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123화 (123/384)

EP.123 이명에는 이유가 있다

귀인이 있으면 조촐하게나마 잔치를 해야 하기 마련. 길손의 긴장을 풀고 먼 곳에서 온 소식을 반기는 그것은 인간의 오랜 예법이다.

지선을 식당에 모신 나는, 남은 음식을 모조리 꺼냈다. 무엇을 좋아할지 몰라 모두 식탁에 낸 채로 지선을 맞이했다.

나는 기쁘게 건배를 외쳤다.

“다들 주목해주세요! 무저갱에 귀인이 오셨습니다! 공병대대의 여신, 삽질의 수호자, 리버스 장의사, 곤곤래, 불도자! 이 모든 호칭의 주인이신 지선 님이십니다!”

지선은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으나, 자기 소개를 할 때는 그다지 마뜩잖은 얼굴이었다. 특히 마지막 두 이명을 들을 때 특히.

‘…마지막 둘은 좀 빼주었으면 하지만. 그래도, 이 소개는 이것으로 끝일 터.’

그러나 이 방에는 호기심이 많은 12세기 소녀가 있다. 티르가 순수하게 궁금해하며 말했다.

“이명이 많구나. 그게 다 어떻게 얻은 것이더냐?”

“하하. 그리 대단한 것들은 아니외다.”

지선은 에둘러 답변을 거절했다. 그러나 지선이 대답하지 않아도 대답할 사람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나!

“대단하지는 않긴요! 하나같이 다 대단한 일밖에 없는데!”

지선처럼 유명하고 대단한 존재를 그냥 지나가던 길손 1로 취급할 수는 없지.

다른 누군가는 용납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못한다. 나는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지선의 대단함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건 말도 안 돼요!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제가 간단하게 설명해드리죠!”

“아니, 굳이.”

“사양하실 필요는 없어요! 티르는 바깥 소식에 어두우니까. 미리 알려주지 않으면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삐진단 말이에요!”

‘…태고의 존재인 시조를 보고 삐진다고? 이자도 보통은 아니군.’

지선이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허락이 떨어지자, 나는 귀빈을 맞이하는 사회자처럼 그녀를 소개했다.

“지선께서는 군국에서 주도하여 시행한 국가 토목공사 대부분에 참가하셨습니다. 다만 나라에서 하는 것 중 제대로 되는 게 없죠! 참호 파고 목책 세우는 게 전부였던 당시의 공병대에게, 그만한 대규모 토목공사는 들인 인원만큼의 인원을 생매장하는 대규모 학살극이 될 뻔했지요! 패왕의 재림이 아닐까 걱정할 정도였어요! 그때 혜성처럼 등장한 게 바로!”

척. 나는 손을 공손히 들어 지선을 가리켰다.

“지선 님이십니다! 지선께서 휘하 대지술사를 이끌고 참가하신 덕에 군국은 길, 댐, 건물을 튼튼하게 지어냈습니다!

그뿐이랴! 몇 배나 튼튼한 콘크리트를 만드는 법, 그것을 다루는 법, 기반을 다지는 법, 수맥을 찾고 흙을 고르는 것까지! 그 모든 것을 알려주는 지선과 대지술사는 공병대대에게 있어서는 대지모신과 다를 바 없었죠! 그렇기에 공병대대의 여신!”

“호오. 지모신의 사도가 목수가 되다니. 흥미롭구나.”

티르가 눈을 반짝이며 흥미롭게 듣다 보니, 지선도 더는 내 소개를 마다하지 못했다. 나는 여세를 이어서 설명을 계속했다.

“삽질의 수호자와 리버스 장의사 역시 그에 관련된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한 공병이 삽질을 하다가 땅에 파묻혔습니다. 공사판에서 흔히 있는 일이지만, 몇몇 시민들은 대지모신이 자기 살을 파헤친 것에 분노하였다고 말하며 두려워했죠. 그때! 지선께서 대지술을 발휘하시니! 화산이 폭발하듯, 우물이 솟아나듯! 그의 몸이 땅속 깊숙한 곳에서 딸려 나온 겁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특히 티르의 리액션은 나를 흡족하게 만들었다.

“오오. 도사들이 비슷한 일을 하는 걸 본 적 있다. 그리하여서?”

“그날 이후, 공병대에서는 더 이상 삽질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삽질의 수호자. 거기에 더불어,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장의사와는 달리 산 사람을 땅 밖으로 끌어낸다고 하여 뒤집힌 장의사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그게 바로 리버스 장의사!”

“훌륭하구나!”

티르가 감탄을 내뱉으며 지선을 다시 보았다. 지선은 잠시 입을 뻐끔거리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제멋대로 부풀어 오른 소문일 뿐이외다.”

‘…대지모신이여. 이 불쌍한 딸에게 수치를 견딜 힘을 주소서.’

아무리 세간에 이름 높은 지선이라도, 12세기의 역사를 자랑하는 티르에 비하면 꼬마. 무저갱과 연배가 비슷한 티르가 흥미를 보이니 차마 내 말을 끊지 못했다.

치트키를 쓴 나는 이어서 설명했다.

“곤곤래(滾坤崍)는, 지선이 힘을 쓰면 대지(坤)가 강물처럼 흘러간다(滾)고 하여 곤곤래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땅이 강물처럼 흘러?”

“그렇습니다. 시멘트라는 게 있거든요! 지선의 노하우로 군국은 양질의 시멘트를 양산해냈습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옮기나 고민하는 도중, 또다시 나타난 지선! 대지술의 권능을 활용하여 시멘트를 흘려보냈으니! 그녀가 흘려보내는 시멘트는 일주일간 멈추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한때 군국이 운송하는 모든 시멘트보다 지선과 마도장교 한개 소대가 움직이는 양이 더 많았던 적도 있다고 했지.

또 그때 익힌 지식으로, 군국 7대 발명품 중 하나인 메타컨베이어 벨트가 생겨났고.

“그런 게 가능하다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그것이 가능하기에, 상식을 능가하기에 비로소 지선입니다! 명성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세간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태연히 해내는 이.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녀를 추앙했다.

성황청이 등장한 이후 꾸준히 쇠락의 길을 걷던 지모신앙. 명맥만 간신히 남은 옛 신앙이 현시대에 부활하여 꽃필 수 있던 건 다 지선의 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소개가 끝나는 기색이 보이자, 지선은 내심 안도했다.

어딜. 아직 하나 남았다.

“그러면 불도자(不倒者)는 무엇이오?”

흠칫.

불사자의 질문에 잠깐 반응하는 지선.

나는 씨익 웃으며 기다렸다는 듯 설명했다.

“넘어지지 않는 자, 라는 뜻입니다.”

“넘어지지 않는다?”

“공병대의 그 누구도, 지선이 넘어지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곳이 비탈이든, 바위산이든, 혹은 비가 와서 진흙으로 질척이는 땅이든. 지선께서는 언제나 두 다리로 걸었죠.”

공사에 참여한 공병대원과 노역자들. 그 누구도 지선이 무릎을 땅에 댄 것을 본 적 없다.

두 발로 걷는 인간이 온갖 고난을 겪은 끝에 다른 짐승처럼 네 발로 걸어 다닐 때.

그녀는 언제나 두 발로 섰고, 두 발로 걸었다. 고목과도 같이 양다리를 박아넣은 채로 모든 일을 해냈다.

“심지어 어느 날, 공사하던 중 댐이 무너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약해진 균열이 부서지며 그 틈으로 물이 미친 듯이 새어 나왔지요. 이대로 가다가는, 댐이 터져서 어마어마한 양의 강물이 하류에 있는 모든 이들을 덮칠 것이 분명했습니다. 끔찍한 재난이지요. 그때.”

이쯤 되면 모두 이어질 말을 예상했다.

동시에, 자기가 예상한 사실을 반신반의했다.

말로야 가능하지만, 인간의 몸으로 이루어내었다 하기에는 너무나도 웅장한 위업.

“그때 등장한 지선이, 두 다리를 굳건히 박아넣은 채 전신으로 둑을 막지 않았다면. 필시 그러했을 것입니다.”

“세상에.”

티르가 손으로 입을 가렸고, 불사자도 탄성을 토했다.

기대하면서도, 믿기 힘든 일. 인간이 불가능의 영역을 침범했을 때 일어나는 카타르시스.

나는 모두의 감정을 읽으며, 그게 내가 한 일이라도 된 것처럼 소리쳤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흘러나오는 물을 몸으로 틀어막으며, 자기가 버티는 동안 보수하라 엄명을 내렸죠. 만일 그녀가 넘어진다면, 보수하는 이들도 다 휩쓸려 갈 만큼 위험한 상황!”

그러나, 그 시절 공사에 참여했던 이들은 술자리만 있으면 지긋지긋하게 그 일화를 말했다.

거기 있던 사람 그 누구도, 그녀가 넘어지는 모습을 상상하지 못했다고.

“그러나 공병대와 노역자들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내려와서 댐을 보수했습니다. 그녀가 댐이 되었던 만 하루 동안, 모두 먹지도 자지도 않고 공사를 완료했지요.”

그렇게 외치는 내 눈은,  감동의 눈물로 촉촉하게 젖어 든 채였다.

아아, 영원히 설명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지선의 위업도 말하다 보니 결국 끝내야 할 때가 오는구나. 인간의 역사란 어찌 이리 짧고 아쉽단 말이냐.

나는 저물어가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끝맺었다.

“그날 이후, 그들은 대지를 상대로 한 정예부대가 되었습니다. 전설의 공병대대. 넘어지지 않는 부대, 불도자 공병대로.”

내 말이 끝난 직후.

감명을 크게 받은 불사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연호했다.

“불도자 공병대! 대단히 멋있는 이름이오!”

“그렇죠? 군국에서도 그 뜻을 높이 기려, 새로 만드는 장비에 불도자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하더라고요.”

“크으. 사람이라면 이름을 남길 자리를 찾곤 하지. 비록 이명이지만! 지선은 어마어마한 위업을 이루었소!”

그렇게, 전설로 남은 공병대의 이야기를 다시 들은 당사자는.

‘20년이 지나도… 떨쳐낼 수 없었군.’

씁쓸하게 술잔을 들이켰다. 누군가 읽었으면 슬퍼할 생각을 하며.

‘이럴 줄 알았다면, 한 번은 넘어질 것을 그랬다.’

자기 전설을 부정하고자 하는 불도자, 아니, 지선을 위해 나는 잔을 높이 들었다.

“싸우자! 이기자! 불도자!”

“불도자라, 멋있구나….”

“불도자! 불도자!”

크게 감명받은 티르와 불사자는 연신 연호했다.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아지조차 몸을 들썩이며 ‘멍! 도자!’를 외치고 있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경의와 응원을 받으며.

‘다섯 번은… 넘어졌어야 했나 보다.’

넘어지지 않는 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쨌건 연회는 계속되었다. 불도자라는 이명이 나올 때를 제외하고는, 지선은 그녀를 향한 질문에 흔쾌히 대답했다.

공병대를 떠나고 무슨 일을 했는지, 후진 양성에 얼마나 힘을 썼는지. 지모신의 교리는 어떠한지.

영점을 맞추듯, 미묘하게 연관 없는 질문에서 시작하여 서서히 본론에 다가가는 와중.

내가 그 앞장서서 포문을 열었다.

“그런데 지선 님처럼 귀하신 분이 이리 누추한 곳에는 왜 오신 거예요?”

모두가 기다린 소재였다. 티르야 모든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불사자와 칼리스마저도 궁금해 마지않던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곳에 끼지 않은 채, 밖에서 그저 듣고만 있는 회귀자에게도.

탁.

본론에 다다르자, 지선은 술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소인은 모든 지모신도들의 비원을 이루려고 왔소이다.”

“모든 지모신도들의 비원?”

“그렇소이다. 과거, 대지모신께서 분노하였던 흔적이자, 모든 지모신도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인 무저갱. 패왕의 업에 의해 파묻힌 매장자들의 추악한 일면.”

그리 말하며, 지선은 짧게 발을 굴렀다.

쿵.

극도에 이른 곤. 주어진 힘을 온전히 땅으로 내보내는 기공의 극의가 탄탈로스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인위적인 지진을 일으킨 진원은, 확고한 의지를 담고 말했다.

“이 땅을 황무지로 만든 대지모신의 지옥, 무저갱. 그것을 없애기 위하여, 소인이 이 자리에 임하였소이다.”

“무저갱을 없앤다고요?”

그래. 확실하다.

회귀자가 말했던, 무저갱을 없애기 위해 찾아온다는 사람이 바로 지선.

어째서 이토록 유명한 사람을 보고 역천을 꿈꾸는 땅뱀이니, 성황청의 악몽이니 했는지는 모르나.

어쨌든 탄탈로스에 몇 개월 더 빨리 임한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불도자의 전설을 만든 분께서 말씀하시니, 왠지 이루어질 것 같다는 기분이 듭니다!”

“…이제 이명은 그만 말해주시겠소이까?”

아차. 너무 건드렸나. 오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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