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96화 (96/384)

EP.96 불사자와 흡혈귀

불사자는 오랜만에 느끼는 포만감에 크게 만족했다. 혼자 콩 통조림 한 캔을 다 해치운 그는, 입맛을 쩍쩍 다시며 마당 쪽으로 향했다.

“이곳 통조림은 더럽게 맛이 없던데, 이걸 이렇게까지 살리다니! 맛있는 재료는 날 것으로 먹어도 맛있지만, 맛없는 것을 맛있게 바꾸는 것이야말로 실력이자 요리의 진수! 중령은 요리 솜씨도 훌륭하니 좋은 신부가 되겠소!”

그와 나란히 걷고 있던 군국 장교, 칼리스 중령은 그러한 칭찬에도 별로 기쁜 기색이 아니었다. 불만스레 혀를 찬 장교는 차갑게 대꾸했다.

“쯧. 그 논리대로면 통조림 하나로 백 가지 요리를 하는 주임원사는 세기의 신부겠군. 헛소리는 그만 지껄이고 본관의 임무를 돕도록, 교육생.”

“백 가지라! 탐이 나는군. 그 주임원사라는 사람도 중령만큼이나 아름다운 여인이오?”

“대머리에 콧수염을 기른 노인이다. 올해 손녀를 보았지.”

“하하하! 그렇다면 됐소! 나는 중령이 해주는 요리로 만족하도록 하지!”

장교가 깊게 눌러쓴 모자챙 아래로도 다 보일 정도로 얼굴을 구겼다.

“본관이 매일 너를 위해 요리할 거라 여기지 말도록, 교육생. 이번만 특별히 한 일이다.”

불사자가 세상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째서!”

“달리 묻고 싶군. 교관인 내가 어째서 교육생의 식사를 책임져야 하지?”

“겸사겸사할 수 있지 않소! 나는 요리에는 재능이 없는데, 이 나라에는 맛있는 재료가 없소! 미안한 말이오만, 내가 이 나라에 정을 붙이려고 해도 콩 통조림만 떠올리면 진저리가 나서 그럴 수가 없었단 말이오! 하지만 중령이 함께라면 조금은 괜찮을 것 같소만!”

이러한 상황이 짜증스러운 듯, 장교가 모자 위로 이마를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일이나 마쳐라. 그러면 생각해보지.”

“알겠소! 어디 보자, 개 아가씨와 친분을 쌓고 싶다고 했던가? 낯가림이 심한 모양이오, 중령!”

“쓸데없는 소리 말고!”

“하하. 알았소. 밥해준다는 거, 친구끼리 약속이니 꼭 지키시오!”

그렇게 둘이 평범하게, 어찌 보면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며 탄탈로스 본관에서 딱 걸어나왔을 때였다.

한껏 수다를 떨다 나온 불사자는 마침 나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오! 선생! 오랜만이오… 엇!”

그가 반갑게 다가오려던 그때, 불사자의 오른팔이 제멋대로 펄떡이더니 나를 한 대 후려치기라도 할 듯 위협적으로 솟구쳤다.

아직 그와 나 사이에는 거리가 상당히 있었지만, 그 위협적인 태도는 확실히 전해졌다. 나와 그는 물론 티르에게도.

놀란 티르가 눈을 붉게 빛냈다.

“휴!”

그와 동시에 어둠 속에서 수천의 군세가 티르의 의지에 따라 몸을 일으켰다.

무저갱은 해가 들지 않는 공간. 모든 곳은 그림자에 잠겨 있다.

티르의 힘이 사방에 뻗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림자와 연결된 곳이라면, 어둠을 다루는 그녀의 권능이 닿는다.

무저갱에 존재하는 수많은 그림자가 티르의 병창이며, 병영이었고, 병사였다. 어둠이 나를 보호하기 위해 일제히 몰려들었다.

티르가 분노하여 외쳤다.

“토인…! 감히 휴를 해치려 해!”

“잠깐! 이건 나의 의지가 아니오!”

정작 그 몸의 주인인 불사자조차도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불사자는 자아가 나뉘어있기라도 한듯 자기 왼팔로 오른팔을 단단히 붙잡고는 말했다.

다름이 아닌, 그 자신의 오른팔을 향해.

“공양(供養)신이여! 어째서 분노하신 것이오? 어? 뭐라고?”

오른팔이 별개의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대화를 나누던 불사자는, 벽처럼 솟아오른 그림자의 군세 너머 의아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선생. 내 오른팔이 선생을 보더니 한 대 후려치고 싶어하는군! 내가 의식이 없는 사이 내 오른팔과 무슨 갈등이라도 빚었소?”

“네?”

대충 생각을 읽어보니, 오른팔이랑 대화 비슷한 것을 한 모양이었다.

저게 의사소통이 되는 거였어? 신기하네.

그나저나, 갈등?

나는 단지 티르를 상대하기 위해 그 오른팔을 걸레처럼 써서 피를 닦아낸 것밖에 없다. 닦다가 더러워지면 긁어내고 다시 쓰고, 가끔은 꼬챙이로 살점을 파헤치고는 사방에 흩뿌리곤 했지.

…만일 오른팔에게 의식이 있었다면 주먹을 말아 쥘만하네. 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을 흐렸다.

“아하하. 그게. 설명하자면 길어요.”

“내 본래 오른팔을 대지모신에게 공양하여 얻은 이 오른팔은 자비를 상징하는 큰손이오! 그런데 이토록 분노하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군!”

“그, 오른팔을 막 휘두르다가 저주가 좀 걸려서….”

“저주? 흠. 그게 끝이 아니라고 하는데? 뭐 오른팔로 요리를 해먹으려고 했거나, 아니면 제물로 바치기라도 한 거요?”

오른팔이 기억력도 좋네. 회귀자보다도 더 잘 기억하는 것 같은데.

오른팔을 속일 자신이 없었던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핀레이라는 어떤 미친 흡혈귀가 날뛰는 바람에, 그 오른팔의 힘을 빌렸죠. 피와 어둠을 뭉쳐 만든 사역자를 여럿 처치했어요.”

“그 정도면 제물 맞지 않소?”

“아, 그런가?”

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하하 웃자, 나를 따라 웃은 불사자가 호탕하게 제안했다.

“좋아! 선생, 한 대만 맞으시오!”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미안. 안 돼요. 잘못 맞으면 죽어서.”

“살살 때리겠소! 그러지 않고서야 내 오른팔의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군!”

“오른팔 재량이잖아요? 댁이 때리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살살 때려요?”

“그런가? 하하! 그러면 알아서 살살 맞으시오!”

나와 불사자가 하하호호 담소를 나눌 때였다. 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티르가 분개하며 외쳤다.

“웃기는 소리.”

그녀가 갖는 영향력은 무저갱 그 누구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한마디에 땅이 울리고, 그림자가 들썩이며, 어둠이 불길하게 흔들린다.

불사자조차도 겁을 집어먹고 입을 텁 다물었을 때, 티르가 무저갱 밑바닥에서 끌어올린 듯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휴는 나를 구하기 위해 그러한 수단을 택했을 뿐이다! 그러니 탓할 거라면 나를 탓하라, 토인.”

그림자 군단이 티르의 앞에서 비켜났다. 똑같은 모양을 빛으로 비춘 듯, 조직적이고 일사분란한 움직임이었다.

어둠의 군세를 뒤에 남겨둔 티르가 불사자 앞으로 나섰다. 핏빛으로 붉게 물든 눈동자가 불사자를 향했다.

“정 누군가를 때리고 싶거든, 나를 때려라. 그것으로 기분이 풀린다면 내가 대신하마. 다만, 휴에게 위해를 끼치고자 한다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을 것이다. 그것이 너를 영멸하는 것이라도.”

걸어다니는 군세이자, 모든 흡혈귀의 시조. 그림자의 여왕.

그녀의 피는 지배력이 가득 담긴 권능이며, 정기를 흡수해 불사성을 유지하는 토인에게 있어선 재생을 막는 저주나 마찬가지.

전설 속 티르칸쟈카를 앞에 둔 불사자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크게 웃었다.

“하하! 연인을 구하기 위해서였소? 그렇다면 인정이지!”

그 직후.

“여, 연인?”

무저갱을 잠식하려는 듯한 거대한 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일렁이던 어둠이 잠잠해졌고, 흔들거리던 대지도 숨을 죽였다. 그림자 군세는 잠시 서로를 마주 보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땅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곳에 남은 건 당혹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는 소녀뿐이었다.

무너지는 어둠의 군세 속에서 티르는 불에 덴 사람처럼 우왕좌왕하며 손을 몇 번이나 쥐었다가 폈다.

“무, 무슨 헛소리냐. 휴, 휴. 저 경박한 토인을 보아라. 별, 희한한 소리를 지껄이다니.”

모두가 티르의 행동을 어이없이 지켜볼 동안, 불사자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소리쳤다.

“참 귀여운 연인이로군! 좋소! 오른팔과는 내가 따로 연락해서 잘 해결하겠소! 오른팔도 이 정도는 이해할 것이오! 어떻소, 나의 공양신이여?”

그동안 불사자의 턱을 만지작거리던 오른팔이 못마땅한 듯 손가락으로 짧게 동그라미를 말아쥐었다. 그리고는 튕기듯 날아가서는 어깻죽지 아래에서 침묵했다.

불사자가 개운하게 소리쳤다.

“오른팔도 이해한다고 하오! 운이 좋았군, 선생!”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운은 당신이 좋았죠. 이해 못 했으면 이해할 때까지 티르가 이해심을 물리적으로 주입해주었을 테니까요.”

“하하! 틀린 말은 아니로군!”

“뭐, 어쨌든 그렇게 되었어요. 허락도 없이 휘둘러서 미안하다고 오른팔에게 전해주세요.”

“사과가 조금 늦은 것 같소만!”

“사과할 대상이 오른팔일 줄은 몰랐으니까요. 아직까지 그 정도 분리주의적인 사고방식은 갖지 못했거든요.”

“하하하! 이해하오!”

애초에 불사자는 나를 때릴 생각이 없었다. 진짜 분노했다면 나에게 달려들었겠지.

어지간해서는 죽지 않는 불사자는 그만큼이나 피해에 둔감하다.

칼에 베여도, 꼬챙이에 찔려도. 심지어 팔이 잘려도. 그건 그에게 있어서 본질적으로 스킨십과 다를 게 없다. 그를 죽이지 못하는 육체 접촉이라는 점에서.

즉, 그는 누군가 한 대 때리거나 상처를 입혀도 하하 웃으며 가볍게 넘어가는 호인(好人)인 것이다. 그와, 그의 부족이 간직한 명예를 건드리지 않는 한 세상 그 누구보다도 안전하리라.

그러니까 장교를 상대로도 유쾌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거고.

그래서 내가 깨운 거기도 하다.

“자, 그러면 본인은 할 일이 있어서 그만 가보겠소!”

“안녕히 가세요. 하는 일 잘 되기를 바랄게요.”

“그럼 나중에! 둘이 즐거운 시간 보내시오!”

“그쪽도.”

팔을 크게 휘적인 불사자는 나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던 장교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의 커다란 목소리가 마당에까지 다 흘러나왔다.

“오. 조금 전, 본인은 진짜 죽을 뻔했소! 아무래도 이쪽으로 지나가기는 곤란해 보이는걸!”

불사자가 태연하게 대답하자, 장교는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라쉬. 너는 시조의 단순한 으름장마저도 견뎌내지 못하는 건가?”

“물론이지! 시조는 진짜, 더럽게 강하다오!”

“그게 당당하게 할 말인가!”

‘시조나 짐승의 왕처럼, 초월적으로 강하지는 않더라도 조금은 의지가 될 줄 알았건만…!’

당연하다. 회귀자, 짐승의 왕, 흡혈귀의 시조가 있는 땅에서 고작 ‘불사’라는 특징 하나는 내세우기 뭣한 명함이다. 아니, 애초에 면면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나름의 불멸성을 지닌 초월적인 존재들.

고작 팔이 뜯겨서 방치된 불사자는, 그들을 상대하기엔 좀 끗발이 떨어진다.

물론 불사자는 그 사실을 별로 유감스러워하지 않았다. 자연 재해보다 강력하지 않다는 사실은 자존심 상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하! 친구의 부탁이라도 못하는 것은 못하는 것이오! 저 아름다운 소녀는 일견 무해한 것처럼 보이나, 사실 혈귀의 시조! 일개 전사에 불과한 내가 싸워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오!”

그의 입으로 확언까지 받자, 장교는 부들거리는 손을 꾹 움켜쥐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이야 했지만, 그렇다고 이토록 쉽게 꼬리를 마는 모습을 기대한 게 아니야…! 이딴 게 조력자라고? 이래서는 최소한의 억제력조차 못 돼!’

“뭐, 이 한 몸을 불사르면 조금 간지럽게야 할 수 있겠지만! 그랬다간 내 몸은 저주받아 다시는 살아날 수 없겠지! 하하, 가능하면 서로 닿지 않는 게 좋소! 물론 나뿐만 아니라, 중령도 마찬가지오!”

불사자는 담담하게 사실을 말했다. 결국 장교도 감정을 추스르고는 말했다.

“…됐다. 애초에 시조와는 대립할 생각은 없었어. 가능하면 그 노역자에게도 다가가지 않을 생각이었고.”

“노역자? 혹시 선생을 말하는 거요?”

“선생? 노역자는 노역자일 뿐이지 않나. 그건 무슨 뜻이지?”

“그는 교관이지 않소? 본인을 소개할 때 자신을 교관이라 칭했소. 그렇다면, 나에게 있어 선생 아니오?”

“그 자식, 교관까지 사칭한 건가…!”

벽너머에서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진다. 장교는 내가 보이지 않음에도 나를 향해 온갖 저주를 쏘아냈다.

‘괘씸하지만 시조가 저렇게 싸고도는 이상, 내가 그에게 손댈 방법은 없다. 진정해, 칼리스. 쓸데없는 부분에 심력을 쓰지 말자.’

흡혈귀 방패는 오늘도 든든했다. 역시 나는 틀리지 않았어.

장교는 빠르게 마음을 다잡고는 불사자에게 말했다.

“본관이 말했듯이, 목표는 개의 왕이다. 개의 왕에 대해선 알고 있겠지?"

“알다마다! 그 개 아가씨 말이지!”

“그래. 개의 왕이 본관을 따르지 않는 것은 아니나….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 노역자가 개의 왕을 부르면 개의 왕은 곧장 그의 곁으로 달려가버린다. 어디에 있는 관계없이.”

“오호! 그런 능력이 선생에게 있소? 꽤 부러운 능력이구려!”

“이건 상당히 중요하다. 만일 개의 왕이 계속 그런 태도라면 계획이 통째로 어그러져.”

만물의 영장의 목적은 짐승의 왕을 손에 넣는 것. 그녀가 탄탈로스에 잠입한 이유도, 개의 왕 아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고작 중령에 불과한(어디까지나 탄탈로스 거주민에 비해) 그녀가 첨병으로 온 이유. 그것은 개의 왕을 확보한다는 목표 자체는 대단히 쉬웠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충성스러운 개의 왕을 꼬드기기 위해선 눈을 맞추고 말만 할 줄 알면 되었기 때문에, 칼리스 중령은 그것을 한 번 시험해보려고 했다.

그러다 '나'라는 난관과 마주했다.

‘우리의 계획에, 개의 왕이 저항한다는 가정은 없었다. 개의 왕은 인간에게 충성스러우며, 특히 군국과 맹약을 나눈 현재 우리가 요구한다면 어쨌든 따라왔을 테니. 하지만…. 만일 그 노역자가 끝까지 우리를 방해한다면, 우리에겐 방법이 없어.’

짐승의 왕을 힘으로 강제로 구속하고 데려간다? 그야말로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다. 그럴 힘이 있으면 왜 짐승의 왕을 이용하려고 드는가? 그냥 그 힘으로 세상을 손에 넣지.

개의 왕을 노리는 이유는, 그만한 힘을 쉽게 다룰 수 있어서.

하지만 세상은 보편적이라, 내가 다루기 쉽다면 타인도 다루기 쉬워하는 법이다.

“그럼 선생에게 진실을 털어놓고 부탁하면 되지 않소? 이러이러해서 개 아가씨가 필요하니, 양보해달라고 사정을 설명하면서!”

그게 되었으면 만물의 영장이 비밀결사가 아니었을 것이다.

장교가 입을 다물자, 불사자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결국 선생을 넘어야 한다는 말이구려! 언제나 느끼지만, 누군가보다 잘나야 한다는 건 참 힘든 일이라오!”

“그는 별것 아니다. 하지만 어찌 된 모양인지…. 그에게는 지금….”

시조 티르칸쟈카.

장교는 그녀의 힘을 상기했다.

이 모든 땅을 망라하는 어둠과, 그것을 다스리는 시조의 힘. 그건 정녕 그것만으로도 나라를 물리적으로 기울게 할 수 있는 힘이다.

‘일개 노역자… 그를 치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야. 하지만 그의 뒤에 있을 시조는 결코 협상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시조와 싸우는 건….’

장교는 판단을 끝마쳤다. 만물의 영장이 모든 힘을 투사할 수 있다면 모를까. 이 무저갱에 한해선.

‘불가능하다. 차라리 해가 뜨는 지상이라면 모를까, 이곳에서 시조와 맞서 싸우는 것은…자살행위야.’

딱. 딱.

장교의 턱이 떨렸다.

임무는 실패할 것이다.

왜냐면, 내가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종소리에, 그리고 내가 제공하는 오락에 길들여진 아지는, 만물의 영장이 부른다고 쫄래쫄래 따라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나를 배제하기엔, 내 뒤에 있는 시조가 너무 두렵다.

어쩌면, 이 사실을 그대로 보고한다면, 이 일의 난이도를 실감한 만물의 영장은.

‘나를 버림말로 삼고…. 이 일에서 손을 뗄 수도.’

악착같이 노력했다. 그 결과로, 그녀는 소각되기 직전에 놓인 아버지의 유산을 얻어냈다.

만물의 영장과 손을 잡고, 죽을 위기를 몇 번이고 넘기며 그들이 제공한 공훈을 손에 넣었다. 훈장도 두 개나 받았다.

그렇게, 4레벨 시민을 향해 차곡차곡 쌓아올린 칼리스 중령의 인생이.

단 한 번의 불운으로, 무너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장교의 몸이 덜덜 떨렸다. 그녀는 정모를 더욱 깊게 눌러 쓰며, 이를 악물고는 되뇌었다.

‘여기서 무너지지 않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거야. 비록 지금 내가 가진 게…. 못미더운 조력자라고 하더라도.’

굳게 다짐한 장교는 천천히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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