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107화 (107/384)

EP.107 짐승, 짐승의 왕, 인간 - 3

칼리스 크리츠 중령의 눈앞에서는, 지금 천지가 진동하는 결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개의 왕, 고양이의 왕, 그리고 시조.

그야말로 세계의 운명을 결정짓는 대결이었다. 설사 그러지는 않을지라도, 칼리스의 입장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이 싸움의 결과에 그녀의 운명이 걸려있으니.

철컹거리는 목줄이 그녀를 잡아당겼다. 칼리스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그런데도 사슬 당겨지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칼리스는 꼴사납게 땅을 뒹굴어야 했다.

목을 조이는 사슬에 고통받으면서도 칼리스는 한 가지만을 되뇌었다.

‘삶을, 포기할 수 없어. 나는 살 거야.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야. 살아남아… 위쪽에 올라가… 아버지의 유산을….’

그러나, 할 수 있을까.

조금 전, 발광하는 나비의 가슴팍에 시조의 정권이 꽂혔다.

고작 주먹질 한 번, 이라 치기엔 너무나도 치명적이었다.

꼬나쥔 주먹이 나비의 가슴에 닿은 순간, 으직, 하며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주먹이 부딪힌 부분에서 붉은 혈기가 태양처럼 폭발했다.

그 뒤, 나비는 총알처럼 튕겨 날아갔다. 팔과 다리를 휘적이지도 못한 채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만일 나비가 평범한 생명체였다면, 맞은 순간 가슴이 내려앉고 숨이 끊어졌으리라.

그러나 상대는 고양이의 왕.

날아가던 나비는 붉은 눈을 뜨더니, 흉성을 발하며 울부짖었다. 날아가는 도중에도 묘기처럼 몸을 뒤집어서 벽에 착지한 다음, 날카로운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며 앞발을 핥더니.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기척을 숨긴 고양이는 순간 세상에서 사라진 것과 다름 없었다. 누구도 보지 못하고, 누구도 듣지 못했다. 나비가 세상에 존재하는 건, 직접 모습을 드러냈을 때밖에 없었다.

그 탓에 시조와 아지는 지극히 수세에 몰렸다. 그들에겐 족쇄가 하나씩 있었기 때문이다.

시조는 노역자…? 인지 뭔지 모를 것을 지키느라.

그리고 개의 왕은, 칼리스를 지키느라. 정확히는 칼리스가 싸움의 여파로 죽지 않게 하느라고.

‘개의 왕이… 나를 살리려고 하는군. 어쩌면 나 자신보다도 더.’

그럴진대 그녀는 개의 왕의 발목이나 잡고 앉아있었다. 목줄에 묶인 채, 그녀 자신의 목숨을 인질로 삼아.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우스운 꼴이었으나, 칼리스도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 내가 저항한다고… 무엇이 바뀌지?’

여기서 저항하면? 고양이의 왕이 패배한다면?

탄탈로스에 있는 이들은 군국에게 잡혀서 내던져진 범죄자들. 이들의 편을 들어서 얻을 것이라고는 암울한 미래뿐이다.

대신, 고양이의 왕이 승리하고, 만물의 영장이 목표를 이룬다면. 칼리스가 얻는 건….

얻을 것이라고는….

무엇일까?

고민하던 칼리스의 눈앞에, 문득 라쉬의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칼리스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움켜쥐려고 다가갔으나.

철컹.

목을 감은 묵직한 쇠사슬이 그녀를 잡아당겼다.

‘…사슬.’

지금껏 그녀를 잡아당기고, 목을 죄고, 죽이려고 든, 사슬만이.

그녀가 만물의 영장을 따르며 얻은 유일한 것이었다.

한때는 자랑스럽게 내보였으나, 결국 아무짝에도 쓸모없던 훈장도.

희망의 탈을 쓰고 있던 자살용 패킷도.

명령이랍시고 목에 감은 사슬도.

고양이의 왕도.

전부 그녀를 죽이려고 했을 뿐.

그에 반해 그녀를 구하려던 라쉬와 아지는, 지금 비참한 꼴이 되어 땅을 뒹굴고 있다. 칼리스 대신 그녀를 살리기 위해 피를 흘리고 있다.

칼리스는 조용히 라쉬가 했던 말을 되뇌었다.

‘…아버지의 유산은, 나.’

아버지에게는 소중한 딸이었겠으나, 칼리스는 누구에게도 소중하지 않았다.

중령씩이나 되었으나 아무것도 몰랐다.

만물의 영장이 무엇을 계획하는지, 누구를 버림말로 썼는지.

그녀는 군국의 중령이면서도, 1레벨 시민과 다를 바 없다. 아니, 0레벨 노역자보다도 하찮은 존재였다. 최소한, 그 노역자…? 는 대령의 목을 졸라 죽일 각오까지 있었다.

…과연 그가 정말 0레벨 노역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 당장 칼리스가 살기 위해선 오직 한 가지 명제만을 따라야 했다.

“사슬을, 끊어야 해.”

나중을 생각할 필요 없다. 칼리스는 중령조차도 아까운 하찮은 인간이니, 미래니 전망이니 하는 것은 밤바다에 몰아치는 폭풍을 보고 파도를 읽으려는 헛된 노력이다.

그런 건, 그럴 능력이 있는 자들의 전유물이다.

지금의 칼리스에겐 1초 앞의 미래조차 보장되지 않았기에.

한순간, 한순간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지금부터라도.”

칼리스가 허리띠를 움켜쥐었다.

이제 꾸러미는 없다. 만물의 영장이 그녀에게 하사한 비장의 꾸러미는 다 없어진 지 오래. 대신, 저 안쪽 깊숙이에 남아있는 사소한 추억만이 그녀에게 남은 모든 것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물려주었던 유산.

집과, 자동마차와, 금박이 붙은 칼과 군장.

그중 들고 다닐 수 있는 유일한 유산… 군장이. 허리띠 주머니 깊숙이 숨겨져 있다.

칼리스가 주머니를 달린 허리띠를 가지고 있던 것도, 그 군장과 언제나 함께하기 위해.

그리 대단치도 않고, 구형에다가, 고작 왼팔 일부분일 뿐이라서 군국에게는 군장이라 인정받지도 못하고 버려졌으나.

덕분에 유산이 되어 칼리스의 손에 쥐어진 유일한 무기.

“콜 투 암즈.”

작게 읊조리며, 칼리스는 군장 패킷을 왼팔에 있는 생체 단말에 꽂았다. 직후 연금광이 빛을 발하며 압축된 강철이 올올이 풀려난다.

장교는 군장으로 완성된다.

군정이 들어선지 25년밖에 되지 않는 짧은 역사의 나라, 군국.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를 차지한 군국이 주변국들 사이에서 입지를 공고히 할 수 있었던 것은, 온갖 기술을 접목하여 급격한 전력확충을 꾀한 데에 있었다.

철컥, 철컥.

칼리스의 팔꿈치부터 손가락 끝까지 뒤덮는, 금속 비늘로 만들어진 매끈한 건틀릿이 생겨났다. 장착을 완료한 칼리스는 왼손 주먹을 쥐었다. 금속끼리 맞닿는 거친 쇳소리가 났다.

이 군장의 능력은 간단하다. 육신의 보호.

그저 성능 좋은 장갑에 불과한 하찮은 군장이다.

칼리스는 실망하지 않았다. 도구란, 어디까지나 사용자 나름인 것. 더 좋은 군장이 있더라도 칼리스는 힘을 제대로 끌어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반평생을 함께 해 온 이 군장이라면, 분명 그녀의 뜻을 이루어주리라.

칼리스는 그것을 믿고 사슬을 묶고 있는 자물쇠를 쥐었다.

사슬은 4레벨 연금강이다. 칼리스의 능력으로는 절대 끊을 수 없다.

그러나 사슬을 채운 자물쇠는 그렇지 않다.

칼리스가 죽은 줄 알았던 에본 중장은 이 사슬을 대령의 목에 걸 생각이었고, 그렇기에 자물쇠는 어디까지나 사슬이 풀어지지 않도록 하는 잠금쇠 역할에 불과했다. 구태여 귀중한 물건을 쓸 이유가 없던 것이다.

물론, 사슬에 채운 강철 자물쇠를 간단히 부술 수 있냐면 그건 아니지만.

꼭 부수지 않더라도 해체할 수 있다면.

칼리스는 건틀릿을 낀 손으로 자물쇠를 움켜쥐고는, 전신에서 마력을 끌어올렸다.

군국 제식 마법.

“세트, 리, 리, 리, 리….”

마도병대 소속, 칼리스 크리츠 중령.

그 특이성 때문에 전원 장교로 이루어진 마도병대에서, 만물의 영장에게 발탁된 이.

마법사가 다 그렇듯 소규모 전투에서는 그다지 쓸모는 없으나, 제식 마법의 진수는 범용성에 있다.

마력을 휘감은 건틀릿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신체 매개 마법이란, 본디 자기 육신을 매개로 삼아 기적을 현현하는 구태의 방식.

옛 마법사들이 자주 썼던 방식이지만, 세계의 규칙을 덧씌우며 생겨나는 반동을 고스란히 자기가 짊어지는 문제가 있어 사장되었다. ‘강한 마법사일수록 빨리 죽는다.’라는 말만 남기고.

그러나 군국이 생체 단말과 의복 패킷을 발명하고, 신체가 짊어져야 할 대가 중 일부를 아키 아바타를 통해 패킷에 떠넘길 수 있게 된 뒤. 제식마법은 당당하게 마법의 한 갈래가 되었다.

“…리, 리, 리알케, 디케이, 문드.”

마력이 모이고, 마법이 시작되었다.

연금 해제, 부식, 균열.

각각 2레벨에 달하는 마법 세 개를 동시에 발현한다.

조합 마법, 연금 물질 분해. 잠정 평가는 3레벨.

몸에 닿은 연금 물질을 부스러뜨리는 3레벨 마법이 자물쇠를 서서히 좀먹었다.

그렇게 자물쇠가 충분히 달아올랐을 때, 칼리스는 건틀릿을 쥐었다.

콰직.

그녀의 주먹 안에서 갈라지고 문드러지며 분해된 자물쇠가 산산이 부서졌다. 대가로 그녀가 착용한 건틀릿의 손바닥 부분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급히 설정하느라, 피부 일부가 분해되어 손아귀에서 피가 흘러나왔지만.

어쨌든, 그녀는 사슬로부터 해방되었다.

사슬이 가벼워졌다. 막힌 것만 같았던 목이 뻥 뚫린 기분이다.

산뜻한 해방감을 느끼며, 칼리스가 목에 걸린 사슬을 집어던졌다.

“개의 왕!”

완전히 해방된 칼리스가 아지를 향해 소리쳤다.

“나는 해방되었어! 이제 나를 신경 쓰지 말고 싸워라!”

“멍? 멍! 멍…”

찰그락거리는 사슬 소리에 고개를 돌린 아지는, 사슬에서 벗어난 칼리스를 보고는 기쁘게 짖었다.

“…청이! 멍!”

칼리스는 잠깐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을 느꼈으나, 곧 마음을 다잡고는 외쳤다.

“고양이에 집중해!”

“알아, 멍!”

어둠 속에서 나비가 튀어나왔다. 본능으로 알아차린 개의 왕은 역습을 준비하며 일단 방어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지의 오른팔은 올라가는 대신 어깨 아래에서 덜렁거렸다. 아지가 의아해하며 자기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멍? 깨갱!”

필사적으로 몸을 비트는 아지를 향해 나비가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급히 몸을 숙인 아지. 머리를 노리다 빗나간 앞발이 콘크리트 벽을 두부처럼 깨부쉈다. 흩어지는 먼지 속에서 아지가 나비를 피해 땅을 뒹굴었다.

사슬은 벗었지만,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때 나타나는 흉성.

적을 죽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때, 짐승은 완전한 살의를 발한다. 다른 모든 것을 덜어낸 채, 존재하는 모든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적’을 죽이려고 든다.

이 순간, 고양이의 왕은 필살의 의지를 가진 짐승이었으며, 가장 잘하는 방식으로 적을 배제하려고 했다.

“깨갱, 깨갱!”

지금껏 칼리스를 지키느라 상처입은 아지는 어둠 속에서 치고 빠지는 나비에게 일방적으로 당할 뿐이었다.

시조가 아지를 도우려고 한걸음 나섰으나…. 그때마다 나비는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명백하게 시조를 견제하는 움직임이었다.

노역자에게서 멀어질 수 없었던 시조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뒤로 물러났다.

개는 흉성을 발휘할 수 없다. 모든 흉성은 늑대가 짊어지고 있기에.

시조는 움직일 수 없다. 자리를 비웠다간, 노역자…? 가 위험에 빠지니까.

당장, 아지를 도울 수 있는 건 칼리스 뿐이었다.

그리고 칼리스는 아지를 도와야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세트.”

건틀릿이 철컥였다. 칼리스가 남은 마력을 전부 끌어올리며 확실하게 읊조렸다.

“리, 리, 리, 리. 피렌하이트, 셀시, 켈.”

마력을 설치, 응축, 응축, 응축, 응축. 그리고 그대로 가열.

순식간에 4단이나 응축된 마력을, 칼리스는 그대로 왼팔에 감았다.

현현한 것은 과열. 건틀릿이 붉게 달아오른다. 열기로 팽창한 강철 비늘이 일제히 일어나며, 화염으로 호흡하는 것처럼 시뻘건 불꽃이 강철로 이루어진 틈새를 오간다.

칼리스는 팔이 익어버릴 듯한 격통에 이를 악물었다. 그나마 건틀릿이 팔을 보호해주고 있었으나, 드러난 손바닥으로 채 막지 못한 열기가 침투한다. 피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군장을 넘어, 자기 몸조차 파괴하는 격렬한 열기.

그러나 멈출 수는 없다.

팔이 불타버리는 것보다, 아지가 쓰러지는 것이 문제이기에.

이미 마력으로 휘몰아치는 암즈에 칼리스는 마력을 덧씌웠다.

“세트, 아쿠스, 리, 파스칼…!”

물을 더하고 바람을 압축. 왼손 가득히 모였던 열기는 탐욕스럽게 물을 삼킨다. 비명을 지르는 물방울을 끝까지 압축하고, 압축했다가.

나비가 아지를 습격하기 직전.

힘을 풀었다.

“스팀스트림!”

격렬한 증기가 해방되었다.

과열된 강철, 그 안에서 떨어진 한 방울의 물. 끓어오르는 증기가 서로 반발하며 튀어오른다. 칼리스는 그 힘을 한계까지 모았다가 한 점으로 쏘아냈다.

그것은 증기이며, 바람이 되어버린 물.

치이이이익!

증기가 거세게 뻗어 나간다. 시끄러운 소리와 더불어 새하얗게 시각화된 뜨거운 열기가, 세상을 뒤엎을 기세로 요란하게 뿜어져 나온다. 나름의 공격력와 유용성을 갖추고 있는 2레벨 마법.

고작 2레벨, 전투 마법이다. 진짜 고양이라면 모를까, 그 왕이라면 터럭 하나 상하지 않을 하찮은 재주.

그러나.

“하악!”

의외의 공격에 놀란 나비는 펄쩍 뛰어 달아났다.

흉성에 몸을 맡기면 이지를 잊고 본능을 따르게 된다. 물도 싫고 뜨거운 것도 싫은 고양이의 왕에게, 뜨거운 증기란 이루 말할 수 없는 무언가.

하찮은 재주일지언정, 세상을 비틀고 속이는 것이 마법. 칼리스는 뜨거운 증기를 흩뿌리며 나비를 몰아냈다.

“가, 가까이 오지 마!”

명령이 아닌, 애원에 가까운 비명을 내지르며 아지 근처에 증기를 흩뿌렸다.

정작 아지도 새하얀 증기를 반기는 건 아니었는지 꼬리로 불만스럽게 땅을 탁, 탁 내리치기는 했지만, 칼리스는 그것을 무시하고는 아지 곁에 섰다.

“어차피 상처 입은 몸이야. 이대로 대치하면 돼! 시간만 끌면 흉성은 잦아들게 되어있어!”

스스로 다짐하듯 소리치며, 칼리스는 마법을 유지한 채로 사방을 겨누었다.

지독한 침묵이 무저갱을 잠식했다. 누구 하나 헛되이 소리를 내지 않았다. 소음이 섞였다간 어둠 속에 숨은 고양이를 놓칠 테니까.

칼리스는 소리 비슷한 것이라도 들리면 곧장 증기를 쏘아냈다. 그게 들어맞았는지, 아니면 틀렸는지는 모른다. 단지 도움이 되기를 바랐을 뿐.

그렇게,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머리카락을 타고 땀방울이 떨어진다. 몸으로 파고든 열기가 전신으로 퍼지고,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는다. 칼리스는 탈진과 탈수 직전의 상황에서 아슬아슬하게 마법을 붙들었다.

그동안 시조는 흑기사를 일으켜 어둠을 채우고 있었다. 만일 고양이의 왕이 어둠을 틈타 기습하려고 든다면 곧장 알아차릴 것이다.

상처를 연달아 핥던 아지는 다시 몸을 움직일 만한 기력을 얻었다. 아지가 양손으로 땅을 짚고 곧장 달려나갈 듯이 몸을 웅크렸다.

‘좋아. 이대로만 가면.’

산다. 살아남는다.

중장에게 반기를 든 이상 군국에 다시는 못 돌아가겠지만. 남겨둔 것을 칼리스가 다시 볼 일은 없겠지만.

만일 그녀에게 남은 기회가, 시간이 있다면.

이번에야말로 더 나은 기억을 쌓아갈 것이다.

그녀의 바람을 듣기라도 한 것일까, 칼리스가 들고 있던 엄지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예견에 가까운 예감이 칼리스에게 찾아왔다.

“내가 왔소!”

얼마 듣지 못했는데 벌써 그리운 목소리다. 순간적으로 칼리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불사자, 라쉬. 얼마나 반가운 이름인가.

죽어도 죽지 않고, 언제나 돌아오는 그의 존재는 칼리스에겐 든든하기만 했다.

이것으로 아군이 하나 늘었다. 고양이의 왕으로부터 살아날 가능성이 늘었다.

그리고 칼리스가 그리던 미래에, 한걸음 가까워졌다.

희망찬 미래가 다가오는 것 같아, 잠시 마음을 풀었던 칼리스에게.

“피해요!”

노역자가 외쳤을 때, 반응이 늦어버렸다.

푸욱.

무언가를 찢는 소리와 함께 격통이 느껴졌다.

칼리스는 고통에 신음하려 했으나 그마저도 잘 안 되었다. 무언가가 그녀의 몸을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 같았다.

몸 안을 맴돌던 열기가 복부를 통해 빠져나왔다. 칼리스는 힘겹게 고개를 내려 그녀의 배를 파고든 것을 확인했다.

그녀의 복부에는 세 개의 칼날이 삐져나와 있었다.

어디서 본 것과 닮았다. 손가락 한 마디 간격으로 매달린 세 개의 칼날.

분명, 중장의 클로였을… 터.

“배신자는… 죽음뿐이다. 알지 않는가, 중령.”

오른팔이 없어진 에본 중장이, 칼리스를 향해 차갑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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