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77화 (77/384)

EP.77 상실의 시대

굳게 닫힌 철문이 무겁게 열렸다. 아지와 셰이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드디어, 사흘간의 칩거를 끝내고 그와 티르칸쟈카가 밖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멍! 멍!”

“야!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둘이 성큼성큼 문으로 다가갈 때였다.

그보다 더 빠르게, 좁은 문틈을 비집고 티르칸쟈카가 혼비백산하여 뛰쳐나왔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티르칸쟈카는 셰이를 보고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셰이! 셰이! 큰일이다! 그가!”

언제나 관 위에 우아하게 앉은 채 느긋하게 행동하던 티르칸쟈카였다. 흡혈귀의 시조이자 그림자의 여왕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기품을 가졌던 그녀가, 지금은 엉망이 된 얼굴로 뛰고 있었다.

티르칸쟈카의 낯선 모습에 셰이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어? 어쩐 일이야, 티르칸쟈카? 늘 타고 다니던 관이랑, 그 남자는…?”

의문은 금방, 그리고 동시에 풀렸다. 마침 철문이 완전히 열리고, 커다란 관과 그 위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그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티르칸쟈카의 전용석이었던 곳을 차지한 채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앉아있는 교관.

그 뻔뻔한 얼굴이 반가우면서도 새삼 화가 치밀었다. 셰이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

“마침 잘 나타났다! 도대체 무슨 의식을 치른 거야? 그 쪽지에 썼던 건 또 무슨 뜻이고? 빨리 내려와서….”

“그게 문제가 아니다, 셰이!”

티르칸쟈카가 셰이를 붙잡았다. 평소의 그녀라고 생각지 못할 만큼 급한 움직임이었다.

도대체 무얼까. 왜 티르칸쟈카가 이리 당황해하고, 저 남자는 멍하니 관 위에 앉아있기만 하는 걸까?

셰이의 머릿속에 이러한 의문이 들 때쯤.

“그가 기억을 잃었어!”

“뭐어?”

생각을 싸그리 날려버리는 말이 들려왔다.

티르칸쟈카는 셰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티르칸쟈카 역시 아는 바가 많지 않았기에 설명은 금방 끝났다.

결과를 전해들은 셰이가 반신반의하여 물었다.

“정말 심장이 뛰는 거야? 저 남자가 해냈다고?”

“그렇다! 정말로 뛰었어!”

“말도 안 돼. 마법사라도 못할 텐데, 마법사도 아닌 저 남자가 도대체 어떻게…. 정말 다시 뛰는 게 맞아? 착각한 게 아니라?”

어찌 보면 타당한 물음이었으나, 그건 소망을 이루었다는 기쁨과 그에 대한 걱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티르칸쟈카의 기분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였다.

티르칸쟈카가 옅게 남아있던 들뜬 감정을 싹 지우며 셰이를 노려보았다.

“설마 내가 이런 중대한 일로 너에게 거짓을 말하겠느냐? 아니면 그가 나를, 나의 혈조술을 속였다는 말이냐? 어찌, 펄떡거리는 심장이라도 보여주어야 믿겠느냐?”

“아니, 그런 뜻은 아니었어. 그냥, 심장을 되살리는 게 이토록 쉬웠다면….”

쉬웠다면 도대체 왜 이전 회차에서는 도달하지 못한 걸까, 셰이는 그렇게 말하려다 아슬아슬하게 멈추었다. 아직 회귀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는 티르칸쟈카의 기분을 더욱 언짢게 했다.

“쉬워? 지금 저 아이의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티르칸쟈카의 호통에 셰이가 찔끔했다. 셰이가 뭐라 변명할 새도 없이, 티르칸쟈카는 관 위에 놓인 그를 가리키며 외쳤다.

“3일 동안이나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음식 하나를 입에 대지도 않았다. 곡기를 끊고, 티끌만큼도 움직이지 않은 채, 관 속에 있는 흡혈귀보다도 고요하게 앉아있다가! 마지막에 나의 심장을 되살리고, 그 대가로 기억을 잃었다! 이런 무모한 일을 감수하였는데, 쉬웠다고?”

하지만 1200년 동안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한 것 치고는 쉬웠잖아.

라고 투덜거리기엔, 티르칸쟈카의 태도가 너무나도 진지했다. 셰이는 입을 다물며 수긍하는 척했다.

‘그래도… 흥분하는 걸 보면, 정말 심장이 다시 뛰나 봐.’

만일, 여전히 심장이 멈춘 상태였다면 티르칸쟈카는 셰이의 말에 동의하진 않더라도 최소한 이해했을 거다. 차가운 피를 지닌 흡혈귀는 쉽사리 흥분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한 발짝 떨어져 관조하게 되니까.

저토록 흥분한다는 사실이 곧 그녀가 감정을 되찾았다는 증거.

‘좋은 일이야. 빨리 그 남자의 기억을 되찾게 해서 방법을 알아내자! 그러면 다음 회차부터는 티르칸쟈카를 설득하기 훨씬 쉬울 거야. 만일 기억을 영영 되찾지 못한다고 해도, 다음 회차에 그를 동료로 삼으면 되니까! 어쨌든 공략의 방도를 찾았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야!’

회귀자라는 입장에서 계산을 끝마친 셰이는 순순히 기뻐했다.

“어쨌든 축하해! 이제 그 녀석만 깨우면 되겠네!”

“후우. 셰이, 너는….”

무언가를 말하려던 티르칸쟈카는 눈을 감고 감정을 가라앉혔다.

심장이 멈춰있을 적에는 이러한 과정도 필요치 않았으나, 되찾은 지금은 마음 먹은 대로 감정이 흘러가지 않았다.

새삼 자신이 무엇을 얻었는지, 무엇을 되찾았는지 되새긴 티르칸쟈카는 다시 한번 그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며 말했다.

“되었다. 지금 너와 입씨름하려고 여기 있는 건 아니니. 어때. 그의 기억을 다시 돌려놓을 방도가 있겠느냐?”

“으음, 나 같은 경우는 천반경으로 대부분을 해결하는 편이지만….”

특정 동작을 몸에 새겨서 대응하는 궁극의 방어기공, 천반경.

낮은 성취에서는 단순히 불의의 접근에 대한 반사적인 반격을 행할 뿐이나, 성취가 높아질수록 그 진가가 발휘된다.

마음은 몸을 따라가기 마련.

몸에 익은 동작을 반복하는 것으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정신과 영혼을 안정된 상태로 돌려놓을 수 있다. 천반경 덕에 셰이는 심장을 멈추게 하는 저주나 혼 빼놓기 등 정신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정신계통 공격을 방어하고 의식이 없는 상황에서 돌연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셰이는 매 회차마다 가장 먼저 천반경을 극성으로 익혔다.

“…하지만 아마 그에게는 그런 방도가 없겠지. 설마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알 수 없고.”

티르칸쟈카의 표정이 절망으로 무너졌다. 흡혈귀답지 않게 표정이 참 다채로워졌구나, 새삼 깨달은 셰이는 마침 사흘 전에 받은 쪽지에 생각이 미쳤다.

혹시, 그 의미 모를 말이?

셰이가 포켓을 뒤적거리는 동안 티르칸쟈카는 허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계속 기억을 잃은 채로…. 세상에, 나를 구하기 위해….”

“잠깐만. 티르칸쟈카. 기다려 봐.”

“정말, 무어라 할 말이 없구나. 나는 나의 미망을 이루기 위해 그의 미래를 빼앗았다….”

“이것 좀 봐봐.”

“어쩔 수 없구나…. 내가 그의 평생을 빼앗아간 만큼, 그것을 보상해야겠지…. 내가 평생을 곁에 두고 보살피도록 하마….”

점점 이야기가 무거워지는 티르칸쟈카를 만류하며, 셰이는 쪽지를 꺼내 팔랑팔랑 흔들었다.

“잠깐! 기다려 봐! 그 녀석이 나한테 남긴 쪽지가 있어!”

티르칸쟈카의 눈이 쪽지에 향했다. 셰이는 그녀의 눈앞에 쪽지를 펼치고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 쪽지에는 별 내용이 적혀있지 않아. 아지를 보살피고 지하 무기고에 가까이 오지 말라는 이야기뿐이야. 하지만 여기, 눌린 자국에는 다른 글씨가 적혀있어!”

“눌린 자국?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아, 그러겠네. 그럼 내가 읽어줄게.”

식당에 가지 말 것.

끝나고 내 상태가 이상해져도 함부로 건드리지 말 것.

혹여나 보급품이 도착한다면, 자신에게 사용할 것.

깊이를 보는 눈으로 글씨를 또박또박 읽은 셰이가 쪽지를 다시 접고는 으스대며 말했다.

“그 녀석도 자기가 이상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예상한 거야. 봐봐. 끝나고 자기 상태가 이상해져도, 라고 적혀있잖아. 아마 이때를 위해 나에게 맡긴 모양이야.”

“…왜 굳이.”

“여기에는 식당에 가지 말라고 적혀있지만, 어디 가지 말라는 건 그곳에 꼭 가라는 뜻이나 마찬가지지. 아마 식당에 가면 뭔가 있을….”

쪽지를 가리키며 설명하던 셰이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티르칸쟈카는 심통이 난 얼굴로 볼을 부풀리고 있었다.

셰이는 티르칸쟈카의 태도에서 무언가 이질감을 느꼈다.

단서를 찾았다면 기뻐해야 하는데, 왜 불만스러운 기색이지?

“어찌하여 그 쪽지를 굳이 너에게 건넸다는 말이냐?”

어라. 셰이는 저도 모르게 멍청한 소리를 냈다.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동안 티르칸쟈카는 셰이를 흘겨보며 불만을 토해냈다.

“그냥 나에게 건넸어도 될 것을. 어찌하여 한 차례 건너 너에게 맡겨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지. 눈을 뜨면 바로 보는 게 나였을 것인데, 내가 쪽지의 내용을 미리 알았다면 이리 걱정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어어?”

잠깐만. 도대체 저 태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셰이는 너무 당황해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동안 티르칸쟈카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다,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얼굴로 손을 말아쥐어 손바닥을 쳤다.

“아아. 드디어 알겠구나. 필시 식당에 가지 말아야 하는 사람은 셰이, 너인 것이 분명하다. 네가 식당에 가지 못하게 막기 위하여 너에게만 그 쪽지를 건넨 것이야. 그게 아니라면 구태여 너에게 맡길 이유가 없으니까.”

“어어어?”

“더불어, 어찌 되었건 바깥에 남은 건 셰이 너 하나뿐이니 겸사겸사 그리 전한 게 아니겠느냐? 좋다. 내가 그를 데리고 식당으로 가마. 가보면 무언가 나오겠지.”

티르칸쟈카는 곧장 달려갈 기색이었다. 멍하니 있던 셰이가 다급히 말을 붙였다.

“잠깐, 티르칸쟈카. 나도 갈게! 너는 아마 찾기 힘들….”

“쪽지의 내용을 어길 셈이냐? 기다리고 있거라. 도움이 필요하거든 내쪽에서 부르마.”

‘아니, 쪽지의 내용이 뭐라고 따르려는 거야? 어차피 저 녀석이 쓴 건데, 이 정도는 어겨도 상관없잖아!’

그러나 티르칸쟈카의 태도는 완고하여, 무슨 일이 있어도 셰이를 떨어뜨려놓고 가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셰이는 괜히 억울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먼저 가볼걸. 괜히 쪽지에 적힌 지시를 그대로 따랐어!’

셰이는 지나칠 정도로 모범적이었던 사흘 전의 자신을 크게 나무랐다. 혹시나 있을 다음 회차에서는 이 남자가 시키는 짓을 그대로 따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멍멍! 멍멍!”

그때 아지가 즐거이 짖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며칠 만에 듣는, 만족감에 가득 찬 소리였다. 셰이는 반사적으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아지가 그를 데리고 놀고 있었다.

그는 초점 없는 눈으로 아지의 뒤를 쫓으며 공을 던졌다. 공이 힘없이 올라갔다가 떨어진다. 아지가 좋다고 그것을 물고 돌아가면, 그는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한 채 아지를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아지가 신이 나서 몸을 기대자, 그 충격에 그는 힘없이 비틀거리다 땅 위로 넘어졌다.

아지가 화들짝 놀라 짖었다.

“멍멍멍! 멍멍멍!”

티르칸쟈카가 혼비백산하여 황급히 그쪽으로 달려갔다.

“개, 개의 왕. 잠시 그를 놓아두거라!”

“멍멍멍! 어떡해? 어떡해?”

“놓으래도!”

난리가 났다. 놀라서 짖는 아지와, 어찌할 줄 모르는 티르칸쟈카. 둘은 쓰러진 그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셰이는 저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기억을 잃었다는 건 진짜인 모양이네…. 혹시나 했는데, 장난은 아닌가 봐.”

그리 말하던 셰이는, 문득 이 와중에도 의심하는 자신이 조금 너무한가 반성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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