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4 꼭두각시 시조와 불쾌한 인형극
사람은 언제나 유혹 속에 있다.
이 명제는 굳이 진위여부를 확인할 필요도 없다. 인간은 매일 아침마다 크나큰 시험을 받기 때문이다.
안락한 침대와 따뜻한 이불 속에서 몇 분 더 행복을 만끽할지, 아니면 그것을 떨치고 나와 두려운 세상 앞에 설지. 매일매일 인간은 잠자리에 드는 것과 동시에, 필연적으로 내일 아침에 마주하게 될 혹독한 시험과 마주한다.
거진 대부분의 인간은 시험을 이겨내고는 거친 세상으로 한 걸음 나아가기 마련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용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렇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지만. 그것이 승리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진 못한다.
자부심을 가져라, 인간들이여. 너희는 아침과 싸워 연전연승하는 존재일지니.
뭐, 관 속에서 300년 연속수면이 가능한 흡혈귀라면 이야기는 좀 다르겠지만. 어쨌건 인간은 그러하다.
그러할진대.
“멍! 멍멍!”
그러한 시험조차 필요하지 않게 만드는 게 바로 군국의 자명종, 혹은 그것을 대신하기로 한 개의 왕 아지였다.
사람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는 그것들은 내가 시험에 들 권리조차 박탈해간다. 다른 선택지를 우악스럽게 가지치기한 채 나에게 하나의 길을 강요한다.
분명 그것들은 편리하다. 효율적이다.
그러나 그곳에 고뇌는 없다. 고뇌를 통해 얻어내는 성찰도, 그것으로 이루어내는 성장도 없으니.
저리 가라, 개.
네가 닭의 왕도 아니고. 어찌하여 내가 고상해질 권리를 탐하려 하느냐.
나는 이 폭신한 이불 속에서 조금 더 고뇌하다가, 지연된 승리를 얻어낼 것이니. 이만 꺼지거라!
“멍멍멍멍멍멍멍멍!!”
“알았어. 미안해! 일어날게!”
젠장. 씨알도 안먹히네.
평소처럼 세수하고 머리에 물을 묻힌 뒤, 의복패킷을 끼워 넣어 교관복을 입었다. 빳빳한 교관복이 내 몸을 뒤덮는다.
의복 패킷이 다 그렇듯 겉모습에 비해 대단히 편하지만, 불만이 하나 있다. 소매가 너무 좁아서 안에 뭐 숨기기 불편하다는 점이다. 나 정도 되는 마술사니까 이 좁은 소매에 카드를 숨기지, 다른 마술사였으면 수갑을 찬 듯한 느낌일 것이다.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언제나처럼 카드를 소매 속에 감추고 방을 나섰을 때였다.
“으르르르.”
“응?”
“멍?”
내가 아지를 보자, 아지도 나를 보았다. 큼직한 눈망울이 나를 향했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아지도 나를 따라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 너 아까 으르렁거리지 않았냐?”
“멍?”
“그래? 아니면 말고.”
뭔가를 들은 것 같았는데, 이상하다. 핀레이가 근처에 있나.
에이, 뭐. 별거 아니겠지.
어제 먹다 남은 밥으로 아침을 차려주었다. 아지가 맛있게 먹는 동안 적당히 배만 채운 나는 느긋하게 마당으로 내려갔다.
“자, 오늘은 뭘 할까…. 흠, 별로 할 일도 없는데. 수업 명목으로 셰이 교육생에게 연금화나 뜯어내면 좋겠다.”
오늘은 아주 중요한 수업을 한다고 흡혈귀를 살살 꼬드기고, 바람을 잔뜩 불어넣은 뒤 난감한 척 발을 빼자. 그러면 회귀자가 알아서 지갑을 열지 않을까?
흡혈귀가 가진 예술품들은 가격은 많이 나가도 당장 쓸 수가 없다는 게 단점이다. 그런 점까지 고려하면 역시 연금화가 최고라니까. 당장 현물화할 수 있다는 점이 특히.
후후. 연금화를 잔뜩 뜯어내서, 카드 한 벌을 새로 맞추는 거야. 물론 다 연금변환 가능한 사양으로.
그렇게 오늘의 사기 계획을 짜면서 걸어가는데, 또 마당 한쪽에서 묘한 생각이 들려왔다.
뭐지? 회귀자가 또 핀레이 팔을 자르기라도 했나? 호기심이 생긴 나는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슬슬 올 거라 생각했다. 교관.”
회귀자와 핀레이가 서로를 마주 보고 나란히 서 있었다. 핀레이가 처음 온 날이 떠오르는 광경이었다.
다만, 둘의 태도는 예전과 정반대였다. 핀레이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있었고, 그 옆에는 전신이 일렁이는 어둠으로 이루어진 흑기사 둘이 호위라도 되는 것처럼 절도 있게 서 있었다.
회귀자는 언제나처럼 불만스러운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또 무슨 난리입니까? 셰이 교육생이 누구 팔이라도 잘랐어요?”
흘긋 시선을 건넨 회귀자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직.”
아직이구나. 음.
그 말에 숨겨진 뜻을 알아챈 핀레이가 짧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분수에 넘치는 검을 들었다고 건방지구나…. 그것도 오늘까지겠지만 말이다.”
“건방?”
뭐지?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회귀자가 남의 팔 자르려고 드는 거야 일상이지만, 자신만만하게 뻗대고 있는 핀레이의 태도는 예상을 한참 벗어난 상황이었다.
회귀자가 마음만 먹으면 잘게 썰려 활흡혈귀회가 되어버릴 녀석이 뭐를 믿고 뻗대는 거지?
궁금한데.
나는 정신을 집중하여 바깥에서 들려오는 핀레이의 생각을 읽어보았고.
어젯밤, 그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차렸다.
이야.
나보다 더한 사기꾼이 여기 있었네.
사기꾼은 턱을 치들었다. 그 모습은 꼭 흡혈귀를 따라한 것 같아서 묘하게 불쾌했다.
“나는 네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으나. 시조께서는 너와 저 꼬마를 제법 어여삐 여기시는 모양이니. 너희에게 전언을 남기도록 하마.”
마치 자기가 대리인이라도 되는 양, 핀레이는 나와 회귀자를 향해 오만하게 선언했다.
“시조께선 나와 같이 지상으로 나갈 것이다.”
“뭐?”
“이건 허락을 구하는 것도, 양해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이건 통보다. 시조의 뜻은 확고하니, 너희들은 그분이 행하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다.”
시조의 뜻이라니. 자기 뜻이겠지.
내가 속으로 비웃고 있는 동안, 자초지종을 모르는 회귀자는 의문을 표했다.
“무슨 소리야? 티르칸쟈카는 올라갈 생각이 없다고 했는.”
“네 이놈! 시조의 성함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순간적으로 욱했지만, 회귀자는 와중에도 천앵을 뽑아 들지 않는 분별력을 발휘했다. 핀레이는 가만히 있는 나와 회귀자를 만족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래. 한참 전, 시조께선 그렇게 말씀하셨지. 하지만 곧 마음을 바꾸셨다. 우리 동족을 위해 지상으로 올라가, 그들을 보살피기로.”
“믿을 수 없어.”
“지금 내 곁에 있는 흑기사를 보아라. 이건 시조의 권능이다. 시조의 뜻이 아니라면, 내가 어찌 혈투기를 두른 흑기사와 함께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말에 호응하듯, 붉은 혈투기를 두른 흑기사가 동시에 발을 굴렀다. 제 딴에는 위협하려고 하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회귀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티르칸쟈카를 직접 만나고 판단하겠어. 안내해.”
눈앞을 가로막는 것이라면 당장이라도 베어버릴 것 같은 날카로운 시선.
핀레이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내 말 못 들었나? 시조께서는 위로 올라갈 준비를 하고 계시다고 했다.”
“너야말로, 내 말 못 들었어? 직접 듣고 판단할 거니까, 안내하라고.”
대기가 불안하게 요동친다. 회귀자의 시선에서 살기가 뻗어 나왔다. 그에 반응하여 흑기사의 전신에 혈투기가 피어올랐다.
일촉즉발의 상황. 나침반처럼 빙글빙글 돌던 천앵이 서서히 멈추고, 흑기사들이 등 뒤로 팔을 내미려는 때.
“기다려요, 셰이 교육생.”
그 상황에서 내가 끼어들었다. 손을 뻗어 회귀자의 앞을 가로막은 나는, 이 와중에도 가만히 앉아만 있는 핀레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건 피와 어둠으로 만들어낸 인형이에요.”
회귀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인형?”
“네. 진짜는 이 건물 밖에서 인형을 조종하고 있어요.”
내가 지적한 직후, 핀레이의 몸이 어둠으로 부풀어 올랐다. 순식간에 새카만 그림자로 변한 핀레이의 인형이 입을 주욱 찢으며 말했다.
[제법 눈치가 빠르군, 교관. 어떻게 알았지?]
생각을 읽었지. 지금 건물 밖에서 들려오는 생각을 말이야.
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적당히 둘러댔다.
“겁쟁이들이 하는 짓은 다 똑같거든요. 당신 같은 겁쟁이가 우리 앞에 본체를 드러낼 리 없잖아요?”
내 대답에, 새카만 그림자가 입을 크게 벌려 광소했다.
[큭, 오만하구나. 오만해. 천민 주제에, 알량한 힘이 있다고 나대는 꼴이라니….]
인형은 그렇게 말했으나, 이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본체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시조의 권능으로 만들어낸 인형을 간파해? 확실히 여간내기가 아니군…! 큭, 그래. 확실히. 시조의 힘이 있더라도 교전은 피하는 편이 낫겠어…!’
벽 너머에서 들리던 생각이 점점 멀어졌다. 지금껏 흡혈귀의 어둠으로 몸을 숨기고 이쪽을 살피던 핀레이는, 내가 지적한 순간 전속력으로 달아났다.
그냥 겁쟁이가 아니라, 대단한 겁쟁이였네.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인형의 형태도 일그러졌다. 피부가 녹아내리고 살갗이 뒤틀리며, 균열에서 어둠이 뭉게뭉게 흘러나왔다. 핀레이의 인형은, 인간은커녕 인형조차도 아니게 된 모습으로 기괴한 소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보이나? 나를 완벽하게 흉내 낸 이 인형 자체가 시조의 권능이라는 증거. 꼬마, 이제 내 뜻이 곧 시조의 뜻이라는 것을 믿겠나?]
수긍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회귀자의 감각으로도, 그 인형이 본체가 아니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했을 정도니까.
회귀자는 분한 얼굴로 대답했다.
“칫. 분명, 너 따위가 다루기에는 분에 넘치는 힘이네.”
[알아들었다면 이제 이야기가 쉬워지겠군. 우리의 요구는 하나다.]
본체가 저 멀리 달아나는 와중에도 인형은 꿋꿋이 마지막 전언을 내뱉었다.
[우리의 탈출을 방해하지 마라. 그러지 않는다면, 죽이지는 않겠….]
서걱.
그 말을 빚어내기도 전에, 회귀자가 인형의 허리를 갈라버렸다. 인형의 몸이 꺾이고 그 틈으로 연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인형을 잃은 흑기사가 반응했으나, 회귀자는 단숨에 천앵을 휘둘러 두 흑기사의 목도 베었다. 까만 투구가 바닥에 닿은 순간 흑기사의 전신이 검은 연기로 바뀌어 사라졌다.
흡혈귀가 사라진 공간에 고요가 찾아왔다. 천앵을 갈무리한 회귀자는 적의에 불타는 눈으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노려보았다.
“티르칸쟈카를 만나러 가야겠어. 직접 만나, 무슨 일인지 이야기를 들어봐야겠어.”
‘만일 티르칸쟈카가 진심으로 나와 맞선다면, 나 혼자서는 이길 수 없겠지. 기껏해야 공멸이 최선이야. 하지만.’
공멸이면 회귀자의 승리이다. 그녀에게는 이번 회차 말고도 다음 회차가 남아있으므로.
이번에 알게 된 정보로 더욱 나은 미래를 찾아가면 된다.
각오를 다진 회귀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너는 어떻게 할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