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3 시조와 마사지사
골렘을 잠시 떨어뜨려놓은 나는 두 흡혈귀 사이에 끼어들었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인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어이, 불법침입자. 지랄은 거기까지다. 그만하고 일어나.”
흡혈귀와 침입자의 시선이 동시에 나를 향한다. 흡혈귀는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침입자는 고개를 살짝 들며 눈을 부라렸다.
영접을 방해받은 침입자에게서 강렬한 생각이 들려왔다.
‘감히! 지금 시조를 영접하는 신성한 자리에, 고작 인간 따위가 끼어들어? 죽고 싶나?’
이 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은 건 흡혈귀의 어전이기 때문이었다. 만일 흡혈귀가 없었다면 바로 나에게 달려들었을 것이다.
‘시조의 어전만 아니었어도 당장 네녀석의 몸을 찢어발기고 혈조술로 네놈의 피를 다 빼어냈을 것인데!’
맹렬한 적의가 나를 향했다. 그에게 있어서, 나는 고대하던 만남을 방해하러 온 훼방꾼으로 보이겠지. 실제로도 맞고.
하지만 내가 믿는 구석 없이 끼어든 게 아니다. 애초에 흡혈귀가 없었으면 내가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내가 말을 건 대상은, 침입자가 아니라 흡혈귀였으니까.
“티르칸쟈카 교육생.”
침입자와 싸우면 내가 지겠지. 똑같이 베여서 상처가 나고 피가 흘러도, 저기는 동전 떨어뜨린 것처럼 피를 주워 담으면 그만이지만, 나는 꽁꽁 싸매고는 며칠 정양해야 하니까.
그렇다면, 안 싸우면 그만.
싸워서 이기는 건 하수이며,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진정한 고수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든다. 평소에 한없이 가벼운 분위기를 풍겼던 건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입가에 서린 미소를 지우고, 언짢은 듯 미간에 힘을 주고. 몸을 살짝 비틀어서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한 불안정한 자세를 만든다. 보는 이가 불안하도록.
나를 처음 보는 침입자에겐 그냥 흔하디흔한 양아치처럼 보이겠지만, 가볍고 해맑은 나에 익숙해진 흡혈귀에게는 조금 낯설 것이다.
낯섦은 곧 두려움. 아주 잠깐이지만, 흡혈귀는 나에게 두려움을 품었다.
…물론. 그건 내 힘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갑자기 정색할 때 순간적으로 느끼는 종류의 두려움이었지만.
둘은 의외로 같은 감정이다.
“저는 많이 참았습니다.”
마술의 기본은 손기술도, 신기한 마술도구도 아니다.
청중의 심리를 가지고 노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마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직 마술사였다.
“밤중에 예고도 없이 남의 영지에 방문하여, 주인을 무시하고 멋대로 빈객을 찾고는, 정당한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영지와, 저의 체면과, 저의 명예가 위협받은 셈입니다.”
정당성을 설파하며, 분노한 기색을 은연중에 내비친다. 단서는 충분히 건넸다. 흡혈귀는 내 말의 결론을 스스로 유추해냈다.
나의 모든 것을 위협받았으니.
‘설마. 죽이겠다고?’
뇌리속에 그 한마디가 번쩍이는 것. 그거면 충분하다.
“세 번째의 무례까지 인내하는 건 자비가 아니라 방종이라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꽤 성실한 사람이라 이 무례를 그냥 보고 넘어갈 수가 없겠습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팔짱 낀 손에서 손가락만 까닥였다. 마치, 이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저 침입자를 배제할 수 있는 것처럼.
오만하게 보이도록 꾸미며, 나는 흡혈귀를 향해 물었다.
“다만 티르칸쟈카 교육생과의 정이 있으니, 마지막으로 여쭙겠습니다. 제가 이 침입자를 죽여도 되겠습니까?”
죽일 능력이야 쥐뿔만큼도 없지만, 그걸 모르는 흡혈귀는 진심으로 나에게 부탁했다.
“…그러지 말아라. 부탁하마.”
흡혈귀 마음속에서 나는 회귀자와 비견되거나 그 이상의 강자. 터무니없는 오해이든 뭐든, 상대가 그렇게 믿는다면. 이용하지 못할 이유 없다.
흡혈귀는 강하다. 그와 별개로 남의 행사에 끼어들고자 하지 않는다. 지극히 방관자적인 입장에서 모든 것을 지켜만 볼 뿐.
군국이 오래된 교회를 무너뜨리다 그 아래에서 흡혈귀를 발견했을 때도, 그녀를 죽이려고 하다 실패하여 대신 무저갱에 넣고자 했을 때도. 흡혈귀는 알면서도 그것을 방치했다.
그런 무심한 그녀도, 동족의 행사에는 차마 눈을 돌리지 못한다. 저주받았다 지탄받던 그들을 안타깝게 여기기에. 그들을 만들어낸 책임감으로.
흡혈귀는 나를 향해 간곡히 부탁했다.
“나의 얼굴을 보아서라도, 부디.”
좋아. 이 정도 간곡한 부탁이라면. 여기서 그만두어도 의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야.”
휴. 성공.
죽이든 살리든 네 마음대로 하라고 했으면 곤란할 뻔했다. 이 분위기에서 살리면 이상한데,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당장 저 침입자를 죽일 수단이 없거든.
하지만 능력의 부재가 의지의 부재인 척, 나는 몸을 휙 돌리며 침입자를 향해 말했다.
“티르칸쟈카 교육생의 얼굴이 예뻐서 살아남은 줄 알아라.”
“으, 으음?!”
스위치를 누른 것처럼 한순간 가벼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뒤쪽에서 흡혈귀의 아연실색한 소리가 들리지만, 일단 그건 넘기고.
“저 얼굴이 못생겼다면 댁은 오늘 내가 친히 마늘장아찌에 담가버렸을 거야. 됐으니까 이제 물러가. 깜깜한 밤에 난리를 피우지 말고.”
“마늘, 장아찌?”
침입자는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싶지는 않은지 엉거주춤 일어난 상태였다. 그러나 내가 폭언을 내뱉어도 덤벼들거나 도망치지도 못하고는 애매하게 서서 눈만 뒤룩뒤룩 굴렸다.
‘시조께서, 친히 부탁이라 말할 정도…? 혹시 이 인간, 그렇게 보이지는 않은데 엄청난 강자인가?’
그의 시야에 흡혈귀가 비쳤다. 경애해 마지않는 시조께서 이쪽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모습은, 장난이나 오해라 하기에는 너무 진지했다.
흡혈귀의 위계질서는 확고하다. 윗사람을 향한 의심은 피가 거꾸로 솟는 불경이며, 따라서 윗사람이 내린 판단조차 의심하지 못한다.
‘그럴 수 있어. 이곳은 탄탈로스! 온갖 괴물들이 있던 곳이다. 이 인간도 상상 이상의 괴물일 가능성이!’
뒤늦게 예의를 주입 당한 침입자는 옷차림을 가다듬었다. 지금이라도 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뒤늦게 헛기침을 하며 손을 내밀었다.
“인사가 늦었구려. 나는.”
“됐고. 아직 밤이다. 너희들은 몰라도, 인간은 잠들고 경계할 시기지.”
나는 손가락으로 무너진 관리실을 가리켰다.
“네 방은 저 무너진 관리실이다. 빈 캐비닛 있으니까 관 삼아서 알아서 잠들어. 그 이상의 대우는 바라지 말고.”
“크윽.”
‘내가 어디 가서 이런 취급을 받은 적은 없었는데…! 하지만 이곳은 시조께서 기거하던 곳. 무저갱의 다른 주민들 역시, 시조만큼은 아니어도 강하고 신비할 것이다. 일단 수그려! 살아남는 게 우선이야!’
침입자는 흡혈귀에게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무너진 관리실로 향했다.
휴우. 다행이다. 안 덤벼들어서.
역시, 사기를 칠 거면 제대로 쳐야 해. 나름 밤의 귀족이라 거들먹거리던 녀석도 내 앞에서 알아서 숙여주잖아. 숱한 위기를 넘기며 강자를 연기한 보람이 있다.
내 행동은 틀리지 않았어. 내가 잠시 전율에 빠져있는 동안.
“고맙구나.”
시야 근처에서 흔들리는 양산이 보였다. 흡혈귀가 나의 옆에 나란히 선 것이다. 나는 평온하게 대꾸했다.
“뭘요, 우리 사이에. 이 정도 부탁은 들어드릴 수 있죠.”
“우리 사이?”
“심장을 만지작거리는 사이 아니겠어요? 그토록 깊은 관계를 맺었는데요, 뭘.”
“풉. 그래. 그러하지.”
흡혈귀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은근히 기대하는 얼굴로, 손을 자기 가슴골에 가져다댔다.
아, 잠깐만. 또?
살갗이 갈라진다. 피부가 갈라지며 보여선 안 될 것이 펼쳐진다. 은밀한 곳까지는 램프의 빛이 닿지 않아, 음영이 진 가슴골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에겐 자신이 있었다. 오직 손의 감각만으로 저 안에 숨겨진 심장을 찾아갈 자신이.
“말이 나온 김에, 한 번 해주겠느냐?”
“지금? 이 와중에요?”
“지금이 어때서? 딱 괜찮은 때 아니더냐. 사방은 어둡고, 온 세상이 고요하며, 아무도 우리를 보고 있지 않으니.”
붉은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을 들었다.
이어진 일은 딱히 떠올리고 싶지 않다.
몰캉거리는 촉감(심장), 안쪽을 더듬고 파헤치는 손가락(갈비뼈와 허파), 번쩍이는 감각(전격 마법)과 함께 느껴지는 달뜬 신음.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뜨끈한 액체(피).
일을 끝마친 뒤 정신건강을 위해 적당히 머릿속으로 보정하는 동안, 흡혈귀는 만족스럽게 피부와 옷을 다잡았다.
“후후. 고맙다. 나는 이만 들어가보마.”
그 말을 끝으로 흡혈귀는 새카만 관 위에 올라앉았다. 그리고 관은 소리도, 기척도 없이 부드럽게 흡혈귀를 데리고 지하 무기고를 향해 움직였다. 붉은 빛 낙인이 찍힌 철문이 활짝 열려 흡혈귀를 맞이했다. 커다란 관과 반짝이는 은발이 사라지고 나서야 철문이 둔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새카만 어둠과 고요가 찾아왔다. 나도 다시 내려놓았던 램프 곁으로 다가갔다.
그제야 골렘은 봇물이 터진 듯 말을 토해냈다.
『방금 그거. 도대체 무엇을 한 겁니까?』
“찌릿찌릿하고 기분 좋은 거요.”
『찌릿찌릿?』
“설명하기 어려워요. 대충 마사지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세요.”
이것만으로 이해할 수 있으면 그건 신 아니면 독심술사다. 둘 다 아니었던 골렘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어쨌건, 귀하와 시조의 관계가 나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살아남기 위한 노력이죠.”
골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훨씬 이야기가 쉬워질 수 있습니다. 타 흡혈귀의 방문은 상정 외의 상황. 현장인력의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합니다.』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네. 열심히 하세요. 아, 저한테 보상 주는 건 잊지 마시고요.”
『보상 말입니까?』
“설마 입 싹 닫을 생각하는 거 아니죠? 평범한 사람의 몸으로 흡혈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고요. 내가 방금 군국을 위해 이 한 목숨을 걸었는데 보상 정도는 있어야죠.”
『군국민이 군국을 위해 봉사하는 건 의무입니다.』
말같지도 않은 말을. 나는 냅다 골렘을 치켜들었다. 목을 붙잡힌 채 허공에 떠오른 골렘은 팔다리를 바둥거리며 외쳤다.
『즉각 위협 행위를 멈추십시오. 부정 평가가 누적되면 귀하의 석방 여부 혹은 사후평가에 불이익이 있을 수 있습니다.』
“대위님 명령이 과도하게 누적되면 평가고 뭐고 받기 전에 뒤질 것 같습니다. 좀 말이 되는 요구를 하십시오. 이따위로 써먹을 거라면 나 말고 진짜 교관을 데려왔어야지.”
『귀하는 지금도 살아남기 위해 교관을 사칭하고 있지 않습니까? 본디 군인 사칭은 최대 사형에 이르는 중죄. 본관이 그걸 좌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유의미한 보상이라 생각.』
“앙? 소리가 나온다고 다 스피커가 아닙니다, 에이비 대위.”
골렘의 스피커를 톡 떼어냈다. 입을 잃어버린 골렘은 다급히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이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렇게 안 보여도 이쪽은 목숨 내놓고 일하고 있다고요, 에이비 대위. 앞으로는 말할 때 상대방 사정도 좀 고려합시다. 대답.”
골렘이 머리를 급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충분히 그 모습을 즐긴 뒤, 나는 스피커를 손가락으로 톡 튕겨주었다.
날아오는 스피커를 잡기 위해 골렘이 급히 손을 뻗었으나 철로 된 프레임은 무언가를 붙잡기엔 너무 딱딱했다. 골렘은 불에 덴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며 수정구 스피커를 간신히 품에 안았다. 혹여나 내가 훔쳐갈까 봐 소중히 안은 모습이 애처롭다.
어찌저찌 다시 스피커를 붙인 골렘이 지친 듯이 말했다.
『…본관의 권한으로 허용된 것이라면 하나 보상하겠습니다. 다만, 본 기체가 부서지는 일이 있더라도 월권은 불가합니다.』
역시, 골렘이고 인간이고 일신상의 위협을 느껴야 좀 고분고분해진다니까. 나는 다시 골렘을 내려놓았다.
“거, 별건 없고. 마력초 같은 거 좀 몇 개 보내주십쇼. 이거 요즘 매일 생활마법 쓰다가 마력 다 떨어져서 몸이 허합니다.”
『마력초라면 3레벨 사치품입니다. 그건 귀하에게 허용되지 않은….』
내가 스피커를 톡톡 두들기자 골렘은 급히 말을 바꾸었다.
『하지만 보급 목적으로는 요청 가능한 품목입니다. 타당한 이유가 있으니, 며칠 안에 보급해드리겠습니다.』
“좋아요. 꼭 꽉꽉 담아주세요. 솔직히 말해서, 제가 지금 하는 일에 비하면 마력초 그거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 번 으름장을 놓은 다음 몸을 돌렸다. 하암. 졸려. 빨리 들어가서 자야지.
충분한 수면이야말로 장생의 지름길. 나는 크게 하품을 하며 내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또 골렘이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잠깐 기다리십시오. 본 기체를 식당까지 이송해주시기 바랍니다.』
“네?”
『귀하의 협조가 없다면 장애가 많은 이 기체로 식당까지 되돌아가기 어렵습니다. 이 기체를 식당으로….』
“잘 안 들리는데요? 이상하다. 여기 올 때는 잘 들렸는데, 다시 말이 딱딱해져서 그런가?”
내가 귀를 후비는 시늉을 하자, 골렘이 말을 멈추었다. 아마 내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눈치 챈 모양이었다.
『귀하는 본관의 정당한 요청을 이행할 의무가….』
“다시 대답해보세요. 뭐라고요?”
잠깐의 고민 끝에, 골렘은 뚝뚝 끊어지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어부, 바를. 부탁드립니다. 오빠.』
나도 마주 대답했다.
“오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