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69화 (69/384)

EP.69 꼭두각시 시조와 불쾌한 인형극 - 6

어우야. 아지가 있어서 다행이다. 내가 인간은 어떻게 해보겠는데 저런 짐승은 좀.

나는 평범한 인간. 평범한 말과 1:1로 싸워도 못 이긴다.

그런데 덩치는 산만하며 죽지도 않고 힘은 더럽게 강한 혈마와 싸워? 그냥 핏물이 되겠지. 회귀자라면 방법이 있었겠지만 나는 아니다. 아지를 부르는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신화적인 전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으음. 상성이 좋지 않네.”

개의 주 공격수단은 물어뜯기. 목을 단숨에 물어 흔들며, 일격에 목뼈를 끊어버리는 것이 결정타다.

그러나 상대는 흡혈귀의 권능으로 사역마가 되어, 불멸의 몸을 지니게 된 혈마 랄리온. 살점이 떨어지고 목이 뜯겨도 무한히 재생하는 불사의 괴물이다.

“유사 태양도 떠있겠다. 랄리온을 수만 번 잡아 찢어서 존재 자체를 흐려버리면 이기겠지만, 그동안 핀레이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

아지가 랄리온을 완전히 박살 내는 데에는 시간이 꽤 필요할 거다.

이제 승부의 행방은 이쪽으로 넘어왔다.

“자. 어쨌든. 아지 덕분에 길이 났습니다. 슬슬 괜찮아졌습니까?”

아지가 한바탕 날뛰고 지나간 곳에는 시산과 혈해, 그것을 갈라 만들어낸 길이 나 있었다. 그 끝에는, 한 어리석은 흡혈귀가 이지를 잃은 채 꼭두각시가 되어있다.

내가 조종하는 꼭두각시조차도 저것보다는 나았는데, 쯧쯧. 나는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치매를 맞이한 노인네 대갈통을 후려치러 갈 준비가.”

“…말 진짜 나쁘게 하네.”

그리 말하는 회귀자의 한쪽 눈은, 피에 젖은 것처럼 새빨갛게 물들어있었다.

“됐어. 이제는 몸을 움직일 수는 있어…. 하지만.”

부들거리는 팔이 애처롭다. 그 떨림은, 천앵으로 흡혈귀를 가리킬 때 더욱 심해졌다. 어찌나 떨림이 심한지 곁에 있던 내가 베일 뻔했다.

혹시 신종 암살 방법인가, 내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티르칸쟈카에게 검을 겨누는 건 무리야. 진혈이 내 몸 구석구석에 숨어든 탓이야. 다른 사역마를 상대로는 마음껏 검을 휘두를 수 있지만, 진혈의 주인에게 직접 겨누려고 하면 진혈이 날뛰어서 방해해.”

“잠깐만요. 그 말뜻은?”

회귀자는 참담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이런 말 하기 싫지만… 부탁할게. 너밖에 없어. 내가 길을 뚫을 테니, 네가…. 티르칸쟈카를 구해.”

“제가요?”

지목당한 나는 황망한 얼굴로 흡혈귀 쪽을 보았다.

나보고 저 앞에 있는 남은 흑기사를 다 처리하고 나아가서.

저 위쪽에서 조종하는 핀레이를 무찌르고.

흡혈귀를 깨워야 한다고?

에이, 그게 됐으면 여기 안 잡혀왔지.

“저에게는 너무 무거운 짐인데요.”

“엄살… 부리지, 마. 네가 힘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은 다 알고 있어.”

숨길 힘이 없는데 어떻게 숨기냐고. 빚쟁이가 돈 뜯어가는 것도 아니고. 없는 힘이 나오라고 하면 나와?

내가 어이가 없어서 말을 잃은 사이, 회귀자는 숨을 가쁘게 들이쉬며 말했다.

“네가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건 알아. 힘을 숨기고 있다는 것도! 하지만 지금은 힘을 써서라도 티르칸쟈카를 구할 때야!”

그렇게 외치는 회귀자의 눈동자는 너무 곧고 맑았다. 당장 위기에 처한 사람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만큼.

어째서 죽음의 위기 앞에서도 이토록 사람을 곧게 믿을 수 있을까? 잠시 그에 경도된 나는 생각을 읽었다.

‘만일 구하지 않는다면. 혹시 이 기회를 틈타 핀레이를 처리한 뒤 티르칸쟈카를 손에 넣으려고 한다면! 다음 회차부터는 적이라 간주해도 무방하겠지!’

그리고 온 미래를 저당 잡힌 나는 몸을 떨었다.

아니, 생각해보니 딱히 위기에 처한 사람이 아니구나. 이번 회차에서 내가 의심스럽게 굴면 당장 다음 회차부터는 추살이다. 그건 막아야 한다.

후우. 지금의 나를 위해서라도, 다음 회차의 나를 위해서라도 노력할 수밖에 없나. 날로 먹기 힘들구만.

어디, 나는 한 번 흡혈귀와 핀레이 쪽을 슬쩍 보았다.

땅을 붉게 비추는 작은 태양, 아지가 한 번 쓸어버린 탓에 공백이 생긴 흑기사대. 빛 앞에서 느려지는 어둠, 그리고 입에서 피를 토하는 핀레이.

어? 잠깐만. 이거 되나?

“뭐, 잘하면 어찌저찌 되겠는데요?”

“…큭.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회귀자는 입가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씨익 웃었다.

어깨에 얹은 짐이 무겁다. 회귀자 기대만큼 멋있게 끝낼 능력은 없는데.

그래도 뭐.

“마법 쓸 수 있죠? 제 몸에 마법이나 걸어주실래요?”

“내 보조 마법은 효율이 좋은 편이 아니라서, 강자에게는 별다른 도움이 안 될 텐데?”

도움 되거든. 1000에 10을 더하면 1%의 증가지만, 10에 10을 더하면 2배로 강해진다는 말씀.

“…그래도, 해서 나쁠 건 없겠지. 잠깐만 기다려.”

고개를 끄덕인 회귀자는 천앵을 풀어냈다.

풍운우로상설뇌전.

압축 공간인 천앵을 매개로, 하늘과 바람을 다루는 마법. 그 속에서 회귀자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그리고 가장 강력한 보조 마법을 꺼냈다.

“천검기, 순풍.”

검을 둘러싼 공간이 올올이 풀어졌다. 그것들은 흩날리는 실타래처럼 낱낱이 펼쳐지더니, 내 몸을 부드럽게 휘감기 시작했다.

마력을 짜낸 회귀자가 힘겹게 말했다.

“앞으로 네가 하는 모든 행동은 바람의 가호와 함께야. 몸을 움직이는 쪽으로 바람이 불 것이고, 거침없는 흙먼지도 너를 방해하지 못해. 강풍이 불어도 너를 둘러싼 바람 덕분에 몸이 흔들리지 않을 거야. 당분간 바람은 네 편이니. 이 흐름을 타도록 해.”

“좋습니다. 이제 무기만 꺼내면 되겠군요.”

내가 등에 멘 보따리를 풀 동안 회귀자가 천앵을 꼬나쥐고 앞으로 나섰다.

“시간을 끌게. 준비해.”

회귀자는 천앵을 살짝 비틀었다.

천앵은 두께가 없는 검, 그렇기에 모든 것을 갈라버릴 수 있으나 어둠과 핏물로 만들어진 흡혈귀의 사역마에는 별 효과가 없다. 한 번 베어봤자 재구성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렇기에, 회귀자는 날카로움을 포기했다. 대신 천앵의 넓적한 옆면이 드러나도록 다잡았다.

두께는 없으나 넓이는 있기에, 널찍한 검신에 바람이 걸린다.

모든 것을 갈라버릴 수 있는 날카로움을 포기하는 대신, 그 위로 세찬 바람을 휘감았다. 회귀자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천검기, 검형변환.”

공간에 균열이라도 난 듯 바람이 흘러 들어간다. 한 줌, 한 뼘도 안 되는 천앵의 검날에 무저갱을 가득 채울 듯한 공기가 깃들었다.

목이 긴 짐승이 더 낮게 울부짖기 마련. 드넓은 창공을 흐르는 바람의 울음소리는 하늘을 목으로 쓰며 우레와 같은 떨림을 만들어낸다.

바람으로 덧씌워진 천앵은, 꼭 거대한 부채와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둔중한 떨림이 천앵으로부터 일어난다. 회귀자는 천앵에 휘감긴 그 모든 바람을 들어 올리며.

“파초선, 나찰난영(羅刹亂英)!”

가로로 크게 저었다.

그 직후, 머리카락이 한꺼번에 곤두섰다. 보이지는 않으나 분명하게 느껴지는 강렬한 힘의 파동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건 바람보다는 채찍에 더 가까운, 극한으로 압축된 힘의 폭풍이었다.

폭풍이 흑기사를 일거에 쓸어버렸다. 바닥에 응어리진 새카만 기운조차 모래처럼 흩어지며, 검은 연기가 반원형으로 밀려났다.

한순간 뻥 뚫린 전면. 회귀자는 입술을 짓씹으며 자기 가슴을 부여잡았다.

“길은 뚫었어! 당장 가…!”

라고 외치던 회귀자는 내 모습을 바라보고는 크게 휘청거렸다.

“잠깐! 너 뭘 들고 있는 거야?!”

“뭐긴요. 저에게도 무기가 필요하잖아요.”

“그게 뭐가 무기인데!”

뭐긴. 뭐라도 챙겨야 한다는 생각에 식당을 뒤지다가 우연히 발견한 무구.

흡혈귀를 상대로 가장 유효한 파마(破魔)…. 아니, 피를 부수는 파혈(破血)의 검.

“바로 불사자의 오른팔! 임모탈 라이트 암!”

“그걸 왜 들고 있어!”

“왜냐!”

마침 땅에 납작 엎드려 바람을 견뎌낸 흑기사가 나에게 뛰어들었다. 좋은 샌드백이 때마침 나타났다. 나는 다가온 흑기사를 향해 불사자의 오른팔을 들이밀었다.

꿈틀거리는 절단면이 흑기사를 향해 내밀어진다. 흑기사는 날카로운 검을 휘둘러 그에 맞서려고 했지만.

“임모탈 스트라이크으으으으!!”

불사자의 팔에 닿은 순간, 어둠이 젖은 모래처럼 부스러지며 땅으로 떨어졌다.

토인의 살점은 흡혈귀의 피에 있어 저주. 권능 자체를 오염시킨 오른팔은 기세를 잃지 않고 그대로 흑기사의 가슴팍을 꿰뚫어버렸다.

그 직후, 흑기사의 전신이 뻣뻣하게 굳더니 그대로 허물어졌다.

그 육신이 재생되는 일은 없었다.

불순물이 섞인 피는 흡혈귀의 지배에서 벗어났으니까.

순식간에 흑기사를 처리한 나는 팔을 빙글 돌리며 외쳤다.

“이것이야말로 흡혈귀를 처리할 수 있는 최강의 무기니까!”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던 회귀자가 빼액 소리쳤다.

“무기가 아니라 팔이잖아! 불사자의 오른팔!”

“몸은 검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신검합일. 그러니 나의 몸과 칼을 어찌 나누어 생각하리오.”

“자기 팔도 아니면서!!”

나는 오른팔을 들어 올려, 불사자의 오른손이 내 손을 꽉 쥔 모습을 회귀자에게 보여주었다.

“이건 폼멜 부분이 특수 제작되어서, 제 손아귀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다고요! 놓칠 일이 절대로 없다는 말씀. 그러니 제 팔의 연장선이라 봐도 되지 않을까요?”

“그냥 불사자의 손이 너를 움켜잡고 있는 거잖아!”

톡, 톡, 톡.

힘을 쏟아서 벨 필요도 없다. 무게를 실어 찌를 필요도 없다. 검로니 검리니 검기니. 그딴 건 나약한 자들이 궁구한 방법일 뿐.

그저 톡 갖다 대기만 했는데, 불사자의 살점이 흡혈귀의 권능을 무력화시키고 사역마를 그냥 핏물로 바꾸어버린다.

그 압도적인 성능은 회귀자조차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거, 나쁘지 않을 수도.”

“후후. 당신이라면 이해할 줄 알았습니다. 당신도, 저도 성능만 따지는 냉혈한이니까요.”

“그렇게 휘둘러도 괜찮은 거 맞지?”

“물론입니다.”

빙글, 나는 오른팔을 반 바퀴 돌리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단지, 내구도에 한계가 있다는 게 좀 아쉽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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