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101화 (101/384)

EP.101 군국의 별

범상치 않은 기도를 풍기는 둘이었다.

한 명은 우락부락한 몸을 지닌 장교였는데, 의복 패킷의 혜택을 똑똑히 받은 것처럼 보였다. 만일 의복 패킷이 없었다면 저 커다란 몸에 맞는 옷을 직접 지어 입었어야 할 것이다.

그보다 반보 앞에서 걸어 내려오는 한 명은 곧은 자세를 가진 장신의 장교였다. 계단을 내려오는 와중에도 상체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특이한 건, 그가 입고 있는 장교복은 평범한 것과는 달리 고급스러운 검푸른색이었다는 점이다. 그 가슴팍에는 훈장 대신 반짝이는 별 두 개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이라면 자신을 설명하기 충분하다는 듯이.

실제로도 그러했다.

“장성….”

제왕을 무너뜨린 이들.

걸어 다니는 전쟁.

군국의 별.

피와 철로 쌓아 올린 군국의 역사에서 가슴에 달린 별이 의미하는바. 그 앞에 주눅이 든 칼리스가 본능적으로 경례를 올리려는 때였다.

“충….”

“기다려라. 내가 먼저다.”

한 손으로 칼리스를 제지한 그는, 곧게 서서는 엄숙하게 선언했다.

“신고한다. 이번 사태의 조사에 겸하여, 탄탈로스의 교육중장이자 교관으로 부임한 에본 크림슨와일드 중장이다. 현 시점부터, 탄탈로스는 본관이 관리한다.”

형식적인 신고.

그러나 말에는 무게가 있다. 그가 가진 권위만큼.

말만 했을 뿐인데, 이 탄탈로스가 그의 손아귀 안에 떨어진 것만 같았다. 그가 가진 힘이, 군국의 권위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모두가 그를 집중해서 쳐다보는 동안, 어느새 그의 곁까지 도달한 나비가 에본 중장을 보챘다.

“냐아아! 늦었잖느냐!”

에본 중장은 나비보다 훨씬 어른스럽고 조용하게 타일렀다.

“나비. 우리는 당신과는 달리 사뿐히 내려앉을 수 없습니다. 이토록 높은 곳이라면 더더욱 낙하산의 힘을 빌려야 합니다.”

“냐! 됐으니까! 빨리 공물이나 내놓거라냐!”

“후우. 점점 보채는 주기가….”

“냐냣!”

한숨을 내쉰 에본 중장은 뒤따라 온 장교를 흘긋 보며 명령했다.

“대령. 그것을.”

“네!”

대령이라는 계급으로 불린 그는 네모난 종이갑에서 종이에 싼 막대기를 꺼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마력초 궐련이었다.

그게 반쯤 세상에 드러난 순간, 나비가 벼락처럼 마력초를 낚아챘다.

나비는 홀린 듯이 손톱으로 종이를 자르고는, 그 막대기에 코를 박아넣고는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과호흡이라도 온 듯 가쁘고 급하게.

한참 그 향을 빨아들인 나비는 황홀한 듯이 미소를 지었다.

“냐학! 나햐아-. 냐-.”

동공이 풀렸다. 나비는 이 사이로 녹아내린 신음을 내며 헤롱거렸다.

개박하와 세계수의 잎사귀를 가공하여 싼, 오직 고양이의 왕을 위해 만들어진 마력초 엽궐련.

고양이의 기호와 인간의 기술, 세계수의 정기까지 더해진 공물이었으며, 동시에… 고양이의 왕을 다스릴 방도이기도 했다.

“냐, 핫, 힉, 냐하-.”

나비의 입에서 침이 질질 흘렀다. 유연한 몸이 이리저리 비틀렸다. 나비는 전신을 움찔거리며 그 향을 미친 듯이 탐닉했다.

에본 중장이 물었다.

“만족했습니까, 나비?”

말로는 존대하고 있었으나, 나비를 보는 에본 중장의 눈에는 한 줌의 경의도 없었다. 그저, 도구를 보듯 차갑게 고양이의 왕을 내려다보았을 뿐.

그동안 혼자 뒹굴거리던 나비가 마력초를 내밀며 외쳤다.

“냐하-! 부-울! 불을 붙이는 것이다냐!”

“나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계약입니다. 제가 공물을 드리면, 당신이 쥐를 잡아주셔야죠. 그것이 계약이지 않습니까.”

“냐! 그러니까! 빨리 말하라냐! 냐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냐?”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곧 찾아올 겁니다.”

그가 중얼거렸을 때였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고, 동시에 허공을 달려온 회귀자가 복도 끝에 내려앉았다. 그녀가 심각한 표정으로 외칠 때였다.

“조금 전, 옥상에 무언가가 떨어졌…!”

회귀자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잔뜩 몸이 달아오른 나비가 순식간에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너냐냐!”

“읏?!”

아지만큼 빠르지는 않지만, 소리를 삼키는 듯한 은밀함이 나비의 모습을 가렸다. 눈 깜짝할 사이 회귀자에게 다가간 나비가 위협적으로 앞발을 치켜들었다.

당황한 와중에도 회귀자는 천반경으로 대응했다. 상대에 맞추어 팔을 들어 올리며 천앵을 펼쳤다. 압축된 공간이 펼쳐지며 서로를 밀어냈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나비의 기세는 죽지 않았다. 앞발이 흐릿하게 흔들리고, 회귀자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었다. 핏, 그녀의 볼에서 한 줄기 핏줄기가 흘러나왔다.

회귀자가 외쳤다.

“고양이의 왕!”

“냐하아! 공물이 되어라냐-!”

퉁, 회귀자가 나비를 걷어차고는 뒤로 뛰었다. 나비는 사뿐 계단 난간을 밟은 뒤 회귀자를 향해 날아갔다.

둘은 순식간에 저 너머로 사라졌다. 곧이어 세상에 부서지는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에본 중장은 나비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쯧. 조만간 망가지겠군…. 인간의 몸을 입고 있는 탓일까. 망가지는 건 인간이랑 비슷해.”

그리고 나서야, 에본 중장은 한구석에 옹기종기 모인 나와 칼리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칼리스는 시선이 다시 향하고 난 뒤에야 경례했다.

“충성. 에본 중장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너는?”

“탄탈로스의 보급감시관으로 왔다가 고립된 칼리스 크리츠 중령입니다.”

미간을 좁힌 에본 중장은 그제야 알아보았다는 듯 탄식했다.

“아아. 장교복을 입지 않고 있어서 잠시 알아보지 못했다. 중령. 살아있었군.”

“그렇… 습니다.”

“보석이 넷 다 깨졌기에 꼼짝없이 죽은 줄 알고 있었다. 중령은 내 예상보다 더 유능했던 모양이군.”

칼리스는 눈을 크게 떴다.

“보석? 그걸 어떻게….”

에본 중장은 칼리스를 바라보며 인자하게 미소를 지었다.

“알면서 무엇을 묻는 건가, 중령. 당연한 것 아닌가. 내가 ‘후원자’다.”

내심 칼리스도 깨닫고 있던 사실이었다.

지금 이 타이밍에 무저갱에, 그것도 고양이의 왕을 대동한 채 찾아올 이들은… 만물의 영장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만, 조금 전 정보를 팔아넘기는 배신을 저지른 입장에서, 차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을 뿐.

다행히 칼리스의 배신을 눈치채지 못한 에본 중장은 칼리스를 향해 우호적인 표시를 보였다.

“지금껏 직접 만난 적은 없겠지만, 나는 중령에 대해 알고 있었지. 중령이 어떤 훈장을 받았는지도 다 알고 있었다.”

“영광입니다.”

“기회를 제공한 건 나지만, 중령의 능력이 없었다면 달성하는 것도 불가능했겠지. 충분히 자랑스러워해도 좋네.”

조금 전까지 자살당할 뻔했던 칼리스는 그의 태도에 어리둥절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본 중장은 칼리스를 향해 호의가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탄탈로스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을 조사하겠다는 명목으로 여기 왔지. 이제, 내 보고에 따라 중령의 평가가 달라지네. 물론, 내가 중령의 ‘후원자’인 이상, 당연히 중령에게 걸린 의심은 다 지울 예정이네.”

“가, 감사합니다.”

“같은 줄을 탄 이들끼리 당연한 일이지. 물론, 그 전에 임무는 끝마쳐야겠지만 말이야.”

해구(海溝)처럼 깊고 어두운 심계를 담은 말.

진상이 슬슬 모습을 드러낸다.

골렘이 말했다.

칼리스가 무저갱에 떨어진 일과, 무저갱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을 자세히 조사하기 위해 장성급이 포함된 조사대가 오고 있다고.

그러나 만일 칼리스가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아지를 꾀어냈을 경우…. 도대체 누가 아지를 지상으로 올려보냈을까? 군국의 별, 장성이 포함된 조사대가 곧 찾아올 텐데?

간단하다.

장성급이 포함된 조사대. 그들이 만물의 영장이었다.

처음부터 만물의 영장은 칼리스를 먼저 탄탈로스에 밀어 넣고는, 그녀를 조사하겠다는 명목으로 탄탈로스에 찾아올 계획이었던 것이다.

장성이나 되는 사람이 이 오지까지 찾아오려면 이유가 필요하니까.

그리고 이 경우, 칼리스를 처리하기도 쉽다. 무저갱에서 건져내어 재활용할 수도 있고, 아예 무저갱 아래에 묻어버릴 수도 있으니.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것이다.

정말, 애초부터 버림패였구나. 칼리스 중령.

이 경우 누가 먼저 배신한 것일까. 참 흥미로운 사색거리가 될 것 같다.

에본 중장은 여전히 칼리스를 아군이라 여기고는 말했다.

“탄탈로스의 모든 존재와 적대하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탈출용 패킷은 사용하지 않았나 보군. 임전무퇴의 정신인가? 훌륭하다, 중령.”

“감사합니다. 알아주셔서, 영광입니다….”

“중령의 그 용기가 우리를 부른 것이다. 우리는 중령이 개의 왕과 함께 탈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중령이 나오지 않자, 위험을 감수하고는 중령을 구하고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직접 찾아온 것이다!”

당연히 거짓말이다.

탈출용 패킷은 이승 탈출 용도. 그들은 칼리스가 살아있자, 탈출용 패킷을 쓰지 않았다고 착각하곤 태연히 거짓부렁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죽을 뻔했던 칼리스에게 의욕을 불어넣기 위해.

“우리가 왔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 중령. 이제 귀관은 귀관의 임무를 하면 된다. 당장 우리를 개의 왕에게 안내해다오. 그러면, 모든 공적이 귀관의 것이다.”

칼리스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를 자살시키려 한 탈출용 패킷. 그것에 목숨을 잃을 뻔했던 것이 조금 전이다.

그런데 후원자라고 자칭했던 에본 중장은 태연하게, 만물의 영장은 그녀를 위해 찾아왔노라 뻔뻔하게 거짓을 말하고 있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거짓이 익숙한 말투. 본능적인 거부감이 솟아난다.

하지만.

‘따르지 않을 방도가… 없어.’

인자한 미소를 짓는 에본 중장을 보며, 칼리스는 떨리는 몸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상대는 군국의 별, 장성. 동시에 비밀결사 만물의 영장의 일원. 고양이의 왕마저 부리고 있어.’

지금 이 순간 살아남기 위해서는 구차하더라도 다시 그들에게 붙어야 했다. 죽을 뻔했다는 사실을 기억에서 지워버리고는, 얻게 될 공적에 눈이 멀어서 그들에게 충성해야 했다.

그것이 정상적인 베팅이었다….

‘그게, 맞을까?’

칼리스의 고민이 깊어지고, 에본 중장의 웃음에 균열이 생기기 직전.

불사자가 칼리스의 어깨를 꽉 잡고는 등을 떠밀었다.

“조금 죽을 뻔했다고 뭘 그리 넋을 놓고 있소? 정신 차리시오! 중령, 아직 중령은 죽지 않았소!”

불사자의 말에 칼리스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는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저 혼자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을 겁니다. 도리어 죽을 뻔하기까지 했고요…. 제 공적은 없는 셈입니다.”

“이러한 겸손함을 바란 적은 없건만. 그 역시 우리와 같은 이들에겐 미덕이지.”

고개를 끄덕인 에본 중장은 칼리스의 등 뒤에 서서 미소 짓는 불사자를 바라보았다.

“불사자, 라쉬 교육생. 맞나?”

“정확하오!”

“자네가 일어나 있는 것을 보니, 중령이 신세를 졌나 보군.”

“신세는 내가 졌지! 그녀가 쓰러진 나에게 세계수 잎을 건네주었으니!”

그 세계수 잎을 건넨 사람이 에본 중장이었기에, 세계수의 잎이라는 단어를 들어도 의아하게 여기지 않았다.

에본 중장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흐음. 자네가 예의를 아는 불사자라 다행이네. 참고로 덧붙이는데, 나는 아직도 자네가 탄탈로스에 갇힌 게 의문이라네.”

“제국에 가면 제국의 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소! 죄를 지었으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지 않겠소!”

“아니, 꼭 그렇지만도 않네. 군국의 법이 자기 무기인 줄 알고 그에 기대 온갖 무례를 일삼는 이들이 있어. 법을 제 친구처럼 생각하는 이들은, 자네가 했던 것처럼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아. 나도 가끔 그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네.”

드물게도, 불사자는 얼굴을 한껏 찡그렸다. 얼굴에 한껏 드러난 불쾌함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거, 사람 치부를 들추는 나쁜 취미가 있구려! 그러지 마시오. 나는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차라리 귀를 막고 도망치는 길을 택할 때니까!”

의외의 반응에, 금빛 눈동자를 끔뻑인 에본 중장은 곧 순순하게 사과했다.

“미안하군, 교육생. 다만 나는 내 입장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네. 어쨌건 자네는 별 인연도 없던 노역자마저 지키려고 했던 선량한 사람이지 않은가. 나는 자네가 중령을 도우리라 믿고 있었네….”

“마치 다 예상했다는 듯이 말하는구려.”

불사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됐소. 그나저나 나는 이만 가보겠소. 중령을 잘 부탁하오.”

“가다니? 어디를 간다는 말인가.”

“저 둘이 싸우는 곳으로 가려고 하오!”

“무엇을 하려고?”

에본 중장의 물음에 불사자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싸움을 말려야 하지 않겠소! 소년이 강하긴 하지만 아직 어린 몸. 다쳤다간 나중이 고달플 거요. 고양이 아가씨도 상태가 영 이상하고! 둘의 싸움을 힘껏 말려보아야겠지. 나는 죽지 않으니 그 역할에 딱 걸맞고!”

그러자 에본 중장의 표정이 묘해졌다. 흥미인지 불쾌함인지 모를 시선으로 불사자를 쳐다보던 에본 중장이 중얼거렸다.

“자네는… 내 예상보다도 더욱 선량한 사람이로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