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114화 (114/384)

EP.114 무저갱에서 살아남기

『…낙성(落星). 군국의 별이 떨어졌습니다.』

중장의 죽음을 말하는 골렘의 어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어두웠다.

『장성살해는 어떤 것으로도 덮을 수 없는 중죄입니다. 비록 그들이… 무언가 불온한 뜻을 품고 침입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죄를 밝히고 벌하는 것은 오직 군국에게만 허락된 권한입니다. 이곳의 모든 이들은 낙성을 일으킨 중죄인입니다. 군국의 적이 된 것입니다.』

“하, 쓰읍.”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기를 기대했는데, 몰래 식당에서 빠져나와 이것저것을 목격한 모양이었다.

하긴 그 난리가 났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게 이상하지. 거기다 장성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만으로도 군국은 의심할 거고.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결론은….”

『…어떤 지침이 내려올지 본관도 확언할 수 없습니다만, 하나 확실한 건. 앞으로 그 어떤 보급도 없을 거라는 점입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어! 아무리 그래도 장성과 싸웠는데 저쪽에서 조처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내가 땅을 치는 동안, 식당 벽에 기대고 있던 회귀자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내가 골렘을 남겨둘 이유도 없어졌겠네?”

『…잘 못 들었습니다?』

“다 처리할까 하다가 어차피 교관도 있는 터라 하나는 남겨뒀는데…. 생각해보니, 저거 교관도 아니라며? 그러면 아예 적대 노선을 탄 지금 굳이 골렘을 남겨둘 필요도 없잖아?”

머리 위로 손을 뻗어 천앵을 집어든 뒤, 터벅터벅 걸어 골렘에게 향하는 회귀자. 골렘이 뒷걸음질 치며 급히 말했다.

『부정. 잠깐 기다리십시오. 본관은 귀하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고자 합니다.』

“이의는 무슨. 군국의 눈. 너희를 남겨두어서 좋은 꼴을 못 봤어. 안녕, 잘 가.”

『잠…!』

골렘을 반으로 갈라 부수려는 회귀자를, 나는 손바닥을 들어보이며 막았다.

“기다려보세요, 셰이 씨.”

“왜, 또?”

“어차피 식당에 갇힌 몸 아닙니까? 굳이 당장 처리할 필요가 있을까요?”

“처리하지 않을 이유는 더욱 없는데.”

쯧쯧.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회귀자.

골렘이 식당에 갇혀있다, 이건 군국이 정보를 얻을 수단이 한정되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아예 없애는 것보다 남겨두는 게 낫다. 유일한 창구를 통해 가짜 정보를 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거짓된 정보를 심어서 방심을 유도한다. 그게 정보전의 기본이거늘.

가, 짜, 정, 보.

나는 입모양을 뻐끔거리며 회귀자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뭐? 입만 뻐끔거리지 말고 말로 해.”

“아, 씨! 손발 더럽게 안 맞네! 골렘 이용할 거니까 남겨두자고요!”

냅다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회귀자가 뒤늦게 아, 하고 반응했고, 골렘에게서는 얼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용, 이라 하셨습니까?』

“에고.”

에고야.

골렘은 팔과 다리를 묶고 안대를 씌운 채 상자 안에 가둬놓았다. 군국과 척을 진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처치였다.

미안, 에이비 대위. 하지만 너는 싱크로 끊을 수 있으니까 괜찮겠지? 휴가라고 생각하고 얼음 동동 띄운 맥주 마시면서 편히 있으라고.

그 뒤,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 상의하기 위해 교육실에 모였다. 부상자인 칼리스를 제외한 모두가 자리에 참석했다.

“자. 오늘부터 보급이 끊긴 거라고 생각하고.”

드물게도 회귀자가 칠판 앞에 서 있었다. 뭔가 인지부조화가 나올 것만 같은, 대단히 어색한 광경이었다.

초졸이… 교편을 잡아?

회귀자는 천앵으로 칠판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앞으로는 식량 관리에 들어갈 거야.”

칠판에는 남은 식량 현황이 적혀있었다.

남은 식량 수, 콩 통조림 42개. 고기 통조림 2개.

절망적인 수치에, 절망적인 비율이었다. 콩 통조림이야 영양소가 풍부하긴 하지만 잔뜩 먹으면 질리고, 무엇보다 42라는 숫자가 충분하지 않다.

“이곳에서 식량을 필요로 하는 인원이 총 다섯. 아끼고 아껴서 하루에 하나씩 먹는다고 해도 42일이면 끝나.”

“응? 본인, 중령, 선생, 꼬마, 개 아가씨, 고양이 아가씨. 흡혈귀 아가씨는 흡혈귀이니 빼면. 총 여섯 아니오?”

불사자의 지적에, 회귀자는 손을 내저으며 설명했다.

“아, 나는 빼. 나한테는 만한전석이 있어서.”

“그게 뭐요?”

“옛 제국, 그러니까 쪼개지기 전 제국의 보물이야. 미리 재료를 넣어놓으면 매일 세 끼의 끼니를 챙겨주지. 여기에 들어오기 전, 미리 식재료를 왕창 넣어왔어. 한 10년분 정도.”

“뭐요! 혼자서 맛난 것을 먹고!”

“하지만 제한이 있어. 아공간이라 넣은 건 다시 못 빼내. 그리고 오직 나만이 접시에서 음식을 집어들 수 있어. 이 보물 자체가 황제 한 사람만을 위해 준비된 보물이었거든.”

불사자가 투덜거렸다.

“뭐 그딴 보물이 다 있소?”

“동감이야. 옛 제국의 보물은 다 이딴 식이긴 해. 사치스럽고 은근 편하지만, 또 제약은 많아서 다양한 분야에 활용하긴 어렵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거리는 회귀자. 나는 그녀를 향해 질문했다.

“그냥 저희에게 한 입씩 덜어서 주시면 안 돼요?”

“한두 번이지, 매번 그러기는 싫어.”

“쳇. 그러면 자랑이나 말지.”

내가 투덜거리자 회귀자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제대로 된 용건을 꺼냈다.

“물론, 맨입으로 이 말을 꺼낸 건 아니야. 너희를 위한 식자재는 따로 준비해두었어.”

회귀자가 허공에 균열을 만들어내고는 거기서 팔을 휘저었다. 전용 아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식량이 가득 든 포대였다.

쌀, 감자, 밀가루 같은 곡식. 염장한 고기 세 덩이, 유리병 속에 보관된 술과 향신료, 심지어 고기 통조림도 스무 개나 있었다.

심지어 향신료와 술은 하나같이 그 가치가 같은 무게의 금에 비견되는 고급품이었다.

냄새를 맡은 아지가 귀를 쫑긋거리며 입가에서 침을 흘리고, 불사자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조차도 눈이 돌아가서 자세를 고쳐 잡을 정도였다.

“이 정도면 되려나?”

회귀자가 으스댔다. 고립된 공간에서 불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있던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아니, 이게 뭐야. 지금까지 이런 걸 꿍쳐두고 있었어요?”

“너희가 보급을 받고 있는데 굳이 한정된 자원을 쓸 이유 없잖아.”

“그래서 보급이 끊긴 지금 푼 거고요? 좀 일찍 풀면 안 되었어요? 이런 게 진작 있었으면 지난 몇 개월 동안 이러고 안 살았을 텐데. 욕심쟁이 같으니.”

“욕심쟁이? 식량이 필요 없나 보네? 그러면 다시 돌려놓을….”

“아니요. 당신은 역사상 최고의 죄수예요.”

회귀자가 마음을 바꾸기 전, 나는 연달아 엄지를 치켜들며 식량 내용물을 확인했다.

다시 보니 술과 향신료만 고급품이 아니었다. 쌀은 밥알 하나를 먹어도 한 끼를 챙긴 것처럼 든든하다는 신선미였고, 밀가루는 가루 하나하나가 황금색으로 빛나는 금빛 평야의 최고급 밀이었다.

자급자족을 위해 준비한 감자는 이대로 심어도 밭 하나를 가득 메우는 억센 품종이었다. 무저갱이라 키울 수는 없겠지만, 만일 토양이 존재했다면 이것 하나만으로도 농성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기도 참나무 숲에서 야생 도토리와 허브를 먹고 자란 흑돼지…. 미쳤네요. 이건 왕처럼 살 수 있겠는데.”

“너무 좋아하지 마. 하나같이 고급품이지만 식량도 영원하지는 않아. 이 식량으로 우리는 남은 9개월 정도를 버텨야 하니까.”

“9개월이요? 왜 하필 9개월이죠?”

내 물음에 회귀자는 잠시 고민했다. 이 정보를 말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람처럼.

‘이왕 남은 시간 동안 버틸 거라면, 기간이 정해진 편이 낫겠지. 이미 9개월이라는 정보를 밝혔어. 굳이 더 숨겨서 불안하게 만들 필요는 없어.’

고민은 짧았다. 회귀자가 대답했다.

“9개월. 아마 그 뒤에는… 너희는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을 거야. 누군가 내려올 거거든.”

“누군가가 누군데요?”

“있어. 이 무저갱을 무너뜨릴 수 있는 사람….”

“힘으로요? 쾅쾅 두들겨서?”

“그런 게 아니야. 진짜, 개념적으로 없애버릴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 거지.”

‘현시대 최강의 대지술사이자, 지모신의 대행자이며… 하늘을 삼키는 땅뱀, 성황청의 악몽이 될 그녀.’

드문드문 느껴지는 생각만으로도 그 위용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저 싸가지 회귀자조차 두려움과 경의를 가질 정도라니.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지, 곧 회상이 끊겼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끔찍할 정도의 위험을 간접적으로나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그거랑 싸울 생각을 하는 거지?

“…어쨌든. 나는 모종의 정보원으로부터 그녀가 이곳을 없앨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녀가 이곳에 걸린 저주를 풀면 이 땅은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거야.”

‘모종의 정보원은 저번 회차의 나. 이번 회차에서 많은 게 바뀌었지만, 이것은 변하지 않을 거야. 그녀의 강렬한 의지를 생각하면.’

9개월. 그 시간만 버티면 탈출할 수 있다는 선언은 의미가 있었다. 불사자도 그 말을 듣고는 크게 안심했다.

“오오! 괜찮구려! 9개월이면 충분히 버틸 만하지!”

자처해서 이곳에 들어온 티르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기꺼워했다.

‘…나는 이곳에서 지내는 소박하고 단란한 삶이 그리 싫지는 않으나. 휴에게는 또 다르겠지. 따사로운 햇살과 귓가에 스치는 바람을 그리워할 터.’

시선이 나를 향한다. 은은하게 떠오른 미소가 입가를 예쁘게 꾸몄다.

‘그래. 이왕 되찾은 삶. 유유자적 바깥을 유람하는 것도 괜찮을지도.’

하하. 이건 좀 부담스럽네. 왜 내가 세상 여행 가이드가 될 것 같지.

어쨌든 반응은 좋았다. 회귀자는 긍정적인 반응에 고무되었다.

“어쨌든, 이걸로 내 말은 끝났어. 질문 있어?”

내가 손을 들고 물었다.

“나비의 마력초는 어쩌려고요?”

“그때 되면 어떻게든 되겠지.”

“또 아무 계획이 없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 정 안 되면 내가 직접….”

‘그때쯤 되어도 중독 증세를 치료하지 못하면 어쩔 수 없어. 최대한 숨만 붙들어 놓다가 나가기 전 편하게 해주자. 어차피 나가면 가장 먼저 만물의 영장을 뒤엎을 생각이었으니, 그들이 새로운 고양이의 왕을 찾아내기 전 뿌리 뽑으면 돼. 내가 영원히 나비를 보살필 수도 없으니….’

뭐야, 말은 영원히 키울 것처럼 하더니. 나비를 살린 건 순수하게 실리 때문이었나.

회귀자가 서늘한 표정으로 단언하려는 때.

냐아-.

그때, 문밖에서 나비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회귀자가 의아해하며 교육실 문을 열었다.

“나비? 무슨 일….”

그러나 문을 열었을 때 나비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진 상태였다. 대신, 문 앞에 반짝이는 수정구 하나가 데구르르 굴러가는 중이었다. 관리실에 있던 골렘 잔해에서 빼온 것처럼 보였다.

‘이건 도대체 무슨 의도…. 아니, 그럴 리 없구나. 나비는 고양이의 왕이니까….’

반사적인 경계심도 짐승의 왕에게까지 향하지는 않았다.

회귀자는 잠시 감동한 얼굴을 하더니, 수정구를 소중히 만지작거렸다. 그리고는 툭 내뱉었다.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네? 어떻게든이 뭔데.”

“어떻게든! 한다고! 마력초도 60개비나 있겠다. 60일 뒤에 생각하면 되잖아!”

빽 소리를 지르는 회귀자.

참 정들기 쉽다. 이런 작은 선물에도 감동하는 걸 보면.

마음에 곧추선 가시가 워낙 날카로울 뿐, 한 번 정들면 다음 회차까지 이어갈 것 같다.

하긴, 처음부터 티르에게 친근한 태도였지? 저번 회차에서는 꽤 깊은 인연을 맺었다고 했나.

“그런데, 그거 아세요?”

하지만 나는 이런 곳에서 9개월이나 있을 생각이 없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우리 꼭 9개월이나 기다릴 필요 없어요. 90일이면 충분합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