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122화 (122/384)

EP.122 대지모신은 모두의 곁에

어머니 대지모를 모시는 대지모신교에는 딱히 신전이랄 게 없다. 그들은 신체 위에 발을 디디고 서 있으니,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것이 곧 접신이며 땅에 입을 맞추는 것이 세례인 셈이다.

그나마 가장 높은 산 중턱에 있는 대사원이나, 대지모의 형상이라 주장하는 바위 같은 게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징물일 뿐.

대지모신에게는 오직 신도만이 있으니.

그것이 지모신교의 교세가 흥한 이유이며, 동시에 쇠락한 이유이기도 하다.

모두 신도가 될 수 있기에 교세가 잡초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가나, 자격 없는 이들이 독초처럼 그 명성을 좀먹기에.

그러나.

자격 없는 이들의 우행이 있음에도 명맥을 유지하는 건, 자격이 충만한 이가 그 몇 배나 분주하게 일하고 있기 때문.

떠받듦을 꺼리는 몇몇 지모신교도는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묵묵히 제 역할을 하였으며, 손에 닿는 수많은 사람을 구원하였으니.

그에 감명받은 만인들은 명망 높은 지모신교도를 선자(仙者)라 불렀다.

그리고 이번 대, 가장 유명한 선자라고 하면.

“지선! 지선이라니!”

상대의 정체를 알아챈 순간, 나는 즉각 뛰쳐나가 지선을 맞이했다.

“정말, 제가 진짜를 보고 있는 거 맞죠? 지선! 지선이죠!”

지선은 이러한 환호가 익숙한 듯,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과분하게도, 몇몇 고인께서 소인을 그리 부르고 계시외다.”

“이야! 내 살아생전 지선을 보는 일이 생길 줄이야! 저기, 영광인데 혹 악수라도….”

“문제 될 것 없소.”

지선은 흔쾌히 손을 내밀었고, 나는 황송하게 그 손을 잡았다.

손가락 하나하나에 힘이 꽉 들어차 있는, 숨을 죽인 고목과도 같은 손이었다. 토목공학 역사의 나이테와 다름없는 단단히 주름진 손을 쥐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내 살가운 태도에 곁에 있던 아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멍? 아는 사람?”

“알다마다, 이것아. 물론 내가 일방적으로 아는 거지만!”

전설로 회자되는 지모신교의 선자를 어찌 모를까.

25년 전, 군국이 왕국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았을 때. 목숨을 잃은 자도 많았고 목숨을 잃어야 할 자는 그보다 열 배는 많았다.

구체제의 요인들, 악덕이 쌓인 상인들, 그들과 결탁한 기사와 종자들, 뒤를 봐주며 콩고물을 얻어먹던 부패한 관료들까지.

전란을 겪고 허덕이던 군국은 이 모두를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했다.

거기에 더해, 그들의 수탈에 신음하던 하층민들을 위한 일자리를 마련해야 했다.

군국은 해냈다.

역사상 다시 없을 대규모 토목공사. 군국을 밑바닥부터 쌓아 올린 대규모 사업은 산적한 여러 문제를 해결했다.

거기서 돋보인 것이 대지술사들.

흙과 모래를 다루는 데 이골이 난, 대지모신의 사도들이 엄청난 노력과 희생을 한 덕에 성공해냈다.

이전까지는 민간신앙, 혹은 사교로 취급받던 대지모신 신앙은 그날 이후 양지로 떠올랐으며, 시민들은 지모신의 사도들을 추앙하였으니.

그중 가장 유명한 이가 바로.

“공병대대의 여신, 삽질의 수호자, 리버스 장의사, 곤곤래(滾坤崍), 불도자(不倒者)! 이 모든 호칭의 주인. 지선이라는 분이야!”

‘잠시. 불도자라니. 그 이명까지 세간에 퍼졌던가?’

지선이 잠시 눈가를 움찔거렸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소리쳤다.

그러자 아지도 신바람이 나서 펄쩍펄쩍 뛰었다.

“멍! 아는 사람!”

“인마. 너는 지선이 뭔지도 모르면서. 네가 왜 신나. 네가 군국 토목공학의 역사를 알아?”

“멍! 반가워! 반가워!”

쯧. 개에게 물어본 내 잘못이다.

지선은 굳고 확실한 발걸음으로 빛이 닿는 곳까지 걸어왔다. 그녀가 걸어올 동안, 심상찮은 기척을 느낀 티르가 관 위에 앉은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티르는 경계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휴, 아는 이냐?”

내가 소개하기 전, 지선이 먼저 티르를 향해 양손을 모았다.

“반갑나이다, 시조시여. 언제나 땅과 가까이 있는 시조의 이야기는 익히 들었소이다. 지모신을 따르는 이로서, 가장 오래 묻힌 이에게 인사를 올리겠나이다.”

“지모신의 사도인가?”

그것만으로도 티르의 경계가 옅어졌다.

눈을 마주치면 악수 대신 전쟁을 했던 성황청과는 달리, 포용적인 대지모신교는 흡혈귀를 배척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흡혈귀의 아군도 아니었지만, 사방이 어둠인 이들에겐 회색마저 밝아 보이는 법이다.

“내 과거 여러 도사와 교분을 나눈 적 있었다. 도사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예를 갖춘 올곧은 이들이었지.”

티르는 목소리를 낮추고는 선언했다.

“그중 몇몇과는 싸우기도 하였지만, 그건 그들이 먼저 공격하였기에 벌어진 일. 네가 나를 적대하지만 않는다면 나 역시 너를 공격하지 않겠다.”

“하면,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다툼이 없을 것이외다.”

지선은 허리를 숙이며 말했고, 티르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제법 말이 통하는 자로다. 이번 방문자는 별다른 일을 벌이지 않을 것 같구나.”

하하. 글쎄요. 그건 또 모르는 일이지.

내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삼킬 무렵.

“아니! 이 어찌 된 일이오? 귀인이 오셨구만!”

마침 뛰어 내려온 불사자와 칼리스도 지선을 보고는 호들갑을 떨었다. 특히 그 반응은 칼리스에게 더 두드러졌는데, 칼리스는 벗은 이후 한 번도 꺼내지 않던 장교복으로 갈아입은 채였다.

모자를 눌러 쓴 칼리스가 다급히 경례했다.

“충성! 칼리스 크리츠 중령입니다…! 준장님께서 이곳은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준장?”

군국의 편제는 직관적이다. 소장, 중장, 대장 순으로 올라간다면, 준장은 다른 모든 장성보다 낮은 위치라는 뜻.

그 점을 상기한 불사자는 순수한 의문을 담아서 물었다.

“준장이라니? 그러면 지선께선 중장보다 낮은 지위란 말이오?”

“가만히 있어요, 라쉬! 준장은 명예직입니다. 일반적인 편제에 소속되지 않았지만, 그 힘과 공로를 인정받아야만 수여 받을 수 있는 회색 별입니다!”

부상자를 연기하고 있던 사실도 잊어버린 칼리스가 급히 불사자를 나무랐다. 지적 받은 불사자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대단하신 분이라는 거야 말하지 않아도 아오. 나는 그저 궁금했을 뿐이오. 군국이 설마 지선까지 포섭한 대단한 국가인가 해서!”

그 대답은 지선이 이어서 했다.

“대지모신의 뜻을 받드는 이들이 어찌 나서서 시체를 만들겠소이까. 소인이 그만한 감투를 쓴 것은, 어디까지나 일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함이외다.”

“하하! 그러니까, 싸우지 않는 장군인 셈이로군! 훨씬 대단하구려! 반갑소, 귀인이여!”

호탕하게 웃어젖힌 불사자는 손을 내미는 대신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리고는 잔뜩 기대하는 눈으로 제안했다.

“지선이여! 이 역시 인연이거늘. 주먹을 맞대도 되겠소?”

주먹을 맞댄다는 건, 서로 주먹 끝을 살짝 맞댄다는 가벼운 게 아니다.

동시에 주먹을 휘둘러 부딪히자는, 서로의 믿음과 힘을 시험하는 야만적인 인사법. 신체에 무리가 가기에 지모신도들도 막상 하라고 하면 꺼리는 해묵은 예식이었다.

마찬가지였는지 지선이 내키지 않는 티를 냈다.

“토인. 대지모와 닮아가려는 이들이여. 이 만남은 대지모신께서 주관하셨으나, 이 땅은 맥이 이어져 있지 않은 터. 소인은 그런 식으로 그대의 기력을 쇠하게 하고 싶지 않소이다.”

다만, 지선이 꺼리는 이유는 달랐다.

비록 상대가 불사자라도, 그 몸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다고.

자기 힘에 대한 압도적인 자신감과 몸에 밴 오만함을 담아. 지선은 그리 말했다.

“하하! 아쉽군! 힘을 견식할 기회였는데!”

정작 하수 취급을 당한 불사자도 전혀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었다. 흔쾌히 넘어가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보인 지선은 이제 칼리스를 보았다.

“그리고, 중령이라 하였소이까.”

“중령, 칼리스 크리츠. 그렇습니다.”

“소인은 군국으로부터 감투를 받았으나, 오늘은 준장으로서 온 것이 아니외다. 어디까지나 지모신의 뜻을 따르는 사도로서 여기 왔으니, 군국의 예를 차릴 필요는 없소이다.”

“예, 알겠습니다…!”

그래도 몸에 익은 군대 물은 아직 빠지지 않았는지, 다시 각 잡힌 경례를 하는 칼리스였다. 지선은 피식 미소를 짓고는, 아직 인사를 나누지 않은 이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

회귀자와 눈이 마주치고는, 부드러운 인상이 딱딱하게 굳었다. 회귀자 역시, 복잡한 적의를 품은 채로 지선을 마주했다.

둘은, 절대 섞일 수 없는 사람처럼 거리를 두고 섰다.

물과 기름, 이라는 표현은 너무 온건하다. 둘은 서로 섞이지만 않을 뿐 누구보다도 평화롭게 떠다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영역에서 마주친 두 맹수.

한 번 부딪혔다간 사생결단을 내야 할 것을 알기에, 서로 차마 다가가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먼저 입을 연 건 연배가 있던 지선이었다. 지선은 정중하게, 하지만 회귀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전해 듣기는 했소이다. 무저갱 안에 아주, 뛰어난 검사가 한 명 있다고.”

“나도, 듣기는 했어. 누구보다도 강한 지모신의 대행자가 있다고.”

형식적으로 말이 오가고, 점차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맑은 하늘에서도 폭풍의 전조를 느낄 수 있듯, 존재하는 모든 이들이 심상치 않은 공기를 읽고 촉각을 곤두세우려는 때.

“우리가 손님을 너무 세워뒀네요! 지선 님! 일단 들어가시죠! 먼 길 피곤하셨을 텐데 식사나 하면서 이야기나 나누죠!”

침묵의 장막을 찢고, 지선의 시야로 내가 끼어들었다. 생글거리는 미소에다가 존경에 찬 시선을 보내며 나는 어깨를 비스듬히 틀어 방향을 안내했다.

곧 시선을 거둔 지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외다. 무저갱은 소인에게도 기꺼운 땅이 아니라 배는 피곤한 것 같소이다.”

“네? 큰일이네요. 지선 님의 이룬 위업에 대해 여쭈고 싶은 게 많았는데, 피곤하시다면 이걸 어찌 해야 하나…. 쉬게 해드려야 하나.”

내 너스레에 지선은 쿡쿡 웃으면서 대답했다.

“금칠을 해주시는구려. 이야기라면 문제없소이다. 요즘은 제 자랑마저도 일하는 것으로 치오이까?”

“이야! 그렇다면야! 얼른 일하시러 가시죠! 미리 경고하는데, 일을 끝마치려면 한참은 걸릴 겁니다!”

“멍? 밥 먹으러 가? 바압!”

“너는 인마. 낄 곳 빠질 곳 좀 구분해! 침투력이 아주 송곳 같네!”

지선은 나의 인도에 따라서 건물로 향했다. 아지는 냉큼 나를 앞질렀고, 티르는 관을 타고 내 곁으로 붙었다. 불사자와 칼리스도 지선을 우러러보며 따라갔다.

“어? 그런데 칼리스. 몸은 다 나은 거요? 멀쩡해 보이는구려!”

흠칫.

“…조금, 무리를 했군요. 준장님께서 오시는 바람에.”

“하하! 이만한 귀인이면 무리할 가치가 있지!”

복작거리는 무저갱은 이곳이 감옥인지, 여관인지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내가 앞장서서 감옥 건물 안으로 이끄는 동안이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회귀자는 따라올 생각도 않은 채로 지선의 뒷모습만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냐아아-.”

외로이 선 회귀자의 곁으로 나비가 살금살금 다가왔다. 자기 앞발을 할짝거리며 회귀자의 근처에 선 나비는, 꼬리를 부풀린 채로 사람들이 사라진 곳을 흘겨보았다.

그러기를 잠시. 이내 둘은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