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62화 (62/384)

EP.62 강박

무저갱, 대지모신이 더는 받치지 않겠다 선언한 땅. 실수로라도 미끄러지면 무한한 낙하를 경험하게 되는, 현세에 실제로 존재하는 지옥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까마득한 희망, 하늘과는 점점 멀어질 뿐인 미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밑바닥에는, 천여 년 간 장례도 없이 가라앉은 것들이 응어리져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

평화와 안정과는 몇백 년 떨어진, 끔찍하고 기이한 땅. 무저갱이란 그러한 곳일진대.

‘왜,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는 거야?’

회귀를 경험한 자, 죽음으로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유일한 여행자.

셰이는 평화 속에서 홀로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불사자의 말대로라면 분명 이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어. 교관이 누군가를 죽이려고 들었고, 짐승의 왕이 울부짖으며, 불사자의 살점을 저주해 흩뿌리고, 무저갱이 무너질만한 사고가.’

그녀가 있던 미래는 수십 개의 하수구가 연결된 시궁창이었다. 하나를 틀어막아도 어딘가에서 미처 처리하지 못한 오수가 터져 나와 세상을 더럽혔다.

셰이는 혼자였고, 변수는 너무 많았다. 천 개의 손을 가지고 있어도 다 막지 못했으리라. 세상은 무너진 균형을 버티지 못하고 종말로 향하는 수문을 열어버리고야 말았다.

흉흉한 사건이 앞으로 있을 끔찍한 비극의 전조가 되기를 자처했다. 느닷없이 나타난 괴물이 사람을 집어삼키기도 하고, 마을 하나가 시체 한 구 남기지 않고 통째로 사라졌다. 짐승의 왕은 종말을 맞이해 울부짖으며 미친 듯이 날뛰었다.

셰이는 종말의 끄트머리에서 그것을 막기보단 근원지를 찾으려고 애썼다.

그 궤적을 쫓아 온 곳이 바로 이곳, 무저갱.

이 안에서, 미래에 재앙의 씨앗이 될 시조와 개의 왕, 불사자를 발견했으나.

예상과는 달리, 그들은 평화로웠다.

‘아무런 일도 없었던 건 아니지. 다만, 나중에 있을 일에 비해… 상황이 그다지 나쁘지 않아. 내가 여기 와서 과거가 아예 바뀐 탓일까? 아니면, 지금 이 상황을 단번에 바꿀 만한 엄청나게 커다란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셰이는 감옥 옥상에 걸터앉아 저 마당 아래를 바라보았다.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단색 땅 위에 짙은 금발의 소녀가 교관복을 입은 사내와 대치하고 있다.

뭔가 불편한지 자꾸 움찔거리는 아지 앞에서 교관이 기분 나쁜 얼굴로 웃었다.

“큭큭. 내가 왜 지금까지 이 생각을 못했을까?”

“으르르르르르.”

“캬하하하하! 그래! 나는 드디어 방법을 찾았다, 아지! 너는 이제 내 적수가 못 돼!”

말하는 꼴만 보면 흑막이나 다를 바 없으나, 셰이는 이제 저런 태도 하나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러기엔 너무 많이 속았기 때문이다.

그리 소리치던 교관이 품 안에서 꺼낸 건, 강철을 두드려 펴서 만든 얇은 원반이었다.

교관이 원반을 들어 올리며 자기 코밑을 쓸었다.

“아아, 이게 바로 원반이라는 것이다. 공기저항을 고려해서 만든 둥글고 넓적한 판이지! 체공시간은 공의 몇 배! 크크크큭! 이게 있으면 이제 내 어깨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 한 번 제대로 던지면 30초는 날아갈 수도 있다!”

“으르르릉! 멍! 멍!”

“알았어, 알았어. 쓰읍. 성질도 급해. 좀 자랑하려고 했더니만 그것도 못하겠네. 자, 물어 와!”

“멍!”

팔을 크게 감고는 원판을 던진다. 강철 원판이 느릿하게 회전하며 저 멀리 날아간다. 한참 기다리고 있던 아지가 화색이 되어 그 뒤를 쫓았다.

바람을 헤치고 부유하는 원판은 쉽사리 내려오지 않는다. 부드럽게 상승하며, 그것보다도 천천히 내려앉는다. 순식간에 원반을 따라잡은 아지는 아래쪽에서 폴짝거리며 그게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동안 교관은 자리에 풀썩 앉고는 크게 웃었다.

“큭큭큭. 그동안 나는 충분히 체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말씀! 사실상 준 방치형 놀이도구나 다름없지! 키키킥! 나는 이제 네가 두렵지 않아!”

“멍!”

그 순간, 아지가 공중으로 펄쩍 뛰어오르곤 입으로 원판을 잡아챘다. 지켜보던 교관의 얼굴이 멍청하게 변했다.

“야, 잠깐만. 아지야. 점프해서 잡는 건 반칙이지. 정정당당하게 2차원에서 승부하자는 말이야. 그리고 너는 뭔 개가 서전트로 3미터를 뛰어. 나 쉴 시간은 달라니까?”

“멍!”

“아니, 아.”

그러나 아지는 다시 원판을 물고 오고, 교관은 한숨을 내쉬며 일어선다.

보고 있으면 긴장하는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진다. 한껏 노려보다가도, 즐거이 꼬리치는 아지와 귀찮은 듯하면서도 계속 놀아주는 교관을 보고 있자면 입에서 힘 빠진 한숨만이 흘러나온다.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고 싶은데, 적의의 칼날을 세우고 싶은데.

그럴 마음조차 들지 않는다.

‘만일 현재 이 장소에서 그럴 만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을 고르라고 하면, 저 교관 하나뿐인데.’

저런 해맑은 미소를 짓는 아지가 그런 흉성을 발할 것 같지도 않다. 침착한 티르칸쟈카가 갑자기 미쳐서 날뛸 것 같지도 않다.

동시에, 저 남자… 아직 이름도 모르는 교관이 딱히 무슨 짓을 벌일 것 같지도 않았다.

‘차라리. 이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누가 나에게 그렇다고 확신을 심어준다면.’

그렇다면 그녀도 모든 짐을 내려놓은 뒤, 짧은 여유를 가질 수 있을 텐데.

하지만 회귀자는 미래를 보고 왔다. 이 무저갱에서 어떤 비극적인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기에 그녀는 편할 수 없다.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다른 모두가 한껏 풀어져 있더라도, 그녀만은.

끔찍한 미래를 보고 온 자에게 안식이란 있을 수가 없다. 이 고립된 평화마저 재앙의 전조처럼 느끼기 마련이니.

‘여기까지 온 이상. 이번 회차에서 무언가를 얻어가야 하는데….’

한쪽 무릎을 끌어 앉은 채, 홀로 옥상 모서리에 걸터앉아, 저 아래 날아가는 원반을 가만히 바라본다. 개를 뒤에 매단 채 느릿하게 커졌다가 작아지는 원반은 꼭 평화로운 일상을 상징하는 것 같다.  순리에 따라 떠올랐다가 가라앉는.

불안한 평화 속에서 가만히 앉아있던 때.

“셰이. 잠시 시간 좀 내주겠느냐.”

차분한 목소리가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챈 셰이는 급히 일어났다.

검붉은 기운으로 둘러싸인 제향나무 관, 시조 티르칸쟈카는 새카만 양산을 걸친 채 그 위에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셰이가 그녀를 마주 보자, 티르칸쟈카는 옥상으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티르칸쟈카! 어, 오랜, 만? 이야? 곁에 달고 다니던 그 놈은?”

“핀레이? 잠시 홀로 두었다. 그는 신경 쓰지 말거라.”

무심한 듯 말하는 말투에는 묘한 냉기가 배어있었다. 셰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미래를 위해서라도 시조와는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어째서 만날 때마다 묘하게 쌀쌀맞은 건지.

한층 착잡해진 셰이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어쩐 일이야? 평소 나 안 찾았잖아. 아니, 이게 서운하다는 뜻이 아니고. 그냥, 그, 사실을 말한 건데….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티르칸쟈카는 횡설수설하는 셰이의 말을 적당히 끊고는 대답했다.

“저번에 네가 말하지 않았느냐. 제식 마법보다 고유마법이 더욱 강력하다고. 자신의 신비를 채현하는 고유마도는 누구나 사용가능한 제식 마법에 비해 압도적이라며 한참을 자랑하였다.”

“어. 그러긴 했는데.”

“그리고 네 마법은 하늘의 기운을 재현하는 것이라 했지. 그 검의 기운을 매개로 사용하는 신비라면서.”

“으, 으응.”

“그렇다면.”

티르칸쟈카는 양산을 놓았다. 퍼석, 하고 어둠이 한순간 흩어지며, 티르칸쟈카는 빛 아래 창백한 모습을 드러냈다.

“벼락도 사용할 수 있을 터. 맞느냐?”

“할 수는 있는데. 왜?”

“나에게 써다오.”

그 말에는 산전수전 다 겪은 셰이조차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뭐? 왜?”

“이유는 묻지 말고, 그냥 해줄 수 있겠느냐?”

“어떤 의도로 하는 건지 알아야 도움을 주지.”

“…그 말도 맞구나.”

혼잣말로 무언가 중얼거린 티르칸쟈카는 순순히 말했다.

“토인이 다시 몸을 일으켰을 때, 기억하느냐?”

“아. 그때.”

불사자 라쉬가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그때 분명, 교관이 불사자의 가슴팍에 전격을 가하고 불사자가 몸을 일으켰었다.

“그래. 전격으로 심장을 다시 일으켰지. 불사자인 토인도 그럴 수 있다면, 나 역시 그럴 수 있을 터.”

“전격으로 심장을 다시 뛰게 하려고?”

셰이는 티르칸쟈카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아차렸다.

토인의 가슴에 전기를 흘려 심장을 뛰게 만든 것처럼, 자신의 심장 역시 되살려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분명, 관 속에서 오랫동안 품어왔을 절절한 소망일 터이다. 그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셰이는 난색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나의 힘으로는 어려울 거야. 마법의 기반은 한 존재가 가지고 있는 심상의 발현이야. 하나의 마법은 하나의 세상. 그것으로 다른 누군가의 몸을 침범하여 바꾸는 건 지극히 어려운 일이며, 해서는 안 돼. 타인의 존엄을 침범하는 행위이니까.”

“토인은 그가 쓴 마법으로 일어났지 않느냐.”

“그건 0레벨, 현상급 마도잖아. 본디 세상에 존재하던 현상만 불러일으킬 뿐인 극히 사소한 마법이야. 마법의 진의가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면, 0레벨 마도는 마법과 가장 거리가 먼 기술이지. 그걸로는 일으킬 수 있는 존재만 일으킬 수 있어.”

셰이는 차분하게 설명을 끝마쳤다. 이 정도면 무례하지 않은 거절이 되었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마법이 아무리 신비해보인다고 한들 한계는 명확하니까. 셰이는 자신의 거절이 귀찮음의 표현이라 생각하지 않기를 바랐다.

안타깝게도 흡혈귀는 이러한 표현에 익숙했다. 이 정도면 거의 직설화법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건 나도 안다. 내 심장이 다시 뛰는 건 불가능에 가깝겠지. 무익한 일에 손대고 싶지 않은 네 심정은 나도 이해한다.”

오해라도 받을까 봐 회귀자가 다급히 항변했다.

“아, 아니야! 나는 그저, 네가 아플까 봐!”

“고통은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1200년 동안 살아오면서 온갖 고통을 겪어왔다…. 물론, 그 역시도 진짜 고통은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자조적으로 웃은 티르칸쟈카가 셰이에게로 다가갔다. 저항하지 않겠다는 듯, 양팔을 벌리고 힘없이 늘어뜨리며.

“부탁하마, 셰이. 만일 너의 마법이 고통뿐이더라도, 그것이 진짜 고통이라면 달게 받겠다. 나 역시, 이것으로 내 심장이 되살아나리라 믿지 않는다. 나는 단지 느끼고 싶을 뿐이니.”

티르칸쟈카는 완고했고, 셰이는 곤혹스러워했다.

왜 하필 벼락을 맞으려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토록 간곡하게 부탁해온다면 거절할 수가 없다. 어차피 고통을 감수하는 쪽은 티르칸쟈카가 아닌가.

심지어 티르칸쟈카에겐 위험하지조차 않다. 셰이의 마법은 강력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마검사 수준. 이 정도 위력으로 위험해질 거였다면 티르칸쟈카는 지금껏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으으. 큰 문제는 없어 보이지만….”

한참의 고민 끝에 셰이는 머리 위에 띄워두었던 천앵을 꺼냈다.

천앵, 셰이는 그것을 검처럼 휘두르고 있으나, 그 본질은 극도로 압축된 공간이다. 무게도, 두께도 없는 것은 이 때문. 공간을 비집고 베어내는 천앵은 세상 그 어떤 검보다도 날카롭다.

셰이는 천앵을 허공에 떨치며 마력을 불어넣으며 설명했다.

“내 마법은 천앵을 매개로 해. 매개가 워낙 강력한 물건이다 보니 하늘 속성을 명확하게 띤다는 단점이 있지만, 하늘 자체가 수많은 현상을 내포하다 보니 준비만 한다면 그 모든 것을 재현할 수 있어.”

천앵에서 바람이 흘러나왔다. 압축된 공간이 풀려나며 점점 존재감을 넓히기 시작했다. 급작스럽게 부풀어 오르는 공간. 제 몸을 키우느라 싸늘하게 식은 공기가 피부에 닿자, 냉기에 떨던 수증기는 피부의 온기에 닿자 이때다 하고 들러붙는다.

물론, 흡혈귀의 피부는 예외이다. 그들의 몸은 부푼 공기만큼이나 싸늘하니까.

“풍운우로 상설뇌전 (風雲雨露 霜雪雷電). 바람은 구름을 만들고, 구름은 비를 내리며, 이슬은 땅에서 솟아올라 풀방울에 맺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물방울들로 젖어 들어가는 평범한 일상.”

그리고 그 뒤.

공기가 불길하게 요동친다.

공포에 휩싸인 듯 진동하는 바람. 불길의 전조를 알아챈 공간이 야단법석 흩어졌다.

그 속에서 셰이의 머리카락이 들썩인다. 바람 때문이 아닌, 심박처럼 짜릿하고 규칙적인 움직임.

셰이는 천앵을 꼭 쥔 채 마력을 풀어놓았다. 전신에서 퍼져나간 마력이 용솟음치며 허공으로 날아가 한곳에 모인다.

그 모양은 꼭 구름을 닮았다. 하늘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무저갱에 구름 한 조각이 정물화처럼 떴다.

“서리와, 눈꽃과, 천둥벼락. 그것들은 비틀린 이상이야. 물방울이 전령 역할에 소홀하면, 땅과 하늘의 갈등은 극한으로 치닫고 비틀린 것을 떨어뜨리지. 내가 불러올 것은 노호. 하늘이 세상에 내리는 장엄한 꾸짖음.”

천앵에서 흘러나온 새카만 먹구름에서 뇌광이 번쩍인다. 거대한 힘을 내포한 구름이 천천히 티르칸쟈카의 머리 위로 향한다. 불길한 전조를 느낀 옷과 머리카락이 들고 일어나는 동안, 티르칸쟈카는 한마디 말도 없이 앞을 보고만 있었다.

“아프면 말해. 그만할게.”

티르칸쟈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셰이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마법을 세상에 새겼다.

“천검기, 천둥새.”

직후, 뇌광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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