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48화 (48/384)

EP.48 여태까지 너를 미행한 거야

흡혈귀의 은밀한 욕구를 알아차리고, 그녀의 비원을 들어주려다 실패한 게 며칠 전. 나는 흡혈귀에게 한 가닥의 끈이라도 걸쳐둔 것에 크게 만족하며, 이 탄탈로스에서의 인연 쌓기에 한 걸음 큰 진전을 이뤘다….

라고 생각하던 시기가 나에게도 있었다.

“잠시 시간을 좀 내주겠느냐?”

“또요?”

익숙함이 꼭 반가움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겨움이나 짜증으로 바뀔 가능성이 크지. 최근 들어 흡혈귀는 틈이 날 때마다 내 방이나 식당에 방문하여 나를 찾고는 했고, 나는 골머리를 앓는 중이었다.

흡혈귀가 나에게 찾아오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얼굴을 콱 구기며 대꾸했다.

“그거 중독이에요, 중독.”

“별로 힘들지도 않잖느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삼시세끼 밥 먹고 쉴 때마다 찾아오는 건 좀.”

“너는 손가락을 집어넣거라. 나머지는 다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아무래도 말린다고 들어먹지도 않을 것 같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흡혈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옷고름을 풀며 나에게로 다가왔다.

내막을 모른 채 먼 발치에서 바라만 본다면, 엄청 부러울 만한 광경이다. 만인이 돌아볼 만한 아름다운 여자가 나만 보면 화색이 되어 으슥한 곳으로 잡아끌고는, 나의 손을 잡아당겨 가슴에 묻는 일.

다만.

“자. 어서.”

옷이 아니라 살가죽을 풀어헤치고.

비유가 아닌, 말 그대로 가슴 안에 묻어버린다는 점을 안다면, 좀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다.

잘린 살 틈으로 손가락을 깊숙이 집어넣었다. 이제는 보지도 않고 심장까지 향하는 길을 찾을 수 있다. 그 달갑지 않은 변화를 스스로 느끼며, 안쪽을 능숙하게 헤집었다.

“볼트.”

전격이 손가락을 타고 심장으로 흘러 들어간다. 아무리 약하다고 하나 심장에 직접 맞닿은 채 쓰는 마법. 심장이 멎을 수도 있을 충격이다.

하지만 상대는 이미 심장이 멎은 지 오래인 흡혈귀. 그녀에게 이 충격은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반가운 자극이었다.

“흐읏. 하아….”

흡혈귀의 얼굴에 홍조가 돈다. 전격에 맞은 심장이 펄떡이며 피를 맹렬하게 뿜어낸 탓이다. 창백한 상아색이었던 얼굴에까지 과할 정도의 피가 들이닥치자 얼굴색이 바뀌고, 잠시 장르가 다른 쾌락이 들이닥친다.

흡혈귀는 달뜬 신음을 내뱉으며 내 팔을 꽉 붙잡았다. 전신이 매달린 것 같은데, 팔에 느껴지는 무게는 가볍기 그지없었다.

한참 여운을 즐긴 흡혈귀는 나에게 매달리듯 몸을 기댔다.

“흐으으…. 점점, 더… 능숙해지고 있구나.”

“인간은 배움의 생물이니까요. 서로서로 익숙해지는 거죠.”

“고맙다…. 다음에도 부탁하마.”

“좀 띄엄띄엄 오세요. 제가 귀찮아요.”

“언제는 노인공경이라더니, 이제는 가식조차 부리지 않는구나.”

“이렇게 자주 찾아올 줄은 몰랐죠. 분명 심장 함부로 드러내지 말라고 했는데 이제는 지킬 생각도 없나 봐요?”

“이미 죽은 몸이다. 심장을 밖으로 내놓아도 아무런 지장이 없거늘, 어찌 드러내지 말라고 하느냐.”

내친김에 직접 꺼내서 보여주려고 하는 흡혈귀. 나는 급히 손을 뻗어서 그걸 막았다. 흡혈귀는 피식 웃으며 내 손을 떼어내고 옷을 추스렸다.

“거기다, 오직 너에게만 보여주고 있지 않느냐. 자랑스럽게 여기거라.”

“자랑스럽긴. 그것도 별로 반갑지 않거든요? 제가 하려는 건 노인공경이지, 노동이 아니에요. 추가노동은 동서고금 남녀노소 누구나 싫어하는 거라고요.”

“그렇다면, 노동에 대가가 있다면 어떠하냐? 내가 따로 보관하고 있던 금을 주마.”

“됐어요. 연금혁명 이전 시기 금은 믿을 게 못 되어요. 그것들 실제 가치는 땅에 굴러다니는 좀 예쁜 돌 수준이라고요.”

“으, 으윽. 시대가 좀 많이 흘렀나 보구나….”

낙담한 흡혈귀는 턱에 손을 괴고 중얼거렸다.

“어쩌지…. 지금 나에게는 금과 조각상 정도밖에 남지 않았거늘. 이것이 대가가 될지 모르겠구나.”

“네? 조각상이요?”

“그래. 그림이나 조각 같은 것들. 나에게 취미가 하나 있었다면, 그것은 미술품을 모으는 것이었다. 감흥은 한순간이나 예술은 그대로 남아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 시대에는 얼마나 가치를 가지고 있을지.”

“그래도 금보다는 낫겠죠. 한 번 보여주시겠어요?”

“그래. 내 들고 올 터이니 여기 있거라.”

흡혈귀는 미술품을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나는 멀어지는 흡혈귀의 뒷모습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흘렸다.

이거 봐. 호구라니까. 내가 조금 만져주고 튕겨주니 제 손으로 재산을 갖다 바치려고 하잖아.

그것도 미술품이라니. 오래 묵힐수록 가치를 더해가는 몇 안 되는 물건이다. 관 속에서 흡혈귀와 함께 천여 년 간 보관되었던, 그것도 한때 세상을 지배했던 절대자의 미술품? 가치를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어지간한 금광 이상의 보물고인 것이다.

탄탈로스에서는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품 안에 보물 정도는 하나 쟁여놓아야지. 나는 장밋빛 미래를 그리며 몸을 돌렸다.

‘저, 저, 저, 저. 저 녀석. 티르칸쟈카와 뭘 하고 있는 거야?!’

…일단, 모퉁이 너머에서 이쪽을 엿보던 관음증 환자부터 해결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복도를 걸었다. 그런 내 뒤를 회귀자가 은신술로 몸을 숨긴 채로 따라왔다.

‘정체를 드러내? 말아? 현행범은 당장 붙잡아서 추궁하는 편이. 아니, 내가 미행했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어쩌지라니? 너 미행한 거 맞잖아. 양심은 저번 회차에 두고 왔니?

입이 근질거리는 걸 필사적으로 틀어막고 있는 사이, 회귀자는 오만 생각 끝에 결론을 내렸다.

‘아니야! 원래 목적에 집중해, 셰이! 나는 이곳 무저갱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내고, 아지와 티르칸쟈카의 타락을 막기 위해 온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끼어들어도 돼!’

홱.

회귀자는 몸을 날려 내 앞에 내려앉았다. 그리고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드디어 나설 마음이 들었나. 오래 기다렸다. 나는 태연하게 회귀자를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셰이 교육….”

“티르칸쟈카에게 무슨 짓을 했어?”

곧바로 본론이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대꾸했다.

“여태까지 나를 미행한 겁니까?”

“물론… 이 아니라, 어쩌다가! 어쩌다가 네가 티르칸쟈카와 같이 어딘가를 향하는 걸 봤고, 네가 이상한 짓을 하는 장면을 목격했어!”

“이상한 짓이라니요? 저는 딱히 누군가에게 비난받을 짓을 한 적이 없는데요.”

“발뺌할 셈이야?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는데! 심지어 둘이 나누는 이야기까지 들었어!”

뭐야, 그거. 그냥 스토커잖아.

“뭐야, 그거. 그냥 스토커잖아.”

아차. 속마음이.

“아니라고!! 따지고 보면, 그래! 잠복형사 같은 거야!”

“셰이 교육생. 혹시 경관이세요?”

“어? 그, 그건 아닌데.”

“뭐야. 그럼 그냥 스토커잖아.”

“아니…!”

제멋대로 흥분해서 폴짝폴짝 뛴 회귀자가,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나를 노려보았다.

“말 돌리지 마. 이건 매우 중대한 문제니까!”

“저야말로 어이가 없는데요. 제가 티르칸쟈카 교육생에게 무슨 짓을 했다고? 최소한 양심에 반하는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이제는 발뺌하겠다 이거지?”

“발뺌은 미행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셰이 교육생이 하고 있는 게 발뺌이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에휴, 그래요. 중요한 걸 들어나 봅시다. 뭔데요?”

조금 대답해주니 몰아넣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회귀자는 한층 의기양양해진 채 소리쳤다.

“너, 티르칸쟈카를 강제로 더듬었잖아!”

“네? 누구를, 강제로, 뭐요?”

“티르칸쟈카를, 강제로, 만지고….”

자기가 말하면서도 말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는 목소리를 점차 줄여나가는 회귀자. 나는 미간을 좁히고 회귀자를 흘겨보았다.

당연하다. 역천의 괴물이자 어둠의 여왕, 흡혈귀의 시조 티르칸쟈카를 협박해서 강제로 더듬어?

그게 되면 왜 이러고 살아.

차게 식은 시선. 내 속뜻을 눈치챈 회귀자는 빽 소리쳤다.

“하, 하지만 녹안으로 나는 똑똑히 봤다는 말이야! 네, 네놈이, 티르칸쟈카 가슴팍에 손을 집어넣는 모습을!”

“네, 뭐. 심장까지 건드렸죠.”

“그딴 소리를! 네가 뭐, 시적인 표현으로, 얼어붙은 심장을 녹이기라도 했다는 말이야?”

뭔 소리야. 문자 그대로의 의미인데. 진짜로, 이 손으로 물리적 접촉을 했다고.

“거기에, 점점 능숙해지고 있다고…!”

“별로 유쾌한 경험은 아니에요.”

손이 자연스럽게 살을 헤집고 심장에 닿는 기분을 네가 아니? 아무리 흡혈귀가 자기 피를 마음대로 다루며 몸이 조각나도 재생한다지만, 그렇다고 그 안쪽에 손을 집어넣는 건 진짜 묘하다고. 미끈한 속살, 꿈틀대는 근육, 묘하게 따뜻하고 축축한 안. 꼭 고래 뱃속에 들어간 느낌이야.

피, 내장, 근육, 뼈. 인간은 몸 속을 채우는 모든 것을 메스껍게 여기도록 진화해왔다. 내장이 드러난다는 건 죽음의 예고 비슷한 거니까. 나도 마찬가지다. 요즘 실시간으로 이성 수치가 깎여나가고 있다.

“너, 너. 네가, 어쨌든. 도대체 티르칸쟈카와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지만.”

머릿속으로는 잠정 결론까지 낸 주제에 무슨.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정말 몰라요?”

“모르지마안!!”

‘이러다간 아지도, 티르칸쟈카도 이 남자의 영향을 너무 크게 받아! 이게 타락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훗날 그런 결과로 이어진다면, 이 남자의 탓일 가능성이 있어!’

내가 뭘 한다고 그래? 타락? 내가 저들을 왜 타락시켜. 자살할 일 있나.

애먼 상상을 하는 걸 보니 진짜 모르는구나. 하긴 심장을 직접 터치해서 전기마사지를 하고 있다고는 상상도 못하겠지.

“분명 남들 눈에 보일 수 없는 이상한 짓이겠지!”

이건 정답이네. 반박할 말이 없다.

“대꾸하지 못하는 걸 보니 맞나 보네! 오늘 그 짓거리를 끝내주겠…!”

“내 좋아서 하는 일이다. 누구 마음대로 끝내고 말고 한다는 말이냐.”

나이스 타이밍이다. 마침 커다란 관을 끌고 온 흡혈귀가 짐짓 화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흡혈귀는 그대로 회귀자를 지나쳐 서서, 나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나름 스승처럼 자신을 대한 티르칸쟈카가 나의 편에 섰다는 것에, 회귀자는 큰 충격을 받았다.

“티르…칸쟈카?”

‘티르칸쟈카가, 저 남자를 등지고 나와 맞서고 있어?’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 떨리는 눈동자. 그러나 흡혈귀의 시선은 차갑고 냉랭했다.

“그만하거라. 왜 나의 일 하나하나까지 네 참견이냐? 스승의 행사에 제자가 어찌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냐.”

“아니야. 나는 너를 위해 하는 거야!”

‘저번 회차, 너는 누군가에게 배신당해서 큰 고통을 느끼고, 세계를 불사르는 대전에 참가한다는 말이야!’

애절한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겼다. 분명 저 말은 진실이며, 언젠가 미래에 일어났던 일이다. 회귀자는 티르칸쟈카의 몰락을 막고, 그녀의 행복을 기원하는 게 분명하다.

그게 세계를 위해서든, 아니면 그녀 자신을 위해서든.

하지만 그건 나밖에 알지 못한다. 흡혈귀에게는 생각을 읽는 능력이 없으므로.

“나를 위해?”

그 마음이 무색하게 흡혈귀는 코웃음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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