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55화 (55/384)

EP.55 위기 탈출 no.0

미친듯이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땀에 젖은 천이 등에 달라붙는다.

어쩌지? 나도 능력이 없는데. 사실 나, 교관이 아니라 붙잡혀 온 노역자란 말이야.

거기다 마침 에이비 대위가 흡혈귀에게 큰 관심을 쏟고 있던 참이다. 무저갱에 존재하는 유일한 협력자라는 입장을 이용해 에이비 대위를 놀리고 반쯤 협박하기까지 했는데, 만일 흡혈귀가 탈출한다면 에이비 대위가 나를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입을 털어서 흡혈귀의 탈출을 막아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고개를 끄덕이자니 탈출시킬 수단이 없고, 고개를 젓자니 홀로 날아갈 판이다. 어쩌지?

생각해라, 생각해. 이 난관을 타개할 유일한 방법.

아.

그래.

그거다.

장수 대신 말을.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를 이곳에서 빼내는 건 왼손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도 손쉬운 일입니다.”

참고로 나는 오늘부터 누가 때려죽이더라도 손바닥을 뒤집지 않기로 했다. 그러니까 거짓말은 아니다.

나는 뒤집지 않기로 한 왼손의 손가락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 필요한 게 있습니다. 그건 아직 충족되지 못했고요.”

“무엇이냐?”

“핀레이, 이곳을 빠져나가겠다는 그의 의지요.”

그러자 흡혈귀가 의아해했다.

“우문이로구나. 당연히 되돌아가고 싶어하지 않겠느냐?”

“그러는 티르칸쟈카 교육생은 왜 안 돌아가시죠?”

“나야 워낙 오래 살아왔고, 또한 바깥에서 딱히 할 일도 없으니….”

“같은 논리로, 핀레이도 그럴 수 있지 않습니까? 이곳에 나가는 이유도 그의 의지에 달려있을 겁니다. 만일, 티르칸쟈카 교육생이 강요하지만 않는다면요.”

흡혈귀는 마음만 먹으면 핀레이 보고 당장 죽으라고 명령할 수도 있다. 핀레이는, 다 못 구가한 생을 조금 아쉬워할지도 모르지만, 시조의 명령에 따를 것이다. 그의 삶을 이어주는 피, 그 모든 힘이 시조에게서 비롯된 것임으로.

역설적으로, 그것이 시조가 다른 흡혈귀를 멀리하게 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흡혈귀는 혹여나 그녀의 말이 판단을 흐릴까, 입을 꼭 다물고는 뒤로 물러났다. 핀레이의 결정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나는 핀레이를 향해 말했다.

“자, 핀레이. 들어보십시오. 당신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대단한 기회를 주는 양, 왼손가락 두 개를 들었다.

“만일 저희가 당신을 빼낸다면, 티르칸쟈카 교육생은 여기 남게 됩니다. 당신은 이곳에 찾아온 목적을 영영 이룰 수 없게 되겠지요.”

그리고 하나를 접는다. 남은 건 하나.

우뚝 솟은 손가락으로 시선이 모인다. 시각적인 표현. 이 손가락으로 지목할 하나의 선택지에 무게가 쏠린다.

나는 그 손가락을 천천히 접으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여기 남기로 결정한다면, 티르칸쟈카 교육생과 함께 있을 기회를 얻는 셈입니다. 위대한 시조에게 봉사하며, 그분이 당신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볼까 고민할 가능성을 남겨두는 것이죠. 이대로 올라가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귀중한 시간이 될 겁니다.”

그리고 손가락을 완전히 접은 뒤, 꽉 쥔 주먹으로 힘차게 말했다.

“이건 기회입니다. 잘 생각하십시오. 이 땅에서 기회를 잡을까, 아니면 지상으로 올라갈까.”

시조를 설득하겠단 일념으로 스스로 무저갱에 들어온 핀레이다. 목적을 이루지 못한 만큼 당연히 탈출에 대한 욕망이 적을 수밖에 없다.

조금 전까지는 시조의 명령 때문이라도 되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시조가 의식적으로 영향을 거둔 지금 핀레이는 이성적으로 판단했다.

‘그 말이 맞아. 어차피 올라가서 얻을 건 없다. 하지만 여기서는 얻을 것이 있으며, 해야 할 일도 있다. 홀로 계신 시조를 보필하는 것! 어느 순간, 나를 갸륵히 여긴 시조께서 나의 청을 들어주실 수도 있을 터!’

그는 찬란한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시조의 심복이 되어 그녀와 함께 지상으로 올라가, 제일가는 공로를 세워 영광을 얻는 일.

이미 반쯤 수포로 돌아간 일이지만, 핀레이는 조금이나마 남은 희망을 움켜쥐기 위해 결심했다.

“시조시여.”

핀레이의 결심을 짐작한 흡혈귀가 대답했다.

“핀레이. 정녕 여기 남아있을 생각이냐?”

“시조께서 허락하신다면, 그러하겠습니다.”

허락하지 않으면 그는 당장 위로 올라갈 것이다. 위대한 시조의 명은, 엘더도 아닌 일개 권속이 절대 거절할 수 없는 것이니.

그렇기에, 권속은 시조 앞에서 자유의지조차 상실하기에, 그것을 안타까워한 시조는 권속의 판단을 최대한 존중했다.

“너 자신의 뜻을 따르거라.”

“감사합니다! 불초 핀레이, 이 무저갱에 남아 시조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무릎 꿇은 핀레이를 잠시 내려보던 흡혈귀는 이제 나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다만, 그의 뜻이 바뀐다면, 언제든 다시 올려보낼 수 있도록 해다오.”

여기서는 한번 튕겨주자. 쉬운 인상을 주면 안 되니까.

“완전 상전이시네요. 여기가 호텔입니까? 아니면 제가 교육생 따까리라도 됩니까? 자꾸 무얼 해달래. 작작하십쇼.”

쉽게 허락해줄 수는 없지. 왜냐면 그 순간 내가 아무것도 아닌 노역자라는 사실이 들통나거든.

가능한 나갈 마음도 안 들게, 그리고 나가지도 못하게 해야 한다. 나는 흡혈귀의 호감도를 깎아먹을 각오로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네 이놈!”

핀레이가 일어서며 소리쳤다. 목에 핏대를 잔뜩 세운 채, 나에게 삿대질하며.

“엥?”

“시조의 요청을 어디 감히 인간 따위가 거부한다는 말이냐!”

“아니, 인간 따위고 자시고.”

“시조를 향한 무례, 내가 용서하지 못한다. 네가 얼마나 강자인지는 관계없다. 내 몸이 한 줌 핏물이 되어도 상관없다. 시조의 권위를 위해서라도 너에게 결투를 신청하겠…!”

잠깐.

저건 진심이다. 나를 엄청난 강자로 인식하고 있으면서, 자기가 죽어서라도 시조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나에게 도전하는 것이다.

문제는, 나는 저 시조의 권속의 권속의 권속과 싸우면서도 승패를 점칠 수 없는 약골이라는 점.

젠장, 목숨을 저리 쉽게 버려? 이래서 흡혈귀라는 족속들이란! 어쩌지? 여기서 내가 약하다는 게 들통나면…!

“그만, 핀레이.”

흡혈귀의 지엄한 명령. 그 순간, 핀레이는 말을 멈추고는 깔끔하게 180도 돌며 무릎을 꿇었다.

미친 놈인가? 내가 어안이 벙벙해져 있을 때. 흡혈귀는 나를 향해 한층 누그러진 태도로 말했다.

“내 너에게 무리한 요구만 했구나. 너조차 이곳의 왕이 아닐 터인데.”

“아, 아뇨. 뭐.”

“내 다시 양해를 구하겠다. 그 이야기는 없던 것으로 해다오.”

“알았어요, 뭐.”

“그래. 고맙구나.”

뭔가 기분이 나쁘다. 나는 이 묘한 불쾌감의 원인을 쳐다보았다.

저 핀레이라는 흡혈귀, 죽음을 별로 겁내지 않잖아?

흡혈귀에게 시조란 신과 어머니의 합집합 같은 존재. 물론 신이고 어머니고 쌩까는 사람은 많으나 핀레이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를 광신도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흠. 저런 거, 남겨둬서 좋을 게 없는데.

“잠깐. 나도 할 말이 있어.”

내가 고민하고 있을 무렵 타이밍 좋게 회귀자가 끼어들었다. 회귀자는 날카로운 눈으로 핀레이를 추궁했다.

“이곳은 ‘어떻게’ 들어왔지? 평범한 방법으로는 절대 오지 못할 텐데.”

그리 말하며 회귀자의 눈이 주황색으로 물든다.

칠색안 중 이색, 내려다보는 눈 주안(朱眼).

왕의 눈이라 불리는 그것은 시야에 닿는 범위 내의 모든 것을 미세하게 파악할 수 있어, 상대방의 몸에서 나타나는 수상한 징후나 주머니에 숨겨둔 물건을 감지할 수 있다.

권능까지 써가며 무언가를 캐내려는 회귀자, 그녀의 앞에.

“셰이.”

“응?”

핀레이 대신 흡혈귀가 나섰다.

“추궁은 거기까지만 하자꾸나. 이미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닐진대 더 추궁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그것도 교육생인 너에게.”

“어? 잠깐, 티르칸쟈카. 이건 중요한….”

“중요한 일이겠지. 허나 급하지는 않을 터. 내일도 오늘과 똑같은 하루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하루 정도 미루어도 되지 않겠느냐. 그리고 너의 물음에 핀레이가 꼭 답하라는 법도 없고.”

“하, 하지만.”

“아니면, 또 나의 뜻을 무시할 것이냐?”

“아, 아니야! 티르칸쟈카! 나는!”

“그래. 그러면 내일 보자꾸나. 나도 핀레이에게 물어볼 것이 있으니.”

“으, 응! 그럴게!”

응, 이라는 말을 끝으로 회귀자는 잽싸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흡혈귀는 다시 양산을 어깨에 걸쳤고, 핀레이는 경탄해 마지않은 눈으로 흡혈귀를 올려다보았다.

‘역시, 시조께서는 이러한 곳에서도 으뜸가는 위치를 차지하시는구나! 자랑스럽다! 내가 밤의 귀족인 것이!’

에고, 회귀자. 기가 완전히 죽었네. 아무래도 저번 흡혈귀의 일갈이 좀 세게 들어간 모양이다.

어쨌든, 고맙다. 생각지도 않은 수확을 느끼게 해줘서.

회귀자는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나는 핀레이의 뇌리에 떠오른 대답을 읽을 수 있다. 그 대답, 내가 받아가지.

‘나에게 정보를 건넨 그 붉은 머리의 마법사는 분명히 시조께서 잠들어 계시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여기 왔을 때 시조께선 이미 깨어난 상태였지. 저들이 시조를 깨운 모양이군. 어떤 방법을 썼을지 모르겠지만, 다행인 일이다. 내가 시조의 잠을 깨울 무례를 덜었으니.’

호오. 붉은 머리 마법사. 꽤 강렬한 인상이군. 뭐지?

‘그는 그 정보를 어떻게 쓸지는 나의 소관이라며 팔찌 하나를 건넸지. 이 낙하산을 차고 무저갱에 떨어지면 탄탈로스에 도달할 수 있다고. 내려오는 도중 낙하산이 펴지는 충격 때문에 놓쳐버렸지만.’

아아. 그래서 낙하산 없이 땅에 부딪힌 거로군. 좋아. 잔해는 거기 있을 테니 이따가 가서 회수하자.

‘반신반의했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그렇다면 그 말도 진실이겠군.’

이 생각만 마저 읽고.

‘그는 자신을, 탄탈로스의 탈옥수라고 소개했다.’

어? 잠깐만. 탈옥범?

이건 생각보다 중요한 정보다. 탄탈로스의 탈옥수들. 그들이 어떻게 탈옥했는지 단서라도 알면 나는 이 지긋지긋한 생활을 청산하는 셈이니까!

살려둔 보람이 있어. 나는 희희낙락하며 생각을 파헤쳤다. 핀레이의 기억 속에 있을 탈출의 실마리를 얻기 위해.

그러자.

‘이제는 탄탈로스에서 탈출할 방법이 남아있지 않다며, 내려간다면 군국이 꺼내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시조의 곁에 머물다 보면, 결국 기회가 올 테니까!’

아.

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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