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54화 (54/384)

EP.54 침묵 선언

다음 날.

어제 중간에 깨는 바람에 잠을 통 자지 못한 터라, 아지가 짜증을 낼 때까지 잠에서 못 깨어나고 말았다. 심기가 불편한 아지를 달래기 위해 아침부터 거나한 식사를 차려야 했다.

먼저 그릇을 비우고 느긋하게 내려가는 도중 갑자기 아래쪽에서 비명 비슷한 게 들려왔다. 뭔가 하고 고개를 내밀어 살피니 어제 침입한 핀레이가 회귀자와 대치하는 중이었다.

아니, 대치라는 표현은 너무 온건한 선택이었다.

이미 회귀자의 검 아래 핀레이의 오른팔이 떨어져 있었으므로.

“쯧쯧. 제 버릇 남 못 준다더니.”

참나. 옛 버릇 못 버리고 또 팔을 잘랐구만. 나는 크게 하품을 하며 그들에게로 걸어갔다.

“하암. 셰이 교육생, 왜 또 남의 팔을 잘랐습니까?”

그러자 핀레이는 자기 어깻죽지를 부여잡으며 눈을 부릅떴다.

‘또? 지금 이 소년은 평소에도 남의 팔을 자르고 다녔다는 말인가? 설마!’

놀랍게도, 현실은 상상을 뛰어넘기 마련이다. 비록 내 경우는 미수에 그쳤지만 말이야.

내 지적에 외팔이 양산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변명했다.

“내 탓이 아니야. 처음 보는 얼굴이 느닷없이 찾아와서는, 나를 보고 손을 뻗어오잖아.”

“악수라도 청했겠죠. 셰이 교육생은 뭐 악수를 청해오는 사람을 의수가 필요한 몸으로 만들겠다고 맹세하기라도 했습니까? 왜 그렇게 팔을 잘라대요? 팔 모으는 취미라도 있어요?”

“내가 악수를 청하는 것 가지고 손을 자를 리 없잖아. 누구를 정신병자로 보는 거야?”

“앗, 어떻게 알았지?”

회귀자의 시선이 따갑다. 눈에서 광선이 나온다면 내 팔을 잘랐을 것이다. 나는 팔을 등 뒤로 숨기며 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니, 솔직히. 셰이 교육생은 제 팔도 자르려고 했잖습니까? 정상적인 사람은 만나면 손을 흔들어 인사하지, 칼을 휘둘러 팔을 자르지 않습니다.”

“나도 아무 이유 없이 자른 건 아니라고. 저 흡혈귀는 뭐라고 했더라, 왜 인간 따위가 진혈을 갖고 있냐면서 내 가슴으로 손을 뻗었단 말이야.”

“아하.”

이제야 내막이 이해되었다.

핀레이는 그 고귀한 시조의 피의 기운을 느끼고 감옥 1층을 기웃거렸던 모양이다. 그러다 회귀자와 마주치고는, 어째서 인간 따위가 그걸 갖고 있냐며 화를 낸 것이다.

당연히 까칠한 회귀자 나리께서 손을 뻗는 핀레이를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다. 검을 휘둘러서 냅다 팔을 잘라버리고, 겁을 집어먹은 불청객은 어깻죽지를 부여잡고는 저런 상태가 된 거지.

충분히 개연성 있는 이야기다. 상황을 이해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티르칸쟈카 교육생의 손님이에요.”

“그 생각이 문득 들어서 목을 치려다가 말았어. 단순히 목을 자르는 것만으로는 죽지도 않을 테니 말이야.”

사람이 참 못됐다니까.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걸로는 안 죽어서라니. 뭐야?

친절한 모범시민인 나는 떨어진 팔을 주워들고는 불청객의 팔에다가 갖다주었다. 잘린 단면끼리 가까워지자, 핏물이 자석이라도 되는 양 주욱 늘어나더니 서로 달라붙었다. 팔을 되찾은 핀레이는 팔을 쓰다듬으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뭐, 뭐지? 저런 괴물딱지와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다니…!’

팔 한 번 베였다고 엄청 경계하네….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

아니, 경계하는 게 인간적으로 맞구나. 요즘 이상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잠시 헷갈렸다. 식당에 들릴 때마다 불사자 팔다리를 매일 마주치고, 맨날 찾아오는 흡혈귀의 심장을 만지작거리다 보니까 상식이 뒤틀리고 있어.

정신 차리자. 이러다간 전혀 평범하지 않게 되어버린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는 이성적으로 말했다.

“그래도 앞으로는 조심해주십시오. 상대가 흡혈귀라 다행이지, 멀쩡한 인간이라면 다시 붙이지도 못합니다.”

“나도 상대가 평범한 인간이면 안 이래.”

“네? 잘 못 들었습니다? 그럼 저는 인간이 아니어서 팔을 자르려고 한 겁니까?”

“평범한, 이라고 했잖아. 보이지 않는 검을 손가락으로 튕겨내는 녀석을 어떻게 평범하다고 그래?”

그 말을 들은 핀레이가 경악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저 검격을 손가락으로 튕겨냈다고? 저토록 평범해보이는 사람이? 이럴 수가. 탄탈로스의 영주라고 했던 것도 허언이 아니었잖아!’

의도한 바는 아닌데, 실시간으로 착각이 쌓여가고 있다. 점점 나를 보는 핀레이의 눈에 공포가 어린다.

…왠지 조금 즐거운데? 밤의 귀족이랍시고 목에 힘주고 다니던 사람이 길거리 마술사에게 저런 태도라니. 내가 언제 이런 대접을 받아보겠어?

얼마나 재미있냐면, 길 가다가 제각각 모양을 가진 돌로 돌탑을 쌓아올릴 때와 비슷한 정도로 재밌다. 할 만 한데.

어디, 뭐 좀 더 쌓을 거 없나?

그때였다. 마침 아침을 배불리 먹고 설렁설렁 걸어오던 아지가, 앞에 있는 낮선 이를 보더니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고는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핀레이는 뒤쪽에서 다가오는 난데없는 적의에 당황했다.

‘뭐지? 이 불길한 느낌은?’

핀레이가 몸을 돌렸다. 그가 마주한 건, 드물게도 이빨을 드러낸 개의 왕 아지였다.

아지는 뭔가 불편한 듯 볼을 씰룩이면서, 그를 뚫어지게 노려보며 천천히 걸어왔다.

털이 곤두선다. 아지의 것도, 우리들의 것도. 짐승의 울부짖음에는 몸을 옭죄는 강렬한 기세가 있었다. 그것을 직접 받은 핀레이는 공포에 질렸다.

“으르르.”

‘수인? 어째서 수인이 나를 보고 이를 가는 거지? 그보다, 도대체 뭐야? 이, 더 근원적이고 피가 떨려오는 두려움은….’

핀레이의 몸이 덜덜 떨리고, 아지의 으르렁거림도 점점 날카로워질 무렵.

아지의 발이 움찔거리며 당장 튀어 오르기 직전 내가 소리쳤다.

“어허. 아지야! 그거 가만히 두고 이리 와!”

내 목소리를 들은 아지는 고개를 홱 돌려 나를 마주한 뒤, 핀레이를 향해 경계하는 시선을 던지면서, 옆걸음으로 내가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 아지는 나의 곁에 착 붙으면서 고자질하듯 핀레이를 가리켰다.

“멍. 멍멍. 피 냄새. 쟤. 저거.”

아무래도 시조 정도 되지 않는 흡혈귀는 은근히 피냄새를 풍기는 모양이다. 아지 입장에선 죽은 인간이 걸어다니는 것처럼 보이겠지.

후각이 몇 배나 되는 아지는 인간보다 피냄새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신경이 잔뜩 곤두서 노려보는 아지. 중재할 내가 없었다면 저 핀레이를 해체해버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지의 턱을 간질이며 말했다.

“알아. 나도 저거 사람 아닌 거. 그냥 놀러왔대.”

“멍멍. 멍. 나, 쟤랑 안 놀아.”

“쟤도 너랑 놀 생각 없을 테니까 참아.”

마침 좋은 착각거리가 왔다. 핀레이에게 여기 서열 좀 알려줄 겸, 조금 강조해볼까.

나는 핀레이를 슬쩍 보며, 일부러 특정 단어를 강조해서 말했다.

“‘개의 왕’이면 ‘개의 왕’답게 좀 품위 좀 지키고. 저런 잔챙이 하나하나에 반응하면 어쩌자는 거야.”

‘개의 왕!’

아지의 정체를 깨달은 핀레이가 입을 딱 벌렸다.

‘진정으로 개의 왕인가? 예전, 인간의 편에 서 인외를 몰아내었다는, 인간과 가장 가까운 짐승의 왕? 그 개의 왕을 애완견처럼…! 역시 여간내기가 아니었어!’

뭘 잘 모르나 본데 개는 기본적으로 애완용이다. 심지어 난폭한 사냥개도 주인 앞에서는 애교를 부리고는 한단 말이다. 개의 왕도 개니까 애완용이지.

애완견이 아닌 개도 있다고? 그걸 우리는 늑대라고 부르기로 했다.

어쨌든 내 대수롭지 않은 태도 때문일까. 아지는 이내 핀레이에게 관심을 끊고는 나에게 매달렸다.

“멍. 오늘 뭐해? 밥? 공놀이? 다른 놀이?”

“아니. 오늘은 나도 안 놀아. 할 일 있어.”

“멍!”

크크. 착각을 쌓을 만큼 쌓았다. 이제 핀레이는 완전히 주눅이 들어서 기도 못 펼 거다. 일합에 팔을 자른 검사에, 흡혈귀의 천적이었던 개의 왕. 거기다 그 둘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나까지.

앞으로는 내 말을 절대 무시하지 못하겠지? 내 손짓 하나하나에 겁을 집어먹고 내 말을 따를 거다.

안 그래도 일하기 귀찮은데, 마침 좋은 흡혈귀 노예 하나 구했구나. 피가 쏙 빠지도록 써먹어 주지.

그때였다.

“마침 모여있었구나.”

어둑한 존재감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넘실거리는 어둠이 새카만 관을 받쳐 들고, 그 관을 가마 삼아 올라탄 흡혈귀가 느릿하게 다가왔다.

또 심기가 불편해지려는 아지를 꼭 붙잡고 흡혈귀를 반겼다.

“아,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은 일찍 일어나셨네요?”

“그래. 마침 잘 되었구나. 이곳에 다 모여있으니 구태여 찾아다닐 필요 없겠어.”

관 위에서 다들 한 번씩 굽어보던 흡혈귀는 턱을 꼿꼿이 쳐들며 양손을 모았다. 그러자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잠시 말을 멈추고는 흡혈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손짓부터 모두에게 균등하게 한 조각씩 건네는 시선. 그에 마주한 사람은 잠시 자신을 잊고는 흡혈귀를 쳐다보게 된다. 그녀는 태생적으로 모두의 주목을 받는 법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타고난 카리스마라고 할까. 계산해서 행동하지 않아도 존재감이 은은하게 드러난다.

향초가 타오르면 잠깐은 눈치채지 못하더라도 언젠가 그 향을 맡게 되는 것처럼.

음악이 깔리면 수다를 떨다가도 잠시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처럼.

흡혈귀의 존재감은 옅으면서도 어느샌가 방을 가득 채우는 것이라, 눈치챘을 땐 이미 모든 사람이 흡혈귀의 입술과 손짓에 집중하고 있었다.

“멍멍? 안 놀아?”

늘 이야기하지만 아지는 사람이 아니다. 개다.

어쨌건 뭇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은 흡혈귀는 입술을 떼고 말했다.

“널리 전해야 할 말은 듣는 이가 많아야 하는 법. 핀레이, 듣거라. 네가 작일 읍소한 건에 대해 답을 내리겠다.”

평소와 별 다를 바 없는 목소리에, 변함없는 어조. 하지만 지금 들리는 흡혈귀의 말은 꼭 어전의 왕명과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핀레이는 더없이 감동한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예! 불초 핀레이, 시조의 명을 직접 듣는다니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들려주십시오!”

나도, 회귀자도 숨을 죽이고 상황을 지켜보는 지금. 흡혈귀는 핀레이를 내려다보며 선언했다.

“작일, 너는 나에게 전쟁을 허락해달라 읍소하였지. 그에 대한 답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기꺼이 받들겠습니다!”

“나는 침묵하겠다.”

핀레이는 실망도, 탄식도 내뱉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조아린 채 그것을 수용했을 뿐.

본인은 영광스러운 성전을 기대하고 이곳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가 그리는 최선의 미래는 시조와 함께 지상으로 올라가는 것이고, 최악의 미래는 무저갱의 미아가 되는 것. 핀레이는 최선의 경우를 위해 최악의 상황을 각오하고 무저갱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 희망이 산산조각이 났으면서도. 핀레이는 전혀 실망한 투가 아니었다.

오히려.

“받들겠습니다! 답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답을 들었다는 사실 자체에 감격했을 뿐이다.

아래 서열의 흡혈귀는 설득할 필요도, 배려할 필요도 없다. 아래에서 위로 거슬러 올라오는 강물은 없듯, 권속이 혈주에게 건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의견을 구하면 그제야 읍소할 수만 있을 뿐.

“여기까지 온 노고를 높이 사, 조금만 더 풀어 말해주겠다.”

흡혈귀는 나와 회귀자 쪽을 흘긋 보며 약간의 설명을 덧붙였다. 나는 저 설명이 핀레이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말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발다미르, 그 아이에게 전쟁을 금한 적 없다. 애초에 나는 아이들에게 내 뜻을 강요한 적이 없다. 전쟁은 오롯이 그들의 몫이자, 그들의 결정으로 이루어지리니. 나는 이미 역사에서 스러진 자. 그들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모를까, 내가 직접 나서서 상징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받듭니다.”

“따라서, 설령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한들, 내가 먼저 나서 혈전을 주창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게 나의 뜻이다.”

“받듭니다.”

“그렇다면. 이만 지상으로 돌아가라. 이곳은 네가 올 곳이 아니니.”

지엄한 명령.

그러나 계속 고개를 조아리며 수긍하던 핀레이는, 이번에만은 다른 태도를 보였다.

“송구하오나, 시조시여. 그 명은 받들지 못하나이다.”

“어째서냐?”

흡혈귀가 시조의 명을 거부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그렇기에, 만일 권속이 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능력의 문제이지.

그렇기에 흡혈귀도 핀레이를 책망하는 대신 그 이유를 물었다. 핀레이는 땅에 머리를 세게 찧으며 외쳤다.

“송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저의 의지와 무관한 것. 저에게는 무저갱에서 나갈 수단이 없나이다! 그렇기에, 불민한 저는 시조께서 내린 명을 받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죽여주십시오!”

“나갈 수단이 없다…? 준비하지 않은 것이냐?”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내려오는 것보다 올라가는 것이 더 수고스럽다는 거야 주지의 사실이건만, 그렇다고 지상으로 되돌아갈 준비조차 하지 않다니? 조금 궁금해지는구나. 도대체 밖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빠져나갈 기약이 없는 무저갱으로 나를 찾아온 것인지.’

흡혈귀의 고민은 길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흡혈귀의 호기심이 치솟았다. 그러나 이미 결정을 내린 바, 더 물어보면 결심이 흔들릴까 흡혈귀는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가만있거라. 이곳은 군국의 영토이며, 관리하기 위해 내려보낸 이가 있다. 그라면 너를 내보낼 수 있음이니. 어디 보자.”

대신 그녀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흡혈귀는 정확히 나를 지목하며 명령에 가깝게 말했다.

“교관. 핀레이는 이곳에 올 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터. 그가 이곳에 온 건 착오이자 사고이니. 그를 지상으로 돌려보내기를 희망하는 바이다.”

어? 나?

잠깐만. 뭐? 저 침입자를 고이 돌려보내라고?

나보고?

“네? 저요?”

“여기 너 말고 누가 또 있다는 말이냐.”

당연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는 흡혈귀. 그 시선을 마주하자 내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아니, 교관이고 자시고.

사실 나도 잡힌 몸인데?

“군국이란 나라가 이곳의 주인이라면, 필시 나가는 방법도 알고 있을 터. 핀레이에게 그러해주기를 요청한다.”

아니, 빠져나갈 방법을 알았다면 가장 내가 먼저 시도했지. 여기 계속 갇혀있었겠어?

“나는 시조 티르칸쟈카. 세계를 삼킬 괴물, 칸쟈카의 이름을 받은 재앙 중 유일하게 남은 업이다. 내로라하는 기사들이 내 앞에서 피를 흩뿌렸고, 수많은 영웅도 이 목을 노리다 스러졌다. 내 비록 영락하여 무저갱에 몸을 의탁했다 하나 내가 행했던 일들이 무색해지는 것은 아닐 터.”

“영락하다니! 시조시여, 말도 안 됩니다! 지상의 모든 흡혈귀가 시조께 경애를 바치는데 그런 말씀은…!”

아니, 그걸 왜 나에게 요구하냐고. 점점 궁지에 몰린다.

그보다, 정말 빠져나갈 준비 하나도 안 하고 온 거야?

그러면 저 불청객을 살려둘 이유가 없었잖아?

“…대답이 없구나. 곤란한 것이냐? 꼭 그것이 안 된다면, 개인적인 인연으로 요구하마. 그를 지상으로 되돌려놓도록 해다오.”

내가 대답하지 못한 건, 그 요청을 들어줄 능력이 없어서였다. 위기를 감지한 내가 머리를 핑핑 돌리고 있을 때였다.

흡혈귀는 나의 침묵을 거절의 뜻이라 지레짐작하고는 목소리를 깔며 선언했다.

“만일 거절한다면, 나는 핀레이를 직접 지상으로 되돌릴 생각이다. 무저갱이 무한하다 하나 나에게 있는 시간 역시 영원. 어둠은 나의 영역이니, 계속 올라간다면 지상에 닿겠지. 다만, 그때 핀레이를 되돌려놓는다면, 구태여 이곳으로 돌아오지는 않을 것 같구나.”

핀레이가 고개를 퍼뜩 쳐들고, 회귀자도 경악해서 얼굴을 굳혔다. 저 말의 의미는 하나였다.

지상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겠다.

즉,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탈옥하겠다는 뜻이었다.

큰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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