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7 태워버리겠어
아지에게 몇 번 혼쭐이 났음에도 핀레이는 계속 거슬렸다.
무언가 말을 하면 ‘어허’ ‘으흠’ 이런 소리로 맥을 끊었으며, 회귀자나 아지가 주먹을 들려고 하면 냅다 도망가거나 흡혈귀를 운운하며 방패로 내세웠다.
짜증나지만 그렇다고 죽을 정도로 잘못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혼쭐을 내주자니 뒤에 있을 흡혈귀가 조금 걸리는. 이 도로 뱉지도 꿀꺽 삼키지도 못하는 애매한 감각이 나와 회귀자를 괴롭혔다.
고난은 유대감을 형성한다. 고작 핀레이 하나 때문에, 평생 서로를 찾을 일 없을 것만 같은 나와 회귀자가 한곳에 모이게 되었다.
“칫, 짜증 나는 게 두 개로 늘었어. 이대로 가다간 스트레스로 죽어버릴 거야. 어떻게든 하나는 처리해야겠어.”
“두 개요? 하나는 핀레이인 건 알겠는데, 그럼 다른 하나는 누군데요?”
“너.”
“무슨 그딴 망발을!”
내가 격분하여 소리치자 회귀자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둘이 비슷하잖아. 시도 때도 없이 끼어드는 거랑, 티르칸쟈카의 비호를 받고 멋대로 구는 거. 제멋대로 행동하면서 아슬아슬하게 선 타는 것도 완전 빼박 닮았던데?”
“내가 어지간한 모욕은 다 참고 넘어가겠는데 그건 절대 인정 못 해요. 아니, 안 해요.”
한없이 자비로운 나지만 인내심에도 끝이 있다. 나를 핀레이와 비교하는 건 나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겠다. 차근차근 회귀자의 말에 반박했다.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세요! 시도 때도 없이 끼어드는 거? 셰이 교육생의 취미잖아요! 티르칸쟈카 교육생의 비호를 받는 거? 시조와 사승관계를 맺은 게 누군데! 제멋대로 행동? 이 무저갱에서 가장 제멋대로 구는 사람을 지목하라면 당신은 가장 먼저 거울부터 찾아야 할 걸요!”
“하아?”
“완전 빼박이네! 이 참에 이름을 바꾸는 게 어때요? 핀레이가 아니라 핀셰이로! 딱이네! 둘이 보면 아주 부부인 줄 알겠어!”
“그딴 거랑 부부는 또 무슨 개소리야!!”
내가 무저갱에 내려온 이후 가장 기분 나빠하던 회귀자가 문득 자기 설정을 떠올리고는 말했다.
“다시금 말하는데, 나는 남자라고!”
아, 그런 설정이었지. 나도 잠시 까먹긴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설명할 방법이 있다.
“네.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죠.”
“야!! 그건!”
“생각해보니 웃겨. 남자가 좋다고 외친 건 자기면서, 정작 언급하면 화내고. 왜 그래요? 자기가 말해놓고 자기 취향이 부끄러워요?”
정론으로 무장한 나의 앞에서 회귀자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고 씩씩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이기지도 못할 싸움은 걸지 마라. 말로 나를 이겨본 적도 없으면서 왜 자꾸 까불어.
나는 귀를 후비며 말했다.
“그, 미안한데 혹시라도 저는 좋아하지 말아주세요. 셰이 교육생이라면 그게 진실이니 상관없을지도 모르는데, 저는 그런 오해받는 거 진짜 질색이거든요. 저는 어디까지나 평범한 취향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니까요.”
“걱정하지 마! 하늘이 무너져도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날카롭게 쏘아붙인 회귀자는 다시 팔짱을 끼고는 중얼거렸다.
“어쨌건, 마음 같아서는 너를 없애고 싶지만, 그것보다는 핀레이를 어떻게 처리하는 편이 쉽겠지. 최소한 그게 꺼드럭대며 다니는 건 막아야 해.”
“듣는 사람 앞에서 없애고 싶다고 말하는 건 좀 그렇지 않아요?”
“그러라고 말한 거야.”
얄밉게 대답한 회귀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전쟁을 벌이겠답시고 무저갱에 내려왔어. 아마 주전파 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주전파겠지. 미래에 대전쟁이 일어났다는 걸 아는 이상, 티르칸쟈카를 주전파 흡혈귀와 가까이 붙여놓아서는 안 돼. 설득이든 협박이든 떨쳐내야 해.’
뭐야, 회귀자. 말로는 처리하기 쉬워서라고 해놓고, 의외로 깊은 생각이 있었잖아?
그에 비해, 내가 핀레이를 치우고 싶었던 이유는 단순히 ‘마음에 안 들어서’. 조금 비교가 된다.
흠. 평범하고 선량한 내 인성이 회귀자보다 안 좋을 리는 없고. 무저갱에 너무 오래 있다 보니 나도 좀 타락했나? 앞으로는 조심해야겠다.
“그래도, 아시죠? 핀레이가 저래 보여도 예일링이에요. 시조의 피를 이어받은 군주 엘더와 그들의 권속인 정예 아인, 바로 그 다음 서열의 흡혈귀. 예일링이 엄청 드문 건 아니지만 적혈공 라인이면 이쪽에서도 알아주잖아요.”
“그래봤자 잔챙이야. 너도, 나도 저따위 녀석은 쉽게 처리할 수 있잖아.”
너만 그렇지, 나는 아닌데? 나는 저거 처리하려면 성수류탄 정도는 필요하다고.
대답이 없자 회귀자는 나를 의아하게 보다, 내 침묵을 당연해서 대답할 필요도 없는 긍정이라 생각했는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거기다, 저건 전쟁을 바라고 온 녀석이잖아. 티르칸쟈카와 가까이 있어서 좋을 것 없….”
우뚝.
회귀자는 말을 하다 말고는 무언가를 떠올렸다.
‘기다려 봐. 이 녀석은 핀레이를 바깥에 내보내자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어. 오히려 이곳에 가두고자 했지. 이유가 없지 않을 거야.’
응? 이유야 있지. 사실 나에게는 핀레이를 밖에 내보낼 방법이 없으니까.
‘그러고 보면 군국의 행보는 늘 전쟁을 부추기고 끼어드는 쪽이었지. 그러네. 시조를 가둔 것도 계획의 일부겠구나.’
아니,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걸리는 게 있었다.
분명 에이비 대위가 조종하는 골렘이 말했지. ‘아직’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반대로 생각하면, ‘언젠가는’ 전쟁이 일어나야 한다는 뜻. 무저갱 속에서 여유작작 지내는 흡혈귀도 군국의 전쟁 계획의 일부에 놓여있다는 뜻이다.
뭘 계획하고 있는 거냐, 군국. 감당할 수는 있냐? 아무래도 회귀자의 생각에 의하면 미래에는 엄청난 대전이 일어난 모양인데 말이야.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곧 관심을 껐다. 에이, 뭐. 군국이 전쟁 준비하는 거 바보가 아니면 다 알고 있는데 얼마나 중요하겠어. 올해 겨울엔 눈이 온다고 말하는 거랑 똑같지.
지금 그보다 중요한 건.
“…나는 핀레이를 티르칸쟈카로부터 떨어뜨릴 생각이야. 나를 방해하지 않는 게 좋을걸.”
‘전쟁을 멈추어야 해. 그놈들이 전쟁을 틈타 날뛰는 일을 막기 위해서라도. 만일, 이 남자가 내 앞길을 막는다면. 그땐.’
나를 향해 살기를 폴폴 풍기는 이 회귀자지.
자, 어쩔까. 으음.
그래, 여기선 이렇게 하자.
“방해할 생각이라뇨? 도우면 도왔지, 제가 셰이 교육생을 왜 방해해요?”
“따지고 보면 핀레이가 무저갱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 것도 다 네가 설득해서잖아. 네가 그래놓고, 지금 나에게 협력한다고? 말이 안 되지.”
회귀자는 내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당장이라도 나를 베어낼 것 같은 눈초리로 말했다.
“너, 나를 방해할 생각이지?”
나쁘지는 않은 추리이나, 틀렸다.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나는 그저 내가 하찮은 노역자란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려줄 수는 없으니, 나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하하. 그렇게 받아들이셨구나. 순진하셔라.”
“뭐?”
회귀자는 여전히 치뜬 눈으로 나를 보다가 변명이라도 해보라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다르게 생각해보세요. 자, 저는 핀레이를 여기 붙잡아두기 위해 그런 말을 했어요. 이곳에 남아, 티르칸쟈카 교육생과 가까이 있으라고.”
“알고 있어. 나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그때 제가 했던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시는 거예요? 그렇게 저에 대한 신뢰가 투철하셨어요?”
회귀자의 눈동자가 커진다. 크게 뜬 눈에는 아까만큼의 날이 서 있지 않다. 대신 찾아온 건 의구심.
‘…다른 속내가 있었다고? 하지만 저 남자의 입장에서, 핀레이를 티르칸쟈카와 함께 둬서 얻을 다른 이득이 있나?’
“제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마시고, 제가 한 행동의 결과만 생각하세요. 그렇다면 우리가 적대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아실 텐데요.”
나는 직설적으로 말하는 대신 떡밥을 뿌렸다. 오솔길에 뿌린 빵조각처럼, 상대가 그 단서를 하나하나 주워가며 흐름을 따라오기를 기다린다.
‘잠깐.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일 수도 있어. 만일 저 남자의 목표가 핀레이와 티르칸쟈카를 붙여두는 게 아니라… 핀레이를 여기 머물게 하는 것, 그 자체였다면?’
그렇게, 비록 내가 건넨 단서를 따라왔을 뿐이지만, 어쨌든 ‘노력’해서 얻어낸 정답은 의심하지 못한다.
왜냐면, 자신의 노력에는 그만한 보상이 따라와야 하니까. 자기가 애써 맞춘 퍼즐은 아름다워야 하며, 머리를 쥐어 싸매며 생각해서 도출한 답은 완벽해야 한다.
그것이 사람의 심리. 회귀자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이곳의 정보를 새어나가지 않게 하려고 핀레이를 가둔 거야? 핀레이가 지상으로 나가 이곳저곳에 퍼뜨리고 다니면, 티르칸쟈카를 이용하려는 세력이 움직일지도 모르니까!’
회귀자는 제멋대로 결론을 내리고 짜릿해 했다. 제 딴에는 숨기려는 듯하지만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떠오른다.
실상을 안다면 어떨까? 나는 단순히 그를 빼낼 능력이 없던 건데. 새삼 궁금해지네.
뭐, 어쨌건.
“군국의 모두가 전쟁을 원하는 건 아니니까요. 우리는 동지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일단 회귀자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는 데에는 성공했다. 회귀자는 여전히 미심쩍어하면서도 나에게 의견을 구할 정도로 마음이 풀렸다.
“계획은 있어?”
“일단 설득이죠.”
“설득? 고작?”
‘납치나 협박, 혹은 이간질이 아니라?’
생각이 바뀌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얘보다는 인성이 좋은 거 같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지만, 일단 가장 일반적인 수단을 취해야죠.”
“좋아. 설득은 내게 맡겨.”
“네?”
“나도 설득 정도는 할 줄 알거든. 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내가 제자니까, 그런 말 하기는 훨씬 편하겠지.”
흠. 별로 믿음직스럽지는 않지만, 본인의 의지가 그렇게 강하니 일단 지켜볼까.
나는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팔 자르면 안 돼요? 흡혈귀라고 해도 기분 나쁠 거니까.”
“누굴 정신병자로 아는 거야?!”
“어떻게 알았지?”
***
티르칸쟈카를 설득하기로 결심한 뒤.
심호흡을 끝낸 회귀자는 혼자 성큼성큼 흡혈귀에게 다가갔다. 나는 머지 않은 모퉁이 뒤에 숨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티르칸쟈카. 잠깐만, 너에게 말할 게 있어.”
회귀자의 설득이라, 참 진귀한 광경이다. 역경이 있으면 말보다는 힘이나 돈으로 자주 해결했을 거 같은 인상이라 믿음은 안 가지만, 상대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회귀자. 내가 모르는 능력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어디 말은 얼마나 잘하나 볼까.
“핀레이와 만나지 마!”
…?
뭐야, 이거. 단어 선정이 왜 그래? 새아빠가 싫은 딸이야? 재혼하지 말라고 애걸하는 거야?
“…? 느닷없구나. 어이하여?”
어이없어서 새어나오는 의문.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에 비해 회귀자의 대꾸는.
“아무튼! 그 녀석이 전쟁을 벌이자고 했다며! 전쟁은 나빠! 위험하다고!”
야. 회귀자. 어휘력 좀 발휘해 봐. 너 외국인이니? 아니면 평소에 사람이랑 말 잘 안 섞고 살았나?
아니, 그런 것치고 나랑은 잘만 이야기하던데? 도저히 안 되겠다. 말은 그만 듣고 생각을 미리 읽어보자.
‘내가 회귀하기 전, 너는 만신창이가 된 채로 전쟁에 참여해. 아무도 이득을 보지 않는 혈전이 벌어진단 말이야. 그 끝을 기다리고 있는 건 하나, 모든 것의 파멸이야. 나는 그 미래를 막으려고 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네가 전쟁과 멀리 떨어져 있는 편이 나아.’
생각은 그나마 정상인데 말은 왜 저래? 도대체 이 회귀자는 무엇이 문제일까?
아아. 조금 알겠다.
회귀 사실을 알리지 않으려다 보니 펼치고자 하는 논리에 구멍이 뚫렸고, 그걸 억지로 이으려다가 저런 유치찬란한 말로 바뀐 것이다.
이젠 슬슬 안쓰러울 정도다. 저걸 어쩐다.
“너라면 알 거라고 생각했다만. 핀레이는 나의 한참 낮은 권속이다. 나의 뜻에 반기조차 들 수 없지.”
“알아! 하지만!”
“그리고 나는 한번 내린 결정을 번복하지 않는다. 어깨 무거운 이는 말조차 둔중해야 하니. 내 당분간 이 뜻을 바꿀 일은 없겠구나. 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알겠으니 이만 말을 줄이거라.”
회귀자는 고개만 몇 번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서 내가 숨어있는 모퉁이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서는 어물쩍거리며 나에게 보고했다.
“그렇대.”
“그, 제가 무리한 요구를 해서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설득 같은 거 지양하고 최대한 힘이나 돈으로 해결하세요.”
‘응? 뭔가 기분이 나쁜데. 비꼬는 건가?’
이걸 고민하는 시점에서 너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얼마나 처참한지 알겠다. 이 회귀자가 구해야 할 세상이 불쌍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나섰다.
“거기서 기다리세요. 심리전의 달인이자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마술사, 그리고 티르칸쟈카 교육생과 으슥한 곳에서 은밀한 관계를 맺는 밀회자. 제자 따위가 저와 범접할 수는 없죠. 제가 처리하고 올게요.”
“그래. 네가 처리해 보. 뭐? 밀회자?”
“으랏챠. 얼른 갔다가 올게요.”
회귀자가 뭐라 하기 전에 냅다 모퉁이에서 튀어나온 나는, 냉큼 손을 들며 흡혈귀에게로 다가갔다.
“티르칸쟈카 교육생. 우연이네요.”
“…둘이 도대체 무슨 작당을 하는 것이냐?”
“하하. 작당이라니요. 아, 마사지 한 번 받으실래요? 오늘 손가락 컨디션 괜찮은데.”
나의 제안을 받았음에도 흡혈귀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속이 너무 빤히 보이지 않느냐. 평소에는 내키지 않는다는 태도를 팍팍 내던 녀석이 왜 먼저 손가락을 꼿꼿이 들고 찾아온다는 말이냐. 거기다 저기에서 셰이가 계속 지켜보고 있는데 어찌.”
웬일로 의구심을 품네? 이거 놀라운데. 내가 전기충격하는 걸 봤다고 자기 심장까지 냉큼 갈라서 드러내던 사람이? 위기감이라는 게 생겼나?
“그래서, 싫어요?”
“…그리 말하지는 않았다. 조금 나중에, 그러니까,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취소. 이미 죽어서 그런가, 이 시체도 위기감이라곤 하나도 없군.
어쨌건.
“셰이 교육생을 대신해서 티르칸쟈카 교육생에게 경고하러 왔어요.”
“너도?”
“지겨우시겠지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에요. 핀레이라는 흡혈귀, 뭔가 뒤가 구려요. 조심하시는 편이 좋겠어요.”
진지하게 한 소리였지만 흡혈귀는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내가 핀레이를 너무 미움을 사게 만든 것 같구나. 알겠다. 앞으로는 자중하도록 하마.”
“자중이라면?”
“내 시중을 든답시고 너희들을 귀찮게 하지 않을 거란 뜻이다. 그는 내 명에 복종하니, 한마디만 전하면 되겠지.”
나랑 회귀자가 찾아온 이유가 ‘핀레이가 귀찮아서’라고 생각한 흡혈귀는 그런 일을 없애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어?
괜찮은데?
아니, 솔직히 솔깃하잖아. 나는 핀레이가 짜증 났을 뿐이니까.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래 주신다면야.”
“앗, 잠깐. 몇 시에 찾아가면 되겠느냐?”
“언제는 시간 보고 찾아왔어요? 내킬 때 오세요.”
“그래.”
후우. 이게 윈윈이지. 나는 희희낙락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러자 벽에 기대고 있던 회귀자가 싸늘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짓거리야.”
“네? 인간승리요.”
“인간승리는 무슨. 뭐가 해결되기는커녕 티르칸쟈카와 밀회 시간만 잡았잖아!”
“시간 안 잡았어요. 저쪽이 알아서 오겠다고 했지.”
“그딴 거! 전혀! 알고 싶지 않거든!”
“지가 물어봐놓고?”
“치잇, 어쨌든! 이왕 협력하기로 했으면 제대로 하란 말이야!”
다시 떠밀렸다. 나는 떨떠름하게 다시 흡혈귀 앞으로 내몰렸다. 어색하게 눈이 마주친다.
흡혈귀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리 싫어하는지 도저히 이유를 모르겠구나. 무엇이 그리 이상하더냐? 내 너희와도 인연을 맺었거늘. 나의 권속인 핀레이를 곁에 두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느냐?”
“어, 만난 시간의 차이 아닐까요? 온 지 일주일도 안 된 핀레이가 티르칸쟈카 교육생만 믿고 너무 나대니까 불편한 거죠.”
“무슨 상관이더냐. 내 너희와 만난 것도 채 한 달이 되지 않거늘.”
흡혈귀에게 있어서 한 달이나 일주일이나 눈 깜짝할 시간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나 핀레이나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반박할 말이 없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까 그렇네요. 한 달이나 일주일이나 티르칸쟈카 교육생의 생애에 비하면 하룻밤 반짝이는 반딧불이와 다를 바가 없으니까요. 평범한 일생을 살아가는 인간도 한 달은 짧다 하는데 12세기 소녀에겐 뭐.”
“……? 12세기, 소녀?”
“아차. 저는 이만 갈게요!”
저쪽에서는 여전히 회귀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모퉁이는 그곳에만 있는 게 아니다. 나는 반대쪽 모퉁이를 향해 달음박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