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4 진짜 교관, 가짜 교관
쪽지에 적힌 마지막 글귀는 다음과 같았다.
‘보급품이 도착하면, 자신에게 사용할 것.’
주어진 모든 의문에 대답할 존재는 오직 그뿐이나, 그는 지금 자신을 잃고 멍하니 앉아있다. 이제 남은 단서라고는 보급품밖에 없었다.
티르는 식당에 묶여있는 골렘에게 향했다.
골렘은 애완동물이라도 된 것처럼 그림자로 된 사슬에 발목이 묶여있었다. 티르칸쟈카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림자 사슬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자유를 되찾은 골렘에게 티르가 스피커를 건넸다. 골렘은 하도 잡아 뜯기는 바람에 이제 헐렁해진 스피커를 입 부분에 끼워 넣고는 힘없이 말했다.
『…무슨 용건이십니까?』
“물을 것이 있다. 보급품에 대해서다.”
골렘의 몸체가 분노로 삐걱거렸다. 천천히 티르를 올려다본 골렘은 주먹을 콱 움켜쥐며 말했다.
『보급품은 곧 도착할 것입니다. 다만.』
마이크에서 흘러나오는 통신병의 목소리에는 확고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보급품은 본관이 수령하겠으나, 탄탈로스로 보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말은 보급품만 기다리고 있던 티르에겐 청천벽력이었다.
“어, 어째서? 보급품을 우리에게 건네는 게 너의 의무 아니더냐?”
『탄탈로스 내부의 교육생이 본관에게 비협조적일 경우, 본관의 직권으로 보급을 지연하거나 지급을 정지할 수 있습니다. 본관은 본관에게 주어진 권한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비, 비협조적이라니. 내가 언제 그러하였다고.”
『본 기체를 구속하고 스피커를 떼어낸 것은, 초등시민학교를 나온 아이도 비협조적이라고 평가할 만한 상황입니다.』
차마 반박할 말이 없었다. 티르는 그때는 물론, 지금도 골렘에게 협조할 생각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비겁한 수를.”
『그러한 권한도 없다면, 귀하와 같은 강대한 존재를 어떻게 컨트롤하겠습니까?』
티르가 팔을 뻗었다. 그러자 그림자에서 무수히 많은 흑기사가 일어나 식당을 빼곡히 채우기 시작했다.
무수한 군세를 다루는 시조의 지배력, 그 일부를 세상에 선보이며, 시조 티르칸쟈카는 골렘을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시조 티르칸쟈카다. 그림자의 여왕이며, 모든 흡혈귀의 뿌리. 세계를 삼킬 괴물이라는 칸쟈카의 이름을 받은 존재. 네가 감히 나를 협박하는 것이냐?”
그러나 골렘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본관은 군국 통신병 에이비 대위입니다. 통신병은 지휘부 이외에는 그 어떤 명령도 받지 않습니다. 설사 죽는다고 하더라도.』
불굴의 의지를 담은 말. 골렘은 죽음 따위는 겁먹지 않는다는 듯 장렬하게 말했다.
『만일 보급품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면, 본 기체를 파괴하십시오. 본관은 탄탈로스를 지켜볼 눈을 잃겠지만, 귀하는 앞으로 존재하는 모든 보급품을 잃을 것입니다.』
“네까짓 게…! 골렘 주제에…!”
『설사 본관의 본신을 부수더라도, 본관은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본관은 군국의 통신병이기에!』
다급한 쪽은 티르였다. 보급품이 없다면 그가 당부한 바를 이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고한 존재이자 모든 흡혈귀의 뿌리인 시조 티르칸쟈카가, 고작 골렘 하나의 협박에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야 한다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티르는 삶에 아무것도 필요치 않은 흡혈귀였지만, 그는 그렇지 않으므로.
“하나만 묻겠다. 보급품이 너에게 있는 것은 확실하렷다?”
『긍정. 조금 전, 해당 보급품은 감시관과 함께 이곳에 도착하였습니다. 감시관의 주변 평가가 끝난 이후 본관이 해당 보급품을 수령할 예정입니다. 그 시점부터 보급품을 지급할지 여부는 온전히 본관의 재량! 만일 귀하가 보급품을 받고 싶다면, 본관의 지시에 협조하십시오!』
“…그래. 어떻게 협조하기를 원하느냐?”
『일단! 본 기체에 대한 그 어떤 적대적 행위도 중지할 것. 본관이 질문하는 사안에는 성심성의껏 답변할 것. 주기적으로 탄탈로스의 상황을 관찰할 기회를 마련할 것! 그 이외에도 48가지 세부사항이…!』
그때였다.
팡!
허공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이불보처럼 넓고 두꺼운 천을 털 때 들릴 법한 소리였다.
혹은, 낙하산이 펴질 때 나는 소리 같기도 했다.
골렘도, 티르도 말을 멈추었다. 잠시 서로를 빤히 바라보는 둘. 티르는 창문을 열고는 바깥을 내다보았다.
창문 밖으로 보급 상자가 떨어지고 있었다. 커다란 낙하산 하나에 의지한 채.
『…어?』
골렘의 마이크에서 얼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직후, 상자가 콘크리트땅에 부딪히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희망을 깨부수는 소리.
『어째서? 멋대로 보급품을?』
우열이 뒤바뀐다. 티르는 저 아래로 떨어지는 낙하산을 눈에 담으며 찬찬히 창문을 닫았다. 철컥, 하고 걸쇠 걸리고, 식당은 다시 밀폐된 공간이 되었다.
완전히 어둠에 잠긴 식당에서, 티르의 음산한 목소리만이 공기를 울렸다.
“보급품이 도착했구나. 이제 어찌할 거냐?”
『….』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골렘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뻔뻔해지는 것이었다.
『보, 본관은 귀하의 협조적인 태도를 높이 사, 해당 보급품을 선지급하였습니다. 그러니 귀하도 아까 합의한 내용을 지켜주기를 희망하는 바입니다.』
“합의? 우리가 합의에 비슷한 것이라도 한 적이 있더냐?”
그러나 완전히 뻔뻔해지기엔 목소리에 자신감이 부족했고, 합의했노라 부르짖기엔 보급품이 너무 일찍 내려왔다.
사실, 어떻게 하더라도 통하지 않았겠지만.
“유언은 그게 끝이냐?”
『자,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저건 뭔가 착오가.』
“착오는 너에게 생긴 것 같구나. 쓸모없는 입에서 여전히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아, 안 돼…. 읍!』
그림자로 만들어진 채찍이 골렘의 전신을 휘감았다. 사방에서 조여드는 채찍에 속박당한 골렘은 티르가 식당 밖으로 나서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셰이는 보급 상자가 투하된 곳으로부터 열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상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보급품이 왔다는 것 자체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탄탈로스에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 원래 이 정도 규모의 시설이라면 하루에도 몇 번 보급품이 도착하고는 한다.
또 그가 이미 쪽지로 예고한 일이기도 하니, 언젠가 도착하리라는 건 예견된 사실이었다.
그러나 셰이는 지금 경계심을 끌어올리고 있었는데, 보급 상자 안에서는 이질적인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왜 상자 안에 사람이 들어있는 걸까?
“도착했느냐?”
“응. 그런데 뭔가…. 이상해.”
어둠을 두르고 날아온 티르가 셰이의 옆에 내려앉았다. 마음이 앞선 티르가 곧장 상자를 확인하려고 다가가다 셰이에게 저지당했다.
“잠깐, 티르칸쟈카. 저 안에는 뭔가가 있어.”
“…음? 그건 나도 알고 있다. 안에 무언가를 담아두기 위한 상자 아니더냐.”
“아니,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 말이야.”
셰이가 그리 중얼거릴 때였다.
상자의 뚜껑이 들썩이며 그 안에서 딱딱하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재 탄탈로스에는 관리인력으로 배치된 노역자가 있다고 들었다. 아직 근무시간일 텐데, 어째서 보급품을 수령하러 오지 않는 것이지?”
철컥철컥. 상자의 안쪽에서 잠금쇠가 풀렸다. 보급상자의 뚜껑이 열고 나타난 건 군국의 제복을 차려입은 여인이었다.
빳빳한 제복에는 한 점의 구김도 없었으며, 어깨선은 각이 잡혀있었고, 제복 위로도 확연히 보이는 가슴에는 반짝이는 훈장 두 개가 매달려 있었다. 자기가 군국의 장교라고 모두에게 주장하는 듯했다.
어딘가의 수상한 교관과는 완전히 딴판인, 그야말로 장교의 본보기 같은 차림이었다. 셰이가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낄 만한….
정모를 옆구리에 낀 채로 나온 그녀는, 모두를 둘러보며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쯧, 군국의 기강도 해이해졌군. 자기들을 위한 보급품이 도착해도 수령하러 나서지 않는 꼴이라니.”
듣기만 해도 싫증이 차오르는 목소리. 딱딱하고, 권위적이며, 틀에 박힌 듯한 말투가 세이의 귓가를 때린다.
‘자를까….’
셰이가 진지하게 고민하던 차.
장교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정모를 썼다. 그러자 칼처럼 잘라낸 단발이 선을 만들어낸다. 장교는 각을 맞춘 다음, 턱을 한껏 든 채로 말했다.
“반갑다. 본관은 오늘부로 이 탄탈로스의 교관으로 부임한 칼리스 크리츠 중령이다. 금일부로 이곳의 총책임을 맡게 되어, 이에 신고한다.”
“교관이라고?”
“그렇다, 교육생.”
의문이 들었다.
탄탈로스 정도 되는 규모에 교관이 두 명이라도 이상하지는 않다.
하지만 현재 이 안에 있는 교육생은 기껏해야 넷이며, 그마저도 판단에 따라 줄어들 수 있다. 조각 난 불사자나 개의 왕은 사람으로 취급하기 모호한 탓이다.
그런데 교관이 둘이나 파견된다니?
“안심하라. 본관은 교육생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여기 남아있는 ‘모범적인’ 교육생들은 장차 군국의 협력자가 될지도 모르는 존재들. 제군들을 더 나은 길로 이끌기 위해 본관이 이곳에 임한 것이다.”
심지어, 이전에 있던 교관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태도로…. 새로 부임했다면, 지위와는 관계없이 먼저 존재하는 책임자에게 신고하는 게 정상일 텐데.
솟아오르는 의구심이 막연한 적의를 억눌렀다. 셰이가 가만히 사태를 지켜보는 무렵.
티르는 사람에겐 관심도 두지 않고, 그림자를 부려서 보급 상자를 뒤지고 있었다.
“그보다, 보급품은 어디 있느냐?”
티르는 보급품을 찾았다. 그림자로 된 거대한 손이 아예 보급상자를 뒤집고 탈탈 털었지만, 보급품은커녕 먼지 한 톨도 떨어지지 않았다.
의아해하던 티르는 이내 묘한 시선을 칼리스에게 보냈다.
“혹시 네가 보급품이냐…? 흐음. 사람은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기계처럼 딱딱한 군국의 장교라도 생명의 위협 정도는 느낀 탓일까. 칼리스는 장교답지 않게 서둘러 품 안을 뒤졌다.
“보급품이라면, 아마 이것을 말하는 것일 터.”
칼리스가 안주머니에서 네모난 종이 갑을 꺼냈다. 엄지로 툭하고 위쪽을 밀자, 뚜껑이 벌어지며 종이로 동그랗게 말린 두꺼운 엽궐련이 나타났다.
“마력초. 3레벨 사치 물품. 쯧, 장교조차도 상부의 허가 없이는 피우기 힘든 기호품이거늘, 일개 노역자를 위해 배급하다니…. 군부도 이곳이 탄탈로스라고 특별취급하고 있군. 그래봤자 사람 사는 곳이거늘.”
불만스러운 듯이 중얼거리던 그녀는 마침 근처로 다가온 그림자의 손에 마력초 갑을 건넸다. 그림자의 손은 마력초를 낚아채고는 곧장 티르에게로 날아갔다.
마력초는 몸을 이완시키며 신경을 안정시키는 향정신성 약초. 미약한 마력 회복 효과를 지니고 있으며, 보통 종이에 말아 궐련의 형태로 사용한다.
아마 저게 ‘그’가 요구한 보급품일 것이다…. 셰이는 그렇게 판단했다.
과연 저것으로 잃어버린 기억을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또 모른다. 무언가를 숨겨두었을 수도.
“잠깐. 그보다. 노역자라고?”
그제야 셰이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중얼거렸다.
노역자라니? 무슨 말인가. 이곳에서 마력초가 필요한 사람은 영 믿지 못할 교관이 하나….
영 믿지 못할….
설마.
“그래. 노역자. 아무도 모르고 있었나?”
칼리스는 쯧, 하고 혀를 차며 말했다.
셰이가 그토록 궁금해했던, 그에 대한 진실을.
“휴즈. 그 남자는 탄탈로스에 배치된 노역자다. 아미텐그라드 13-3구역에서 내기 도박을 하다가 긴급체포된 이후 탄탈로스 노역형을 선고받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