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2 혈주와 권속
아무래도 침입자는 낙하산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반짝이는 빛은 여전히 다가오고 있는데 그보다 먼저 쿵, 하고 묵직한 충돌음이 들렸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피 같은 게 튀어 내 발에 닿았다.
그러나 나도, 흡혈귀도 걱정하지 않았다. 상대가 만일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라면, 이 정도 상처는 상처 축에도 들지 않았음으로.
상대는 흡혈귀. 쏟은 물은 주워담지 못해도 흘린 피는 그대로 되돌릴 수 있는 불사의 존재.
머리가 깨져 피가 흘러나온 것 정도야 금방 되돌리고는 일어날 것이다…. 나는 그가 일어나기를 기다렸으나.
“어? 왜 안 일어나지? 정신을 못차리는데요?”
“아아. 내 잠시 깜빡했구나.”
흡혈귀가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슬금슬금 흡혈귀로 다가오던 피가 다시 침입자를 향해 밀려 들어갔다.
피에 대한 지배력의 차이가 월등해서, 침입자의 생존본능보다도 흡혈귀가 피를 잡아당기는 인력이 강했던 것이다. 흡혈귀는 내친 김에 피를 안에 다 집어넣은 뒤 상처까지 막아주었다.
피를 되찾은 덕분에 침입자가 정신을 차렸고, 곧이어.
“이 피의 이끌림, 이건 분명!”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침입자가 고개를 든다. 어둠 너머에서 붉은, 하지만 흡혈귀의 것보다는 살짝 탁한 빛이 번뜩였다.
환희, 경애, 숭배, 희열.
격랄한 감정이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침입자는 눈을 부릅뜨고는, 땅을 기듯 달려와 흡혈귀 앞에 부복했다.
“시조시여!”
낯선 이가 다가와 느닷없이 무릎을 꿇는 게 꽤 익숙한 일인지, 흡혈귀는 일말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지그시 쳐다보는 동안 침입자가 읍소했다.
“시조시여! 당신을 뵙기 위해 불초 핀레이가 찾아뵈었나이다. 부디, 칩거 중인 당신을 방해한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쿵, 하고 머리를 찧는 침입자. 찢긴 피부에서 흘러나온 피가 흡혈귀를 향하다, 흡혈귀가 살짝 시선을 던지자 화들짝 놀란 것처럼 제 주인을 찾아갔다.
흡혈귀는 차가운 눈으로 부복한 침입자를 향해 명령했다.
“핀레이. 너를 설명하거라.”
더 높은 피.
더 강한 권능.
시조의 앞에서, 시조가 아닌 흡혈귀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피에 대한 지배력은 전부 시조에게서 비롯된 것이니.
피를 움직이는 것, 목소리를 내는 것, 생을 구가하는 것, 그 모든 게 시조의 암묵적인 허락 아래 이뤄지는 일. 시조가 손짓 한 번만 하면 그 순간, 자기 피에 대한 지배력을 모두 상실하고 한 끼 간식거리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시조는 흡혈귀에게 있어서 신을 초월한 무언가였다.
시조에게 있어서는 가볍게 내던지는 말이었으나, 받아들이는 침입자에게는 어명, 아니, 계시와도 같았다. 침입자는 곧바로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예. 저를 권속 삼으신 분은 에르테 백작이시며, 그분께선 적혈공 발다미르 전하의 직계이십니다. 공국의 명을 따라 정보를 수집하다, 누군가에게 소식을 듣고는 시조께 드릴 청이 있어 찾아왔나이다.”
적혈공 발다미르.
안개 공국의 공왕이자, 정체와 소재가 동시에 밝혀진 유일한 흡혈귀. 성황청의 주적. 그리고 가장 고귀한 엘더.
그의 이름이 흡혈귀의 대명사로 쓰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거물이었지만.
“발다미르. 그 아이. 오랜만에 듣는 울림이구나.”
그런 존재를 어린아이 부르듯 되뇐 시조는 먼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그 아이는 잘 지내느냐? 여전히 왕 노릇에 심취해있느냐?”
누군가에게는 왕이며, 절대군주이며, 지배자.
하지만 한때 꿈 많은 청년이던 그를 지켜본 시조에겐, 여전히 그 순간 그대로 남아있었다.
침입자는 순간적으로 그 간극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저, 적혈공 전하를, 그 아이라고….”
‘아니, 시조께서는 적혈공 전하를 친히 권속으로 삼으신 분. 나는 지금 전설과, 신화와 마주하고 있는 거야. 정신 차려, 핀레이!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어리바리한 모습을 보여드릴 수 없어!’
자기를 채찍질한 침입자는 정신을 다잡고는 다시 머리를 숙였다.
“네! 그분은 평안하십니다. 공국의 명실상부한 왕인 적혈공께서는 그 어느 때와 비교해서 입지전적인 위치에 올라와 계십니다!”
“열심히 노력하였나 보구나. 성황청이 가만 보지 않았을 터인데.”
이 세상에 오롯한 자신의 나라를 세우겠다 천명하고, 영웅적인 행보를 보인 끝에 그것을 이룩해낸 적혈공의 업적을 누가 단순히 ‘노력’이라 치부할 수 있을까. 평범한 사람이 그리 말했다면 불경하다고 핀잔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같은 전쟁을 겪고, 같은 세월을 지내며, 한때 같은 꿈을 꾸었던 시조는 그를 평가할 수 있으리라.
새삼스레 그것을 자각한 침입자가 마른 입술을 적셨다.
‘그래. 이분은 절대자. 우리를 창조하였고, 우리의 비원을 이루었으며, 우리를 하나로 모아 영광으로 이끌어주실 분! 나는 지금 그런 분 앞에 선 거야! 그러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어!’
침을 삼키려는 듯, 침입자의 목울대가 꿀렁였다. 침이 나지 않음에도 인간일 적 습관이 남아있는 탓이다.
그만큼 침입자는 잔뜩 긴장하고, 또 기대한 채로 입을 열었다.
“시조시여! 요즈음 성황청의 기세가 예전만 못합니다.”
드디어 본론이었다. 이 침입자가 온갖 고난을 감수하며 이곳에 떨어진 이유.
침입자가 땅을 바라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신비는 그 베일을 벗고, 신성은 빛이 바랬습니다. 성황청은 독선에 휩싸여 사방에 적을 만들었으니, 그야말로 천신이 그들을 저버린 것입니다. 아니면, 처음부터 그딴 잡신은 존재하지 않던지.”
미처 포장하지 못한 증오가 그 가시를 세웠다.
침입자는, 비록 증오의 대상이 다른 쪽이라지만, 시조 앞에서 너무 감정적이었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었다.
“어쨌건 그들은 사방에 너무 많은 일을 벌였고, 이제 그동안 쌓은 업보를 감당할 차례입니다. 당연히, 그 일축을 우리 밤의 귀족들이 담당하는 것이 순리일 겁니다. 다가올 그날을 위해 혈채를 받아낼 준비를, 혈전을 벌일 채비를 해야 합니다.”
“전쟁이라.”
짧게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슬픔, 내키지 않음, 꺼림칙함, 지긋지긋함.
들뜬 침입자와는 정반대의, 가라앉고 음울한 감정.
이 둘의 온도 차는, 겉으로만 보면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전쟁을 바라보는 전후세대와 전쟁세대의 온도 차를 보는 듯했다.
흡혈귀는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그건, 모든 아이의 뜻이더냐? 다들 전쟁을 바라느냐?”
아주 짧은 순간, 침입자는 갈등했다. 거짓은 아니지만 조금이나마 사심을 담아 말할지, 아니면 있는 그대로를 말할지.
하지만 흡혈귀 사이의 위계는 왕과 군주의 것, 그 이상이다. 흡혈귀는 자기보다 높은 위계의 흡혈귀에게 저항하지 못한다. 생사여탈을 결정하는 그 간극은, 어쩌면 신도와 신의 관계보다도 더 벌어져 있었다.
신은 인간을 낳지도 않았으며, 인간을 조종할 수도 없다. 전원을 내리듯 한순간에 목숨을 빼앗아갈 수도 없다.
그러나 시조는 그 모든 게 가능하다. 흡혈귀를 만들었고, 그들을 움직일 수 있으며, 손짓 하나로 소멸시킬 수도 있으니.
결국 침입자는 머리를 조아리며 사실을 고했다.
“아니, 아닙니다. 적혈공을 비롯한 다른 엘더께서는, 시조께서 허락하지 않는 한 절대 전쟁을 벌일 수 없다는 뜻을 비치셨습니다.”
그러나, 라고 작게 덧붙인 침입자는 기대감에 부푼 미소를 지었다.
“달리 말하면, 시조께서 한마디만 하여도 저희는 전쟁을 준비할 겁니다.”
흡혈귀가 안색을 굳혔다.
그 말인즉슨, 전쟁을 위한 준비가 거의 다 끝났다는 의미이다.
무기도, 힘도, 병력도, 각오도.
심지어 전쟁을 벌일 상대조차 준비되어, 이제 시조의 허가만 떨어지면 당장이라도 뿔나팔을 불겠다는 뜻을 담은 말.
“그러한 시대입니다. 모두가 힘을 비축하는, 무기를 준비하고 정신을 다잡으며 서로를 향한 증오를 키워가는 그런 때. 모든 게 갖춰졌습니다. 시조시여, 당신께서 오신다면 말이지요. 하나의 구심점이 없는 저희에게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침입자는 경건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이어질 대답을 기다리며.
흡혈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저갱에 다시금 침묵이 도래했다. 살아가기 위한 호흡도, 음식을 넘기기 위한 침도, 피를 순환시키기 위한 박동도 필요 없는 두 흡혈귀는 못 박힌 듯 멈춰있었다. 사진을 한 장 오려낸 모습이라고 해도 믿길 정도로.
어둠만큼이나 무겁게 내려앉은 고요함.
그곳에서 소리를 낸 건.
『적극적으로 저지하십시오.』
내 귓속에다 마이크를 들이밀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지령을 전달하는 골렘뿐이었다.
『아직, 전쟁을 일으킬 때가 아닙니다. 시조는 아직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귀하에게 요청합니다. 적극적으로 저지하십시오.』
아직, 아직이라. 꽤 흥미로운 단어선택이다.
그보다, 흡혈귀 둘이 대화하는데 끼어들어야 한다니. 평범한 노역자에게 바라는 게 너무 많지 않아?
어지간하면 안 들어주려고 했지만, 왠지 지금은 흐름이 나쁘지 않아서.
“자아. 이제 그만.”
나는 성큼 앞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