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1 건전한 생활
그러지 않아도 조용한 편인 교실이었지만, 내 발언으로 소리가 살해당한 듯 고요가 찾아왔다. 회귀자가 입을 쩍 벌리고 나를 쳐다보았고, 아지는 여전히 우울한 눈으로 꼭두저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는 떠받드는 태도를 유지했다.
박물관에서 찾아야 할 법한 유치한 옛날 멘트였지만 어지간한 국보급 유물보다도 나이가 많은 고대인에게는 잘 통했다. 12세기 소녀 흡혈귀의 경우에는, 이게 연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대단히 흡족해 하는 상황이었다.
‘제법 비위 맞추는 대사를 읊을 줄 아는구나. 어디, 장난이라는 건 알지만 조금만 더 들어볼까.’
“…허락하마.”
“감사합니다, 레이디.”
내민 손등 위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키스했다. 분위기에 취한 흡혈귀는 그마저도 불쾌하지 않게 받아들였다.
빈 의자를 낮게 들고 흡혈귀의 맞은편에 내려놓은 뒤, 흡혈귀를 향해 허리를 숙여 한 번 더 동의를 구했다. 흡혈귀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반 박자 늦게 의자에 마주 앉았다.
‘흐으음. 제법 예법을 취할 줄 아는구나.’
몰입도가 굉장했다. 뮤지컬이나 연극을 보고 눈물을 찍어내는 사람처럼, 이것이 연기임을 분명 의식하고 있음에도 감정이 철철 흘러넘쳤다.
어떻게 이런 감수성을 가지고 자기는 괜찮다 말할 수 있지? 만일 심장이 제대로 뛰는 몸이었으면 어찌 되었을지 상상도 안 간다.
어쨌건, 나는 연기를 이어갔다.
“실례지만 어느 집안의 영애분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없다.”
내 질문에 흡혈귀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답은 짧았지만, 흡혈귀의 생각은 그만큼 짧지는 않았다.
‘한창 세상을 나다닐 때, 나의 외모에 혹해 다가온 이들이 많았지. 내가 귀족인 줄 알던 그들에게 이리 대답해주면 반응은 셋이었다. 태도를 바꾸어 경멸하거나, 나를 종이라도 된 것처럼 치부하거나, 아니면 자기는 특별한 사람인 척, 위선을 떨며 괜찮다고 말하거나.’
도리어 나를 시험하는 의도를 담고서 흡혈귀는 대답을 재촉하듯 손가락으로 탁자를 건드렸다.
‘어디, 비록 이 상황 자체가 연기라지만. 너는 어떻게 대답하나 볼까.’
생각을 잘못했다.
12세기 소녀의 감수성은 나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이 상황 자체가 연기라는 자각을 왜 이리 늦게 해? 배역에 너무 몰입한 거 아니야?
뭐, 배역에 집중한다고 나쁠 건 없으니까. 나도 그에 맞게 대해주자.
“역시, 하늘에서 내려주신 분이셨군요.”
“음?”
“정녕 요정이신 겁니까? 하긴, 그러지 않으면 세상 바깥에서 온 듯한 미(美)가 아무런 맥락도, 소문도 없이 갑작스럽게 나타날 리 없지요. 저는 운이 좋군요. 하늘이 땅에게 선물한 아름다운 요정을 가장 먼저 발견할 수 있었으니.”
‘…제법….’
듣는 사람이 낯부끄러울 정도의 어마어마한 호들갑.
하지만 상대는 과거의 감성을 그대로 갖고 온 흡혈귀다. 이토록 손발이 오그라드는 대사도 그때 감성으로는 평범하게 주고받는 말이었으니.
“너의 기대를 배반하는 것 같아 안타깝지만, 그런 뜻이 아니다. 내세울 가문이 없다는 뜻이었지. 나의 아버님은 이름 없는 가문의 방계였다. 쫓겨나듯 가문에서 뛰쳐나와 따로 살림을 꾸리셨으니. 즉, 나에게 가문이랄 것도 없다는 말뜻이다.”
“아아. 요정이 아니라 인간이셨다니. 한편으로는 안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절망하는 제가 있습니다. 당신처럼 아름다우신 분에게는, 이미 사자만큼 용맹하며 공작처럼 고귀한 기사가 그 곁을 지키고 있겠죠. 혹여나 보물을 노리는 승냥이가 나타날까, 눈에 불을 켠 채로. 이 몸에 걸친 게 전부인 저에게는 일 초의 기회도 없을 게 분명합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안타깝게 한탄하자, 흡혈귀는 작게 웃으며 대꾸했다.
“내 말이 없다 하여 멋대로 짚어대는구나. 내세울 가문이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내세울 가문이 없다. 지금껏 그 누구와도, 이름을 나눌만한 사이가 되지 않았다.
옛날 화법대로라면, 자기는 지금 누구와도 교제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리고 동서고금 ‘사귀는 사람 없다.’는 말의 의미는 수동적인 긍정을 의미했다.
“세상 모두가 눈이 삐었음이 분명하군요! 당신 같은 분을 홀로 두다니! 아니, 혹여나 저 말고 다른 남자들이 조약이라도 맺은 걸까요? 높은 절벽 위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꽃, 그것만은 건드리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기로?”
“후후. 실없는 소리를.”
기껍게 웃은 뒤, 흡혈귀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어쩌면, 나에게 있는 다른 결격사유를, 그들은 알아챈 것일지도 모르지.”
“그것을 눈이 삐었다고 합니다. 아름다움에는 죄가 없으며, 기품에는 구분이 없으니. 사람들은 마주 앉은 자리에서는 그 본질을 깨닫지 못한다 지껄이나, 그런 이들이 오히려 당장 보이지 않는 돈이나 권력, 혹은 핏줄을 따지는 세속적인 놈들입니다.”
그리 말하며 손을 뻗어 흡혈귀의 손을 잡았다. 흡혈귀는 이제 손을 피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살짝 힘이 들어가기까지 했다.
“저는 당신을 담는 제 눈을, 목소리를 담는 제 귀를, 지금 맞닿은 제 손을 믿습니다.”
“…내가 무엇인지 알고.”
“무엇이든, 두렵지 않습니다.”
짧고 확실하게 말한 뒤, 시선을 살짝 구석으로 흐리며 덧붙였다.
“제가 두려운 것은, 나약하고 못난 제가 당신을 만족시키지 못할까 봐, 당신의 마음을 다 채울 수 없을까 봐. 그것뿐입니다.”
“오만하구나. 강하고 잘난 이라면 쉬이 채울 것이라고 생각하였느냐? 나의 마음을 상인의 저울처럼 여긴 것이냐?”
가만히 듣고만 있던 흡혈귀가 느닷없이 언성을 높였다. 내가 흠칫 놀란 시늉을 하자, 짐짓 화난 표정을 지으며 나를 꾸짖었다.
“마음은 오직 시간으로만 채울 수 있다. 면면이 어떻든, 가진 돈이 적든,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저의 시간으로 당신을 채울 수 있도록, 곁에 있는 것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어디, 해 보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을 돌아 흡혈귀에게로 걸어가는 동안, 흡혈귀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나의 자리였던 것처럼 흡혈귀의 왼쪽 자리에 앉고, 왼손으로 왼손을 잡았다. 먼 손으로 잡았으니 필연적으로 몸이 가까워진다.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오른팔을 뻗어,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어깨에다가 팔을 감았다.
이대로 당기면 몸이 맞닿는다. 그럼에도 흡혈귀는 딱히 거부하지 않았다.
흠. 이대로 끌어당겨도 재미야 있겠지만, 내가 계산한 거랑은 좀 멀어지는데.
회귀자, 보고만 있을 거야?
“그, 그만해! 도대체 어디까지 하려는 거야!”
나이스 타이밍, 회귀자.
회귀자가 새빨개진 얼굴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흐름이 깨지고, 나는 피식 웃으면서 양손을 번쩍 들며 일어섰다.
연기가 끝났다. 잠시 달짝지근하게 녹아내렸던 공기가 한순간 차가워진다.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 나는 미소를 지으며 흡혈귀에게 다가갔다.
“티르칸쟈카 교육생.”
흡혈귀는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으, 음?”
“솔직히, 분위기에 조금 취했죠?”
내 질문에 아주 잠시 동안, 흡혈귀는 대단히 혼란스러워했다. 나의 태도가 너무 급격하게 바뀐 탓이다.
그러나 마음은 몸을 따라간다. 요동이 일어나는 것도 잠시. 심장이 뛰지 않는 흡혈귀는 금방 평정을 가장했고, 멈춘 혈류가 순식간에 몸을 식혔다.
흡혈귀는 평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제법 재미있는 여흥이라 장단을 맞춰줬을 뿐인데.”
“여흥이요?”
“그래. 여흥이지.”
여흥은 무슨. 12세기 전 정조 관념을 갖고 있는 흡혈귀면서 이런 태도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잠깐의 여흥이었단 말이죠?”
“물론. 이 모든 게 연기라고 하니, 나 역시 가벼운 마음으로 임했던 것 아니겠느냐.”
자기 스스로 설득하는 것처럼 홀로 고개를 끄덕이던 흡혈귀. 태연함을 가장하며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있다.
나는 악동의 미소를 지으며 건들건들 다가갔다.
“오호라. 그렇군요. 티르칸쟈카 교육생은 잠깐의 여흥으로 외간 남자에게 흔쾌히 안기는 분입니까? 그렇게 가벼운 분이셨어요?”
“무슨 소리냐? 내 그럴 리 없.”
없다고 말하면 자가당착. 조금 전 보여준 태도가 성립하지 않는다.
늘 느끼는 거지만, 자기를 나락으로 빠뜨리는 사람은 꼭 자기 자신이라니까. 왜 감당하지 못할 말을 하냐는 말이야.
“마, 말하지 않았느냐. 연기라는 것을 알고, 흠흠, 가벼운 마음으로 임했다고.”
급히 변명했지만 약발이 떨어졌다. 나는 팔짱을 끼곤 중얼거렸다.
“이거 심리적 허들 하나만 낮추면 사람이 훅훅 바뀌네요. 이러셔도 되는 겁니까? 제가 강아지 손만 잡아도 뭐라 하시던 분이?”
“멍?”
자기 이름이 거론되자 반응하는 아지. 마침 잘 됐다. 댁이 나랑 방금 뭘 했는지 보여주지.
“아지야, 손.”
“멍.”
아지는 냉큼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잡았다. 발톱을 숨긴 폭신폭신한 손을 어루만지며 흡혈귀의 반응을 살폈다.
역시나, 망측하다는 눈으로 보고 있다. 조금 전에는 나랑 나란히 앉았으면서.
“보셨습니까? 조금 전 티르칸쟈카 교육생이 이랬습니다.”
“그, 그럴 리가! 모함이다!”
“셰이 교육생. 어땠습니까? 공정하게 말씀해주세요.”
흡혈귀와 회귀자가 눈이 마주쳤고, 회귀자는 살짝 시선을 피하며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자의 저런 태도는 무엇보다 커다란 증거가 되었다.
결국 궁지에 몰린 흡혈귀는 양산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외쳤다.
“그래! 내 잠시 마음을 놓았다! 그건 인정하마! 하지만!”
홱. 양산의 끝부분이 나를 가리킨다. 양산 너머에서 흡혈귀가 원망스럽게 소리쳤다.
“그게 어때서! 어차피, 너는 이미 내 가슴 안쪽을 본 몸 아니더냐!”
그 순간, 회귀자가 제자리에서 미끄러지고 말았다. 가장 꼴사나운 방식으로 넘어진 회귀자가 허우적거리며 이쪽을 보았다.
‘뭐? 뭘 봐? 가슴, 안쪽? 둘이서 도대체 뭘 해댄 건데?’
어이쿠야. 뭔가 단단히 착각하는 모양새네.
그러나저러나, 이미 궁지에 몰린 흡혈귀는 회귀자가 듣는 건 상관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이미 수도 없이 손가락이 닿았는데, 당장 오늘 아침에만 해도 네 봉사를 받았는데! 내가 무엇을 또 어떻게 경계하라는 말이냐?”
‘오늘 아침?! 도대체 뭔데? 무슨 짓을 아침부터 했던 거야?!’
아이고, 시끄러워라. 한쪽은 말하고 한쪽은 생각하니 정신이 하나도 없네.
“제가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티르칸쟈카 교육생은 마음을 너무 쉽게 주는 경향이 있어요. 자기가 불로불사에 힘이 좀 강하다고 그런 태도인 것 같은데 요즘은 그렇게 살다간 코 베이기 딱 좋거든요. 조금 의심하는 습관을 들여 봐요.”
“네 말대로라면, 나는 처음부터 너에게 심장을 드러내선 안 되었겠구나!”
“오, 정답이에요.”
이토록 쉽게 깨달을 줄이야. 감격스럽기 그지없다.
“제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다 드러내세요? 제가 혹여나 나쁜 마음을 먹으면 아무리 티르칸쟈카 교육생이라도 대단히 고통스러울 텐데요. 남에게 마음을 연다는 건, 혹은 그렇게 가슴을 연다는 건 그만큼 위험한 일이에요.”
“그러지 않았잖느냐.”
흡혈귀가 양산을 살짝 들었다. 새카만 양산 아래 붉게 빛나는 눈동자에서, 책망하는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몇 번이고 기회가 있었음에도, 너는 나에게 악의를 내 안에 쏟아내지 않았잖느냐. 그런데도 의심하라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죠.”
“…흐, 좋다.”
흡혈귀가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웬일로 자기 발을 이용해 직접 교육실 문까지 성큼성큼 걸어갔다.
“네 말대로. 앞으로는 모든 것을 의심하면서 지내마.”
그리 말하고는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 뒤로 어둠이 넘실거리며 문을 쾅 닫았다.
흡혈귀가 사라지자, 입을 떡 벌리고 있던 회귀자가 뻣뻣하게 고개를 돌리고는 나에게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너, 너, 너, 너.”
“자아. 이제 믿으시겠죠? 이렇게 의심을 심어주었으니까 이제 핀레이가 뭐라고 해도 한 번 걸러 듣겠.”
“아니! 그게 아니라! 도대체 티르칸쟈카에게 무엇을 하고 다니는 거야?!”
응?
뭐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핀레이랑 거리를 좀 두게끔 의심을 심어주었잖아. 도대체 뭐가 불만이라 이래?
말만 쿨하지, 정작 얘도 과몰입 세게 한다니까.
에휴, 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오늘부로 네 새아빠가 되었단다. 아버지라고 불러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