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75화 (75/384)

EP.75 티르칸쟈카의 책 - 구약(하)

소녀와 아버지는 곤란에 빠졌다.

죽음은 그 무거움만큼 드물게 찾아왔고, 그중에서도 시신이 온전히 남는 종류의 죽음은 더욱 적었다. 짐승에게 물려가거나 물에 빠져 죽으면 시체조차 남지 않는 탓이다.

시체가 남는 종류의 죽음이라고는 병사(病死)밖에 없는데, 그것도 문제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사소한 상처나 병에도 냉큼 아버지를 찾아오게 된 이후, 어지간한 병은 사인(死因)이 되지 못했다.

거기다 우연히 심한 병으로 죽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지모신교를 따르는 사람들은 매장을 선호하였으나, 시체 묻을 돈도 없는 가난한 이들은 성교회가 장려하는 화장을 받아들였다. 불타 사라지는 시체들 앞에서 아버지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백토가 된 시신을 해부할 수 없는 노릇이며, 그렇다고 진찰을 게을리하여 사람을 죽도록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 이 근방에서는 도저히 시신을 구할 수 없었다.

결국, 마음이 급해진 아버지는 위험을 무릅쓰기로 했다.

“티르, 오늘은 조금 더 멀리 갔다가 오마.”

이제는 앞뒤가 바뀌어버린 집착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인간의 모든 것을 알게 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소녀는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으나, 그것은 걱정으로만 끝났다. 아버지를 뛰어넘어버린 소녀는 이미 훌륭한 치료사였기 때문이다.

“저도 도울게요.”

“되었다. 멀고 험한 길이다. ”

“괜찮아요. 저는 밤 중에 걷는 것도 좋아해요. 그리고 아시잖아요? 저는 아무리 걸어도 숨이 가쁘지 않아요.”

“고개를 두 개나 넘는 먼 길이다. 너까지 데리고 가는 게 도리어 더 눈에 띄니, 오늘은 집을 지키도록 해라.”

아버지의 뜻은 완고했고 합리적이었다. 소녀는 금방 수긍했다. 그러나 불만스러운 표정은 다 드러났는지, 외투를 챙기던 아버지는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대신, 랄리온의 발굽에 천을 씌워주겠니? 먼길이니, 오늘은 달구지를 끌 노새가 필요하니 말이다….”

어둑한 밤이었다.

떠나는 모습을 마을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아니 되었기에, 아버지는 저녁이 훨씬 지나서야 출발했다. 소녀는 마을에서 가장 큰 바위 위에 걸터앉아서 아버지를 배웅하고, 같은 자리에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하늘에는 반짝이는 별이 흘러갔다. 저 달이 지는 속도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렸다. 소녀는 저무는 달과 반짝이는 별을 보며 하염없이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는 틀리지 않았다.

잔혹한 병, 그 야속한 죽음. 그것만 없었다면 어머니는 살아있었을 텐데. 그러면 아버지도 미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행복했을 텐데.

그러니 나쁜 것은 아버지가 아니다. 정말로 사악한 건, 아버지를 이렇게 만든 잔혹한 병마 때문이다….

‘미안하구나, 티르.’

한 줄기 바람 소리가 그녀를 깨웠다. 깜빡 졸았었던 모양이다. 먼 곳에서 동이 트고 있었고, 나무에서 새 지저귀는 소리가 났다.

소녀는 다급히 몸을 추스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밤이 다 지났는데도 아버지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걸까? 만일 그녀를 보았다면 분명히 깨웠을 텐데.

아니, 너무 지쳐서 옆으로 눈을 돌릴 틈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길목을 바라보던 소녀는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아버지가 아직 안 계시면 다시 나오면 그만이니까.

그렇게 길을 거슬러 올라가,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작은 오두막집에 도착할 무렵.

불길한 예감이 그녀를 스치고 지나갔다.

커다란 말이 집 근처에 매여 있었다. 랄리온보다도 두 배나 크고, 갈기가 멋들어져 아름다운 준마였다. 보기만 해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흰 안장에는 성교회의 인장인 십자가가 있었다….

그걸 알아본 순간, 소녀는 다급히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나쁜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았다.

문을 열자 비릿한 피냄새가 풍겼다. 그리 넓지 않은 집이라 소녀는 들어가자마자 모든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집에 있는 건, 차가운 강철 갑옷을 입은 세 명의 괴한.

그리고 그중 한 명이 쥐고 있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날과.

그 아래, 피를 흘리며 쓰러진 아버지까지.

“아버지!”

소녀는 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아버지의 옆에 주저앉았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의 눈에 잠시 초점이 돌아왔다.

잠시 반가움에 흐려지던 눈가가 크게 떠오르며 경악과 공포에 물들었다.

“티르…. 도망….”

“안 돼요! 아버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희미한 목소리. 그러나 아버지는, 죽기 직전 모든 힘을 끌어내어, 피거품과 함께

“어떻게… 든…. 살…거라. 내… 희망….”

“아버지!”

큰 상처다. 굳이 치료사가 보지 않더라도 가망이 없다는 사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할 수 있을까? 모른다. 아직 살아있는 사람을 상대로 이토록 힘을 크게 써본 적은 없다.

하지만 해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아버지가 죽을 테니까. 소녀는 눈을 감고는, 흘러나오는 핏물에 지배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신관이시여. 이 소녀는 어찌할까요?”

“두고 돌아간다. 우리는 징벌자이지 살인자는 아니다. 필요한 건 전부 얻었으니….”

그리 중얼거리던 신관이 어느 순간 입을 다물었다.

소녀의 손가락을 따라 피가 움직인다. 아버지의 가슴팍에서 솟구친 피는, 소녀의 인도 아래 제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핏물이 용솟음친다.

엎어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으나, 피는 그러할 수 있었다. 소녀는 필사적으로 아버지의 피를 돌이켰다.

“…신관이시여. 저건.”

훅. 신관이 손을 들었다. 무거운 침묵이 그들을 내리눌렀다.

하늘이 내리누르는 듯한 묵직한 어조로, 신관이 소녀를 향해 말했다.

“꼬마야. 이름이 무엇이냐?”

뒤에서 들려오는 말에 소녀는 정신을 차렸다. 저 사람들은, 분명 아버지를 벌하러 온 사람들. 소녀가 하는 일을 가만히 지켜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만두면 아버지는 죽는다. 그렇게 둘 수는 없다. 여전히 혈조술을 펼치며, 소녀는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티, 티르에요. 죄송해요. 앞으로는 안 할 테니까, 제발, 아버지를 살려주세요….”

“티르, 그래. 티르. 좋은 이름이구나. 아버지가 지어주셨니?”

“네, 네. 아버지는, 좋으신 분이에요. 많은 사람을 도와주셨어요.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제가 말릴 테니까….”

효심이 지극한 소녀의 애원이었다. 눈앞의 괴한에게 자비심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대로 발걸음을 돌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신관. 신앙과 의무감으로 지은 갑옷에는 자비가 스며들 수 없으니.

“나는 네 아버지를 살릴 수 없다. 다만.”

푸욱.

아무런 예고도 없이, 신관의 검이 소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어, 하는 얼빠진 소리. 살갗을 가르고 들어오는 차가운 금속의 감각, 두근거리는 심장 끝으로 요동치는 칼날.

어느 순간 끔찍한 고통이 뒤이었다. 관통당한 허파에서 올라온 피거품을 쏟으며, 티르는 마루 위로 허물어졌다.

세상이 흐릿하다. 고통만이 머리를 뒤흔든다. 소녀의 의식이 점점 가라앉는다.

이즈음 해서 소녀의 기억이 희미해졌다.

소녀의 쓰러진 몸 위로 신관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네 아버지와 같은 곳으로 보내주마.”

신관이 칼날을 흩뿌렸다. 핏자국이 나무로 된 마루에 검의 궤적을 그렸다.

그게 소녀가 살아있을 적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반성하겠다. 필요없는 동정심 때문에 일을 그르칠 뻔했어.”

“정화합니까? 횃불을 가져올까요?”

“아니다. 우리는 경고를 새겨야 한다. 건물 밑에 있는 시체를 들추어내고 떠나자.”

“예. 신관님.”

“위험했구나. 이런 곳에 마신(魔神)의 씨앗이 있었다니 말이야….”

“선생님, 저 오늘 팔이 뻐근한데…. 꺄아악!”

“살인이야! 살인이야! 선생님이 죽었어! 티르도!”

“어? 시…체?”

“잠깐, 이거 저번 달에 돌아가신 아주머니….”

“여기! 다른 시체도 잔뜩…!”

“설마 요즘 들어 무덤이 파헤쳐진 게 다 선생님, 아니, 이 악마가….”

“악마….”

“천벌을 받은 거야….”

“불길해. 아무도 오지 못하게….”

“….”

“쯧쯧. 아무리 죽은 자의 무덤을 욕보이는 대죄를 저질렀다곤 하나, 이들의 육신도 죄악도 모두 대지에서 왔는데 돌아가지 못하는 건 안타깝지 아니한가. 지모신을 모시는 입장에서, 이리 놔둬 저주받게끔 할 수가 없구나.”

“아비와 딸이 죽으면서까지 마주 보고 있구나. 필시 서로에게는 상냥한 가족이었을 터. 후우, 오랜만에 장례나 치러볼까.”

“좋아. 다 묻었다. 후우. 오랜만에 힘을 쓰니 힘들구나.”

“부디, 지모신의 품 안에서는 안온하기를.”

그러나.

소녀의 심장을 찌른 신관도.

그들을 방치한 마을 사람들도.

소녀를 아비와 함께 묻은 매장자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심장에 찔린 소녀가, 그 상처에도 불구하고 아직 죽지 않았음을.

인고의 시간이었다. 소녀는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무덤 속에서 필사적으로 생을 이어갔다. 눈앞에서 아버지의 시체가 썩어들어가는 걸 보면서도 소녀는 삶을 놓지 못했다.

그것은 아버지가 남긴 한마디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원초적인 본능 때문일까.

소녀는 몸 밖으로 흘러나가려는 피를 붙잡으며, 다가오는 죽음을 악착같이 밀어냈다.

‘어두워….’

당연히 어두울 수밖에. 아비랑 나란히 관 속에 누워서 땅 아래에 묻혀있다. 지금까지 그러했고, 앞으로도 영영 그럴 것이다.

그러할진대 색이 필요할까? 빛을 막아내기 위해 만들어낸 색소가?

필요없다. 모든 색을 지워내라.

‘배고…파.’

먹을 것이라고는 눈앞에 있는 아버지뿐….

소름이 끼친다. 먹으라고? 아버지의 시체를? 그럴 수는 없다. 그런데도 패륜과 식인을 요구하는 허기가 야속하기만 하다.

차라리 굶주림을 느끼지 않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목, 말…라.’

굶주림이 없는데 침이 필요할까? 잃을 것이 없는데 눈물이 필요할까?

다 필요 없는 것들이다. 버려라.

‘아파….’

어째서 아픔을 느껴야 하는가? 어떤 늙은 철학자가 말한 대로라면, 고통은 살아있다는 증거 아닌가? 그렇다면, 이미 생명을 잃은 소녀에겐 아픔은 무의미하다.

끝까지 자신을 쫓아와 괴롭히는 아픔이 야속하다. 버려야 한다.

색조 따윈 필요 없다. 지워내라.

욕망 따윈 필요 없다. 잘라내라.

눈물 따윈 필요 없다. 비워내라.

고통 따윈 필요 없다. 긁어내라.

그렇게, 소녀는 자기가 가졌던 피와, 아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삶의 흔적과 나란히 누워 인고의 세월을 견뎠다.

그러는 동안 혈조술은 날이 갈수록 극에 이르렀다.

생존을 위한 모든 활동이 멈추고, 오직 피만 움직여서 몸을 꾸려왔다. 한때 가정을 악착같이 꾸려오던 소녀는, 그녀의 몸을 대상으로 피도 눈물도 없는 징수관이 되었다.

그렇게, 필요 없는 것을 전부 버려가며, 자신의 손끝 발끝의 핏줄 하나하나 천천히 지배하게 된 소녀는.

점차 범위를 넓혀나가, 땅 위에 흩뿌려진 모든 피를 손에 넣은 그녀는.

어느 순간, 관 뚜껑을 열고 세상에 나왔다.

“아아.”

건조한 중얼거림이 흘렀다. 오랫동안 쓰지 않아 말을 잊어버렸다 생각했는데, 다른 것을 다 버려냈어도 언어는 아직 남아있던 모양이다.

사방이 어두웠으나, 소녀의 눈에는 어둠이 익숙했다. 매일같이 어둠 속에서 살아온 결과였다.

소녀가 깨어났을 땐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마을도.

세상도.

사람도.

달라지지 않은 건 소녀뿐….

아니, 어쩌면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일지도.

수많은 것을 버렸지만, 그래도 남은 것은 있었다. 차갑게 타오르는 정제된 분노. 그건 소녀의 눈앞에 아버지의 시체 모습으로 남은 덕분에, 그 영겁의 시간 동안 잊지 않을 수 있던 감정이었다.

소녀는 피를 움직여 몸을 걷게 만들었다. 조종당하는 꼭두각시처럼 어색한 발걸음이었으나,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익숙해졌다.

목적지는 없으나 목적만이 남은 길을 걸으며, 소녀는 그녀의 업을 되뇌었다.

천신의 사도들에게, 그녀가 잃었던 것만큼을 빼앗아 갈 것이었다.

-그러한 이야기.

소녀는 그렇게 버려낸 것을 한 데 모아 벼려내었다. 너무 오래되었고, 너무 고통스러워 잊어야 했던 인고의 기억. 아버지의 시체와 마주 보며 몸을 하나씩 덜어냈던 시간을 모아 한 장의 카드에 담았다.

마법은 자기 세상의 발현이다. 소녀는 1200년 전 사라지고 없는 자신을 떠올리며 유품을 만들었다.

하얀 카드 위에 그려진 붉은 하트가 핏빛으로 빛났다.

소녀는 소녀의 가슴에, 붉은 카드 한 장을 찔러넣었다. 한없이 아프고, 다정하게.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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