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7 계획은 깨지라고 있는 것
생각을 읽지 못하는 내가 보더라도, 싱크로를 끊은 척 연기하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그런데 민감한 회귀자에겐 어떨까.
하아, 깊게 한숨을 내쉰 회귀자가 천앵을 손으로 쥐었다.
“알았어. 정 못 끊겠다면 내가 끊어줄게.”
『…!』
툭.
이번엔 진짜로 연결을 끊은 애착인형이 힘없이 늘어졌다. 짧은 팔다리가 중력에 따라 덜렁거렸다.
나는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애착인형을 붙잡고 오열했다.
“안돼애애애앳! 내 애착인형이이이이이이!”
“자기 인형 이름을 애착인형이라 짓는 사람이 어디 있어? 호들갑 떨지 말고.”
하지만, 앞으로 있을 진지한 이야기를 견뎌내기 위해서는 이런 식으로 분위기를 풀어야 하는걸!
내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귀자는 무게를 잡았다.
“부탁이 있어.”
“내일은 해가 반대쪽에서 뜨려나. 셰이 씨가 진지하게 부탁을 해오다니. 뭔데요? 들어나 봅시다.”
나는 이미 상대의 생각을 다 읽었고, 어떤 말을 할지, 왜 하는지도 다 아는데.
이 눈앞의 상대는 그 말을 전하기 위해, 평생에 없는 말주변을 쥐어짜며 나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의미가 없냐고? 아니, 의미가 있어서 문제다.
이러면 나는 회귀자의 바람에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잖아. 거절하기 힘들다고.
“이번에, 지선의 인도 아래 모두 무저갱의 근원에 도달하게 되면.”
회귀자는 불과 몇 시간 전 지선이 받은 환대를 기억했다. 이곳의 대부분이 지선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고, 어떤 업적을 이루었는지 하루종일 설명할 것처럼 보였다.
그에 비해, 저번 회차에서는 어떨지 모르나. 지금의 회귀자는 아무런 연고도 전적도 없는 뜨내기일 뿐이었다.
‘상대는 명망 높으면서 모두에게 인자하기로 소문 난 지선이야. 훗날 재앙으로 기억되는 그녀라면 몰라도, 지금은 별 볼 일 없는 나보다 훨씬 유명하고 믿음직스러운 존재겠지.’
회귀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할 줄 알았다.
그리고 상대방이 누구인지, 얼마나 대단하고 위험한 사람인지.
재앙의 전조를 알리는 역천의 땅뱀, 지선의 강력함을 익히 알고 있었다.
땅의 검, 지잔의 원주인이자. 성검대와 성녀에게 패배하여 목숨을 잃은 비극의 주인공. 동시에 성황청 몰락의 시발점이 된 성황청의 악몽.
땅의 검에 더해진 그녀의 대지술은 땅을 가르고 산을 기울게 하는 힘을 지녔다. 군대는 그녀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회귀 초반이라 준비 기간이 짧았던 것을 고려하더라도, 아직 단 한 번도 1:1로 승리를 거둔 적 없다.
그러나 지금, 그 불가능에 도전해야 했다.
“아마도, 나는 지선과 싸우게 될 거야. 그러니까.”
두렵기도 했으나, 그건 또 다른 문제였다. 어쨌건 이번 회차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기 위해선 회귀자는 그녀를 쓰러뜨려야 했다.
그래야 지선의 계획과 증오를 알아내고, 정보를 얻은 뒤. 어떻게 대응할지 정할 수 있기에.
필요한 것은 오직 결과뿐이다. 수련하겠답시고, 자존심을 채우겠답시고 뻗댈 필요 없다.
회귀자에게 필요한 건, 지선을 상대로 한 승리. 그뿐.
하지만.
“도와….”
달라고 말하기 전, 회귀자는 말을 삼키고 입을 꾹 다물었다.
‘…누구 편을 들까. 아마도, 나는 아닐 거야. 버리는 회차라고 생각했던 나는, 이곳에서 그 누구의 마음도 얻지 못했으니까.’
회귀자는 지금껏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한 적이 없다.
아니, 정확히는 있었다.
흡혈귀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시조를 암살하는 대신 설득하려 했던 적이 있었다. 성공했다. 그 시기, 다가오는 위협에 맞서기 위해 단결해야 했으며, 회귀자는 상처받은 시조와 공감대를 나눌 힘과 자격을 갖추었다.
레지스탕스와 협력한 적 있었다. 성공했다. 군국의 약점을 기묘하게 찔러 들어가고,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날뛴 덕분에 군국을 무너뜨렸다.
비록 그들이 나라를 만족스럽게 운영한 것은 아니었으나, 아니, 도리어 더 끔찍하였으나… 어찌하였든, 그때 회귀자는 정치적으로 가장 든든한 배경을 얻었다.
그러나 회귀하면 그 모든 게 끝이다.
실패만 끝나는 게 아니라, 그녀가 이루어낸 작은 성공마저도 종언을 고한다. 하수구로 물이 빨려 들어가듯, 아름답게 가꾸었던 작은 왕국마저도 사라진다.
아무리 열심히 쌓았던, 얼마나 공을 들였던.
정이 얼마나 들었던.
‘지금 부탁할 수 있는 건, 모두의 한복판에 있는 이 남자밖에 없어. 하지만, 과연 그가 나를 도울까?’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성공은, 드는 노력에 비해 잃을 것이 너무 컸다. 심지어 만나는 시점에 따라서 천차만별이었다.
그게 가장 두드러진 경우가 이번 회귀였다.
상처 입지 않은 티르는 회귀자에게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짐승의 왕은, 예전 회귀자가 보던 것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자연히 회귀자의 관심사는 관계보단 힘과 무기로 향했다.
도구는 손에 쥐면 배신하지는 않으니까.
도구는 정이 들어도 금방 떼어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관계를 등한시한 대가일까.
‘돕진 않더라도, 최소한 나를 부정하지는 말아주었으면.’
그게 실패를 걱정해서인지, 아니면 상처받기 싫어서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내가 그녀와 싸울 때, 아무도 끼어들지 못하게 해줘.”
회귀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절박한 의지를 담아 나에게 부탁했다.
나는 바람을 읽는다. 간절하고 절박한 부탁일수록 차마 거절하지 못하는, 일종의 직업병이 있다. 아니, 능력의 부작용이라 해야 하나.
하지만 바람이 언제나 한쪽으로 부는 건 아니다. 가끔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바람이 불며, 둘은 개와 고양이처럼 서로 아웅다웅하며 다투곤 한다.
누군가를 무찔러 달라는 바람은, 필연적으로 마파람에 스러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끼어들지 말라는 부탁이라면.
“네? 저희가 왜 끼어들어요?”
정말로 대수롭지 않게, 나는 회귀자의 부탁에 응했다.
“왜 싸우려는 건지는 모르지만, 알아서 잘 해결 보세요. 이왕이면 좋게좋게 넘어가시고요.”
“…안 말려?”
“성인끼리 싸우는 데 뭘 말려. 아, 혹시 미성년자세요? 왠지 좀 작더라.”
“그, 그럴 리 없잖아! 성인이 된 지는 한참 지났다구!”
‘그, 지금 내 나이가 열아홉 맞지? 회귀 시작하고 천앵이랑 물건 몇 개만 챙긴 뒤 곧바로 무저갱으로 뛰었으니까…!’
사실, 미성년자여도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이러면 더욱 문제 없네.
오히려 문제는 따로 있다. 물건 몇 개를 챙겼는데 그만한 보물이 튀어나오나? 도대체 다 챙기면 얼마나 많다는 거야.
어쨌든. 나는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적거리며 말했다.
“둘 다 성인이면 뭐, 말 다 했지. 심지어 둘 다 엄청나게 강하잖아요? 그렇다면야 사이에 껴서 새우등 터지고 싶은 게 아니라면 끼어드는 게 바보 아닐까요?”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지선 님, 좋으신 분이니까 살살 하세요. 저분도 셰이 씨를 죽이려고 들지 않을 테니… 뭐야? 사실 대련이잖아? 대련이라면 지금도 할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아, 아니. 싸움 자체는 진지한 거니까….”
“그래요? 뭐, 사정이 있나 보지.”
애초에 끼어들 생각 없던 나에게 끼어들지 말라는 부탁이라면 편하지. 나는 손을 휘적휘적 저었다.
“다른 분들도 비슷한 생각일 거예요. 티르도 남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타입 아니고, 아지야 인간끼리 싸우면 틀어박혀 있을 거고. 라쉬 씨는 칼리스 지키려고 여념이 없을 테니까요.”
“그런…가?”
“아, 설마 나비가 끼어들기 바라는 건 아니죠? 그러면 당신 진짜 나쁜 사람이야. 누가 싸울 걸 바라고 고양이를 키워!”
“안 바라! 그리고 나비는 내가 키우는 게 아니야! 잠깐 보살피는 거지!”
어찌 되었건 결론은 났다. 회귀자는 한결 안도한 기색으로 말했다.
“어쨌든… 고마워. 그거면 충분해.”
“그나저나, 조금 불쾌하네요.”
“또 뭐가.”
“아무렴 우리도 지난 세월 동안의 인연이 있지. 설마 둘이 갑자기 치고 받고 싸우는데 느닷없이 지선 님의 편을 들겠어요? 달려들어서 ‘감히 명망 높은 지선 님을 습격하다니! 죽어랏!’ 이러면서 다짜고짜 공격하겠어요?”
회귀자는 어물쩍거리다가 대꾸했다.
“…아니야?”
너, 해본 적 있구나. 느닷없이 끼어들어서 ‘감히 내가 아는 사람을 공격해!’ 이러면서 싸움을 건 적 있구나.
당한 사람은 진짜 억울하겠다. 이래서 회귀자란.
“당연히 아니죠. 아무리 당신이 오른팔만 보면 눈이 돌아가서 자르려고 드는 꼴을 보였다고 한들, 분위기를 못 읽고 계속 겉돌기만 하던 외톨이라는 걸 알았다고 한들.”
“…욕이지, 그거?”
“그래도 어리숙한 면은 있을지언정, 나름 문제가 생겼을 때는 누구보다 먼저 달려와서 해결하려고 했다는 걸 아니까요. 다른 사람에게 아예 관심이 없으면 불가능할 일이죠.”
“욕이야, 칭찬이야?”
“따지고 보면 반반? 어쨌든.”
나는 회귀자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자기 몸에 손대는 걸 지극히 싫어하는 회귀자였으나, 흔쾌히 수락한 내가 고마운 건지 가느다란 어깨를 꼭 잡고 흔들 때도 가만히 있었다.
아니면 닿아도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정이 든 것일 수도 있고.
“나름 3개월의 시간이 의미는 있었다고요.”
그러고 보면 처음 무저갱에 떨어진 직후부터 지금까지, 아직 채 3개월도 지나지 않았다. 누가 쳐들어오고, 떨어지고, 싸우고. 정말 크고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사이사이 간극이 고작 1개월밖에 없다니.
나도 그렇지만, 회귀자도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아직 3개월밖에 안 지났구나. 그토록 많은 일이 있었는데.”
이상하다. 감상은 똑같은데, 왜 얘가 말하니까 놀려주고 싶지.
내가 말했다.
“3개월밖에, 라니요? 3개월이면 한 학기예요. 한 학기면 셰이 씨가 초등학교 졸업에서 중등학교 중퇴로 거듭날 시간이라고요.”
“너는 진짜 끝까지!”
발끈한 회귀자는 빽하고 소리쳤다.
“더러워서 다음에는 졸업하고 올게! 기다려 봐. 진짜!”
“다음? 다음이 어딨다고.”
‘아차. 내가 회귀한다는 사실을 밝힐 수는….’
아니, 너 회귀 초에 열여덟이라며. 그러면 회귀해도 못 가는 거 아니야? 중등학교 졸업 이후잖아?
내 지적도 잠시, 회귀자는 아주 독특한 대책을 마련했다.
“신분은 속이면 그만이야!”
“아니, 중등학교 가려고 신분을 속여요?”
“하면 돼! 나는 변장술에도 일가견이 있거든!”
‘천반경 축골공이랑, 아가르타의 가면을 쓰면 좀 빨리 자란 남학생으로 보일 수는 있겠지…!’
그게 된다는 것보다, 그걸 하려는 생각을 했다는 게 더 신기하다.
“가능하고 말고 문제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좀 문제가 아닐지.”
“닥쳐! 너만 아니어도 이럴 일 없었어!”
“그 이전에 당신이 초등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면?”
“중등군사학교는 개나 소나 다 가는 곳이잖아! 그딴 걸로 뻗대지 말란 말이야!”
“개랑 소도 가는데 왜…?”
“야아아!”
이것이 이 사회에서의 방어 불가 기술. 너에게 천앵이 있다면 나에게는 교육제도가 있으니. 맛이 어떠냐, 초졸.
회귀자를 한껏 놀리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알아낸 사실은 없었다. 지선에게 무슨 내막이 있었는지는, 회귀자도 이전 회차에서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저 아래 닿기 전까진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제발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이곳이 무저갱이라는 것도 잊고, 나는 그렇게 지모신에게 기도했다.