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6 거슬리게 하면
꼬챙이가 팔찌의 이음매를 비집고 들어갔다. 단조롭게 연금된 팔찌의 틈이 벌어지며, 한가운데 매달려있던 회색 구슬이 톡 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두 손가락으로 집어서 유심히 살폈다.
확실하다. 구조를 보건대 의심할 여지 없는 의복 패킷이었다. 다만, 일반적인 옷과는 조금 다르게, 이것은 생체 단말 없이 스스로 작동하는 종류였을 뿐.
연금술의 정수, 압축 패킷 중에는 생체 단말에 넣지 않아도 작동하는 종류가 몇 개 있다.
고액의 어음이나 기밀문서를 담은 파피루스 패킷.
창이나 칼, 방패 등 단순한 구조의 무기를 만들어내는 웨폰 패킷 등등.
사용자의 신체 정보와는 상관없는 간단한 구조를 가진 물건들은 이렇게 마력을 불어넣는 장치와 함께 판매되고는 한다.
그중에서도 이것은 낙하산 패킷. 천천히 떨어지기 위해 쓰는 물건이다. 이곳이 무저갱이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낙하산 패킷을 끼고 떨어진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뭔가 걸린다는 말이지. 흠.”
꼬챙이 끝에 마력을 부여한 뒤 낙하산 패킷에 난 홈을 긁었다. 패킷의 일부가 벌어지며 그 안쪽에 있는 빈공간이 드러났다. 안쪽에 빛을 비추어보던 나는, 낙하산 패킷을 거꾸로 뒤집어 흔들었다.
투둑. 작고 흩어지는 소리. 나는 패킷을 잠시 내려놓고 그 안에서 떨어진 것들을 바라보았다.
“흙?”
몇 톨도 안 될, 알갱이를 하나하나 셀 수 있을 법한 양의 흙.
지상이라면 한 삽에 이의 몇만 배는 될 흙더미를 퍼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지모신의 저주를 받은 이곳에서는, 이 몇 톨의 흙더미도 낯설다. 사방이 오직 콘크리트로만 지어진 구조물에서, 평범한 흙은 찾기 어려운 것이었으니.
“그런 거였나?”
나는 흙을 두 손가락으로 비비적거렸다. 더 잘게 부스러진 흙이 책상 위로 흩날렸다.
핀레이라는 불청객이 눌러앉은 현재, 상황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지 않았다.
나는 핀레이에게 충분히 겁을 주었고, 내 의도에 따라 핀레이는 나와 아지, 회귀자를 두려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기서 그가 취한 태도는 내 예상과는 사뭇 달랐다.
“아, 핀레이 씨. 찾았다. 잠깐 할 일이 있으니까 와 봐요.”
“그럴 시간 없다.”
“네?”
“곧 시조께서 기침하실 터, 나는 시조께서 바깥 공기를 마시기 전 가장 먼저 그분을 맞이해야 한다. 잠에서 깨어난 혈주의 옆을 지키고 있는 건 의무이자 영광이니.”
지금 나랑 장난하나? 아니, 아침부터 그렇게 죽치고 있겠다고? 지금 일하기 싫어서 핑계를 대는 건가?
그러나 생각을 읽어 본 결과, 핀레이의 그 말은 핑계가 아니었다. 시조를 보필하는 행위의 우선순위가 너무 높아 다른 일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것이었다.
거기다.
‘나는 지금 시조의 직속 시종이다. 그분을 보필하는 것도 바쁜데 다른 일을 할 수는 없다. 시조의 시종이 잡일을 한다고 해보아라. 시조의 체면이 얼마나 떨어질 것인가? 내가 죽더라도 그럴 수 없다.’
누가 보면 일하기 싫어서 농땡이를 피우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놀랍게도 이건 그의 ‘진심’이었다. 그러니까 핀레이는 잡일하는 행위 자체가 그의, 그리고 시조의 위엄을 깎아먹는 행위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허허, 어이가 없어서. 나도 힘이 있었다면 일단 팔을 벤 다음 윽박질렀을 텐데. 당장 나에게 그럴 힘이 없다는 게 한이다.
“아니, 그러면 일은 누가 해요? 요리는? 청소는?”
“그에 대해서는 그쪽이 알아서 해야지. 시조의 위대한 권능으로 생을 부여받은 우리 밤의 귀족은 용변도 보지 않고 땅을 더럽히지도 않으며 음식도, 빛도 필요치 않아. 오직 피만 요구할 뿐.”
“지가 똥 안 싸는 거랑 일 안 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그렇게 따질 거면 피도 마시지 말아야지. 그 인간을 네가 낳아서 네가 키운 거 아니잖아요.”
“대신 그에 맞는 대가를 지불하지. 우리에게는 그만한 권력과 재력이 있으니까.”
재력이든 권력이든 지금 갖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 뭐가 이리 당당해? 내가 어안이 벙벙해져 있을 때, 핀레이는 잘난 척 한마디 덧붙였다.
“알겠나, 천민?”
“당신. 신분제를 타파한 군국의 펀치 한 대 맞아보실래요?”
내가 주먹을 말아쥐고 위협하자 핀레이가 움찔 물러났다.
“크, 크윽. 나는 시조의 시종. 외압에 굴할 수 없다!”
“하는 행동은 기득권이면서 나오는 말은 자유투사야. 뭐야, 이거? 표리부동의 실현자가 여기 있었네. 장난해? 표리부동하지 않게 내장과 껍질을 아예 분리해줄까?”
아지에게 부탁하면 아주 뼈와 살과 피를 잘 분리해줄 것이다. 생체 원심분리기, 멍멍이 데스 롤을 한번 맛보면 정신을 차릴 텐데. 내가 한창 으름장을 놓고 있을 때였다.
그때, 지하 무기고의 문이 열리고 관 위에 올라탄 흡혈귀가 등장했다. 그 순간 핀레이는 구세주라도 본 것처럼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시조시여! 기침하셨나이까!”
“일어났으니, 그쯤 해두거라.”
핀레이는 즉각 한쪽 무릎을 꿇고 흡혈귀를 맞이했다. 흡혈귀가 느긋하게 손짓하자 핀레이는 일어서서 흡혈귀의 관 앞에 바람잡이처럼 서고는 나를 향해 외치기 시작했다.
“비켜라! 시조의 행차시다!”
“아니, 이게 뭔.”
커다란 관이 다가오니 나도 길을 비킬 수밖에 없었다. 시조의 시중을 들게 되어 의기양양한 핀레이와, 관 위에서 옅게 미소를 지으며 앉은 흡혈귀가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흡혈귀는 마침 내 곁을 지나가며 말을 흘렸다.
“후후. 이해하거라. 나를 보필하게 되어 어지간히 들뜬 모양이다.”
정작, 그렇게 말하는 흡혈귀는 곤란해하는 나를 보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기가 차서 입도 안 다물어진다. 내가 멍하니 있는 동안 핀레이가 감격에 겨운 채로 크게 외쳤다.
“시조시여!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4층이다. 너에게 내가 자주 향하는 장소를 일러주마.”
“받들겠습니다!”
그렇게, 혈주와 그 권속은 천천히, 그리고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 이후로도 핀레이는 길가에 난 돌멩이처럼 툭툭 걸리곤 했다.
“아, 티르칸쟈카 교육생.”
“어허! 시조의 성함에 어찌 교육생이라는, 내려다보는 듯한 호칭을 붙인다는 말인가!”
“하아?”
“되었다, 핀레이. 나는 이 시대의 지식이 부족한 몸. 그의 지식을 필요로 하니, 교육생이라는 표현도 틀리지 않음이라.”
핀레이는 즉각 말을 멈추고는 흡혈귀 앞에 부복했다.
“송구합니다! 시조의 뜻이 너무 깊어서 저의 얕은 피로는 차마 짚지 못했습니다!”
“되었다. 내 잠시 교관과 이야기를 하겠다.”
“시조의 뜻을 받듭니다!”
핀레이가 부복한 채 물러나자, 흡혈귀는 우아하게 양산을 걸치며 말했다.
“그래. 무슨 말을 하려고?”
“무슨 말이긴. 티르칸쟈카 교육생이 저를 불렀다면서요?”
“아아. 그러했지.”
흡혈귀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그 순간, 핀레이는 부복한 자세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단 한순간에 핀레이의 의식을 빼앗은 흡혈귀는 찬찬히 다가왔다.
“핀레이가 보면 시끄러울 테니, 잠깐 재웠다. 그는 자기가 잠든 줄도 모를 것이다.”
시조의 혈조술은 다른 흡혈귀의 피조차 완벽하게 제어하는 수준. 의식을 한순간 끊어놓고 다시 잇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게 핀레이를 침묵시켜놓은 흡혈귀는 잠시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을 갈랐다. 그러고는 은근히 몸을 내 쪽으로 들이밀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요즘 좀 드물었구나. 자, 어서.”
“아니. 이 와중에 자기 좋을 대로만….”
“이 꼴을 그에게 보일 수는 없잖느냐.”
뭔가, 뭔가 마음에는 안 드는데. 딱히 거절할 명분은 없다. 나는 떨떠름한 감정을 느끼며 손가락을 심장에 가져다 댔다.
*****
“교관! 시조께서, 오늘의 담화는 어디서 이루어지냐고 여쭈신다!”
“엥? 오늘은 안 하려고 했는데.”
“어허! 교관을 자처하는 자가 게으름을 피우다니! 나라의 일꾼이면 그 의무를 다하라!”
“….”
“크, 흠! 나는 시조를 모시러 가겠다!”
내 따가운 시선을 뒤로 한 채 핀레이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건 비단 나의 일만은 아니었다. 마침 회귀자가 걸어가다 핀레이를 보고는 그를 불러세웠다.
“거기 흡혈귀. 동작 그만. 티르칸쟈카는?”
“어허! 시조의 성함을 어디 함부로 부르느냐? 너 같은 애송이는 입지로 보나, 연륜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시조의 발끝만큼도 못 따라간다! 그렇다면 알아서 극존칭을 취해야지!”
걸어가다가 갑자기 꾸중을 들은 회귀자는 잠깐 당황했는지 입술을 뻐끔거리다, 곧 입매를 차갑게 굳히며 대꾸했다.
“…아니. 그래. 그러면 너한테 물어보지. 저번에 이은 질문 말인데. 너, 무저갱은 어떻게.”
“어허! 건방진! 이토록 돌려 말해도 모르는 것이냐? 그런 사소한 의문 따위는 알아서 해결해! 나는 시조를 모시느라 바쁘다!”
핀레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몸을 돌려서 걸어갔다. 회귀자는 그 뒷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손을 위로 들어 천앵을 잡았다.
“…썰어버릴 거야. 말리지 마.”
“이왕 썰 거면 깍뚝썰기와 어슷썰기로 부탁드립니다. 가장 큰 조각이 배수구 거름망보다 작게. 안 그러면 짬통에 버리기 힘드니까요.”
물론, 흡혈귀의 비호를 받는 핀레이를 공격할 수는 없었다. 회귀자는 저번 흡혈귀에게 한마디 들은 뒤 거스르는 짓을 삼가고 있었고, 나는 핀레이보다도 약했으니.
결국 나와 회귀자는 멀어지는 핀레이를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다.
*****
“맛있게 먹어라. 흘리지 말고.”
“멍!”
아지가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밥상 앞에서는 한없이 착해지는 아지가 갑자기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평소였다면 공격적인 태도에 겁을 집어먹었겠지만, 이제는 익숙해졌다. 아지가 갑자기 심기가 불편해지는 건 핀레이가 찾아올 때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험! 어험!”
마침 건너편에서 생각이 들려오기도 했고.
비릿한 혈향이 먼저 풍겨왔다. 곧이어 핀레이가 근엄한 얼굴로 들어오더니, 주위를 돌아보며 혀를 찼다.
“쯧. 이곳에는 피를 제공할 천민들이 부족하군. 시조께 피를 바쳐야 하는데 말이야. 어디, 피를 바칠 사람 없나.”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저 미친놈이, 흡혈귀가 먹을 간식을 마련하고자 인간, 그나마 편한 분위기를 가진 나를 찾아온 것이다.
자기가 요구하면 당연히 주겠지, 하는 생각이 너무 괘씸하다. 혼쭐을 내줄까.
으르렁거리는 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 귀에 속삭였다.
“아지야. 저거 깨물래?”
“으르르르.”
“자, 잠깐! 멈춰라! 나는, 정당한 거래를 하러 왔다!”
위기를 느낀 핀레이가 다급히 손을 내뻗었다. 나는 일단 들어보자는 마음으로 당장 뛰쳐나가려는 아지를 제지했다.
“기다려, 아지야. 저딴 흡혈귀도 비석에 남길 말은 필요하니까.”
“거래를 하러 왔다니까! 이건 시조를 위한 일이다!”
“당신 유언이 될 지도 모르니 고심해서 말해봐요. 또 뭔데요?”
“피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너희 천민들이 시조께 피를 상납하기를 요구한다.”
“맨입으로?”
“당연히 아니지.”
핀레이는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거만하게 말했다.
“천민과 밤의 귀족이 같이 사는 안개 공국에서는, 천민이 바친 피에 대한 대가를 치른다. 보통 피의 무게의 열 배 정도 되는 식량이지.”
“아지야. 저 몸뚱아리를 요리하면 고기가 얼마나 나올까 궁금하지 않니?”
“자, 잠깐! 하지만! 지금은 피가 귀한 관계로! 피의 무게의 열 배 정도 되는 은화를 지불하겠다!”
피 무게의 열 배? 그 정도 은화면 고민해볼 만하지. 나는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었다.
일이 잘 안 되면 더 많은 돈을 준비하라. 그게 바로 규모의 경제 아니겠어?
“안녕하세요, 고객님. 피 은행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대금은 어떻게 치르실 겁니까?”
“어음을 써줄 테니, 밖에 나가면 안개 공국에서 받아가도록.”
“잘 못 들었습니다?”
“귀가 막혔나? 어음을 써준다고 했다.”
뭔 소리야. 어음? 실물로 줘도 모자랄 판에?
아니, 그보다.
“어음 하나 있는 거로 인간이 어떻게 흡혈귀의 나라를 찾아가고, 거기 은행에 방문해서 돈을 받아가요?”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귀족이 천민의 일을 왜 신경 써야 한다는 말이냐. 돈을 받아내는 건 네 일이다.”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는 흡혈귀. 그러니까, 그냥 공수표를 던지고 싶다는 말이지?
잠시 그 말을 곱씹은 나는 아지에게 명령했다.
“아지야. 저거 밖까지 쫓아내고 와. 그래도 죽이지는 마라.”
“왈왈!”
“으아아악! 개의 왕! 멈추어라! 나는 시조의, 컥!”
부리나케 도망가는 핀레이를, 아지는 맹렬하게 짖으며 건물 바깥까지 쫓아냈다. 뿌듯한 표정으로 돌아온 아지를 위해서 고기 한 점을 더 구워주었다.
그러나 이걸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