했을 때. 나는 발작적으로 튀어 오르며 침대맡에 있는 램프를 켰다.

누가 아무런 기척도 없이 밤중에 숨어들어온다는 말인가. 그것도 내 방 안까지. 필시 나쁜 의도를 가지고 온 게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했으나, 눈에 비친 모습은 너무나 의외였다.

새하얀 인상의 아름다운 소녀였다. 흰색을 가졌다기보단 색소가 결핍된 듯한 느낌이다.

핏기 없는 얼굴, 채도 없는 은발, 온기 없는 표정에, 미동 없는 가슴.

생명을 이루는 몇 가지가 결여된 듯 병약한 인상.

귀족적이면서도 고전적인 우아함이 묻어나왔으나, 신비로운 분위기에 비해 어리게 보이는 외모였다. 그러나 그건 덜 자란 게 아니라, 마치 어느 순간부터 성장을 빼앗겨버린 것만 같은 덧없음이었다.

귀신인가? 머리카락도, 팔다리도 가늘기 그지없다. 손만 대면 부러질 것 같아 쉬이 다가가기 힘들다.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의 백자를 보는 것 같은 아슬아슬한 위태로움이 느껴진다.

하지만 불안감은 그 자체로 매력이기도 하다. 언제 떨어질까, 어떻게 깨질까, 부서진 조각 사이사이로 흘러나오는 붉은 액체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러한 기대감이 아찔하고 배덕적인 충동을 들게 하기에.

전신의 피가 그쪽으로 이끌린다. 까마득하다. 떨어지는 것과 비슷한 아찔함이 감각이 느껴진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고-.

“아.”

상대를 읽었다.

흡혈귀잖아.

여기는 왜?

설마.

“드디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러 온 겁니까?”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붉은 눈동자에 의아함이 가득 담겼다.

“자다가 웬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

“배가 그렇게 고팠습니까? 하지만 잠시 생각해보십시오. 이건 대단히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제 전신에 흐르는 피는 약 5L 정도. 당신은 지금 저를 잡아봤자 딱 그 정도 피밖에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매일매일 피를 만들어낼 수 있고, 극한으로 짜내면 일주일마다 약 300mL 정도의 혈액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17주, 약 120일이면 그때부터 저를 살리는 게 이득인 셈이죠. 기억하세요. 이자율의 괴물이 되십시오. 당신처럼 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무조건 복리가 이득입니다….”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 한 영원히 살아갈 흡혈귀에게 금단의 지식을 전해주는 나, 어쩌면 괴물을 만들어버린 것일지도….

아지소리를 지껄이던 나를, 흡혈귀는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잠은 다 깼느냐?”

“네. 좀 입 놀리니까 정신이 드네요.”

“그래. 앉아도 되겠지?”

“아, 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흡혈귀는 허공에서 검은 의자를 만들어내더니 그 위에 걸터앉았다.

침대에 앉으며 손으로 얼굴을 몇 번 쓸었다. 상대방에게서 적의나 식욕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오늘 죽을 운명은 아니었던 듯하다.

내가 겁먹은 것을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한다. 밤중에 조용히 찾아온 흡혈귀라니. 호환과 마마에 이은 세계 3대 공포 장르잖아.

흡혈귀에게 나를 해칠 의도가 없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나는 땅에 떨어진 야자수처럼 쪽쪽 빨리는 꼴이 되었을 거다.

“이 밤중에 제 방에는 무슨 볼일이세요?”

생각을 읽을 겸 질문을 던졌지만, 굳이 독심술을 쓸 것도 없이 흡혈귀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래. 내 긴히 할 말이 있어 너를 찾아왔다. 조금 급했다 생각하나, 이 밤중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말을 하다 말고 잠시 주위를 둘러본 흡혈귀는, 양산으로 얼굴을 살짝 가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바깥에서 너를 불렀거늘, 잠에서 영 깨지를 않더구나. 어쩔 수 없이 너의 방에 발을 들였다…. 웬 잠이 그리도 깊다는 말이냐. 내가 직접 들어 와야 했잖느냐.”

'아녀자가 밤중에 사내의 방에 몰래 찾아오다니 상상조차 못할 일이건만.'

저기, 아녀자고 뭐고 전에 자신이 흡혈귀라는 사실을 자각해주었으면 하는데. 엄청 무서웠다고. 지금 내 심장의 두근거림은 천적을 만났을 때나 느낄 공포의 박동이다.

당한 건 나인데 왜 자기가 손해 본 양….

에라. 나는 내친 김에 사악하게 웃으면서 혀를 내밀었다.

“크크크. 이 밤중에 몰래 찾아왔다는 건 각오가 되어있다는 거겠지…. 그렇게 내가 그리웠나? 오냐. 원하는 대로 다뤄주마….”

“장난치지 말거라. 나는 진지하다.”

붉은 눈에 불쾌함이 어린다. 자기는 야간에 침입해놓고서 나는 장난도 못 치게 하네. 불공평해.

하지만 나와 흡혈귀 사이의 나이 차이는 그 이상으로 불공평하지. 꼬리를 말고는 냉큼 말을 돌렸다.

“자꾸 말을 끊으시니까 그렇죠. 평소엔 느긋하신 분이 몸이 달아 밤중에 여기까지 찾아왔으면서, 왜 말도 못 꺼내고 머리카락만 꼬고 계세요?”

“그것이…. 내, 이런 말하기는 조금 갑작스럽다만. 그게, 네게 긴히 할 부탁이.”

“빨리요. 저는 한낱 인간이라 티르칸쟈카 교육생 속을 읽을 수 없거든요. 말로 하지 않으면 몰라요.”

사실, 안다. 방금 읽었으니.

아니, 어쩌면 오늘 심장 소생술을 시도했을 때부터, 나는 이럴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느꼈다. 멈춘 심장과 빼앗긴 삶에 대한 흡혈귀의 열망은 천 년이 지나도 여전히 응어리져있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흡혈귀는 결심하고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붉은 눈동자에는 한 가닥 희망을 붙잡은 인간의 열망이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꼭 도박판에서 좋은 패를 움켜쥔 초보를 보는 것 같았다.

“심장, 말이다. 오늘 네가 했던 그것으로, 멈추었던 심장을 다시 뛰게 했지.”

“네.”

“나의 몸 안에도 멈추어있는 심장이 하나 있다. 오랫동안 지펴지지 않아 고장이 나 버린 화로가.”

흡혈귀의 심장은 뛰지 않는다. 그들의 심장은 차갑게 얼어붙은 채 피만 흘려보낸다. 흡혈귀의 심장이란 그저 수많은 혈류가 한곳에 만나는 장소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피는 어떻게 움직이느냐. 생명의 근원이기도 한 붉은 액체는 어떤 원리로 움직이느냐….

정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혈조술.

회귀자가 배우려고 했던, 피를 다루는 흡혈귀의 기술.

그것으로, 피 한 방울 한 줄기를 직접 조종하여 온몸으로 퍼뜨린다. 근육 틈으로, 살갗 속으로 하나하나 밀어넣는 것이다.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통제되는 피는 심박 없이도 몸을 움직인다.

그게 흡혈귀가 죽었으면서도 살아갈 수 있는 이유이다.

“그 화로를, 네 불꽃으로 되살려주겠느냐?”

그렇기에 흡혈귀의 심장은 뛰지 않는다. 그들의 심장은 멎은 채다. 피는 심장과는 상관없이 도도히 흐른다. 강물이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쥐어짜는 듯한 격정적인 혈류는, 흡혈귀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그들은 흥분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만일 그런 감정을 느꼈다고 하더라도 육체에 주는 영향은 단 하나도 없다.

“부탁이다. 제멋대로 뛰는 심장을 가지고…. 살아있는 채로 죽고 싶다.”

얼굴이 붉어지지 않는다. 핏대가 올라오지 않는다. 시야가 좁아지지 않는다.

눈시울이 붉어지지 않는다. 눈물이 흐르지 않는다. 긴장하여 손발이 떨리지도, 슬픔이 전신을 옥죄지도 않는다.

흥분도, 슬픔도. 머릿속에서 반짝이는 생각으로 끝날 뿐. 호르몬 없는 감정에는 지속성이 없다.

지난 천여 년 동안, 몇몇 사람들은 흡혈귀를 동경해왔다. 그들이 가지지 못한 불로불사의 육체와 냉철한 평정심마저도 부러워했다. 흡혈귀가 가질 수 있는 감정이라고는 자신의 혈주를 향한 경애 뿐.

하나, 정작 그 시조인 티르칸쟈카는 한순간도 그것을 좋아해 본 적 없었다.

그래서, 흡혈귀는 나에게 찾아온 것이다. 천 년을 품어온 절절한 소망을, 그러나 가슴으로는 실감할 수 없는 공허한 아쉬움을 담아.

내가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자, 흡혈귀는 슬프게 미소를 지었다.

“…조금, 추하지? 이미 천 년을 넘게 살아왔건만, 뭐 그리 미련이 남았다고. 다른 이들의 몇 배는 살아왔는데 염치없이 더 삶을 바라니.”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뭘요.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게 앞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퇴색시킬 수 없지요.”

의외로 다정한 나의 대답에 흡혈귀가 입을 작게 벌렸다.

“너라면 놀려댈 줄 알았건만. 의외로구나.”

“제가 언제 티르칸쟈카 교육생을 놀렸다고 그러세요? 한결같은 태도로 얼마나 배려해드렸는데. 저처럼 노인공경 열심히 하는 사람 또 없습니다.”

“…아닌가? 여전히 나는 놀림 받고 있는 것이냐?”

지금까지 나이를 건드릴 때마다 묘하게 신경을 쓰더라니. 더 살아가는 것에 염치없음을 느끼고 있었나.

흡혈귀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중얼거렸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 이미 한 번 죽었으니. 고통 역시도 겁나지 않는다.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고통을 겪어보았으니. 하지만, 내 이 몸으로 느낀 경험이나 감정, 그리고 고통은… 다 한번 걸러진 것. 천천히 흐르는 피로 관조한 것이다. 내 지난 세월이 전부 가짜인 것 같아, 그게 너무 끔찍하여….”

흡혈귀가 느닷없이 내 팔을 잡았다. 차가운 손이 나를 최후의 동아줄마냥 붙들었다. 그 안에 담겨있는 힘은 얼마 되지 않지만, 나는 흡혈귀의 손을 떨쳐낼 수 없었다.

싸늘한 애환을 잔뜩 담아, 흡혈귀는 내게 애원했다.

“뭐든지 하겠다. 부탁이다. 내 심장을 되살려다오.”

쓰읍. 이거 안 좋은데.

빛바랜 희망 속에서 스며나오는 희미한 기대. 저문 꿈. 잃어버린 동심.

이 모든 게 마술사를 미치게 만드는 요소다.

자기 자신도 믿지 않던 희망을 갈구하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든 놀라게 하고 싶어지잖은가.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야말로 마술사의 의무이니까.

나는 다시 한번 물었다.

“뭐든지 하시겠다고요?”

“그래. 천 년의 염원인데 무언들 못할까.”

“그러면.”

침대에서 일어났다. 흡혈귀의 시선이 나를 따라온다. 의자에 앉아있는 흡혈귀의 머리는 기껏해야 내 허리춤밖에 오지 않았다.

이부자리를 반듯하게 정리하고는, 딱딱한 매트리스를 팡팡 두드리며 명령했다.

“가슴 풀어헤치고 여기 누우세요.”

그러자 흡혈귀의 눈동자가 흠칫 떨렸다. 설마 그런 반응이 나올 거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사람처럼.

“가슴을, 풀어헤치고 말이냐? 그건.”

“뭐든지 하시겠다면서요?”

이 태도, 이 눈빛.

절박함과, 거기서 찾은 희망. 익숙하다. 동시에, 맛있는 먹잇감을 본 것처럼 입가에 군침이 돈다. 뒷골목 카드쟁이로 살아온 나의 감이 외치고 있다.

이건 호구다.

마침 좋은 패가 손에 들어와, 내가 달리면 따라 내지를 각오가 되어있는. 아주 등골을, 피까지 쪽쪽 빨아먹을 수 있는 호구.

이런 호구를 그냥 보냈다간 도박사의 이름이 운다.

“일을 치르려면 누우셔야죠. 자, 어서요.”

단호하게 명령했다. 흡혈귀는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는지 움찔거렸다. 새하얀 손이 괜히 허공을 움켜쥐었다가 놓는다. 그러다가 이윽고 결심한 듯, 작은 손으로 옷깃을 다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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