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49화 (49/384)

EP.49 너는 행복할 수 없어

“말 잘했다. 이 기회에 나도 한마디 하마. 너는 나에게 가르침을 청했지. 내 분위기에 휩쓸려 너를 제자로 받고 가르침을 주고 있다만.”

차가운 불은 실존했다. 그렇지 않다면, 불처럼 새빨간 흡혈귀의 눈동자는 그토록 시릴 수가 없었다. 내 곁으로 한 걸음 붙은 흡혈귀가 회귀자를 꾸짖었다.

“너는 나에게 아무런 경의도 표하지 않는구나.”

“경, 의?”

“혹은 존경, 상징, 징표, 뜻. 무엇이든 말이다.”

새카만 양산이 어깨에 톡 걸쳐진다. 흡혈귀는 작게 한탄하며 회귀자를 흘겨보았다.

“조그마한 선물이라도 괜찮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라도, 감사하게 여긴다는 그 말이라도 충분했다. 헌데, 셰이 너는 나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그건….”

“그에 반해.”

이번에는 시선이 나를 향한다. 나는 냉큼 손을 들어 흔들었고, 흡혈귀는 미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회귀자에게 보여주기 위해 내 장단에 맞춰준 것이었다.

명확한 온도 차. 비록 보여주기 용으로 지은 표정이라도, 회귀자에게 충격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이 녀석은 건방지더라도 말로는 나를 공경했지. 무례하지만 나에게 필요한 것을 주었다. 요구하면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바라면 나에게 지식을 알려주었지. 그런데 너는 나에게 무엇을 하였느냐?”

혈조술을 배웠다. 그뿐이다.

회귀자의 입장에서 흡혈귀는 종말의 전조였다. 세계가 멸망할 때 그 이유로 항상 흡혈귀가 거론되고는 했다.

그러나 이전 회차, 회귀자는 온갖 노력 끝에 흡혈귀를 굴레에서 빼내어 아군으로 삼는 데 성공했다. 둘은 어깨를 맞대고 싸우는 전우였으며 동시에 믿을 수 있는 동료이기도 했다. 둘 모두 흘러가는 시간 속의 조난자였기에, 공감대가 형성되어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회귀자는, 혈조술을 얻고 겸사겸사 티르칸쟈카를 ‘보호’하기 위해 이곳에 내려왔다. 그녀를 위해.

하지만.

“그, 대가라면…. 뭐, 보물이라도….”

“보물? 내 금이 무용지물이 되었다고, 지금 내가 보물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더냐?”

지금 이 시점의 흡혈귀는 그녀가 아는 종말의 조각이 아니라, 정녕 시조 티르칸쟈카로서 존재하고 있으니.

“나 역시 한때 세상의 머리였다. 온갖 귀중한 것으로 머리를 꾸몄고, 아름다운 것을 몸에 걸쳤으며, 부드러운 것을 발밑에 깔았다. 나는 어둠의 존재였으나, 모든 반짝이는 것을 손에 넣었다. 태양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러한 내가 권력을 바라겠느냐? 재물을 탐하겠느냐? 그것도 아니라면, 하찮은 명예를 얻으려고 들겠느냐? 단지 조금의 마음이라면 충분했거늘.”

사실, 흡혈귀도 회귀자를 그리 싫어하는 건 아니다. 그저 아쉬움이 담긴 투정일 뿐이다.

다만 인간관계를 회귀로만 쌓아온 회귀자는 이런 상황에 닥쳐 본 경험이 얼마 없는지 어쩔 줄 몰라 했다.

“티, 티르….”

“되었다. 어차피 나에게 얻어가려는 건 혈조술밖에 없었지. 원하는 것을 취했으면 그냥 가거라.”

흡혈귀의 냉정한 선언에, 회귀자는 부들부들 떨다가 고개를 떨궜다. 흡혈귀는 양산을 어깨에 얹고는 몸을 빙글 돌렸다. 새카만 양산이 흡혈귀와 회귀자를 갈랐다.

쐐기를 박듯, 흡혈귀는 나를 보고는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가자꾸나.”

“잠깐만요. 셰이 교육생에게 한마디만 하고요.”

“짧게 하거라.”

내 말에 회귀자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회귀자의 시선에 의구심이 맴돌았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나는 작게 헛기침을 한 뒤, 그녀를 바라보며 비열하게 미소를 지었다. 다리를 벌리고 서서 턱을 치들며 삼류 악역처럼 헤프게 웃었다.

“뭐, 그렇게 되었습니다. 큭큭큭. 걱정하지 마세요, 셰이 교육생. 댁의 스승은 내가 극진히 모시겠습니다.”

‘…지금 나를 놀리는 거야?’

그걸 지금 알아채다니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구나. 그러니까 흡혈귀처럼 다루기 쉬운 사람한테도 핀잔을 듣지.

아, 내친김에.

나는 호주머니에서 다이아몬드 1 카드를 꺼냈다. 마름모꼴 새빨간 문양에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기이한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회귀자는 그 색의 정체를 깨닫고 외쳤다.

“너, 그건…! 진혈!”

“캬하하하. 이제 아셨습니까? 한 방울만 달라고 하니까 냉큼 주시더군요. 이미 당신 스승은 나에게 심장이고 피고 다 빼서 준 몸! 당신은 이제 끝…!”

“요 녀석이.”

새빨간 주먹이 느닷없이 내 뒤통수를 스치고 지나갔다. 고통에 신음하는 사이, 흡혈귀가 인상을 찡그리며 나를 나무랐다.

“너는 입을 좀 다물 필요성이 있다. 내 분노를 어찌 이리 무색하게 만든다는 말이냐.”

“왜요? 저도 평소에 쌓인 게 많아 골려준 건데요.”

“어른이 화를 낼 때는 잠자코 있거라. 아랫것이 이것저것을 덧붙여서야 본래 의미가 퇴색되는 법이다.”

“어? 뭐야. 진지하게 나이 대우해주기를 바라세요? 해드릴까요?”

‘지금까지는… 진지하지 않았다고? 이보다 더할 수 있다는 말이냐?’

내 말에 겁을 집어먹은 흡혈귀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무얼 하던 네 자유이거늘 어찌 탓할까. 네 멋대로 하거라.”

흡혈귀를 단숨에 굴복시킨 나는 한쪽 입가로만 웃으면서 회귀자를 한껏 비웃어주었다. 나는 말 한마디로 흡혈귀를 물러나게 할 수 있다고. 너는 안 되지?

“보셨죠? 저는 이만 갑니다. 그리고 죄송한데, 다음부터는 ‘상관없는’ ‘타인’의 일로 ‘번거롭게’ 굴지 않았으면 해요. '질척'거리지 말고…. 큭킥칵캬캬캬캬!”

‘저 자식…! 두고 보자! 반드시 저 가면을 벗겨서 추악한 낯을 낱낱이 파헤쳐주겠어!’

맹렬하게 불타오르는 회귀자를 뒤로 하고 나는 흡혈귀와 함께 걸어갔다. 조금만 더 자극해볼까 싶어 흡혈귀에게 어깨동무를 하려고 했으나, 손을 가져다 대려고 하자 흡혈귀의 양산이 뭉게뭉게 피어나더니 나를 꼭 붙잡고 밀어냈다. 그 손길은 정중했지만 강력해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뭔데 양산이 나보다 강하지? 거기다 왜 스스로 움직일까? 나는 양산조차 이기지 못하는 몸이야?

그동안 흡혈귀는 깊이 생각에 잠긴 채로 느릿하게 걸었다.

‘셰이. 능력이 출중한 아이이나, 무언가 손색이 있다. 힘이나 재능과는 관계없이, 자신을 이루는 무언가가 조금 결여되어 있어…. 헌데, 그것이 무엇인지. 도저히 무어라 짚을 수가 없구나.’

우리는 그것을 사회성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수틀리면 세상을 멸망시키고 다음 회차로 도망쳤던 회귀자는 흡혈귀에게 걱정받을 정도로 부족해 보인다.

세상에 지적받을 사람이 없어서…. 쯧쯧쯧. 피 빨아먹는 흡혈귀가 인성을 걱정하는 꼴이라니. 우스운 일이다.

‘나는 저 아이를 어쩌다 제자로 받았을까. 누가 보지 않더라도 열심히 수련하는 모습은 기특하기 그지없으나, 그건 내가 스승으로서 지켜본 바에 의한 것. 태생이 그리 살갑지 않은 아이다. 본래 나라면 저런 아이를 쳐다보지도 않았을 터…. 왜였지?’

생각을 따라, 흡혈귀의 시선이 점차 나에게로 향했다. 붉은 눈에 새하얀 의문이 담긴다.

‘그때도 이 녀석이렷다. 이 녀석이 나를 건드려, 셰이를 제자로 삼게끔 되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꼭 물을 흐려놓으며 상황을 만들어가는 쪽은 이 녀석…. 혹시?’

적극적인 생각은 좋지만, 그보다는 정산이 먼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는 하지만 식대 정산은 미리 해야지. 나는 흡혈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 그래서 미술품은요?”

내 물음에 흡혈귀는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양산을 살짝 들어올리며 손짓했다.

“…아아. 맞다. 너에게 조각을 주기로 했지.”

그러자 흡혈귀의 관이 내 앞에서 멈추더니 뚜껑이 덜컥 열렸다. 여전히 넘실거리는 어둠 속에서 조각상이 하나 둘 튀어나왔다. 새카만 기류가 조각상을 조심스레 붙잡고는 나의 앞에 늘어놓았다.

옥을 깎아 만든 토템, 대리석으로 만들었으나 옷주름까지 섬세하게 조각한 인물상, 앞발을 높이 든 말과 그 위에 타고 있는 전사의 동상.

하나하나 귀중한 가치를 가진 조각이었다.

“내가 가진 조각상이다. 무엇을 좋아할지 몰라 일단 대강 추려서 들고 와봤는데….”

흡혈귀는 조심스럽게 말했으나, 나름 아끼는 콜렉션인 듯 으스대는 마음도 한 톨 지니고 있었다. 추렸다는 게 허언은 아닌지, 재료부터가 귀중해 보이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조각 하나하나가 섬세하고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대박이다. 진실로 흡혈귀의 관짝 안은 보물상자, 아니, 보물창고 그 자체였다!

내로라하는 황제의 무덤도 트레져 헌터들에게 탈탈 털리는 시대다. 그러는 와중 흡혈귀와 함께 천 년이라는 세월을 건너뛴 이 조각에는 천문학적인 가치가 남아있었다.

고전적이나 낡지 않은 기법. 그러면서도 티끌만 한 흠집 하나 없었다. 아무래도 흡혈귀의 기운에 영향을 받은 듯 만들어졌을 때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역사적인 가치를 인정받기만 한다면, 그야말로 떼돈을 벌 수 있는 황금향.

“와…!”

다만.

여기서 고민이 필요하다.

호구를 상대할 때, 가져온 판돈을 냉큼 털어먹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간 호구는 돈과 함께 불쾌한 기억만 남기고는 손을 털고 판에서 떠난다.

낚시의 기본은 시침질. 떡밥을 뿌리고, 살살 달랜 뒤, 슬쩍슬쩍 놓아주다가 미끼를 문 순간 한 번에 잡아채야 한다.

비록 한 방울이라지만, 진혈도 선물한 흡혈귀가 아끼는 예술품을 내게 준 건 나에게 부채의식이 있기 때문. 나는 흡혈귀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려주었고 심장 마사지도 해주고 있다. 그에 반해, 저번에 줬던 왕관은 가짜 금이었으며, 가진 지식이나 물건도 시대에 한참 뒤쳐졌다는 열등감에 빠져있다.

이거, 사실대로 말하고 냉큼 받는 것도 방법이지만.

더 커다란 이득을 위해 여기서 살짝 놓아주는 게 진정한 도박사.

나는 안색을 흐리며 조각을 손에서 놓았다.

“이거 이단의 우상이잖아요….”

“무어라? 이단?”

“지역 신앙 같은 거…. 드루이즘이나 토테미즘, 짐승의 왕 숭배 등등. 그 시절의 잔재요. 이 모든 것들은 이단의 우상 취급을 받아서 보이는 즉시 파괴되기 일쑤인데.”

아쉬운 듯이 말하자, 흡혈귀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뭣? 누가, 도대체 누가 멋대로 과거의 유물을 이단으로 취급하느냐?”

“이단 정하는 곳이 어디겠어요. 성황청이지.”

“천신의 사자들…. 그 놈들인가! 도움이 되는 게 없구나!”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약간의 과장을 섞었을 뿐.

세상 모두가 천신의 사도는 아니니 팔려면 못 팔 것도 없다. 특히 군국은 신전에 세금을 매기는 유일한 나라. 내 독심술과 함께라면, 제 가격 받아내는 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어려운 척, 이 보물을 마다한다면?

“혹시나 해서 여쭙는데, 성경 삽화와 비슷한 느낌의 그림이나 신상(神像)은 없죠?”

흡혈귀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대답했다.

“…내 피로 물들인 거라면, 아직 남아있다만.”

“아이고. 그건 세상에 드러난 순간 척살령이 떨어지겠네요.”

나는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 가져온 대가가 나에게는 마땅치 않다는 기색. 그러면 지불능력을 상실한, 최소한 그렇게 믿는 흡혈귀는 나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

“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구나.”

“뭘요. 마음만이라도 고마운걸요.”

아쉬움을 숨기고 사양하는 척, 받고는 싶지만, 상대가 지불한 대가가 마땅치 않은 척. 말을 조금씩 끌며 흡혈귀의 마음에 부담을 더해간다.

‘결국, 내가 가진 것 중 무엇도 도움이 되지 못했구나.’

흡혈귀의 마음속에서 나지막이 전해지는 짧은 죄책감을 들으며,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괜찮다니까요. 낙담하지 마시고. 애초에 보상을 바라고 한 일도 아니니까요. 뭐, 전기 마사지는 계속해드릴게요!”

내 위로에도 흡혈귀의 마음에 드리운 그늘은 가시지 않았다.

“내가 미안하여 그렇다. 재물에 뜻을 두었다 생각한 적은 없으나, 지나고 보니 세월이 무상하기만 하구나. 내가 여전하다고 한들, 내 가진 모든 것이 시간에 스러지니.”

“이미 진혈도 받았잖아요. 충분히 받았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허나.”

“에이. 괜찮다니깐.”

좋아. 충분히 부담을 주었으니 이제는 살짝 풀어줄 차례다.

나는 시원하게 웃으며 검지손가락을 들었다.

“자. 이제 우울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마사지나 해드릴게요. 가슴을 풀어 헤쳐주세요. 양손으로 붙잡고 벌려주시면 그러면 제 손가락을 안에 깊숙이 넣은 뒤, 제 마력을 가득 뿌려드릴게요.”

바보도 알아들을 만큼 노골적인 농담. 나에 대한 미안함으로 한껏 우울해졌던 흡혈귀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확 인상을 썼다.

“말 좀 가려서 하지 않겠느냐? 꼭 음행을 저지르는 것 같아 불편하구나.”

“그러면 진지하게 묘사할까요? 자아, 어디 보자. 갈비뼈랑 근막이 심장부를 튼튼하게 감싸고 있네요…, 허파 뒤집어야 하는데 각도가 안 나오니 살짝만 치워주시, 우욱. 잠깐. 비위가. 우웩.”

“…하, 말로는 도저히 이기지 못하겠구나. 되었다. 네 알아서 하거라.”

분위기는 충분히 풀었다. 헛웃음을 지은 흡혈귀는 냉큼 가슴을 열어젖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이 붉어진 흡혈귀는 가슴께를 여미며 나에게서 멀어졌다. 다음에도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흡혈귀가 돌아가고,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격을 쏘아낸 손가락이 가늘게 경련하고 있었다.

…손쉽게 흡혈귀의 호감도를 사는 심장 마사지…. 다 좋은데. 내 정신건강에 해롭다. 손가락에 아직 몰캉거리는 촉감이 남아있는 것 같아.

내가 아무리 사람 속을 들여다본다지만, 자연과학 내부를 들여다보고 싶지는 않았다고.

오늘은 고기요리를 했는데, 붉은 살점을 볼 때마다 속이 올라와 차마 먹지 못하고 아지에게 주었다. 아지는 영문도 모른 채 행복한 울음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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