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6 짐승, 짐승의 왕, 인간 - 2
두 개의 클로가 푸른 기운을 담고는 세상을 찢었다. 짧은 간격을 두고 연달아 이어지는 참격을, 셰이는 가볍게 손목만 틀어 막아냈다.
무게 없는 검, 천앵은 일방적으로 에본에게만 관성을 가진 무기였다. 분명 왼쪽의 클로를 막고 있었는데, 손목을 빙글 돌리니 방향을 바꾸어 곧장 에본의 머리를 쪼개려 달려들었다. 그 탓에 에본은 한 손으로 공격하면서도 언제든지 방어할 수 있도록 다른 손을 남겨두어야 했다.
“보이지 않는 무기라니. 처음에는 골치 아프다 생각했었는데.”
차라리 천앵이 보이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처음부터 그가 셰이의 손목에 집중하지 않았다면, 천앵의 비밀을 눈치채기도 전 그의 머리가 먼저 갈라졌을 테니까.
에본이 그 불합리함을 탓하며 말했다.
“확실히, 분에 넘칠 정도로 좋은 무기로군.”
“네 알량한 머리로 뭘 안다고? 네 생각보다 열 배는 좋을걸?”
셰이가 차갑게 비웃으며 검기를 휘날렸다.
천검기, 순풍.
이 순간부터, 바람은 오직 셰이에게만 미소 짓는다. 공기를 두르고 떨어지는 천앵. 무게 없는 검이나, 진동하는 바람은 그 자체로 힘이다.
“큭!”
에본이 양손으로 클로를 교차하여 천앵을 받아냈다. 여섯 개의 칼날이 천앵 하나에 맞서 거칠게 진동했다. 에본이 양팔을 거세게 밀어붙여 천앵을 떨쳤다.
막아내기야 했지만, 두 손 전부를 방어에 쓴 순간 이미 수싸움으로는 패배한 셈이다.
셰이는 비웃었고, 에본은 이를 악물었다.
“짐승의 왕에게 당한 몸 가지고 잘도 해내는구나!”
“아, 이거?”
여전히 비웃음을 머금은 채 셰이가 고개를 까딱였다. 그 순간, 혈조술이 발휘되며 바깥으로 나왔던 피가 몸 안으로 되돌아갔다.
에본이 경악해서 외쳤다.
“위장이었나!”
“아니, 위장은 아니지. 방금 회복했을 뿐, 실제로 좀 다쳤으니까.”
그 사실은 에본에게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약간이지만 피를 되돌리고 상처를 회복하는 능력이 있다면, 클로로 생채기를 내어 승부를 유리하게 점하는 전술은 사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저 고양이의 왕, 꽤 상처가 많이 났는데도 도망치지 않던걸. 잘 조련했나 봐? 덕분에 예상치 못한 타격을 좀 입었지 뭐야.”
“잡다한 능력을 가지고 자신만만하구나.”
어쩔 수 없이, 그의 두 번째 힘을 써야 했다. 에본이 왼손 손목을 비틀어 돌리며 중얼거렸다.
“콜 투 암즈, 세트.”
그 순간, 왼손 클로에 내장되어 있던 소형 군장(軍裝)이 에본의 생체 단말에 끼워졌다. 곧이어 마력을 삼킨 생체 단말이 빛나기 시작했다.
철컥, 철컥. 피부를 타고 강철로 만든 뼈대가 자리 잡는다. 그 사이로 연금광이 빛나는 3레벨 강철이 면을 채운다.
변신이 아니다. 아키 아바타를 타고 마력과 연금광이 흐르는 것이기에, 에본은 한창 전투를 하는 와중에도 군장 착용을 완료해냈다.
강철의 투구를 쓴 에본이 고개를 휘저었다. 머리를 노리던 천앵이 그의 투구에 달린 외뿔에 튕겨 나갔다. 낯선 장비를 마주한 셰이는 상대 무기를 살피기 위해 바람으로 에본을 떨쳐내며 물러났다.
에본이 자신만만하게 중얼거렸다.
“장성기(將星器), 유니콘이다.”
양손의 클로부터, 건틀릿, 견갑이 달린 흉갑에 투구, 그리고 장식용은 아닌 튼튼한 뿔까지. 상체를 보호하는 동시에 공격수단도 하나 더한, 군국에서 특별히 만든 에본만의 장비였다.
말없이 바라보는 셰이를 향해 에본이 설명했다. 뿔과 투구 아래에서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자네라면 알겠지. 클로를 이용한 싸움은 머리를 들이밀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네. 지금까지는 자네가 머리를 노리면 나는 막거나 피하기 위해 수비태세를 취해야 했으나…. 하지만, 군장을 착용한 이상 그런 건 없다. 이제 남은 건 공격뿐. 어때, 막을 수 있겠나?”
셰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의문이 가득 차 있었다.
에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렸으나, 그의 예상과는 반대로 셰이의 의문은 역량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역시, 처음 보는 군장이야. 너, 그거 훔친 건 아니지? 아니면 성능이 별로라서 폐기하기 직전이라든가?”
너무 어처구니없는 내용을 들으면 가끔 인내심도 작동하지 않는 법이다. 무례하면서도 생뚱맞은 의심을 받은 에본은 답지 않게 발끈해서 소리쳤다.
“당연하다! 나는 군국의 별이며, 내 군장은 장성에게만 허락된 기물! 그 별이 하나이듯, 장성의 군장은 유일한 것이다!”
“왜지? 저번에는 이런 바보 같은 군장을 가진 장성은 없었어. 뭐야, 도대체? 너희마저도 주범이 아니었던 거야?”
“…무슨 뜻이지?”
그러나 셰이의 의문은 지금의 에본이 대답할 수 없는 것이었다. 셰이는 싸움도 잊고는 중얼거렸다.
“교관. 남자고, 인류의 위대한 비원 뭐시기를 하는 만물의 영장. 불사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불사자 정도는 되어야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고, 짐승의 왕을 데려왔어.”
단편적인 정보가 그녀의 입을 타고 쏟아진다.
셰이의 말을 들은 에본 중장은 한층 가라앉은 눈빛으로 물었다.
“…인류의 위대한 비원? 네놈, 무엇을 알고 있지?”
셰이는 그 의문에 대답할 수 있었으나 대답할 생각이 없었다. 혼자 중얼거리기만 할뿐.
“심지어는 여자도 둘. 아지를 포함했는지 아닌지는 애매하지만, 중령이 그때 곁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호하니 그건 넘기면. 대충 모든 정황이 딱 들어맞아.”
한참 추리를 거듭하던 셰이는 맞지 않는 퍼즐 조각에 신경질을 냈다.
“그러면, 도대체 무저갱을 개판 쳐놓은 놈은 누구야?! 만물의 영장 놈들은 나름 짐승의 전문가라는 것들이 왜 아지를 그 꼴로 만들고? 그 시체는 다 어디서 났는데?!”
서로의 정보가 교차했다. 셰이의 의문은 에본이 풀 수 없었고, 에본의 의문을 셰이는 풀 생각이 없었다.
이 경우, 용건이 새로이 생겨난 건 에본이었다. 에본이 클로를 부딪히고는, 날을 세우며 스윽 쓸어 당겼다. 칼날에 불티가 튀며 쇳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오른팔을 자르고 심문해야만 말을 듣겠군. 걱정하지 마라. 생체 단말이 있는 왼팔은 남겨둘 테니. 그곳으로는 고문해야 하니까 말이다.”
나쁜 기억이 떠오른 셰이는 얼굴을 한껏 찡그렸다. PTSD가 될 법한 끔찍한 기억이 떠올라도, 가장 먼저 짜증을 느끼는 건 그녀의 장점 중 하나였다.
회귀자라는 입장에선 말이다.
“네 뿔이나 잘 간수하지 그래?”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다른 부분은 3레벨이지만, 이 뿔만은 4레벨 연금강이니까. 잘못 찔렸다가 목숨을 잃지는 않길 바란다. 네가 들려줘야 할 게 많으니.”
“아니, 그 뜻이 아닌데. 네 머리에 있는 그거.”
셰이가 불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 웃는 셰이의 머리카락은, 느닷없는 정전기로 파짓거리고 있었다.
뒤늦게 에본은 천앵이 불길하게 요동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투명해야 할 그 색이, 어느덧 먹구름처럼 어두워졌다는 것 역시도.
“뭐 맞기 딱 좋지 않아? 내려앉을 곳을 찾는 천둥새는 말이야, 뾰족한 곳을 좋아한다는데.”
심상치 않음을 느낀 에본이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셰이의 공격이 완성되었다. 셰이가 손가락을 위에서 아래로 그으며 힘을 발현했다.
천검기.
천둥새.
처음부터 정해진 것처럼, 그것 말고 다른 가능성은 없는 것처럼.
한 줄기 벼락이 유니콘의 뿔로 떨어졌다.
“끄아아아아아악--!”
전격이 에본의 몸을 타고 흘렀다. 에본은 덜덜 떨리는 몸을 추스르며 전신에 기공을 펼쳤다.
군국 제식기공, 건(乾)식. 반(反), 탄(彈).
총알이나 화살을 튕겨내는 반탄지기가 전신에 일어났다. 몸에서 밀어내는 기운으로 한순간 벼락을 떨쳐낸 그는 다리를 땅에 박아넣고는 기공을 끌어올렸다.
제식기공, 곤(坤)식. 류(流)
다리를 땅에 붙이고 기공을 퍼뜨려, 벼락을 순간적으로 땅에 흘려보낸다. 그의 몸을 파고들던 뇌기가 순식간에 저 아래로 스며들었다.
벼락을 흘려내는 위업을 달성한 에본이 숨을 몰아쉬었다.
“후욱. 후욱.”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너무나 막심한 손해다. 상대방의 공격을, 피하는 것도 아니고 버텨내기 위해서 연달아 기공을 펼쳐야 했으니 기력 소모가 극심했다.
몸을 추스르는 에본을 향해 셰이가 이죽거렸다.
“어찌저찌 건곤(乾坤)은 이룬 것 같네. 어때, 감(坎)은 잡았니? 아니면 요즘도 곤까지만 이루면 다 장성 시켜 줘?”
“크윽… 어쩌다 운이 좋게 기물을 손에 넣은 주제에! 그 힘으로 우위를 차지한다고, 네가 나보다 위라도 되는 것처럼 지껄이지 마라!”
에본이 회복할 시간을 벌 요량으로 외쳤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셰이는 얼굴을 콱 구겼다.
“템빨이라고?”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다만, 무언가 발작적인 반응에 에본은 부정하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동안 셰이는 씩씩거리며 천앵을 꼬나쥐고는 에본을 노려보았다.
“템빨이라고 했어, 지금?”
적의가 부푼다. 그것을 감지한 에본 중장은 급히 클로를 들어올렸다.
천앵을 양손으로 단단히 잡고, 팔을 감은 채로 어깨 뒤로 든다. 동시에 셰이는 전신에서 기공을 끌어올렸다.
온갖 보물을 모으고, 영약을 섭취하여 넘치는 기력이 천앵에 스며든다.
찰나의 순간, 어마어마한 기운을 전신에 휘감은 셰이가 에본을 향해 외쳤다.
“템빨이라고 그만해, 이 새끼야! 천앵 없어도 중장 따위는 이겨어어엇!”
천반경.
동작을 미리 몸에 새겨, 불의의 공격조차 자연스럽게 받아넘기는 궁극의 방어기공.
그러나, 새긴 동작이 꼭 방어식일 이유는 없다.
방어보다는 공격의 가짓수가 많다. 더 다채로워야 하며, 상대에 따라 맞추어야 한다. 따라서 천반경처럼 미리 준비해두는 식(式)의 경우 방어의 효율이 압도적이다.
실제로 천반경이라는 기공 역시 그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고.
그래도 조금은… 공격식이 있어도 되지 않을까. 비교적 상황을 타지 않는 동작이라면, 다섯 개 정도는.
셰이는 그렇게 생각하고, 행했다.
셰이가 고집스럽게 만든 다섯 가지 공격식 중 하나. 왼쪽 사선 베기.
천앵이 묵직하게 공간을 갈랐다. 무게 없는 검은 기력을 담으면 그것이 힘.
푸르른 기공이 가득 담긴 검은, 이 무저갱 속 유일하게 펼쳐진 하늘이었다. 저항할 수도, 막아낼 수도 없는.
“반탄…!”
에본이 몸을 방어하기 위해 극성으로 기공을 펼쳤으나.
너무나도 강맹한 힘 앞에 튕겨 나가는 건 그의 클로뿐이었다.
4레벨 연금강으로 만들어진 유니콘의 뿔이 꺾였다. 견갑부터 흉갑까지 천앵이 큼직하게 가르고 지나갔다. 그 안에 담긴 기공마저도 베어내며, 천앵은 에본의 몸에 푸른 사선을 그었다.
피가 튀었다. 에본이 비틀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천반경 공격식의 역동작 때문에 잠깐 멈추었던 셰이는, 이미 거리가 벌어진 김에 더 추격하지 않고 상대를 살폈다.
그나마 치명상을 피한 건 반탄기공의 덕이었다. 전신에 퍼뜨린 반탄기공 덕분에 베이는 순간 몸이 밀려났고, 천앵의 궤적으로부터 갈비뼈는 지킬 수 있었다.
이미 심각한 상처이지만, 어쨌든 목숨은 구한 셈이다.
에본이 핏물과 함께 한탄을 뱉어냈다.
“…빌어먹을… 절창…. 이딴 괴물을… 무력화시키지도 않고… 떨어뜨리다니….”
셰이가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알았으면 준비를 더 해오지 그랬어.”
에본이 웃었다. 한참을 웃어 젖히다가 피까지 토해낸 에본은, 울컥이는 피를 손으로 막고는 중얼거렸다.
“하하… 고양이의 왕까지, 데리고 왔는데…. 무슨 준비가 더 필요한가?”
셰이도 수긍했다. 만물의 영장이 짐승의 왕까지 대동했을 정도면 나름 신경을 쓴 셈이다. 이 이상의 전력은 말 그대로 결전을 위한 힘. 중장 개인이 사사로이 쓸 수 없는 것.
대신 에본 중장은 그의 위치에서, 그가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썼다. 중장이라는 입장에서 나오는 권력부터, 애써 키우고 포섭한 인재들, 마력초와 그의 부관까지.
“그런데, 이런… 변수 하나에, 모조리 막힐 줄이야….”
허무하게 중얼거린 에본이 유니콘을 해제했다. 부서진 금속은 그렇게 상실된 채, 남아있는 부분의 연금강이 빛무리로 화하더니 에본의 왼팔로 몰려들었다.
픽, 하고 군데군데 이가 나간 군장 패킷이 빠져나왔다. 장성의 군장은 일종의 식별표이자, 군사기밀이 가득 담긴 무기. 패배했을 경우, 기술 유출의 방지를 위해서라도 패킷의 형태로 잠가두는 것이 군인의 미덕이다.
에본이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집어 들 때였다.
군장 패킷의 안쪽에서 파삭, 하는 소리가 들렸다. 보석이 깨질 때나 들릴 법한 허무한 소리.
그 뒤, 깨진 보석 조각이 에본의 발치에 떨어졌다.
에본의 눈이 커졌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그것의 정체는 서로 공명하는 쌍둥이 보석이었다.
한쪽이 깨지면 다른 한쪽도 깨지는.
“뭐야, 그건?”
셰이의 의문이 들렸으나, 그가 대답할 의무는 없었다.
곧이어 답이 나올 것이기도 했고.
키하하하아아아아아아아아악!
저 멀리서 나비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단순한 하악질과는 다른, 약간의 광기마저 묻어나는 하울링.
놀란 셰이가 건물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야? 흉성(胸聲)?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큭, 큭, 큭.”
이런 일에 익숙했던 에본은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아차렸다.
나비를 조련하는 과정은 어렵고 시간이 많이 들며 위험하기까지 했다.
마약에 중독된 인간조차도 위험하다. 하물며 그게 고양이의 왕이라면 어떨까.
처음에는 선물인 줄 알고 넙죽 마력초를 받은 나비는, 가끔 증상이 심해질 때면 마력초 관리자를 공격하고는 남은 것을 빼앗아 달아나고는 했다.
그렇게 마력초 관리자가 죽으면 에본은 즉각 마약 공급을 중단했다.
마력초가 다 떨어지면 나비는 슬금슬금 돌아왔다. 협박하고, 애원하고, 가끔 기지를 다 뒤집어 엎었으나 없는 마력초를 찾을 수는 없었다. 금단 증상으로 몸을 뒤틀던 나비는, 마력초를 제공하는 유일한 존재가 에본이라는 사실을 각인했다.
그렇게 한참 애를 태우고 난 뒤, 뒤늦게 마력초를 제공하며, 마력초를 훔쳤다간 다시는 받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납득시켰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계속.
그러한 노력 덕분에 나비는 '관리자의 죽음'과 '마약의 상실'을 연관 짓게 되었다.
그건 에본에게 있어서도, 대령에게 있어서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최소한 대령의 목숨은 나비로부터는 지킬 수 있으며, 대령이 죽으면 나비가 발광하여 모든 것을 초토화시킬 것이기에. 둘 모두에게 든든한 보험이었던 것이다.
“…하. ‘그’는 이런 것도 만들었나…. 참, 나보다도 더하군.”
그러나 만물의 영장을 후원하는 어떤 존재는, 그것마저도 장치로 만들어둔 것이다.
만일 에본이 패배하면, 고양이의 왕으로 하여금 발광하도록…. 현재 에본의 유일한 부관인 대령의 몸속에 무언가를 설치해두었음이 분명했다.
아마 보석이 깨지면 반응하여 몸 안을 헤집는 종류겠지. 가능한 피냄새가 나도록.
“어쨌든, 고맙군. 덕분에….”
나비가 발광하고, 잠깐 셰이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한 틈을 타.
에본은, 아까 입을 가리는 척 넣었던 마력초를 이빨로 짓씹었다. 풀을 감싼 종이가 뜯어지며, 안에 있는 개박하로 만든 마력초가.
정확히는, 개박하의 왕과 더불어, 세계수의 잎을 말려서 특수제작한 마력초가 입안 가득히 퍼졌다.
에본이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큭큭. 이건, 쓰고 싶지 않았는데….”
틱.
그의 손가락에서 불꽃이 일어난다. 무투파인 그이지만, 1레벨의 일상 마법 정도는 교양으로 익히고 있었다.
“세트, 리.”
발화, 이그나이트.
불꽃의 피렌하이트와 바람의 파스칼의 조합. 그의 입안에 있던 불이 들불처럼 번지며 단숨에, 일제히 불타오른다. 마력초를 연료 삼아.
고양이 왕이 발하는 흉성 때문에 잠깐 한눈을 팔았던 셰이가 의아해했다.
“어? 자기 입에 불을 당겼어? 무슨 짓거리를…?”
그 답은, 에본 중장이었던 것이 했다.
“키하아아아악…!”
눈동자가 세로로 좁아진다. 그의 머리카락이 빳빳이 곤두섰다. 자세가 자연스레 낮아지고, 발톱이 조금 자라며, 인간의 몸으로 흉성 비슷한 것을 발한다.
셰이는 이제야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너…! 고양이 수인…!”
에본의 입에서 대답 대신 검은 연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마력초가 불에 타며 생기는 연기는 그냥 향보다 몇십 배 강한 자극을 준다. 그것을 고양이 수인이 맡으면 고통을 잊고, 짐승의 피를 되찾으며, 흉성을 발하게 된다.
지독한 중독성과 극심한 후유증이 있어서 만물의 영장에서도 그리 권장하지는 않지만.
죽음 직전에 사용하겠다면, 불가능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에본은 불길이 입안을 다 태우는 와중에도 소리쳤다.
“키햐아아악! 아니! 나는 짐승이 아니야! 인간이다--!”
에본이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네 발로, 아까보다도 빠르고 가볍게.
흉성을 발하면서도 지성은 잃지 않은 이 모습을, 셰이는 지난 회차에서 상대해본 적이 있었다. 인간의 가장 큰 적이었던, 짐승의 왕을 대동한 수인들이 정확히 이런 모습이었다.
“왠지 공격방식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고양이의 왕이 너를 따랐구나! 네가 자기 백성인 줄 알고! 하지만, 귀와 꼬리는 어떻게…!”
셰이는 급히 에본을 살폈고, 그리고 보았다.
투구가 사라진 부분, 곤두선 머리털 속.
피딱지가 굳어서 생긴, 무언가 잘려나간 흔적이.
“자기 귀를…! 미친… 놈들…!”
그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에본의 클로가, 진짜 고양이라도 된 것마냥 아까보다 훨씬 강맹하고 교묘하게 덮쳐왔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태우며 덤벼드는 에본을 상대로, 셰이는 2차전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