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100화 (100/384)

EP.100 짐승의 왕들

“음? 잠깐.”

불사자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내가 숨어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는 냉큼 문을 열고는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선생. 여기서 무슨 일이오?”

“앗, 들켰다!”

이걸 찾네.

수상하게 숨어있는 나를 미심쩍게 바라보는 불사자.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방 안에서 기어 나왔다.

“아니, 뭐 좀 들고 올 게 있어서 방으로 향하는데, 뭔가 아래쪽 분위기가 이상하더라고요. 그래서 냉큼 방에 들어가서 숨어있다가, 나올 타이밍을 놓치고 스탠바이만 하고 있었죠.”

내 변명을 그대로 받아들인 불사자가 나를 나무랐다.

“거, 보고 있었다면 좀 막았어야지! 중령이 죽을 뻔했고, 소년은 죽일 뻔했소!”

“그사이에 껴들었다면 저도 죽고 셰이 씨는 살인마에서 연쇄살인마로 진화하지 않았을까요? 라쉬 씨랑은 달리 저는 불사자가 아니라고요. 팔 잘리면 다시 붙이지도 못하고 죽어도 풀잎으로 부활할 수 없다고요.”

“음! 부정할 수 없군! 사실 나도 말려들기만 했지 막지는 못했거든! 하하하!”

불사자는 호탕하게 웃었다. 나도 그를 따라서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 나는 탈출 꾸러미의 정체를 보기 위해 이곳에 숨어있었다.

칼리스가 회귀자를 피해 도망칠 곳은 하나뿐이었고, 그것을 눈치챈 나는 티르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앞질러서 이곳에서 숨어 있었다. 만일 칼리스가 탈출 꾸러미를 통해 지상으로 나간다면, 그 순간을 노려서 탈출 방법을 빼앗거나 알아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탈출 보따리의 정체가 이승 탈출 보따리였을 줄이야.

처음 꾸러미에 대한 생각을 읽었을 때, 나는 소매치기할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예전 버릇 어디 안 간다고, 저 도톰하게 올라온 혁대 속 가죽 주머니를 보면 손이 근질거려서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가고는 했기 때문이다.

지금 보면 안 하길 천만다행이었다. 이승 탈출 꾸러미를 소매치기해서 썼다가 그대로 죽어버리면 부고란 대신 유머란에 실리겠지.

후우. 역시 사람은 개과천선하고 봐야 해. 착하게 사니까 액막이 부적이… 아니, 복이 오잖아.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불사자는 칼리스의 어깨를 꽉 붙잡으며 말했다.

“중령을 살린 건 중령 자신이오. 나는 그저 조금 거들었을 뿐! 그러니 자랑스러워해도 좋소, 중령!”

“…네헷.”

혀를 씹은 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불사자가 칼리스를 쳐다보았다. 순간적으로 칼리스의 얼굴이 머리카락 색만큼이나 빨개졌다.

불사자가 의아해했다.

“음? 중령. 뭔가 반응이 귀여워진 것 같소만?”

“아, 아니힛….”

“그나저나, 눈을 반쯤 가리던 모자가 없으니 이제는 인상이 훤히 보이는군! 생각보다 눈매가 둥그셨구려! 매일 모자 아래 눈만 봐서 칼날처럼 날카로운 줄 알았는데, 보기보다 귀엽잖소!”

“그, 게….”

“도대체 그 딱딱하고 챙 넓은 모자는 왜 쓰고 다니셨던 거요? 머리를 누르는 것 말고는 하등 쓸모가 없군! 그 모자챙 그림자만 없었어도 중령의 얼굴을 더 빨리 알았을 거요!”

“우스…워, 보이기, 싫어…서.”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며 칼리스는 자꾸만 고개를 숙였다.

이런, 이런. 그런 건가.

희미하게 느껴지는 새콤달콤한 감정은 손발이 오그라들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는 마약과 같았다. 나는 코 밑을 쓰윽 닦으며 말했다.

“이야. 구차하긴 했지만 그래도 흥미로웠어요! 아무리 삶이 팍팍해도 이승이 좋죠?”

“…죽고 싶나?”

“어라? 나한테는 여전히 날을 세우는 거야?”

어이, 불사자. 눈매가 부드럽다며? 나를 향할 때는 아직도 날카로워서 베일 것 같은데.

제복도, 모자도 없는데 찌릿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주눅이 든다. 이게 본능에 각인된 공포?

칼리스는 나를 째릿 노려보고는, 은근히 불사자 쪽에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조사단이 오기 전까지, 저는 이곳에 머물러야 합니다. 하물며 권한 정지까지 당했으니 저도 죄수나 마찬가지입니다.”

“거,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래도 중령은 우리처럼 완벽하게 갇힌 건 아니지 않소! 그리고 내가 살아보면서 느낀 건데, 이곳, 은근히 살만하다오!”

“그럴… 지도요.”

완전히 빠졌구나. 하긴, 자기 몸 던져가며 구해준 사람에게 좋은 감정을 품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이걸 어쩐다.

“너무 붙잡고 있었군! 자, 이제 나는 가보겠소. 일단 한숨 주무시는 편이 나을 거요! 놀란 몸을 진정시키는 방법은 푹 잠드는 것이니!”

불사자는 예의 바르게도 자리를 비켜주려고 했다. 칼리스가 바라는 바는 아니었다.

칼리스가 특별해서 구한 건 아니다. 애초에, 불사자는 탈옥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일개 노역자들을 지키기 위해 주동자와 맞선 경력이 있다. 비참하게 패배하여 사지가 뜯겼지만 어쨌든.

그러니까, 그냥 불사자의 성격이 이렇게 생겨먹은 것이다. 칼리스가 ‘특별’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뭐, 잘 해보려는 생각이야 있겠지만.

“에휴. 고생길이 열렸네….”

앞으로 어떤 난관이 찾아올지 궁금해서 그리 중얼거리던 때.

약간의 조짐도 없이.

아무런 맥락도 없이.

조그만 소리도 없이.

고양이 수인이 눈앞에 나타났다.

“냐아-.”

갑작스러운 등장에 모두 말을 잃었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듯 사뿐사뿐 걷는 소녀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조용하게, 모두의 한가운데로 걸어온 고양이 수인은 손을 말아쥐더니 손등을 핥기 시작했다.

“…고양이?”

꼿꼿이 선 꼬리가 머리 근처까지 닿는다. 세모로 뾰족한 고양이 귀에 등까지 내려오는 풍성한 잿빛 머리카락, 특이하게도 바깥쪽 털색은 어두운 회색인데 안쪽은 순백에 가까울 정도로 하얗다. 마치 안과 밖을 달리 칠한 것 같다.

새하얀 얼굴에는 네 갈래 콧수염이 가늘고 길게 나 있다. 사뿐거리는 걸음은 우아하면서도 깃털처럼 가벼워서, 눈으로 보지 못했다면 그곳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냐아-.”

고양이 수인은 요망하게 울며, 무심한 듯 면면을 바라보았다.

나 역시 반사적으로 나타난 상대의 생각을 읽었다. 아니, 읽으려고 했다.

읽을 수 없다.

아니, 읽히기는 하는데, 의미가 이어지지를 않는다. 마치 동굴에 적힌 상형문자를 우리 말로 옮겨적은 듯한. 따라 읽을 수는 있으나 말뜻을 파악할 수 없는 문맥의 책이었다.

이미 경험한 적 있었기에 당황하지는 않았다. 단지 놀랐을 뿐이다.

“고양이의 왕?”

미친, 짐승의 왕이 뭘 먹을 게 있다고 여기를 와?

아니, 이건 좀 이상한데. 개의 왕이야 인간이 시켰으니 왔다고 하지만, 고양이의 왕이 어째서 무저갱에 찾아와? 여기가 무저갱이야, 동물원이야?

주위에 당장 느껴지는 생각은 없다. 그렇다는 건 혼자라는 소리인데.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나.

짐승의 왕이 가진 기억은 읽지 못하지만, 그 이름은 알 수 있다.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되니까.

손등을 할짝거리는 나비를 향해 말을 걸었다.

“나비야. 우리 집에는 왜 왔니?”

“냐?”

나비는 손등 핥기를 잠시 멈추고는 도도하게 말했다.

“냐는 공물을 받고 그 뜻을 들어주러 왔다냐.”

“공물을 받아?”

“냐는 인간과 동등하게 계약을 맺은 유일한 왕. 쥐구멍에서 찍찍거리는 쥐를 잡아달라, 내 시종이 공물을 바치며 그것을 바랐다냐. 그래서 냐가 여기 임하였다냐.”

계약. 쥐. 공물.

무언가 불길한 기분이 드는 건,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조금 전까지 만물의 영장에 대해 이러저러한 이야기가 나왔다면 더더욱.

“오! 고양이 아가씨!”

그때, 죽음이 없어 위기감각이 없는 불사자는 그답게 성큼 나비를 향해 다가갔다.

“올해는 복에 겨웠구만! 그토록 보기 힘들다는 동물 아가씨를 둘이나 뵙게 되다니! 어마어마한 모험이오. 마을로 돌아갔을 때 놀라 자빠질 이들의 눈에 선하군!”

“냐아?”

“반갑소! 나는 라쉬라고 하오, 고양이 아가씨!”

불사자가 나비를 향해 손을 뻗었을 때였다.

빤히 바라보던 나비는 앞발로 불사자를 후려쳤다.

공간이 도려졌다. 고양이의 앞발이 어둡게 공간을 삼키고, 단숨에 뜯겨나간 불사자의 팔이 복도를 가로질러 날아갔다. 복도를 종단할 때까지 그의 부착형 오른팔은 단 한 번도 땅에 닿지 않았다.

불사자가 눈을 크게 떴다.

“오!”

아지와 비슷한, 아니, 그 이상의 힘이었다.

사람과 닮은 형체를 갖고 있기만 해도 적의가 옅어지는 아지와는 달리, 경계심이 강한 고양이의 왕은 손속을 두지 않았다. 만일 라쉬가 불사자가 아니었더라도 저렇게 후려쳤을 것이다.

그러니까, 만일 내가 손을 내밀었다고 해도 말이다.

등줄기로 땀이 흐른다. 슬슬 죽음의 냄새가 내 코에서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인간에게 비교적 우호적인 짐승, 고양이의 왕이라지만… 애초에 짐승의 왕은 가까이 하지 않는 편이 좋다. 짐승은 제멋대로에 언제 돌변할지 모르니까.

완성된 호의를 가진 아지가 이질적인 경우지, 기본적으로 짐승이란… 머나먼 과거부터 두려움과 위험의 상징이었다.

사람의 팔을 태연하게 날려버린 나비는 방금 휘두른 앞발을 할짝거렸다.

불사자는 왼팔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역시 고양이인가! 까칠하기가 으뜸이군! 요즘 내 주변에는 까칠한 여자밖에 없어서 조금 외롭다오! 하하! 모두들, 고양이 아가씨에게는 섣불리 다가가지 않는 편이 좋겠소! 나처럼 불사가 아니라면 말이오!”

팔꿈치 아래로 사라진 오른팔을 보며 칼리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라쉬, 괜찮…습니까?”

“괜찮소. 오른팔이 떨어지는 건 이제 일상이니! 요즘은 붙어있는 게 더 어색해서, 나는 가끔 내 오른팔을 뗀 다음 베개삼아 자기도 한다오! 진정한 의미의 팔베개지!”

“…일어난지 하루밖에 안됐는데요?”

“그런가? 그러면 오늘부터 그러고 자겠소!”

불사자의 실없는 농담이 분위기를 어느 정도 풀어주었다.

저 반대편 벽에 부딪히고 나서야 땅에 떨어진 오른팔은, 두 손가락으로 몸을 일으키더니 뽈뽈거리며 다가왔다.

그 진귀한 광경에 나비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스스로 움직이는 오른팔을 빤히 바라보았다.

“냐? 팔이 움직인다냐.”

“내 자랑스러운 팔이오! 지금까지 나를 배신한 적 없지! 어지간한 동료만큼이나 든든….”

“냐.”

오른팔이 나비 앞을 지나칠 때였다.

콰직.

나비는 앞발로 그 오른팔을 으스러뜨렸다. 단순히 내리찍었을 뿐인데 바닥이 고양이 발바닥 모양으로 움푹 들어갔다. 나비의 앞발과 콘크리트 바닥 사이에 짓이겨진 오른팔이 과일처럼 뭉개지며 살점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불사자가 한 방 먹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라, 이건 그다지 괜찮지 않소만.”

칼리스는 다급히 외쳤다.

“라쉬!”

“쉿! 다가가지 마시오. 그래도 괜찮소! 오른팔은 대지모신께 공양한 신체. 아무리 손상되어도 언젠가는 재생할 테니….”

나비는 자꾸만 재생되는 오른팔을 신기한 듯 바라보다가, 다 회복되어 도망치려고 할 때마다 손으로 내리찍었다. 그럴 때면 오른팔이 고통스럽게 부들부들 떨었다.

아무런 악의도 없이, 순수한 호기심으로 오른팔을 괴롭히는 광경. 그 모습은 징그러우면서도, 차마 눈을 떼기 힘든 잔혹한 무언가가 있었다.

잠시 묘한 대치가 계속되었다. 우리는 아무런 말도 없이 나비가 노는 모습만 바라보았다.

사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냐아앗! 도대체 언제 오는 것이냐!”

슬슬 재생력이 떨어진 오른팔. 부들거리기만 하는 오른팔에 흥미를 잃은 나비가 짜증스럽게 울었다.

직후 쿵, 하고 옥상에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뒤이어 낙하산 펄럭이는 소리가 들렸다.

귀를 쫑긋 세운 나비가 고개를 휙 들고는 소리쳤다.

“냐아! 서둘러라냐!”

“가고 있습니다.”

목소리가 들린 이후, 옥상 계단에서 두 명의 장교가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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