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0 짐승, 짐승의 왕, 인간 - 6
“다만! 궁금한 것이 있소!”
아주 잠깐이지만, 중장은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고 무저갱 위쪽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아직 때가 아니었는지, 아득한 공간이 주는 끝없는 어둠은 건재했다. 에본은 고개를 내려 불사자를 보았다.
‘불사자 라쉬, 부족을 모욕한 이를 찢어 죽였다고 했지. 명예와 은원만 신경 쓰고 법과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이용해먹기 쉬운 전형적인 야만인이라 생각했으나…. 나의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인물. 그래도 여전히, 이용할 수 있다.’
에본이 다시 평정을 가장하며 말했다.
“무엇인가?”
불사자는 약간의 껄끄러움과 커다란 호기심을 담아 말했다.
“중장의 부하였던 중령. 그녀는 분명 중장의 명에 따라 이곳에 왔을 터인데, 어째서 죽이려고 한 것이오?”
피식 미소를 지은 에본이 대꾸했다.
“대답하기 쉽군. 우리를 배신했기 때문이다.”
“그게 죽을 이유요?”
“거기다 목표를 이루기에 그 목숨이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지. 마침 그 자리에 있었고, 개의 왕과 사슬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것 말고도 뭐, 이것저것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네. 나에게 있어선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지.”
“그런 것이로군.”
“왜, 그 이유가 궁금했나? 의외인걸. 자네는 죽음이라는 개념이 희박한 불사자 아닌가. 그런데 중령의 죽음이 그토록 인상적이었나?”
“평소보다 조금 더 인상적이었지. 그러나 그녀의 죽음만이 인상적인 건 아니오.”
불사자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에겐 죽음이 드무오. 칼에 찔려도, 불에 그을려도, 갈기갈기 찢겨서 땅에 흩뿌려져도 언젠가는 되돌아오지. 저주가 아닌 평범한 질병에는 걸리지 않소. 간혹 있을 죽음마저도 더 구차해지기 전에 대지모신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여겨, 누군가의 장례식 때 슬퍼하는 대신 모두 모여 웃고 떠들고는 한다오.”
그의 물음에는 깊은 고민의 흔적이 들어있었다. 그 진지함에 화답하여, 에본도 충분한 경의를 갖고 대답했다.
“천국이로군. 우리에겐 죽음이 급작스럽게 찾아온다네. 심지어, 그런 죽음은 너무 많기까지 하지. 준비되지 않은 죽음은 일상이고, 영원한 상실은 주변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지. 가만히 있었는데 상관이 죽어서 진급되는 경우도 흔하고, 저번 주에 같이 커피를 마셨던 대령이 느닷없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네. 자네와는 달리, 우리는 몸뚱아리가 찢기면 그것으로 끝이거든.”
나름의 고찰을 담은 답변이었다. 다만 불사자는 듣고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나도 알고 있소. 그러니 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이오. 중장처럼 쉽게 죽는 이들이, 목숨이 그만큼 연약하고 귀중함을 알면서도 도리어 쉽게 죽거나 죽이고는 한다오. 마치 목숨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처럼.”
“우리라고 목숨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네. 다만, 그보다 더 귀한 것을 찾기 위해 노력할 뿐이지. 어차피 잃어버릴 목숨을, 더 가치 있는 곳에 써야 하지 않겠나.”
엇갈린 대답. 그러나 이것이 관점의 차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불사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관점이 다르군. 본인은 쉽게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일수록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오.”
“목숨을 쉽게 잃어버리기에, 영영 이어지는 것에 더 집착하는 법이네. 이왕 잃어버릴 목숨을 불변의 가치를 찾고자 사용하고자 하네.”
“중령은 삶을 갈구하였소.”
“그러니 우리가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겠나. 중령의 행동은 우리의 약속을 저버린 것이었어. 자네라면 목숨의 소중함 만큼 약속의 소중함도 이해할 거라고 믿네.”
문답이 끝났다. 불사자는 진중한 표정으로, 방금 나누었던 대화를 되새기고 있었다.
잠깐 불사자를 살피던 에본이 확인 차 물었다.
“그렇다면, 자네는 나를 막지 않겠군. 내 목숨도 귀중할 테니.”
불사자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중장이 내 친구의 등을 찔렀지만, 그건 중령과 중장 사이의 문제였겠지. 내가 끼어들 자격은 없는 것 같소.”
“이해해주어서 고맙군.”
“중장을 탓하지 않겠소. 다만, 내 판단 때문에 중령이나 다른 이들이 위험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오.”
“걱정하지 말게. 나는 이미 끔찍한 실패를 겪었고, 오른팔도 잃었지. 이제 달리 수를 쓸 방법도 없다네. 중령이 위험해지는 일은 없을 걸세.”
에본이 태연하게 거짓을 늘어놓았다. 비밀 조직 간부다운 능숙한 거짓말이었다.
불사자는 눈을 감았다. 그를 못 본 척하겠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그것을 눈치챈 에본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른팔이 잘려서 피를 뚝뚝 떨어뜨리는 사람이라고는 상상조차 안 되는, 자연스러운 동작.
하지만, 과연.
“중장님, 잠깐만요!”
“아, 노역자, 자네도 있었지.”
내가 나서자, 에본은 자연스럽게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겉으로는 우호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마지막에 보여준 능력이 인상 깊었다네. 하하. 그때는 정말 경악했지 뭔가. 설마 사슬 대신 클로를 분해할 줄이야. 나도 예상 밖의 일이었네.”
‘빌어먹을, 마지막 계획이 저것에 틀어졌다. 급조한 계획이었으나, 그런 만큼 방해받을 일이 없었는데! 시조만 아니었다면 처음부터 죽였을 터!!’
속마음을 숨기면서 능숙하게 대꾸하는 에본 중장. 독심술사 입장에서는 꽤 소름 끼치는 광경이었다. 이만큼이나 안과 밖 낙차가 심한 사람은 흔치 않은데.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인식표 필요하지 않으세요? 대령님은 돌아가셨잖아요. 전사자인데, 확인하려면 인식표는 가져가셔야죠!”
인식표. 군국이 전사자를 기리기 위해서 마련한 것.
4레벨에 도달하지 못한 군인들에겐, 사망 시 가족에게 전달되는 보상금이야말로 유일하며 진정한 유산이나 마찬가지다. 그때 필요한 것이 인식표이며, 군인들은 인식표를 목숨만큼이나 소중하게 여긴다.
오죽하면 '온전한 몸뚱아리를 남기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온전한 인식표라도 남겨라'라는 말이 있을까.
그러니 전사자의 인식표를 챙겨주어야 하는 것이 같은 군인으로서의 예의이며, 미덕이자, 의무.
그러나 탈출하기 위해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에본에겐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다. 내려갔다가 회귀자 같은 위험한 존재와 마주치면 곤란하기도 하고.
에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인식표가 무엇이 필요하겠나. 내가 장성이니, 나의 증언이면 충분하네.”
“어, 하지만 인식표가 있어야…. 그리고 칼파츠 쿠리스 중령님도 솔직히, 반사적으로 구하긴 했는데 많이 위독하시고. 여기 머물렀다가 돌아가시면 어떻게 해요?”
걱정을 가장한 나의 말.
탈출 시기가 가까워지자 초조했던 에본은 계속 말을 거는 나를 떨쳐내기 위해서 되는 대로 대꾸했다.
“걱정하지 말게. 칼파츠 중령에 대한 내용은 말해두겠네. 회복에 전념하고 있다고, 보고를 해두지….”
그리고, 걸려들었다.
점조직으로 이루어졌으며, 혹시나 하는 상황에 대비해 은유를 통해 정보를 전달하고, 정체가 드러나지 않게 서로를 비밀스럽게 지칭하는 만물의 영장.
그들은, 비록 자기가 ‘후원자’라도, 후원받는 이의 얼굴도, 이름도 모른다.
칼리스가 후원자의 정체를 알고 놀랐고, 중장도 칼리스의 얼굴을 보고도 곧장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니.
그런 에본은 내가 칼파츠라고 말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덕분에 불사자가 눈을 떴다.
“이보시오.”
불사자의 목소리는 아까보다도 한 톤이 낮았다. 자기 몸을 찌른 일도 흔쾌히 넘어가는 시원한 웃음 역시 사라져있었다.
“다시 말해보시오. 중령의 이름이, 뭐라고?”
있는 것은, 거짓을 찾아낸 자의 분노뿐.
“칼파츠 중령 아닌가. 성은, 음. 기억이 안 나는군. 군국은 성을 그다지 중요시 여기지 않거든….”
“틀렸소. 그녀의 이름은 칼리스요. 칼리스 크리츠이지.”
순간, 에본의 눈에 곤혹스러운 빛이 스쳤다. 동시에 나를 향한 적의도 부풀어 올랐다. 함정에 빠졌을 때 느끼는 불쾌함과 더불어, 그 함정을 판 나에게 살의까지 쏘아보냈다.
잘못 생각했구나, 에본 중장. 곤란해하는 건 괜찮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살의까지 품어버리면, 불사자가 어떤 판단을 하겠니.
에본이 재빨리 수습하려고 말을 주워섬겼다.
“아, 내가 착각했나 보군. 방금 그 노역자가 잘못 말해서….”
“그녀는 훌륭한 전사였소. 살아남기 위해 삶과 치열하게 싸운 그녀는, 마지막까지 죽음에 맞서는 전사였지. 나는 그녀를 존중하오.”
“나도 마찬가지라네.”
배신자에게 죽음을, 이라고 해놓고? 하하. 불사자도 안 믿을 소리를.
“나는 당신네들이 찾는 게 정녕 귀중한 것이라 생각했소. 명예처럼, 자긍심처럼,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얻어야 할 무언가라고 생각했소.”
“그런 것이 맞다네. 우리는 인류의 위대한 비원을 위해….”
“그러나, 그리 중요한 것이라서 누군가에게 죽기를 명령하였다면.”
불사자는 한 걸음 다가가면서 되뇌었다.
“최소한, 그 이름은 기려야 하지 않겠소. 그것은 약속 이전에 지켜야 할 미덕일 터. 죽음에 비장함이라고는 없는 우리조차도 그리하는데, 중장에게는 중장을 위해 죽어간 이에게 아무런 경의가 없구려.”
“미안하군. 내가….”
“사과하지 마시오. 그 사과를 받을 이는 여기 없으니. 어쨌든, 이것으로 중장은 중령을 규탄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았소. 그렇다면.”
그의 왼손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힘차게 움켜쥐었다. 그러할진대, 바위가 다져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까득. 바위처럼 다물어진 주먹을 들어 올리며, 라쉬가 무표정으로 말했다.
“세 대만 맞읍시다. 내 몸을 찢었고, 내 친구를 다치게 했고, 그 명예마저 욕보였으니. 그 정도면 되지 않겠소?”
곧 탈출을 준비해야 하는 에본에겐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에본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온전한 왼손으로 군장 패킷을 꺼냈다.
회귀자와 싸우다 패배하고,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빼낸 군장 패킷. 그것을 입에 문 그는 그대로 왼팔에 있는 생체 단말에 끼워 넣었다. 번쩍이는 연금광이 그의 상체를 뒤덮었다.
“…상태는 만전이 아니지만.”
이전 싸움에서 상하거나 부러진 부분은 그대로 손상된 채다. 이미 손상된 군장을 해제했다가 다시 재구성한 것이기에 이음매도 매끄럽지 않고, 손상된 부분으로 잔여 마력이 줄기줄기 빠져나간다.
심지어 없어진 오른팔로는, 방향을 잃은 연금강이 줄기줄기 흘러 떨어졌다. 그 탓에 오른쪽 견갑과 흉갑도 형체를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어쨌든.
무기가 없던 에본에게는, 왼손에 생겨난 클로 하나도 소중했다.
“불사자는 재생력을 믿고 지구력 싸움을 벌이지. 그런데 지상도 아닌 이 무저갱에서, 자네가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글쎄.”
그에 비해, 불사자는 여전히 죽지 않는 몸과 두 주먹뿐. 다만,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주먹에는 명확한 적의가 담겨있었다는 점이다.
불사자가 주먹을 쥐고 대꾸했다.
“그래도 세 대는 때릴 수 있겠지.”
불사자에게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적을 부수겠다는 의지. 그것이 눈앞의 에본에게 향했다.
“이번에는 몸이 찢겨도 나를 원망하지 말게나!”
에본이 먼저 불사자에게 달려갔다.
‘경시하지 말자. 나는 부상을 입었다. 남은 팔은 하나. 여력도 얼마 없으니 전투를 최대한 짧게 끝내야 한다.’
오른팔이 없고 전신이 만신창이였으나, 에본은 여전히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에본이 불사자에게 미끄러지듯 달려들며 클로를 뻗었다.
불사자는 피하거나 상대를 관찰하는 대신, 클로를 향해 오른손을 펼쳐 내밀었다.
‘클로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잡을 생각인가, 어리석긴!’
불사자는 반대쪽 손을 들지도 않았다. 공격을 노린다면, 팔꿈치 아래가 없는 에본의 오른쪽을 노리는 게 현명한데도 구태여 정면으로 맞선다. 불사자의 오만함, 혹은 안일함.
정정당당하게 상대한다면 무기를 지닌 에본이 유리하다. 에본은 클로에 기공을 덧씌우며 내질렀다.
‘그 손가락부터 잘라주지! 그 상태로 손끝에서부터 전신을 갈라주마!’
그렇게, 에본이 칼날을 틀어 불사자의 손가락을 노렸다. 푸르른 기공이 담긴 칼날이 불사자의 손가락을 자르려다.
툭, 하고 뼈에 걸렸다.
‘아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기공을 두르지 않았다면 모를까, 예기와 반발력을 지닌 클로가 고작 뼈에 걸릴 이유가 없다. 걸려도 그대로 잘라내거나 밀어낸다면 모를까.
지금 클로가 걸린 건, 불사자의 뼈가 단단해졌다는 것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경악하는 에본의 귀에 으적, 하고 무언가를 씹는 소리가 들렸다.
불사자의 입안에는 은행나무 이파리가 들어있었다.
“대지모시여.”
불사자가 낮게 읊조리며, 오른손에 힘을 강하게 주었다. 영험 어린 은행나무 잎. 불사자의 몸뚱아리에 내려앉은 그 이파리에서 잎맥이 뻗어나간다.
이곳은 무저갱, 대지모신이 버린 땅. 그러나 대지모신에게 바친 불사자의 육체는 토양과 닮았다.
봄에 태어난 잎은 나무를 위해 봉사하다가, 그 쓸모가 다하면 땅으로 내려앉아 썩는다. 나무 한 그루를 둘러싸고 이어지는 작은 순환은 그 명이 다할 때까지 이어진다.
드디어 땅 속에 묻히게 된 은행나무 잎은 안심하고 썩어 문드러졌다. 세계수의 잎으로서 잔뜩 머금은 정기를 다시 대지모신께 돌려드리기 위해.
끼리릭. 클로의 칼날이 살점에 붙잡히며 부르르 진동한다. 에본이 급히 클로를 빼내려고 했지만 단단히 고정된 클로는 빠지지 않았다.
드디어 그 힘의 정체를 알아챈 에본이 이를 갈았다.
‘기공…! 이것도 일종의 기공이다! 신체 그 자체를 강화시키는!’
“네놈, 감(坎)을 잡았나…!”
클로를 움켜쥔 불사자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군국이 무어라 부르는지는 별로 관심 없소. 그냥, 몸뚱아리를 단단하게 했을 뿐이오.”
에본이 클로를 빼내려고 발버둥을 쳤다. 클로를 비틀기도, 흔들어보기도, 밀고 당기기까지 했다.
그러나 클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뼈에 잘못 박힌 것도, 근육에 걸린 것도 아니었다. 칼날에 두른 기공은 그 대부분을 떨쳐낼 수 있게 하니까.
그냥, 지금 클로가 안 움직이는 건, 불사자가 그것을 움켜잡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 야만인의 기공…! 내 것에 비견될 정도다!’
압도적인 기력 차이 때문에 떨쳐낼 수가 없다.
오른팔이 없기에, 클로를 벗어낼 수도 없다.
그냥, 왼팔이 잡힌 채 바둥거리던 에본은, 불사자가 왼손 주먹을 쥐고 들어 올리는 모습을 지근거리에서 똑똑히 보아야 했다. 아무리 그라도 간담이 서늘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에본이 외쳤다.
“네놈은… 무저갱에서 힘을 발휘할 수 없을 터인데!”
“분명, 그렇지. 하지만 나에게는 영험 어린 은행나무의 잎사귀가 있소.”
너무 귀한 것이라, 아끼고 아꼈던 세계수의 잎. 불사자는 본래 지상으로 올라가자마자 그 잎을 대지모신께 공양하려고 했었다.
그러니까 에본을 때리겠다고 결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저게 왜 아직도 남아있는…! 깨울 때 사용한 게 아니었던 건가!’
에본이 그걸 눈치채고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그걸 칼파츠 중령에게 건넨 것은 나다! 나라는 말이다!! 칼파츠가 아니라, 내가 너를 깨웠다! 너는 나를 도와야 해!”
한 줄기 희망을 담아 외쳤으나, 돌아온 건 차가운 반응뿐이었다.
“틀렸소. 세계수의 이파리는 대지모신의 것이오. 맡아두는 이만 이름을 달리할 뿐, 결과적으로는 대지모신의 은혜이지. 이 이파리를 잠시 맡아둔 모든 이에게 감사를 표할 필요는 없지. 그저, 이파리에 담긴 마음만 받으면 될 뿐이오.”
그리고 불사자 라쉬는 왼손 주먹을 뒤로 크게 당기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또, 중장 부하의 이름은 칼리스라오. 기억해두시오.”
콰직.
투구가 만들어지다 만 에본의 얼굴에, 불사자의 정권이 틀어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