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4 바람을 듣는 이
오랜 잠에서 깬 불사자는 곧장 캐비닛을 박차고 뛰어내렸다.
힘차게 바닥에 착지한 그는 잠시 비틀거렸다. 대충 갖다 붙인 팔과 다리가 아직 다 붙지 않고 흔들거렸던 탓이다.
그러나 그는 재생능력을 가진 불사자였고, 마침 정기가 온몸에 충만한 상태였다.
“흡!”
불사자가 힘을 주자, 살짝 뒤틀려있던 팔과 다리가 순식간에 제 위치로 돌아왔다. 몸에 잔뜩 나 있던 생채기가 순식간에 아물었고, 바싹 말라 있던 몸이 물에 흠뻑 젖은 것처럼 단숨에 부풀어 올랐다.
완전히 부활한 불사자는 자기 손발을 내려다보며 외쳤다.
“오! 정기가 충만하군! 어떻게 된 일이지?”
불사자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때, 마침 그의 앞에 서 있던 장교가 목에 빳빳이 힘을 주고 말했다.
“탄탈로스 교육대, 라쉬. 맞나?”
불사자가 냉큼 대답했다.
“그렇소! 눈을 뜨자마자 이토록 아름다운 미인이 나를 반기다니. 지금까지 내 삶이 헛되지 않았구려! 이 또한 대지모신의 안배이리니!”
“…미인?”
“그럼, 아름다운 사람을 보고 미인이라 하지 않으면 무어라 말할까!”
불사자의 말은 능청스러웠으나 너무 갑작스러웠기에, 장교는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는 그저 인상을 찌푸렸다.
“말장난할 시간 없다. 본관은 탄탈로스의 교관으로 발령받은 칼리스 크리츠 중령이며, 이 탄탈로스의 관리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장교가 꾸러미를 열고는 그 안에 있던 물건을 꺼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것을 보고 있던 라쉬는, 물건의 정체를 알아차리고는 화색이 되었다.
“이건 세계수 잎이 아니오!”
“알아보는군.”
짐승에게 왕이 있다면, 풀과 나무엔 세계수가 있다.
그러나 짐승과는 다르게 식물의 왕은 인간의 모습을 하지 않았다.
인간은 지상의 지배종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짐승의 영역에 한해서다. 아무리 오만한 인간이라도 감히 인류가 식물까지 지배한다고 말할 수는 없으리라.
실제로도 그러했다. 식물은 짐승이 어떻게 되든 신경조차 쓰지 않고 원래의 모습을 간직했다.
수도 없이 피고 지는 꽃이나 풀에게도 왕은 있으나, 그들의 왕은 찾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 식물의 왕은 각자의 모습을 하고 있어 구분해내기 어려우며, 설사 천운이 따라서 발견한다 한들 뽑는 순간 그 명이 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몇 나무는 수천 년 동안 살아갈 수 있으며, 그것은 그 나무의 왕도 마찬가지.
나무의 왕은 짧게는 수십, 길게는 수천 년을 살아왔고, 그중에는 너무나 오래 존재하여 소재가 밝혀진 나무의 왕이 존재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세계수라 불렀다.
수천 년 동안 대지의 정기를 한껏 머금은 그것들은 뿌리 한 줄기가 작은 구릉과 같고 이파리 하나가 커다란 부채만 하다고 전해진다. 대지모신과 함께 나고 자란 이 크고 영험한 나무의 왕을, 몇몇 사람들은 신처럼 떠받들고 추앙하고는 했다.
불사자 라쉬도 그중 하나였다.
“알다마다! 우리 부족은 세상 누구보다도 대지모신과 가까운 존재. 정기를 한껏 담은 그것을 어찌 몰라볼 수 있을까! 영험 있는 은행나무는, 비록 우리 근처에 있진 않지만! 우리에겐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이지!”
그리고, 그러한 이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조금 신기하고 커다란 나무 정도로 인식되고는 했다.
떨어진 이파리 하나를 돈 받고 팔아넘길 수 있는 조금 귀중한 나무로.
장교가 말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알겠지?”
“물론 객관적인 가치도 알고 있소! 한 번 사보려고 했는데 더럽게 비싸더군! 노역으로 버는 쥐꼬리만한 돈으로는 택도 없었소! 어쨌든 고맙소. 안 그래도 정기가 부족하여 재생이 늦어지고 있었는데! 덕분에 몸이 전부 나았어!”
불사자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세계수의 잎을 건넨 장교는, 표정으로는 나타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어리둥절했다.
‘이상하군. 세계수 잎을 먹이지도 않았는데, 오른팔이 제멋대로 뛰어오더니 기운을 되찾았어.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잠깐만. 오른팔을 낫게 한 그 회복약, 혹시.
설마하는 심정으로 회귀자를 향해 물었다.
“셰이 씨. 혹시 회복약 재료에….”
“응. 불사자 같은 경우는 대지의 정기가 잘 들어서, 세계수 잎사귀 썼는데?”
태연하게 대답하는 회귀자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와아. 이럴 때만 씀씀이가 커.”
“필요한 최소비용이었어. 누가 팔을 아주 걸레짝으로 만들어놓은 바람에, 저주가 심각해서 그 정도 아니고서는 회복 못 시켰어.”
“그래요. 다 제 불찰입니다.”
쳇. 혀를 찬 나는 모퉁이에 바짝 붙어 조심스레 교육실 안쪽을 훔쳐보았다. 회귀자는 영문도 모르는 채로 내 뒤를 졸졸 따랐다.
“중령이 불사자와 만났네. 이것 때문에 나를 불렀던 거야?”
“이미 늦었어요. 지켜보기나 하죠.”
회귀자와 내가 열린 문으로 안쪽을 살피는 동안, 장교도 모자챙 아래에서 날카로운 눈동자로 불사자를 평가했다.
2 m는 될 법한 근육질의 거구. 누더기가 된 셔츠 사이로 보이는 몸은 구릿빛보다도 어두워서 피부라기보단 금속처럼 보였다. 그의 우락부락한 몸은 생명력으로 넘치고 있었는데, 아직 세계수 잎사귀를 쓰지 않았음에도 전성기의 힘을 되찾은 상태였다.
‘그나저나, 조금 전 뛰어 들어온 그 오른팔은 어찌 된 영문이지…?’
어쨌건 결과가 좋으면 그만. 오른팔에 대한 생각을 잠시 접은 장교는 불사자의 몸을 위아래로 살폈다.
‘맨손으로 사람을 찢었다고 했다. 이곳이 무저갱이라 돋보이진 않지만, 한때 광전사의 족속이라 불렸던 불사종족. 그중에서도 ‘오른팔’이라는, 두 번째로 높은 지위를 가졌다지…. 충분한 조력자가 될 수 있을 거다.’
부족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한 불사자들의 땅. 그곳을 떠나 세상을 방랑하던 불사자 라쉬는 부국강병한 군국에 커다란 흥미를 느꼈다. 그는 군국과 여러 교섭을 거치고 빡빡한 조건을 수용한 끝에, 임시 시민권을 발급받으면서까지 군국에서 머물렀다.
살인을 저지르는 바람에 재고의 여지도 없이 무저갱에 떨어지게 되었지만.
‘군국에게 호의를 가진, 몇 안 되는 이.’
적만 가득한 무저갱. 세상과 고립된 곳에서, 아군이 될 가능성을 지닌 유일한 존재를 발견한 거다.
장교는 내심 크게 안도했다.
‘그 보따리의 수수께끼를 풀어서 다행이야. 혹여나 떠올리지 못했다면…. 그들의 지령은 언제나 이리 애매모호하게 전해져서….’
턱에 손을 댄 채 고민하던 장교는 차가운 계산을 끝마쳤다. 불사자는 세계수 잎사귀를 행복한 듯이 바라보며 잔뜩 기대한 채 말했다.
“정녕 이것을 내가 가져도 되는 것이오?”
“좋다. 다만, 조건이 있다.”
“이야. 이렇게 귀한 선물을! 고맙소!”
“조건이 있다고 했을 텐데?”
충분히 이용가치가 있다, 고 판단한 장교는 챙을 눌러쓰며 말했다.
“선물이 아니다. 본관이 귀 교육생을 위해 치른 비용이지. 본관에게도 상당한 출혈이 있었으니, 교육생은 그만큼 나에게….”
“하하! 군국 사람들은 말을 참 딱딱하게 하는 재주가 있다니까! 이 선물, 정말 기쁘고 달갑게 받도록 하겠소!”
“교육생. 몇 번이고 말하지만….”
계속 선물이라고 강조하는 불사자를, 장교는 마뜩잖은 시선으로 보았다. 장교는 불사자가 세계수 잎사귀를 선물이라 퉁치고 꿀꺽할 생각이라 여긴 탓이다.
그러나 그건 불사자의 호탕함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아니, 선물이오!”
고집스레 고개를 내저은 불사자는 다시금 엄지를 척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건 본인에게 엄청 귀한 선물이고, 또한 정기가 부족한 지금 가장 필요했던 양식이오! 이런 선물을 직접 들고는 나를 찾아와서 건넨 것이니. 이 물건은 필시 마음이 담긴 선물일 것이고, 마음이 오갔으니 우리는 곧 친구라고 할 수 있지 않겠소!”
“…뭐?”
군국에서 자라 그러한 말에 익숙지 않은 장교는 뒤늦게 불사자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러니까, 불사자는 채무 관계를 거절하는 대신 마음의 빚을 지기로 한 것이었다.
채무라면 값을 치르는 것으로 관계가 끝나지만, 친구는 마음이 지기 전까지 시들지 않으니까.
“나는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는 사람이 아니오. 어디, 무슨 부탁이 있소, 친구?”
이 상황은 장교에게도 의외였는지, 장교는 잠시 할 말을 잃고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몰리고 몰린 몸. 지금 그녀에겐 거절할 이유도, 명분도.
그럴 의지도 없다.
“…본관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다. 나는, 교육생이 그것을 도왔으면 한다.”
“하하! 친구의 부탁이라면야 얼마든지!”
불사자는 손을 내밀었고, 장교는 그다지 내키지 않아 했지만 결국 손을 마주 잡았다.
‘…무저갱에 갇힌 죄수 따위와 친구가 되고 싶지는 않지만. 당장 이용하기에는 그편이 낫겠군.’
친구라는 형태이든, 채무 관계이든 상관없다.
목숨이 아까운지 모르는 불사자를 이용할 수만 있다면, 장교는 이 관계를 어떻게 부를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덩치가 커서 그런지…. 손 역시 크군. 손가락만 해도 두 마디가 더 길어….’
악수하는 동안 문득 어울리지 않은 생각을 하던 교관은, 짧게 고개를 젓고는 자신을 다잡았다.
‘아니. 단순히 체구를 생각한 것뿐이다. 이 크기라면, 고기 방패로 쓰기엔 딱일 테니까.’
좋아.
슬슬 물러갈 시간이다. 그들로부터 시선을 뗀 나는 회귀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셰이 씨.”
그러자 회귀자가 질색하며 뛰어올랐다.
“아, 씨. 깜짝이야. 왜?”
왜 이리 과민반응이야? 전신의 털을 곤두세운 채 하악질을 하는 회귀자를 향해 물었다.
“같은 남자끼리 왜 그리 놀래요?”
“징그럽잖아! 그냥 말하면 될 것이지 왜 속삭이는데!”
“안에 다 들릴 텐데 소리칠 수는 없잖아요.”
“평소에 소리가 흘러나가지 않게 하고 있으니까 괜찮아!”
스토킹이 패시브구나. 아주 바람직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옆을 가리켰다.
“저쪽도 슬슬 나올 것 같으니 우리는 도망갈까요?”
“도망? 불사자에게 용건이 있던 거 아니었어?”
“조금 전에 끝났어요.”
나는 저쪽을 흘긋 보고는, 소원대로 믿고 의지할 조력자를 손에 넣은 장교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원하는 바는 이루었으니까요.”
회귀자는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대로 가면 좀 개운하지 않은데. 불사자…. 그가 중령에게 붙었다고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어내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귀찮아지는 건 사양이야.”
“참나. 세상에서 제일 귀찮은 게.”
“뭐?”
“됐어요. 일단 와요!”
슬슬 장교와 불사자가 교육실에서 나올 타이밍이다. 그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나는 회귀자를 잡아끌고 밖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