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109화 (109/384)

EP.109 짐승, 짐승의 왕, 인간 - 5

나의 탈출 마술이 끝난 이후.

에본 중장의 얼굴에 수십 가지 표정이 스쳤다.

의아함, 허망함, 분노, 절망, 실패감, 미안함, 괘씸함 등등.

그러나, 어쩔까. 내가 중간에 풀어버리는 기색이라도 보였다면 모를까. 이미 멀리 떨어진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중령!”

“휴!”

마침, 불사자와 티르가 도착했다. 냉큼 달려온 불사자는 쓰러지려는 칼리스를 부축했으나, 티르는 피 흘리는 칼리스에겐 관심도 없는 듯이 나를 살폈다.

“놀랐지 않느냐! 혼자 달려나가면 어찌한다는 말이냐? 언질이라도 주었어야지!”

불가능했다. 내 생사밖에 관심이 없는 이 흡혈귀에게 말했다면, 보내주는 대신 일단 붙잡고 봤을 것 같아서 말이야.

솔직하게 말하는 대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흐렸다.

“멀쩡하면 됐죠, 뭐. 저는 괜찮으니까, 저 사람 피나 되돌려주세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자 티르가 눈매를 좁혔다.

“피, 말이냐?”

“네. 혈조술은 약해졌어도, 그냥 흐르는 피를 안쪽으로 돌리는 정도는 가능하시죠?”

먼 과거, 티르는 치료사였다. 그때 티르는 사람들의 상처를 멎게 하는 데 혈조술을 쓰곤 했다.

그때도 했으니 삶을 되찾은 지금이라도 혈조술로 피 정도는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내가 합당한 부탁을 했을 때였다.

왠지 티르가 불만스럽게 볼을 부풀렸다.

“그토록 저 병사의 목숨이 귀중했느냐? 네 목숨을 걸고 달려갈 만큼?”

‘나는 혹여나 네가 죽을까 전전긍긍하였거늘, 어찌 된 것이 나보다도 더 제 목숨을 아끼지 않는구나!’

어이구, 화가 단단히 나셨네.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말싸움으로 이겨? 아니면 감정에 호소해?

아직 일이 다 끝나지 않았으니 쉬운 방법으로 가야 할 것 같은데.

말대꾸하는 대신, 나는 손을 들어올려 티르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섬세한 은발이 손끝에서 부드럽게 구른다.

갑작스럽게 줄어든 거리에 티르가 말을 멈추고 흠칫거릴 때, 손바닥에 올린 은빛 머리카락을 서서히 흐트러뜨리며 말했다.

“제가 죽었으면 흡혈귀로 만들어주셨을 거잖아요.”

죽어도 흡혈귀가 되면 된다는, 논점이 살짝 빗나간 말. 그러나 감성을 건드리려면 논리보다는 무게가 담겨있어야 하는 법이다.

일종의 고백 비슷한 말에 티르가 소심하게 대꾸했다.

“그, 그러하나…. 내 혈조술이 온전치 못하여….”

나는 순진하게 물었다.

“못해서요?”

“지금 나의 피로 흡혈귀가 되어도, 멀리 떨어져 있으면… 피가 잘 움직이지 않을 터이다.”

“멀리 있으면 안 통한다고요?”

싱긋 웃으며, 머리카락을 코끝에 갖다 대고는 중얼거렸다.

“그럼 계속 가까이 있어야겠네요. 그래도 뭐, 살아난다면야. 감수할 만하죠?”

“읏…!”

티르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심장이 제대로 일하는 모양이다.

나에게서 반사적으로 멀어진 티르는, 새침하게 쏘아붙이며 칼리스에게로 향했다.

“…죽기만 해보거라. 되살려서, 아주 죽도록 부려먹어주마!”

그러고는 내 부탁대로 칼리스의 피를 되돌리는 티르였다. 친절하게도 어둠을 그러모아서 칼리스의 몸을 붙잡아주기도 했다.

불사자는 그가 칼리스를 위해 할 일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는 티르에게 맡기고 물러났다. 손이 비게 된 그는 나에게 다가왔다.

“선생, 수고하셨소!”

“열심히 일하기는 했어요. 이제 슬슬 쉬어도 될 만큼.”

“그래도, 이 점은 짚을 수밖에 없구려! 참 짓궂으시오! 그토록 급박한 와중에도 장난을 치다니!”

“장난이라뇨?”

“사슬을 풀지 못한 척한 것 말이요!”

“네? 그게 장난처럼 보였어요?”

“…아니었소?”

불사자가 눈을 끔뻑거렸다.

와, 사람 살렸는데 타박을 해? 나는 억울한 티를 숨기지 않으며 세상 떠나가라 외쳤다.

“아이고. 열심히 일했더니 태도로 트집을 잡네! 내가 사슬을 냉큼 풀어버렸어 봐. 저 중장이 그대로 물러났겠어요? 곧장 나에게 칼날을 던졌을걸요!”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군! 반박할 말이 없소!”

불사자가 곧장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이 너무 즐거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길래 그만 착각해버렸소! 미안하오!”

“용서해드릴 테니까 앞으로 처신 잘해요.”

즐거운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건 부수적인 요인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이왕 안전을 위해서 연기하는 김에 나도 즐거우면 좋잖아.

“그나저나 재주도 좋소. 그 짧은 시간에 풀어낼 줄이야.”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애초에 클로같은 근본 없는 무기를 쓰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무기는 조립식이나 분리형이 아니라 통짜를 써야 한다고요.”

그도 쓰고 싶어서 쓴 건 아니었지만 말이지. 군국의 장성은 가장 상성 좋은 무기를 포기한 채로 도달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니.

그때였다.

“멍멍! 멍멍멍!”

저편에서 화색이 된 아지가 짖으며 달려왔다. 팔에는 클로 손잡이가 묶인 쇠사슬을 차고 있었는데, 길이가 10m나 되는 쇠사슬은 아지가 달릴 때마다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에본 중장은 실패한 순간 어딘가로 달아났기에, 아지는 방해 없이 즉각 나에게로 뛰었다.

“자식, 고생시키긴.”

그래도 나를 제일 많이 봤다고 곧장 나에게로 뛰어오는구나. 개 키운 보람에 감개무량하다…라고 생각하는데, 왠지 아지의 속도가 줄어들지 않았다. 아지는 속도를 줄이는 대신 폴짝 뛰어서 나에게로 안겨왔다.

“꾸엑!”

개가 뛰어들어도 꼴사납게 넘어질 자신이 있는데, 심지어 아지는 몸뚱이만은 성인이다. 거기에 사슬까지 매달고 있어 건장한 나조차 버티지 못했다.

쓰러진 내 위에 올라탄 아지가 연신 얼굴을 핥았다.

“멍! 멍!”

“아이 씨. 야! 나 안 다쳤어! 핥지 마!”

“멍!”

은혜는 아는 것 같아서 좋은데, 갚는 방식이 잘못되었다. 핥지 말고 어디서 돈이나 물어다 왔으면 좋겠는데.

나는 아지 손에 묶인 사슬을 풀어주며 말을 걸었다.

“됐고, 아지야. 네가 할 일이 있다.”

“멍?”

“바깥에, 고양이가 한 마리 있거든. 고양이처럼 까칠한 인간 말고 진짜 고양이.”

“멍!”

지금까지 얼마나 불편했을까. 팔에 사슬도 묶이고, 약속에도 묶이고. 에고, 지금껏 이 말을 안 해서 얼마나 고통받았을지.

철그렁, 사슬이 떨어졌다.

나는 이제 양손이 자유로워진 아지를 향해 명령했다.

지금껏 아지를 억제하는 사슬, 그것을 풀어내는 명령을.

“그 고양이가 우리 괴롭혀. 그러니까, 가서 물어.”

“…으르르.”

허락이 떨어지자, 아지가 반갑게 이를 드러냈다. 아지는 내 위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무저갱이 다 울리도록 낮게 울며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좋아. 바깥도 회귀자가 나비를 거의 정리한 것 같으니까. 아지가 가면 확실하게 끝장낼 수 있을 것이다.

일을 대충 끝낸 나는 손을 탁탁 털었다. 이제 남은 건….

“어라? 라쉬 씨. 어디 가세요?”

고개를 들어보니, 불사자가 성큼성큼 어디로인가로 걷고 있었다. 내가 묻자 불사자가 손을 내저으며 대꾸했다.

“아아, 신경 쓰지 마시오! 중장을 한번 보고 싶어서 찾으러 가는 중이오!”

“중장이요?”

“그렇소. 물어볼 게 있어서 말이지!”

나는 티르 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혈조술의 반경이 좁아져서 그런지, 티르는 칼리스에게 바짝 붙어있느라 이쪽을 살피지 못하고 있었다.

나도 그를 따라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우연이네요. 저도 그에게 볼 일이 있었거든요. 같이 가시죠.”

“본인은 딱히 싸우러 가는 것은 아니오만. 괜찮겠소?”

“저도 딱히 싸우러 가는 게 아니에요. 그냥 물어볼 게 있어서.”

“알겠소! 자, 갑시…!”

내가 급히 손가락을 코앞에 갖다 댔다.

“쉿. 조용히. 그리고 몰래 가죠. 내가 중장한테 간다는 소리 들으면 티르가 경을 칠 거예요.”

눈을 끔뻑이던 불사자도 내 말을 알아듣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하하! 소박맞는 바깥사람 같구만! 좋소. 갑시다! 몰래!”

소박만 맞으면 다행이지, 저 주먹에 맞아 봐. 짐승의 왕을 한 방에 빈사로 만든 주먹이야.

지금이야 제대로 쓰는 방법을 몰라서 저러고 있지만, 만일 온전히 쓰는 법을 익힌다면. 어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불사자를 따라갔다.

에본 중장은 고양이 수인다운 은밀함으로 옥상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불사자와 함께 그의 뒤를 밟았다.

‘처참한 실패였다. 죽을 각오야 언제나 되어있지만. 이렇게 실패한 채로 죽을 수는 없다.’

이 지경이 되었음에도, 에본은 끝까지 삶을 향해 아득바득 기어 올라갔다.

삶을 향한 집념이라면 박수를 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저건 마침표를 찾아다니는 사람의 절규다.

영원히 준비되지 않을 완벽한 마침표를 위해, 다른 책을 태연히 태워버리는 불꽃이다.

‘가장 큰 원인은… 그 위험인물. 육장성, 절창에게 제압당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보다 몇 수는 아래일 터. 고양이의 왕을 쓰거나 내가 나서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거늘….’

회귀자의 존재는 그에게 있어 변수였다. 짐승의 왕이나 시조와는 달리, 존재 자체가 불분명하여 섣불리 다가가기 힘들었던 위험인물.

감상이 나랑 비슷해서 안심된다.

다행이다. 나한테만 난폭한 사람이 아니어서. 회귀자, 너는 모두를 위협하는 공평한 재앙같은 존재였구나.

‘…하지만, 그런 것치고도 묘하게 일이 안 풀렸다. 중령은 배신했고, 대령과 고양이의 왕이 허무하리만치 무력했어. 내가 고려하지 못한, 다른 변수가 있던 게 틀림없다….’

네가 고려하지 못한 다른 변수?

우리는 그것을 세상이라 부른다. 원래 세상은 변수밖에 없는 법.

네가 비겁한 예언자도 아닌데, 세상 모든 것을 예측하고 미리 볼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그러니,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 이 탄탈로스를 가라앉힌다. 변수째로.’

“그건 안 되지! 사람이 타고 있단 말이야!”

내 외침에, 옥상 한복판으로 걸어가던 에본이 흠칫 놀라서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나와 불사자도 옥상에 도착했다.

에본이 우리를 보고서도 긴장한 기색 없이 아는 척을 했다.

“아, 불사자와 노역자로군.”

불사자가 그를 향해 말을 걸었다.

“반갑소, 중장. 나는 라쉬요. 중장이 갈기갈기 찢어버린 사람이기도 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네는 부활해서 내 앞에 서 있고.”

능수능란한 대꾸였다. 쫓기는 사람 답지 않게 여유롭기도 했다.

불사자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뭐, 중장에게 억하심정이 있는 건 아니오. 내 몸이 좀 상했다고 억하심정을 가진다면 세상에는 원망스러운 사람이 가득할 뿐이니! 이건 비밀인데, 이 무저갱에서도 다 한 번씩은 내 몸뚱아리를 갖고 논 전적이 있다오!”

하긴, 아지도 회귀자도 티르도 나도 불사자 몸뚱아리를 망가뜨리긴 했지.

호쾌하게 외친 불사자. 중장은 인자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자네는 그러한 인물이었지. 덕분에 자네를 찢을 때 죄책감이 그리 크지는 않았네.”

“괜찮소! 나를 찢은 것에 대해서는 가질 필요 없소! 이곳 사람들도 나에게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으니!”

…미안합니다, 라쉬 씨.

나는 그가 억하심정을 가지기 전, 미리 마음속으로 사과했다.

“다만! 궁금한 것이 있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