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102화 (102/384)

EP.102 만물의 영장

“자네는… 내 생각보다도 훨씬 선량한 사람이로군.”

에본 중장의 말은 뜬금없었다. 의도가 모호한 말이었고, 에본 중장은 미녀는커녕 여자조차 아니었기에, 불사자는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다.

“집어넣으시오. 남자에게 칭찬받아보았자 별로 와닿는 것도 없소.”

“옳아. 그렇지. 그래.”

에본 중장이 혼잣말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계속 영문 모를 말만 주워삼자, 불사자도 중장에게 관심을 껐다.

“나는 이만 싸움을 말리러 가보겠….”

“아. 그건 안 되지, 안 돼.”

그 순간이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에본 중장이 거칠게 손을 뻗었다. 그의 양손에는 어느샌가 솟아난 클로가 서늘한 빛을 발하며 불사자의 등을 노리고 있었다.

짐승의 아가리 같은 클로가 불사자의 몸을 헤집으려는 때.

“흡! 어림도 없지!”

살기를 감지한 불사자는 즉각 몸을 비틀고는, 그가 자랑하는 오른팔을 들어 에본 중장의 공격을 막았다….

…오른손이 아직 떨어져 있다는 것을 깜빡한 채로.

“아차! 오른손!”

클로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는 불사자의 몸을 꿰뚫었다. 발톱을 본따 만든 칼날이 불사자의 내장을 헤집으며 사정없이 밀어붙였다.

한순간의 방심으로 칼날 여섯 개에 관통당한 불사자가 비통하게 외쳤다.

“크윽! 불찰이다! 오른팔이 없는 게 너무 익숙해져서 그만!”

“이것만으로도 치명상. 하나, 상대는 불사종족. 어차피 죽지도 않겠지….”

에본 중장이 서늘하게 중얼거렸다.

“방해하지 못하게만 해두겠네, 선량한 친구.”

에본 중장은 그렇게 말하며 몸 안에서 기운을 끌어올렸다.

몸 안에서 짜낸 마력이 푸르게 빛났다. 기공을 덧씌운 수십 번의 참격이 불사자의 몸을 난자했다. 어깨, 넓적다리, 흉부, 옆구리. 커다란 전신에 잇달아 수십 개의 혈선이 그어졌다.

아주 잠깐, 불사자의 몸이 허공에 떠오른 채로 멈췄다. 불사자는 무언가를 말하려고 뻐끔거렸으나 그건 말로 이어지지 못했다.

직후, 그의 몸이 폭발하며 사방팔방으로 터져나갔다. 육편의 폭풍이 복도를 가득 메웠다.

무자비하면서도 효율적인 공격이었다. 이렇게 전신을 찢어놓는다면, 불사자라도 몸을 재생시키는 데에는 한나절이 걸릴 테니까.

“아, 아아아아! 라쉬!”

눈앞에서 불사자가 폭발하는 모습은 칼리스에겐 너무 가혹한 광경이었다. 순간 패닉에 빠진 칼리스가 비명을 질렀다.

에본 중장은 그녀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정이 들었나? 걱정 말게, 중령. 그는 불사자이지 않는가. 어차피 다시 부활할 걸세.”

“그…렇지만…. 이건. 그는 조력자였는데.”

에본 중장은 이어지는 칼리스의 말을 듣지도 않았다. 그는 대신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가며 무언가 잊은 게 없는지 되짚었다.

“좋아. 방해꾼은 고양이의 왕으로 지웠고, 불사자는 방금 치웠고. 시조는 역시 우리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으니. 이제 남은 건….”

말꼬리를 끌며, 중장의 시선이 천천히 내 쪽으로 향했다. 나와 그의 눈이 어색하게 마주쳤다.

중장이 말했다.

“그나저나, 존재감 옅다는 소리를 많이 듣나? 아니면 은신술이라도 사용했나?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넘어갈 뻔했다네.”

아까비.

아, 쓰읍. 여기 있는 모두의 생각을 읽으며, 최대한 눈에 띄지 않도록 인식의 사각에 몸을 숨기던 중이었는데. 비밀조직 출신이라 그런지 중장이 생각 이상으로 꼼꼼했다.

손가락 접기는 반칙이지. 정정당당하게 기억력으로만 승부하라는 말이야!

이대로 딱 걸렸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냥 넘어갈 수 있을까?

“필요는 발견의 어머니. 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건, 제 존재를 굳이 눈치챌 필요도 없다는 뜻 아닐까요? 저는 일개 평범한 노역자일 뿐이니까요. 그냥 보내주시면 모두에게 행복한….”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네.”

‘노역자…. 그저 살아남았을 뿐인, 운 좋은 일반인. 중령이 죽었다면 모를까, 지금은 길잡이도 필요없다. 굳이 목격자를 남겨둘 필요는 없겠지.’

살기가 부풀어 오른다. 그건 군국의 최강 전력이라는 장성이 나에게 발하는 확고한 살의.

별빛을 막을 수 없듯, 나 역시 그의 공격을 막을 능력이 없다. 천앵이라면 모를까, 이번 공격은 명확하게 무게를 가진 클로. 내 힘으로는 막더라도 그대로 꿰뚫릴 것이다.

만일 무저갱에 처음 떨어졌을 때의 나였다면 꼼짝없이 죽었겠지.

“자네의 불운을 탓하게.”

하지만, 나에겐 든든한 뒷배가 있다. 어지간한 나라보다도, 아니, 나라 그 자체인 뒷배가.

내가 티르를 부르기 직전 칼리스가 먼저 외쳤다.

“그를 공격해선 안 됩니다. 에본 중장님!”

에본 중장은 클로를 거둘 생각조차 않고 말했다.

“중령, 내 누누이 말하지만, 잔정은 넣어두게. 대업에….”

“아니요. 그게 아닙니다. 그는 시조의 비호를 받고 있습니다.”

“시조?”

[그렇다.]

직후, 빛이 드리운 그림자가 일제히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에서는 얇고 높은 목소리가, 넓고 두꺼운 그림자에서는 둔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둠의 중주는 공간을 통째로 흔들다가 점차 하나의 목소리로 수렴했다.

[그는 나의 비호를 받고 있으며, 그의 심장이 나의 심장이니.]

내 그림자 속에서 흑기사 셋이 솟아나더니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어둠으로 벼려낸 세 자루의 검이 날카롭게 섰다.

[선고하겠다. 그를 다치게 하는 이에겐 혈채를 받아내리라.]

전신이 오싹오싹 떨릴 정도로 강대한 기운이었다. 자연재해를 앞두고 경쟁심을 불태우는 이가 없듯, 평범한 사람이라면 감히 대적할 생각도 못하고 몸을 수그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 태고의 어둠마저도 장성을 두렵게 하기는 부족했다.

에본 중장은 놀라움을 가득 담아 말했다.

“노역자, 그냥 살아난 건 아닌 모양이로군. 시조를 꼬드겼나?”

“하하. 살아남기 위한 발악이랄까요.”

“발악치고는 규모가 좀 크군. 그렇다면 당연히, 그 위업에 걸맞은 대접을 해야겠지!”

라고 말하며, 에본 중장은 신속하게 클로를 휘둘렀다. 짐승의 것처럼 난폭한 발톱이 어둠을 갈랐다.

흑기사는 딱 두 합을 버텼다. 어둠을 그러모아 만든 무기가 푸르른 예기에 닿아 한 합 만에 부서지고, 아주 짧은 간격을 두고 연이어 날아온 두 번째 클로가 흑기사를 허물어뜨렸다.

다른 흑기사 둘이 에본 중장을 노리고 공격해왔다. 그러나 어느새 다가온 대령이 그중 하나의 앞을 막았다.

“감히 중장님을!”

쿵, 대령은 두 다리를 강하게 내딛고는, 두 주먹으로 흑기사를 연달아 때렸다. 빗발처럼 쏟아지는 주먹에 흑기사의 전신이 흩어졌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푸른 기운이 담긴 정권이 흑기사의 얼굴에 직격했다. 흑기사가 비틀거리다 이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동안 남은 하나까지 토막내버린 에본 중장은 이제 아무런 방해물도 없이 나와 마주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는데, 이 흑기사들 진짜로 너무 약한 거 아닐까? 티르와 싸울 때는 이 하찮음이 반가웠는데, 지금은 영 미덥지 못하다.

중장이 나를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인질이 필요하지 않겠나. 협조해주시게.”

살아있던 칼리스를 볼 때와 비슷한, 인자하면서도 차갑게 계산된 미소.

이제 알겠다. 저 미소, 그에게 있어 쓸모있는 사람을 보면 나오는 미소다. 뜻밖의 횡재를 했을 때 기뻐하면서도 냉철하게 손익을 계산하는 장사꾼이나 지을 법한 웃음이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 쓸모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겠지만. 그다지 기쁘지는 않았다.

“안심하시게, 시조. 우리의 안녕을 위해 그의 안전을 약속하지. 그는 털끝만큼도 다치지 않을 걸세…. 시조, 그대가 우리를 방해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네놈들…. 그 말을 지켜야 할 것이다.]

그림자가 경고하듯 부글거렸다. 에본 중장은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인사하고는,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대령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대령. 밧줄을 가져오게. 그를 묶어야지.”

“네, 알겠습니다!”

곰처럼 생긴 대령은 가죽 가방에서 밧줄을 꺼냈다. 불에 타지도 않고 칼날에도 잘 잘리지 않는, 군국 특제 로프다. 그것을 양손으로 당겨 강도를 확인한 대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 다가왔다.

대령이 차갑게 미소를 지었다. 나는 대령을 맞이하여, 대령이 나를 쉽게 묶을 수 있도록 양팔을 모아 냉큼 들이댔다.

“자! 빨리 묶으세요!”

“…무슨 짓이냐?”

“군국을 향한 적극적인 협조입니다! 어차피 이렇게 묶을 셈이잖아요! 빨리 끝내고 빨리 마무리합시다! 예전의 평화로운 탄탈로스를 되찾기 위해!”

대령은 뭔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으나 그래 봐야 할 일이 변하지는 않는다. 의심스런 눈으로 나를 살피며 내 손목을 단단히 묶고는, 그것도 모자라 곰 같은 힘으로 꽉 잡아당겼다. 더럽게 세게 묶는 바람에 내 손가락이 다 아플 정도였다.

역시 군국, 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완벽한 결박이었다. 에본 중장이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유쾌하군, 노역자.”

“이런 상황이니 유쾌해야죠. 무저갱에서 미간에 힘을 쓰고 무게 잡고 있어 봐야 칙칙함을 한 획 더하는 것밖에 더 되나요.”

“시조를 꼬실 때에도 이렇게 했나?”

“그건 영업비밀… 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네요. 천이백 년 동안 외롭게 살아오신 독거노인이라 그런지, 적적하지 않으시게 곁에 붙어서 재잘대니까 마음을 완전히 열어서는 간이고 쓸개고 빼줄 태도로… 악!”

저기 있던 그림자가 통조림 깡통을 내게 던졌다. 느닷없이 머리를 맞은 나는 얼얼한 뒤통수를 문지르려다, 팔이 묶였다는 것을 상기하고는 신음 소리만 냈다.

에본 중장은 나와 그림자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기억해두는 게 좋겠군. 나중에 써먹을 수 있겠어.’

나에게서 시선을 뗀 중장은 칼리스를 향해 말했다.

“자, 중령. 우리를 개의 왕에게로 안내해라. ‘길’이 열리는 30분 후까지는 준비가 끝나야 한다.”

“네, 알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칼리스가 앞장 서서 길을 안내했다. 에본 중장이 그녀의 뒤를 느긋하게 따르려는 때였다.

문득, 바닥에 떨어진 조그만 칼조각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에본 중장은 눈가를 좁히며 피 묻은 칼조각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승 탈출 꾸러미에 있던 자살용 패킷, 그것이 만들어낸 얇고 예리한 칼날.

아주 잠깐 그것을 바라보던 에본 중장은, 곁눈질로 칼리스의 오른손에 난 상처를 확인한 뒤, 작게 코웃음을 치며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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